성학십도
  성학십도부록서
  진성학십도차
  제일태극도
  제이서명도
  제삼소학도
  제사대학도
  제오백록동규도
  제육심통성정도
  제칠인설도
  제팔심학도
  제구경재잠도
  제십숙흥야매잠도
  성학십도부록발

 

 

제4 대학도

《대학》 경문(經文)


《대학》의 도는 명덕(明德)을 밝히는 데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으며, 지선(至善)에 그치는 데 있다. 그칠 곳을 안 뒤에 정(定)함이 있으니, 정한 뒤에 능히 고요하며, 고요한 뒤에 능히 편안하며, 편안한 뒤에 능히 생각하며, 생각한 뒤에 능히 얻는다. 물(物)에는 본말(本末)이 있고 사(事)에는 종시(終始)이 있으니, 먼저 하고 뒤에 할 바를 안다면 도에 가깝다.

옛적에 천하에 명덕(明德)을 밝히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고,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집을 가지런히 하고, 그 집을 가지런히 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몸을 닦고, 그 몸을 닦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앎을 지극하게 하나니, 앎을 지극하게 하는 것은 물(物)을 격(格)함에 달려 있다.

물(物)이 격(格)한 뒤에 앎이 지극하게 되고, 앎이 지극하게 된 뒤에 뜻이 정성스럽게 되고, 뜻이 정성스럽게 된 뒤에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게 된 뒤에 몸이 닦이게 되고, 몸이 닦이게 된 뒤에 집이 가지런하게 되고, 집이 가지런하게 된 뒤에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지게 된 뒤에 천하가 평정된다. 천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일체 모두 몸을 닦는 것을 근본으로 한다. 그 근본이 어지러운데 말단이 다스려질 자는 없으며 후하게 할 바에 박하고 박하게 할 바에 후할 사람은 있지 않다.


혹자가 말하기를 “경(敬)을 그대는 어떻게 공부하는가?”하니,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정자(程子)가 일찍이 경을 설명하기를 주일무적(主一無適)1)으로 말하기도 했고 일찍이 정제엄숙(整齊嚴肅)으로 말하기도 했으며, 그 문인 사씨(謝氏)2)의 설인 즉 이른바 ‘마음이 항상 깨어 있게 하는 법[常惺惺法]’이라고 한 것이 있으며, 윤씨(尹氏)3)의 설인 즉 ‘그 마음을 수렵하여 한 가지 사물도 용납하지 않는 것[其心收斂不容一物]’이라고 한 것이 있는데, ‘경(敬)’이란 일심(一心)의 주재(主宰)이면서 만사의 근본이다. 이에 대해 공부하는 방도를 안다면 《소학》을 여기에서 의지하여 시작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 것이다. 《소학》을 여기에서 힘써 시작해야 함을 안다면 《대학》을 여기에서 의지하여 마치지 않을 수 없다는 것도 하나로 꿰뚫어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대개 이 마음이 이미 서서 이로 말미암아 사물을 궁리하고 앎을 지극히 하여 사물의 이치를 다한다면 이른바 ‘덕성을 높이고[尊德性] 학문을 일삼는 것[道問學]’4)이고, 이로 말미암아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그 몸을 닦는다면 이른바 ‘먼저 그 큰 것을 세우면 작은 것이 빼앗지 못한다[先立其大者而小者不能奪]’5)는 것이고, 이로 말미암아 집을 가지런히 하고 나라를 다스려 천하를 평정하기에 미친다면 이른바 ‘자기를 닦아서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修己以安百姓]’6)는 것과 ‘공손에 돈독히 함에 천하가 평정된다[篤恭而天下平]’7)고 함이니, 이는 모두 처음부터 하루라도 경(敬)에서 떠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즉 ‘경(敬)’이라는 한 글자가 어찌 성학(聖學)의 시종(始終)을 이루는 요체가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위는 공문(孔門)에서 남긴 《대학》의 첫장입니다. 국초에 신 권근(權近)8)이 이 그림9)을 그렸는데, 장(章) 아래 인용한 《대학혹문》의 《대학》 《소학》을 통론한 뜻은 〈소학도(小學圖)〉 아래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만 《소학》 《대학》의 두 설만 마땅히 통합하여 볼 뿐 아니라 아울러 상하의 여덟 가지 그림도 모두 마땅히 이 두 그리과 통합하여 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대개 위의 두 림은 곧 단서를 구하여 확충(擴充)하고 천도를 체득하여 다하는 극치의 곳으로 《소학》과 《대학》의 표준 본원이 되고, 아래의 여섯 그림은 곧 선을 밝히고 몸을 정성스럽게 하며 도덕(道德)을 높이고 공업(功業)을 넓게하는 힘을 쓰는 곳으로서 《소학》과 《대학》의 바탕과 일이 되는 것이며 ‘경(敬)’이란 또 위 아래를 통하는 것으로서 공부를 행하고 공효를 거둠에 모두 마땅히 종사하여 잃어서는 않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자(朱子)의 설이 자와 같고 지금 이 열 가지 그림이 모두 경(敬)을 주로 하는 것입니다.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는 정(靜)을 말하고 경(敬)을 말하지 않았는데, 주자의 註(註) 가운데서는 경(敬)을 말하여 보충했습니다.


부록


(주자의 장구) 《대학》의 도는 명덕(明德)을 밝히는 데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으며, 지선(至善)에 그치는 데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 ‘대학(大學)’이라는 것은 대인(大人)의 학문이다. ‘명(明)’은 밝히는 것이다. ‘명덕(明德)’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는 바로서 허령불매(虛靈不昧)하여 뭇 이치를 갖추어 만사에 응하는 것이다. 다만 명덕이 기품(氣禀)에 구애되고 인욕(人欲)에 가려져서 때로 혼미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본체의 밝음인 즉 일찍이 그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배우는 사람이 마땅히 발하는 바를 따라서 드디어 이를 밝혀 그 처음을 회복해야 한다. ‘신(新)’이라는 것은 그 구습(舊習)을 혁신함을 말한다. 말하자면, 이미 스스로 그 명덕을 밝히고 또 마땅히 미루어 남에게 미쳐서 그들로 하여금 또한 그 구습에 물든 더러움을 제거함이 있게 해야 한다. ‘지(止)’라는 것은 반드시 여기에 이르러 다른 것으로 옮겨 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선(至善)’인 즉 사리의 당연한 극치이다. 말하자면, 명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함이 모두 마당히 지선(至善)의 경지에 이르러 옮겨 가지 않아야 하니, 대개 반드시 천리의 극치를 다하여 한 털끝만큼이라도 인욕의 사사로움이 없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대학》의 강령(綱領)이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하늘이 사람과 사물에 부여한 것을 ‘명(命)’이라 하고, 사람과 사물이 받은 것을 ‘성(性)’이라 하고, 한 몸의 주인이 되는 것을 ‘심(心)’이라 하고, 하늘에서 얻어 광명 정대한 것을 ‘명덕(明德)’이라고 한다.”고 했다.

묻기를 “명덕(明德)은 심(心)인가, 성(性)인가?” 하니, 말하기를 “심과 성은 절로 분별이 있다. 허령(虛靈)한 것이 심이고, 내용이 있는 것[實]이 성이다. 성은 곧 이치이고, 심은 곧 실어서 베풀어 발용(發用)하는 것이다. 심은 화(火)에 속하는데 그로 인하여 광명을 내고 발동하는 것이니 까닭에 허다한 도리를 갖추었다. 예를 들어 부모를 향해서는 효가 나옴이 있고 임금을 향해서는 충이 나옴이 있으니, 이것이 곧 성이다. 어버이를 섬김에 효가 필요하고 임금을 섬김에 충이 핑료함을 아는 것과 같은 것은 이것이 곧 심이다.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심은 성(性)과 정(情)을 통괄하고 있다.’고 하니, 이 말이 가장 정밀하다.”고 했다.

허령불매(虛靈不昧)는 곧 심이고, 이 이치가 심중에 갖추어져 조금도 부족하거나 모자람이 없는 것이 곧 性(性)이고, 느낌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곧 정(情)이다.

다만 허령불매(虛靈不昧)라는 네 글자로서 명덕(明德)에 대해 설명한 뜻이 이미 충분한데 다시 ‘뭇 이치를 갖추어 만사에 응한다’ 고 말하여 체․용(體用)이 그 가운데 있음을 포괄하고 또 다시 실(實)하여 허(虛)하지 않음을 밝히니, 그 말이 적실 확고하고 혼후 원만하여 조리가 부족한 곳이 없다.

명덕(明德)은 일찍이 그칠 때가 없고 때로 일용(日用)의 사이에 발현(發見)한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어린 아이가 우물 속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서 놀라고 두려운 마음이 생기고, 의리가 아닌 것을 보고서 부끄럽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고, 어진 사람을 보고서 공경하는 마음이 생기고, 선한 일을 보고서 감탄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니, 이는 모두 명덕(明德)의 발현이다. 비록 지극히 악한 사람일지라도 역시 때로 선한 생각이 나타날 때가 있으니, 다만 마땅히 그 나타나는 단서를 따라서 계속하여 밝혀야만 하는 것이다.

명덕(明德)은 곧 하나의 광명(光明)의 물사(物事)이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한 번 불을 가지고 사물을 비친다면 밝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바로 명덕인 것이다. 만약 점차 불이 약해서 작아지게 되면 문득 어둡게 되나니, 불어서 이 불을 붙게 하는 것이 곧 그 명덕을 밝히는 것이다.

또 말하기를 “이 이치는 사람이 고르게 가진 것이고 나만 사사로이 가진 것이 아니다. 이미 스스로 그 덕을 밝혔으면 모름지기 마땅히 미루어서 남에게 미쳐야만 할 것이니, 다른 사람이 기품(氣禀)과 인욕(人欲)에 가려져 혼미함을 보고서 어찌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가지고 이를 새롭게 하고자 하지 않을 것인가?”라고 했다.

또 말하기를 “하나의 지자(止字)를 말하고 또 하나의 지자(至字)을 말한 것은 곧바로 저 극지처(極至處)에 이른 후에 그치고자 함인 까닭으로 ‘군자는 그 극(極)을 쓰지 않음이 없다.[君子無所不用其極]’10)고 했다.”라고 했다.

지선(至善)은 매우 좋은 도리가 온전히 극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이 저기에 있음에 자기가 모름지기 가서 그쳐야만 하는 것이니, 저것이 그치게 되면 선과 내가 한결같이 능히 그치지 못하여 선은 절로 선이고 나는 절로 나이게 될 것이다.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인력(人力)과 사의(私意)로 할 수 있는 바가 이니고 본디 하나의 당연한 법칙이 있으니, 이를 지나쳐도 불가하고  이에 미치지 못해도 또한 불가하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효는 곧 덕을밝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절로 당연한 법칙이 있으니, 미치지 못하는 것은 실로 옳지 않고, 만약 그 법칙에 지나치게 되면 반드시 부모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다리살을 베는 일이 있을 것이다. 모름지기 당연한 법칙에 이르러 그 곳에 처하여 옮겨 가지 않아야 바야흐로 ‘지선에 그치는 것[止於至善]’이다. 지선에 그치는 것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을 포괄하니, 자기가 지선에 그치기를 바라고 백성도 지선에 그치기를 바라야 한다. 저에게 있어서는 비록 능하지 못하나 나에게 있어서 저를 바란다면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신안 오씨(新安吳氏)11)가 말하기를 “지선에 그치는 것은 명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표적(標的)이고, 천리를 극진히 하여 인욕을 전혀 없게 하는 것은 지선에 그치는 율령(律令)이다. 그러나 이미 지선(至善)을 ‘사리의 당연한 극치’라고 말하고 또 ‘천리의 지극함’이라고 말한 것은, 대개 사물에 흩어져 있는 것으로부터 말한다면 ‘사리’인데 이는 곧 이치의 만수처(萬殊處)이니 ‘한 가지 사물이 하나의 태극을 갖춘 것’이고,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부터 말한다면 ‘천리’인데 이는 곧 이치의 일본처(一本處)이니 ‘만물이 통체로 하나의 태극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근본은 실로 만 가지로 나누어지는 까닭으로 ‘사리(事理)는 뭇 이치이다’ 하고, 만 가지가 모여서 하나가 되는 까닭으로 ‘천리(天理)는 한 이치일 따름이다’ 한다.”라고 했다.


그칠 곳을 안 뒤에~능히 얻는다.[知止而后止能得] ‘지(止)’라는 것은 마땅히 그쳐야 할 곳이니, 곧 지선(至善)이 있는 곳이다. 이를 알게 되면 뜻이 정하여 향하는 것이 있다. ‘정(靜)’은 마음이 망령되게 움직이지 않음을 말한다. ‘안(安)’은 처하는 것에 편안함을 말한다. ‘려(慮)’는 처사가 정밀하고 상세함을 말한다. ‘득(得)’은 그 그칠 곳을 얻음을 말한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그칠 곳을 아는 것은 곧 가는 곳을 아는 것이니, 이미 알게 되면 심중이 문득 정하게 되어 다시 다른 길을 구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길을 가는데 이 한 길을 따라 갈 것을 안다면 심중에 절로 정함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일 이 곳으로 가기를 구하고 또 저 곳으로 가기를 구한다면 곧 심중에 정함이 있지 않은 것이다. 정․정․안․려․득(定靜安慮得)의 다섯 글자는 곧 공효의 차례이고 공부의 절목은 아니니, 다만 그칠 곳을 알게 되면 자연히 서로 기인하여 보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물(物)에는 본말(本末)이 있고~도에 가깝다.[物有本末止近道矣]  덕을 밝힘은 ‘본(本)’이고 백성을 새롭게 함은 ‘말(末)’이며, 그칠 곳을 아는 것은 ‘시(始)’이고 능히 얻는 것은 ‘종(終)’이다. 본과 시는 먼저 할 바이고 말과 종은 뒤에 할 바이다. 이것은 윗 글 두 절목의 뜻을 결론짓는 것이다.

묻기를 “사(事)와 물(物)을 어떻게 분별하는가?”라고 하니,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상대하여 말한다면 사는 사이고 물은 물이지만, 오직 물만 말한다면 사가 그 가운데 겸하여 있다. 그칠 곳을 알고 능히 얻는 차례는 마치 밭갈고 파종하고 김매고 거두는 과정과 같으니, 이는 일에 있어서 처음과 끝이 이와 같은 것이다. 덕을 밝히는 것은 곧 자기의 일물(一物)을 깨닫는 것이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곧 천하의 만물(萬物)을 깨닫게 하는 것이니, 자기의 일물로써 천하의 만물을 대함에 문득 내외 본말이 있다. 먼저 할 바와 뒤에 할 바를 알게 되면 자연히 도에 가깝게 되나, 선후를 알지 못하면 문득 전도되고 마니 어떻게 도에 가까울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옛적에 명덕(明德)을 밝히고자 하는~물(物)을 격(格)함에 달려 있다.[古之欲明明止在格物] ‘천하에 명덕을 밝힌다’는 것은 천하의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그 명덕을 밝힘이 있게 하는 것이다. ‘심(心)’이란 몸이 주인으로 삼는 것이다. ‘성(誠)’은 참다운 거이고, 의(意)한 마음이 발하는 바이니, ‘그 마음이 발하는 바를 참답게 한다’는 것은 반드시 스스로 쾌족(快足)하여 스스로 속임이 없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치(致)’는 미루어 다하는 것이고 ‘지(知)’는 지식과 같은 것이니, 치지(致知)란 나의 지식을 미루어 다하여 그 아는 바가 극진하지 않음이 없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격(格)은 이르는 것이고 물(物)은 사물과 같으니, 격물(格物)은 사물의 이치에 궁리하여 이르러 그 극처에 이르지 않음이 없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여덟 가지는 《대학》 조목(條目)이다.

주자(朱子) 가 말하기를 “여섯 개의 ‘욕자(欲字)’와 ‘선자(先字)’는 이와 같이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이와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니, 곧 공부의 절차를 말하는 것이다. 치지(致知)의 경우는 문득 격물(格物) 위에 있는데, ‘욕자’와 ‘선자’로서는 자못 의미가 느슨하고 ‘~에 있다’고 하는 의미인 ‘재자(在字)’가 또 다소 긴절하다.”라고 했다.

‘치지(致知)’와 ‘성의(誠意)’는 곧 학자의 두 가지 관문이니, ‘치지’는 곧 몽각관(夢覺關)이고 ‘성의’는 곧 선악관(善惡關)이다. ‘치지’의 관문을 투과하면 깨어 있는 상태이나 그렇지 못하다면 혼미한 꿈의 상태이고, ‘성의’의 관문을 투과하면 선에 들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악에 떨어진다.

‘격물(格物)’은 곧 몽각관(夢覺關)이고, ‘성의(誠意)’는 인귀관(人鬼關)이다. 이 두 관문을 지나면 위의 그 공부는 한 절목씩 쉬워지니,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 데 이르러서는 지보(地步)가 더욱 넓어지나 다만 모름지기 돌이켜 살펴보아야만 도달할 수 있다.


물(物)이 격(格)한 뒤에~천하가 평정된다.[物格而后知止] ‘물격(物格)’이란 물리(物理)의 극처에 이르지 않음이 없는 것이고, ‘지지(知至)’란 내 마음의 아는 바가 극진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아는 것이 이미 극진하게 되면 뜻이 성실하게 될 수 있다. 뜻이 이미 성실하게 되면 마음이 바르게 될 수 있다. ‘몸을 닦는 것’ 이상은 명덕을 밝히는 일리고 ‘집을 가지런히 하는 것’ 이하는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이다. 물(物)이 격(格)하고 앎이 지극하게 되면 그칠 곳을 아는 것이다. ‘뜻이 정성스러워진다’는 것 이하는 모두 그칠 곳을 얻는 순서이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치지(致知)라는 것은 이치가 사물에 있는데 나의 지식을 미루어 이를 아는 것이고, 지지(知至)라는 것은 이치가 비록 사물에 있으나 내 마음의 지삭이 이미 그 지극함을 얻는 것이다.”라고 했다.


천자로부터 이하로~몸을 닦는 것을 근본으로 한다.[自天子以下止修身爲本] ‘일시(壹是)’는 일체의 뜻이다.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正心]’ 이상은 모두 몸을 닦는 바이고, ‘집을 가지런히 하는 것[齊家]’ 이하는 곧 이것을 들어서 적용하는 것일 따름이다.


그 근본이 어지러운데~있지 않다.[其本亂止未之有也] ‘본(本)’은 몸을 말한다. ‘후하게 할 바’는 집을 말한다. 이 두 절목은 위의 글 두 절목의 뜻을 결론짓는 것이다.

이상은 ‘경(經)’ 1장이니 대개 공자(孔子)의 말을 증자(曾子)가 기술한 것으로 생각되고, 그 ‘전(傳)’ 10장은 곧 증자의 뜻을 문인들이 기술한 것이다.


주자(朱子)12)가 혹문(或問)에서 말하였다.

이 편에서 이른바 ‘재명명덕재신민재지어지선(在明明德在親民在止於至善)’이라고 한 것을 또한 그 말의 상세함을 들을 수 있겠는가?

가로되 천도(天道)가 유행(流行)하여 만물(萬物)을 발육(發育)시킴에 그 조화(造化)가 된 까닭은 음양오행(陰陽五行)일 뿐이니 이른바 음양오행(陰陽五行)이란 것은 또한 반드시 이러한 이치(理致)가 있은 뒤에 이러한 기운(氣運)이 있는 것이다. 만물(萬物)을 생산(生産)함에 있어서는 곧 또한 반드시 이러한 기운(氣運)이 모인 뒤에 이러한 형상이 있는 까닭에 사람과 만물(萬物)이 생겨남에는 반드시 이러한 이치(理致)를 얻은 연후에 건순(健順)과 인의(仁義)와 예지(禮智)의 성품이 있고 반드시 이러한 기운(氣運)을 얻은 연후에 혼백(魂魄)과 오장(五臟)13)과 백해(百骸)14)의 몸이 있다.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15)가 이른바 무극(無極)의 참과 이오(二五)16)의 정(精)이 오묘(奧妙)하게 합하여 엉긴 것이 정히 이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치(理致)로써 이것을 말한다면 만물(萬物)은 한 근원이라서 진실로 사람과 만물(萬物)의 귀천이 다를 수가 없고 기운으로써 이것을 말한다면 바르고 통한 것을 얻으면 사람이 되고 치우치고 또한 막힌 것을 얻으면 만물(萬物)이 되는 것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혹은 귀(貴)하고 혹은 천(賤)하여 능히 가지런하지 못하니 저 천(賤)하여 만물(萬物)이 된 것은 이미 형체와 기운의 치우침과 막힘에 질곡(桎梏)이 되어서 그 본체(本體)의 온전함을 채우지 못하지만 오직 사람은 곧 바르고 통한 기운을 얻어서 그 성품(性品)이 가장 귀한 까닭에 사방 한치의 사이에 있는 마음이 허령(虛靈)하고 통철(洞徹)하며 만가지 이치(理致)가 모두 구비(具備)되어 있으니 대개 사람이 짐승과 다른 까닭은 정(正)히 이러한 이유에 있다. 요순(堯舜)17)과 같은 사람이 되어서 천지의 작용에 참여하여 만물(萬物)의 화육(化育)을 도울 수 있는 까닭도 또한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니 이것이 곧 이른바 명덕(明德)이란 것이다. 그러나 그 통함이 혹 맑고 흐림의 다름이 없고 그 바름이 혹 아름다움과 악함의 다름이 없는 까닭에 그 천부(天賦)의 자질(資質)이 맑은 사람은 지혜롭고 탁한 사람은 어리석으며 아름다운 사람은 어질고 악한 사람은 불초(不肖)하다. 또한 능히 같지 못한 사람이 있으니 반드시 상지(上智)와 대현(大賢)의 자질(資質)이 있어야 곧 능히 그 본체(本體)를 온전히 할 수 있어서 조금도 밝지 아니함이 없고 이러함에 미치지 못하면 곧 그 이른바 명덕(明德)이란 것이 이미 가린 바는 없으나 그 온전함을 상실하게 된다. 하물며 또한 기질(氣質)이 가린 마음으로써 사물(事物)의 무궁(無窮)한 변화(變化)에 접하게 되면 곧 눈으로는 좋은 빛을 보고자하고 귀로는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자 하며 입으로는 맛난 음식을 먹고자 하고 코로는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자 하며 사지(四肢)는 편안하게 있고자 하여 덕(德)을 해롭게 하는 것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으리요? 이 두 가지는 서로 반복하여 깊고 굳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덕(德)의 밝음은 날마다 어두워지고 이 마음의 허령(虛靈)함을 아는 사람은 다만 정욕(情欲)과 이해(利害)의 사사로움을 아는 것에 불과할 뿐이니 이것은 곧 비록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나 실상은 짐승과 멀지 아니하고 비록 요순(堯舜)과 같은 사람이 되어 천지의 작용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하나 또한 능히 스스로를 확충(擴充)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본래 밝은 체(體)는 하늘로부터 받아서 마침내 어둡게 할 수가 없다. 이럼으로써 비록 어둡고 엄폐(掩蔽)한 것이 지극하더라도 개연(介然)18)한 즈음에 한 번 깨달음이 있으면 이 빈 틈 사이에 나아가 그 본체(本體)가 이미 통연(洞然)19)할 것이다. 이럼으로써 성인(聖人)이 가르침을 베풂에 이미 소학(小學)의 가운데에서 기르고 다시 대학(大學)의 도(道)로써 열어주는데 그 반드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학설(學說)로써 우선을 삼으니 이것을 시키는 까닭은 그 기르는 가운데로 나아가서 그 발동(發動)한 바를 인하여 그 이것을 밝히는 단서(端緖)를 열어주는 것이다.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며 몸을 닦는 항목(項目)으로써 이어나감에 또한 이것을 시키는 까닭은 그 이미 밝힌 발단(發端)을 인하여 이것을 내 몸에 돌이켜서 그 이것을 밝히는 실상을 이루는 것이다. 대개 이미 그 이것을 밝히는 발단(發端)을 열어주고 또한 그 이것을 밝히는 실상을 이루어줌이 있으면 내가 하늘에서 얻은 것이 일찍이 밝지 아니함이 없으니 어찌 초연(超然)하게 기질(氣質)과 물욕(物欲)의 누(累)가 없고 다시 그 본체(本體)의 온전함을 얻지 못하겠는가? 이것은 곧 이른바 밝은 덕(德)을 밝힌 것으로 성품(性品)과 분수(分數)의 밖에 작위(作爲)할 바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 이른바 밝은 덕(德)이란 것은 또한 사람마다 함께 얻은 바로서 내가 사사로이 얻은 것은 아니다. 지난번에 모두 물욕(物欲)의 엄폐(掩蔽)가 된즉 그 어질고 어리석음의 구분이 진실로 크게 서로 먼 것이 없었다. 지금 내가 이미 다행하게 스스로 밝힘이 있으면 보건대 저 뭇 사람들이 함께 이것을 얻었으나 능히 스스로 밝히지 못하고 바야흐로 또한 미혹(迷惑)된 것을 마음으로 달게 여기고 비루하고 더러우며 구차(苟且)하고 천(賤)한 가운데에 푹 빠져도 스스로 알지를 못하니 어찌 측연(惻然)20)하게 이것을 구제하려고 생각하지 아니하는가? 그런 까닭에 반드시 내가 스스로 밝힌 바를 미루어서 거기에 미쳐 가는데 집을 다스림에서 시작하고 나라를 다스림을 가운데로 하고 마침내 천하를 태평하게 함에 미쳐가서 저들로 하여금 이 밝은 덕(德)이 있어도 능히 스스로 밝히지 못하면 또한 모두 스스로 밝혀서 그 옛날에 물든 더러움을 제거하게 한다. 이것이 곧 이른바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것인데 또한 이것을 부여하고 주며 증가시키고 더해줄 수가 없다. 그러나 덕(德)이 나에게 있는 것을 마땅히 밝히고 백성들에게 있는 것도 마땅히 새롭게 하면 또한 모두 사람의 힘으로 할 바가 아니고 내가 밝혀서 이것을 새롭게 하는 까닭이 또한 사사로운 뜻으로 구차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하늘에서 얻어 일용(日用)의 사이에 나타난 것이 진실로 이미 각각 본연(本然)하고 일정한 법칙이 아님이 없는 까닭이니 정자(程子)가 이른바 그 지극히 정미(精微)한 의리(義理)는 가히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에 지극히 착하다는 것으로써 이 조목(條目)을 설정하니 전에 이른바 임금의 인(仁)과 신하의 공경(恭敬)과 자식의 효도(孝道)와 아버지의 자애(慈愛)와 사람과 더불어 사귀는 믿음이 곧 그 조목(條目)의 큰 것이다. 여러 사람들의 마음은 진실로 이러한 것이 없지 아니하나 혹 능히 알지 못하고 학자는 비록 혹 이것을 알더라도 또한 능히 반드시 이러한 것에 이르러서 이것을 제거하지 못하는 사람은 드물다. 대학(大學)의 가르침이란 것은 그 이치(理致)가 비록 조금 회복되어도 순수하지 못함이 있고 자기가 비록 조금 극복해도 다하지 못함이 있으며 또한 장차 대개 자기를 수양(修養)하여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도(道)를 다하지 못할 것인가를 염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것을 지적해서 말하여 덕(德)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표적을 삼는 것이다. 덕(德)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은 진실로 능히 반드시 여기에 이름을 요구하고 조금도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차이가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아니하면 사람의 욕심을 버리고 하늘의 이치(理致)를 회복하는 것이 터럭만큼의 남은 한도 없을 것이다. 대저 대학(大學) 한 편의 뜻을 총괄(總括)하여 말하면 여덟 가지 일에서 벗어나지 아니하고 여덟 가지 일의 요지를 총괄(總括)하여 말하면 또한 이 세 가지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니 이것은 내가 단연코 대학(大學)의 강령(綱領)으로 삼아도 의심이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맹자(孟子)21)가 죽음으로부터 도학(道學)이 전해지지 아니하여 세상의 군자(君子)가 각각 그 뜻의 편한 것으로써 학문을 삼았다. 이에 곧 그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을 힘쓰지 아니하고 한갓 정교(政敎)와 법도(法度)로써 족히 백성을 새롭게 할 수가 있다고 여기고 또한 자기 몸을 사랑하고 홀로 착하다고 여겨 스스로 족히 그 밝은 덕(德)을 밝힌다고 말하여 백성을 새롭게 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또한 두 가지를 마땅히 힘써야 함을 간략하게 알지만 돌아보건대 곧 작은 성공에 안주하고 가까운 이익에 익숙하여 지극히 착한 것이 있는 곳에 그치기를 구하지 아니하니 이것은 모두 이 편의 지나침을 고찰하지 아니한 때문이다. 그 능히 자기를 완성하고 사물(事物)을 완성함에 있어서 오류를 저지르지 아니할 사람이 드물 것이다.

가로되 이 경전의 순서가 성의장(誠意章) 이하로부터는 그 뜻이 분명하여 전(傳)에 다 실려있는데 홀로 그 이른바 격물치지(格物致知)는 글자의 뜻이 분명하지 아니하여 전(傳)에서 다시 빠져있다. 또한 최초로 힘을 쓴 곳은 있으나 다시 상문(上文)에서 실마리를 말한 것은 찾을 수가 없다. 자네가 도리어 스스로 정자(程子)의 뜻을 취한 것이라고 말하여 이것을 보충하면 정자(程子)의 말이 어찌 반드시 경전의 뜻에 합당함을 보이겠는가? 자네의 말이 또한 모두 정자(程子)에게서 나오지 아니한 것 같으니 무엇 때문인가? 가로되 혹자가 정자(程子)에게 질문하여 가로되 학문은 무엇을 해야 깨달을 수 있겠는가? 정자(程子) 가로되 학문은 지식을 이루는 것보다 먼저 가는 것이 없으니 능히 그 지식을 이루면 생각이 날마다 더욱 분명해져서 오래도록 한 뒤에 깨달을 수가 있다. 서경(書經)22)에 이른바 ‘생각함은 지혜롭고 지혜로움은 성스러움을 만든다.’고 하고 동중서(董仲舒)23)가 이른바 ‘학문을 힘써한즉 듣고 보는 것이 넓어져서 지혜가 더욱 분명해진다.’는 것이 정히 이것을 말한 것이다. 배우되 깨달음이 없으면 또한 무엇으로써 배움을 하겠는가? 혹자가 질문하기를 충성스럽고 신의(信義)가 있게 하는 것은 가히 힘써 할 수 있으나 지식을 이루는 것은 어려우니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정자(程子) 가로되 성(誠)과 경(敬)은 진실로 힘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천하의 이치(理致)가 먼저 이것을 알지 못하고 또한 능히 힘써 이것을 행하는 자가 있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대학(大學)의 순서가 지식을 이룸을 먼저하고 뜻을 정성스럽게 함을 뒤에 하니 그 등급을 가히 뛰어넘을 수가 없다. 진실로 성인(聖人)의 총명(聰明)함과 예지로도 한갓 힘쓰고자 하여 그 행사의 자취를 실천함이 없으면 또한 어찌 능히 저와 같은 동작(動作)과 주선(周旋)을 함에 있어서 예절에 맞지 아니함이 없겠는가? 오직 그 이치(理致)를 환하게 밝혀야 곧 능히 억지로 힘써하는 것을 기다리지 아니해도 저절로 즐거워하여 이치(理致)를 따라 할 뿐이다. 대개 사람의 성품(性品)이 본래 착하지 않음이 없어서 이치(理致)를 따라 행하면 마땅히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오직 그 지식이 이르지 아니하고 다만 힘으로써만 하고자 하는지라. 이럼으로써  그 어려움에 괴로워하고 그 즐거움을 알지 못할 뿐이다. 이것을 알아서 이르면 이치(理致)를 따르는 것이 즐겁고 이치(理致)를 따르지 아니함이 즐겁지 아니함이 되니 어찌 괴롭게 이치(理致)를 따르지 아니하여 내 즐거움을 해롭게 하겠는가? 옛날에 일찍이 호랑이가 사람을 상하게 했다고 말하는 사람을 본적이 있는데 여러 사람들이 모두가 이 이야기를 들었다. 그 가운데에 한 사람이 정신과 얼굴빛이 홀로 변했는데 그 까닭을 물으니 이에 일찍이 호랑이에게 상했던 사람이었다. 대개 호랑이가 사람을 상하게 한다는 것은 사람이면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이 말을 듣고 두려워하는 사람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이것을 아는 데에 있어서 참으로 아는 사람과 참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학자가 도(道)를 아는 것이 반드시 이 사람이 호랑이를 아는 것과 같이 한 연후에 이를 수 있을 뿐이다. 만약 가로되 착하지 아니한 것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인 줄을 알면서도 오히려 혹시 이것을 하면 또한 일찍이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닐 뿐만이 아니다. 이 두 가지 조목(條目)은 모두 격물(格物)과 치지(致知)를 마땅히 먼저 해야 하고 뒤에 할 수 없다는 뜻의 이유를 말한 것이다. 또한 질문하기를 나아가 수양(修養)하는 기술에 무엇을 먼저 해야 할 것인가? 정자(程子)가 가로되 마음을 바르게 하고 뜻을 정성스럽게 하는 것보다 먼저 해야할 것이 없다. 그러나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지식을 이루어야 하고 지식을 이루고자 함은 또한 사물(事物)을 연구함에 있으니 치(致)는 다하는 것이요 격(格)은 이르는 것이다. 대개 한 가지 사물(事物)이 있으면 반드시 이치(理致)가 있으니 궁구(窮究)하여 이것이 이르게 하는 것이 이른바 격물(格物)이란 것이다. 그러하되 격물(格物)은 또한 하나의 발단(發端)이 아니니 혹 독서(讀書)하여 도의(道義)를 강론(講論)하여 밝히고 혹 고금(古今)의 인물을 논하여 그 시비(是非)를 분별하며 혹 사물(事物)에 응접(應接)하여 그 마땅하고 그렇지 못함에 처하는 것 같은 것이 모두 이치(理致)를 궁구(窮究)하는 것이다. 가로되 격물(格物)이란 것은 반드시 사물(事物)마다 이것은 연구해야 하는가? 장차 하나의 사물(事物)을 연구함에 그쳐도 만 가지 이치(理致)가 모두 통하는가? 가로되 한 가지 사물(事物)을 연구하면 만 가지 이치(理致)가 통하나니 비록 안자(顔子)24)가 또한 이러한 지경에 이르지는 못해도 오직 금일(今日)에 하나의 사물(事物)을 연구하고 명일(明日)에 또한 하나의 사물(事物)을 연구하여 습관을 축적함이 이미 많아진 연후에 탈연(脫然)25)하게 관통하는 곳이 있을 뿐이다. 또 가로되 한 몸의 가운데로부터 만물(萬物)의 이치(理致)에 이르기까지 이해를 많이 하면 활연(豁然)26)하게 깨닫는 곳이 있다. 또 가로되 이치(理致)를 궁구(窮究)하는 사람은 반드시 천하의 이치(理致)를 모두 궁구(窮究)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또한 다만 한 가지 이치(理致)를 궁구(窮究)하여 문득 이르렀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축적(蓄積)을 많이 한 후에 스스로 마땅히 탈연(脫然)하게 깨달은 곳이 있다. 또 가로되 격물(格物)은 천하의 사물(事物)을 모두 궁구(窮究)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한 가지 일에 있어서 모두를 궁구(窮究)하고 그 나머지는 가히 유추(類推)할 수가 있다. 효도(孝道)를 말함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그 효도(孝道)가 될 수 있는 이유가 어떠한 가를 연구하여야 한다. 만약 한 가지 일에 있어서 궁구(窮究)를 하지 못하고 또한 따로 한 가지 일을 궁구(窮究)함에 혹 쉬운 것을 먼저 하고 혹 어려운 것을 먼저 하여 각각 그 사람의 깊고 얕음을 따라서 해야 하니 비유컨대 천 갈래 지름길과 만 갈래 길로 모두 나라로 갈 수가 있는 것과 같다. 다만 하나의 길을 얻어서 들어가면 가히 유추(類推)하여 그 나머지를 통할 수가 있다. 대개 만물(萬物)은 각각 한 가지 이치(理致)를 구비하고 있고 만 가지 이치(理致)는 함께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으니 이것이 유추(類推)하여 통하지 아니함이 없는 까닭이다. 또 가로되 사물(事物)에는 반드시 이치(理致)가 있어서 모두 마땅히 궁구(窮究)해야 하는데 천지(天地)가 높고 깊으며 귀신(鬼神)이 그윽하고 나타나는 이유와 같은 것이 이것이다. 만약에 하늘은 내가 그 높음을 알 수 있을 뿐이고 땅은 내가 그 깊음을 알 수 있을 뿐이며 귀신(鬼神)은 내가 그 그윽하고 또 나타남을 알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면 이것은 이미 그러한 말이니 또한 무슨 이치(理致)를 궁구(窮究)할 수 있겠는가? 또 가로되 만약에 효도(孝道)를 하고자 하면 곧 마땅히 효도(孝道)를 하는 도(道)가 어떠한 지의 이유와 봉양(奉養)을 하는 마땅함이 어떠한 지의 이유를 알아서 겨울에는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하는 절차를 궁구(窮究)하지 않음이 없게 한 연후에 이것을 능히 할 수가 있고 홀로 대개 효(孝)라는 한 글자를 지키기만 하여 가히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혹자가 질문하기를 사물(事物)과 자기를 관찰하는 사람이 어찌 사물(事物) 보기를 인하여 도리어 자기에게 구하겠는가? 가로되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다. 사물(事物)과 내가 하나의 이치(理致)이니 겨우 저것에 밝으면 곧 이것을 이해할 수 있으니 이것은 안과 밖을 합하는 도(道)이다. 그 큰 것으로 말하면 천지(天地)가 높고 두터운 까닭이요 그 작은 것으로 말하면 하나의 사물(事物)이 그러한 까닭에 이르는 것이니 모두 학자가 마땅히 생각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가로되 그러한즉 먼저 사단(四端)에 구하는 것이 옳은가? 가로되 정(情)과 성(誠)에 구하는 것이 진실로 몸에 간절하다. 그러나 하나의 풀과 하나의 나무에도 또한 모두 이치(理致)가 있으니 가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또 가로되 지식을 이루는 요체(要諦)는 마땅히 지선(至善)의 소재를 알아야 하는 것이니 아버지는 자애(慈愛)에 그치고 자식은 효도(孝道)에 그치는 것과 같은 종류이다. 만약 이것을 힘쓰지 아니하고 한갓 범연(汎然)27)하게 만물(萬物)의 이치(理致)를 관찰하고자 한다면 나는 대군(大軍)의 유격(遊擊) 기병(騎兵)이 너무 멀리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것과 같을까 두려운 것이다. 또 가로되 사물(事物)을 연구함은 이것을 몸에 관찰하여 그 얻음이 더욱 절실함만 같은 것이 없으니 이 아홉 가지 조목(條目)은 모두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마땅히 힘을 써야할 곳과 그 차례의 공정(工程)을 아는 것을 말한 것이다. 또 가로되 사물(事物)을 연구하고 이치(理致)를 궁구(窮究)함에는 다만 뜻을 정성스럽게 하여 이것을 연구해야 할 것이고 그 더디고 빠른 것은 곧 사람의 밝고 어두움에 달려있을 뿐이다. 또 가로되 도(道)에 들어가는 것은 경(敬)과 같은 것이 없으니 능히 지식을 이루는데 경(敬)에 있지 아니한 사람은 있지 아니하다. 또 가로되 함양(涵養)에 모름지기 경(敬)을 써서 배움에 나아가면 지식을 이룸에 있다. 또 가로되 지식을 이룸은 함양(涵養)하는 바에 있고 지식을 기르는 것은 욕심을 적게 가지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다. 또 가로되 사물(事物)을 연구하는 것은 도(道)에 가는 시작이니 생각이 사물(事物)을 연구하고자 하면 진실로 이미 도(道)에 가까운 것이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마음을 거두어서 방심(放心)하지 않는 까닭이다. 이 다섯 가지 조목(條目)은 또한 본원(本原)을 함양(涵養)하는 공(功)을 말한 것이니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근본이 되는 까닭이다. 무릇 정자(程子)가 이 말을 한 것은 이러한 것에 불과하니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전(傳)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제 그 의리(義理)를 찾음에 이미 의심할 바가 없고 그 글자의 뜻을 고찰함에 또한 모두 근거가 있으니 다른 책으로써 이것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곧 주역(周易)의 문언(文言)에 이른바 ‘학취문변(學聚問辨)’이요 중용(中庸)에 이른바 ‘명선택선(明善擇善)’이요 맹자(孟子)에 이른바 ‘지성지천(知性知天)’이니 또한 모두 먼저 굳게 지키고 힘써 행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징험(徵驗)할 수 있으니 대개 대학(大學)에서 처음으로 가르치는 공(功)은 여기에 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일찍이 이것을 반복하여 고찰함에 그 필연적(必然的)인 것을 믿었다. 이럼으로써 가만히 그 뜻을 취하여 전문(傳文)의 빠진 부분을 보충하였고 그렇지 아니한즉 또 어찌 감히 올바르지 아니한 죄를 범하고 증거가 없는 말을 해서 스스로 성현(聖賢)의 경전 사이에 의탁하겠는가? 가로되 그러한즉 우리 자네의 뜻을 또한 가히 얻어서 이것을 모두 들을 수 있겠는가? 가로되 나는 들으니 천도(天道)가 유행하고 조화(造化)가 발육하여 무릇 소리와 색깔과 모습과 형상이 있는 것이 천지간에 가득히 찬 것은 모두 사물(事物)이요 이미 이런 사물(事物)이 있으면 이러한 사물(事物)이 된 까닭은 각각 당연한 법칙이 있지 아니함이 없어서 스스로 그침을 용납하지 아니하니 이것은 모두 하늘이 부여한 것을 얻어서 된 것이고 사람이 능히 할 수 있는 바가 아닌 것이다. 지금 또한 지극히 간절하게 가까운 것으로 말하자면 마음의 물건 된 것이 실제로 몸에 주장을 하고 그 체(體)는 곧 인의(仁義)와 예지(禮智)의 성품이 있고 그 용(用)은 곧 측은(惻隱)과 수오(羞惡)와 공경(恭敬)과 시비(是非)의 정이 있어서 혼연(渾然)28)히 가운데에 있으면서 느낌을 따라 응함에 각각 주장하는 바가 있어서 가히 어지럽히지 못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몸이 갖추고 있는 바에 미치면 입과 코와 귀와 눈과 사지(四肢)의 용(用)이 있고 또 다음으로 몸이 접하는 바에 미치면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와 부부(夫婦)와 장유(長幼)와 붕우(朋友)의 떳떳함이 있으니 이것에는 모두 반드시 당연한 법칙이 있어서 스스로 그만두기를 용납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이른바 이치(理致)라는 것은 바깥에서 사람에게 이르면 다른 사람의 이치(理致)가 자기와 다르지 아니하고 멀리서 사물(事物)에 이르면 사물(事物)의 이치(理致)가 사람과 다르지 아니하니 그 큰 것을 지극히 하면 천지의 운행(運行)과 고금(古今)의 변천을 능히 바깥으로 할 수가 없고 작은 것에 다하면 하나의 티끌의 미미(微微)함과 한 번 숨쉬는 사이에도 능히 빠트리지 아니한다. 이것이 곧 상제(上帝)가 내려주신 바의 충심(衷心)이요 뭇 백성들이 잡은 바의 떳떳함이니 劉子가 이른바 ‘천지지중(天地之中)’이요 부자(夫子)29)가 이른바 ‘성여천도(性與天道)’요 자사(子思)30)가 이른바 ‘천명지성(天命之性)’이요 맹자(孟子)가 이른바 ‘인의지심(仁義之心)’이요 정자(程子)가 이른바 ‘천연자유지중(天然自有之中)’이요 장자(張子)31)가 이른바 ‘만물(萬物)지일원(萬物之一原)’이요 소자(邵子)32)가 이른바 ‘도지형체(道之形體)’란 것이다. 다만 그 기질(氣質)에 맑고 흐리며 치우치고 바름의 다름과 물욕(物欲)에 얕고 깊으며 두텁고 얇음의 차이가 있다. 이럼으로써 사람과 사물(事物), 어질고 어리석음이 서로 현격(懸隔)하게 차이가 나서 능히 같지 아니할 뿐이다. 그 이치(理致)가 같기 때문에 한 사람의 마음으로써 천하만물(天下萬物)의 이치(理致)에 능히 알지 못할 것이 없고 그 기품(氣品)이 다른 까닭에 그 이치(理致)에 있어서 혹 능히 궁구(窮究)하지 못할 바가 있다. 이치(理致)에 궁구(窮究)하지 못함이 있는 까닭에 그 아는 것이 다 알지 못함이 있고 다하지 못함이 있으면 그 마음의 발하는 바가 반드시 능히 의리(義理)에 순수하지는 못하나 물욕(物欲)의 사사로움이 뒤섞임은 없을 것이니 이것은 그 뜻이 정성스럽지 못함이 있고 마음이 바르지 못함이 있으며 몸이 수양(修養)하지 못함이 있어서 천하국가(天下國家)를 가히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다. 옛날에 성인(聖人)이 대개 이것을 근심하였다. 이럼으로써 그 처음으로 가르칠 적에 소학(小學)을 하게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성(誠)과 경(敬)을 익히게 하니 곧 그 방심(放心)을 거두고 그 덕성(德性)을 길러서 그 지극함을 쓰지 아니한 바가 없게 한 까닭이다. 그 대학(大學)에 나아감에 미쳐서는 곧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대개 사물(事物)의 가운데로 나아가서 그 아는 바의 이치(理致)를 인하여 유추(類推)하여 연구하게 함으로써 각각 그 지극한 경지에 이르게 하면 내 지식이 또한 두루 미치고 정밀(精密)하고 간절(懇切)해져서 다하지 아니함이 없다. 그 힘을 쓰는 방법 같은 것은 곧 혹시 일과 행위의 나타난 것에 고찰(考察)하고 혹시 염려(念慮)의 은미(隱微)함에 살피며 혹시 문자(文字)의 가운데에 구하고 혹시 강론(講論)의 즈음에 찾아서 하여금 심신성정(心身性情)의 덕과 인륜일용(人倫日用)의 떳떳함에서 천지귀신(天地鬼神)의 변화와 조수초목(鳥獸草木)의 마땅함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그 하나의 사물(事物) 가운데에 그 당연함을 보아 그침을 용납하지 않음이 있고 그 그러한 까닭을 허여(許與)하여 바꾸지 못할 것이 있어서 반드시 겉과 속과 정밀(精密)함과 거침에 다하지 아니하는 바가 없고 또한 더욱 그러한 종류를 유추(類推)하여 이것을 통하였다. 어느 하루에 탈연(脫然)하게 관통하면 천하의 사물(事物)에 모두 그 의리(義理)의 정미(精微)함의 지극한 바를 연구하고 내 총명(聰明)과 예지(睿知)가 또한 모두 그 마음의 본체(本體)를 지극히 하여 다하지 아니함이 없다. 이것이 내가 본전(本傳) 궐문(闕文)의 뜻을 보충하는 이유의 뜻이니 비록 능히 정자(程子)의 말을 모두 쓰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 요지(要旨)와 귀취(歸趣)는 곧 합당하지 아니한 사람이 드무니 독자가 그 또한 깊이 상고(詳考)하여 실제로 이것을 알지어다! 가로되 그러한즉 자네가 배움을 하는 것이 마음에 구하지 아니하고 자취에 구하며 안에 구하지 아니하고 바깥에 구하니 내가 성현(聖賢)의 학문이 이와 같이 천근(淺近)하면서 지리(支離)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가로되 사람이 배움을 하는 까닭은 마음과 이치(理致)일 뿐이다. 마음은 비록 한 몸을 주장하고 있으나 그 체(體)의 허령(虛靈)함은 족히 천하의 이치(理致)를 관장하니 이치(理致)가 비록 만물(萬物)에 산재(散在)해 있으나 그 용(用)의 미묘(微妙)함은 실제로 한 사람의 마음을 벗어나지 아니하니 처음부터 안과 바깥과 정밀(精密)함과 거침으로써 논의할 수 없다. 그러나 혹시 이 마음의 허령(虛靈)함을 알지 못하여 이것을 보존하지 못하면 어둡고 뒤섞여 혼란하여 뭇 이치(理致)의 오묘(奧妙)함을 궁구(窮究)할 수가 없고 뭇 이치(理致)의 오묘(奧妙)함을 알지 못하여 이것을 궁구(窮究)하지 못하면 편협(偏狹)되고 고집(固執)하고 막혀서 이 마음의 온전함을 다할 수가 없게 된다. 이것이 이치(理致)와 형세가 서로 요구하는 것이니 대개 또한 반드시 그러한 것이 있다. 이럼으로써 성인(聖人)이 가르침을 베풀 적에 사람들로 하여금 이 마음의 허령(虛靈)함을 묵묵히 알게 하고 이것을 단장정일(端莊靜一)의 가운데에 보존하게 하여 궁리(窮理)의 근본으로 삼고 사람들로 하여금 뭇 이치(理致)의 오묘(奧妙)함이 있는 줄을 알게 하여 이것을 학문과 사변(思辨)의 즈음에 궁구(窮究)하게 하여 마음을 다하는 공을 이루게 하니 크고 가는 것이 서로 함양(涵養)하고 움직이고 고요한 것이 서로 길러서 처음부터 안과 바깥과 정밀(精密)함과 거침의 선택이 있지 아니했다. 진실을 축적(蓄積)하고 힘을 오랫동안 써서 활연(豁然)하게 관통함에 미쳐서는 곧 또한 혼연(渾然)히 일치가 됨을 알고 과연 안과 바깥과 정밀(精密)함과 거침을 가히 말할 수가 없다. 지금 반드시 이것으로써 천근(淺近)하고 지리(支離)하다고 하여 형체를 감추고 그림자를 숨겨서 별도로 한 종류의 유심(幽深)하고 황홀(恍惚)하며 간난(艱難)하고 막혀 끊어지는 의논을 만들어 힘써 학자들로 하여금 망연(茫然)33)하게 그 마음을 문자(文字)와 언어(言語)의 바깥에 두어서 말하기를 “도(道)는 반드시 이와 같이 한 연후에 가히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근세(近世)에 불교학(佛敎學)의 피음사둔(詖淫邪遁)34)이 더욱 심한 것이어서 이것을 어지러운 곳으로 옮기고자 하는 것이다. 고인(古人)이 말한 명덕(明德)과 신민(親民)의 실학(實學)에 그 또한 오류가 된다.

질문하건대 용(用)의 미묘(微妙)함은 이것이 심(心)의 사용함과 그렇지 아니함이다. 주자(朱子)가 가라사대 이(理)에는 반드시 용(用)이 있으니 하필 또 이 심(心)의 용(用)을 말할 것인가? 심(心)의 체(體)는 이 이(理)에 갖추어져 있으니 이(理)는 곧 해당되지 않음이 없고 한가지 사물(事物)에도 존재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그 용(用)은 실제로 사람 마음을 벗어나지 아니하니 대개 이(理)는 비록 사물(事物)에 있으나 용(用)은 실제로 심(心)에 있다.

질문하건대 육상산(陸象山)35)이 정이천(程伊川)36)의 격물설(格物說)을 취하지 아니한 것은 아마도 일에 따라서 토론을 한다면 정신이 피폐해지기 쉬워서 마음에 구함만 같지 못하다고 여긴 것이다. 마음이 밝으면 비치지 아니함이 없어서 그 주장이 힘을 덜 수 있을 것이다. 가로되 일에 따라서 토론함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문득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서 말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발은 발걸음을 따라서 걸어가서 어둡고 어두운 땅에 들어가더라도 어느 누구도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이자(李子)37)가 기명언(奇明彦)38)에게 답장한 편지에 가로되 물격(物格)과 물리(物理)의 지극한 곳이 이르지 않음이 없다는 학설에 대해서는 삼가 가르침을 듣겠나이다. 전에 모(某)는 주자(朱子)의 이(理)는 정의(情意)도 없고 계산과 헤아림도 없고 조작(造作)도 없다는 학설(學說)만을 지킬 줄을 알아서 내가 궁구(窮究)하여 물리(物理)의 지극한 곳에 이르는 것이지 이(理)가 어찌 스스로 지극한 곳에 이르는 것이겠는가라고 생각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물격(物格)의 격(格)과 무부도(無不到)의 도(道)를 모두 내가 연구하고 내가 이르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지난날 서울에 있을 적에 이(理)가 이른다는 학설로 깨우쳐 주심을 입고서 반복해 자세히 생각해 보았으나 오히려 의혹이 풀리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근자(近者)에 김이정(金而精)39)이 전해 준 것에 영공께서 주(朱) 선생이 이(理)가 이른다는 것에 대해 언급한 서너 조항을 상고(詳考)해 낸 것을 받아본 뒤에야 비로소 나의 견해가 잘못되었음을 두려워하고서, 이에 관한 옛날의 견해를 다 씻어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서 자세히 생각하여 먼저 이(理)가 스스로 이를 수 있는 까닭이 무엇인가를 찾아보았습니다.

대개 대학(大學)의 보망장(補亡章) 혹문(或問) 가운데에 보이는 주자(朱子)의 학설(學說)이 이것을 드러내 밝힌 것이 해와 달처럼 밝은데도 내가 항상 그 말씀을 의미있게 보았으면서도 이에 대하여 깨닫지 못했던 것뿐입니다. 그 설에 "사람이 학문을 하는 까닭은 심(心)과 이(理)일 뿐이다. 심(心)이 비록 일신(一身)의 주인이지만, 그 체(體)의 허령(虛靈)함이 천하의 이(理)를 관섭(管攝)할 수 있고, 이(理)가 비록 만물(萬物)에 흩어져 있으나, 그 용(用)의 미묘(微妙)함이 실로 한 사람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애당초 내외(內外)의 정밀함과 거침으로써 논할 수 없다." 하였고, 그 소주(小註)에 어떤 이가 “용(用)의 미묘(微妙)함이 바로 심(心)의 용(用)입니까."고 물으니,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이(理)에는 반드시 용(用)이 있으니 무엇 때문에 또 심(心)의 용(用)을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심(心)의 체(體)는 이 이(理)를 갖추고 있고, 이(理)는 모든 것을 다 갖추지 않음이 없어 한 물건도 있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그 용(用)은 실로 사람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대개 이(理)는 비록 만물(萬物)(萬物)에 있지만, 용(用)은 실로 심(心)에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 “이(理)가 만물(萬物)(萬物)에 있으나 그 용(用)은 실로 한 사람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로써 보면 이(理)가 스스로 작용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사람의 마음을 기다려 작용한다는 것인 듯하니, 이(理)가 스스로 이른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또 “이(理)에는 반드시 용(用)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또 심(心)의 용(用)을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말로써 보면 그 용(用)이 비록 인심(人心)에서 벗어나지 않으나 용(用)이 되는 묘처(妙處)는 이(理)의 발현(발현)이 인심(人心)이 이르는 바에 따라 이르지 않는 바가 없고 극진하지 않는 바가 없다는 것이니, 다만 나의 격물(格物)이 지극하지 못함을 두려워할 뿐, 이(理)가 스스로 이르지 않는 것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야흐로 그 격물(格物)을 말한 것은 진실로 내가 궁구(窮究)하여 사물(事物)의 극처(極處)에 이르는 것을 말한 것이지만, 그 물격(物格)을 말한 곳에 미쳐서는 어찌 사물(事物) 이치(理致)의 극처(極處)가 나의 궁구(窮究)한 바에 따라 이르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라 할 수 없겠습니까. 여기에서 정의(情意)도 없고 조작(造作)도 없는 것이 이(理)의 본연(本然)의 체(體)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보는 바에 따라 이르지 않음이 없는 것이 이(理)의 지극히 신묘(神妙)한 용(用)인데, 전에는 단지 본체(本體)가 무위(無爲)한 줄만 알고, 묘용(妙用)이 드러나 행할 수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여 이(理)를 아무 작용(作用)이 없는 죽은 물건으로 인식하는 데 가까웠으니, 도(道)와 거리가 어찌 매우 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고명(高明)의 부지런한 제유(提諭)로 인하여 망녕(妄佞)된 의견을 버리고 새로운 뜻을 터득하고 신격(新格)으로 길이 나아가게 되었으니 매우 다행입니다.

혹문(或問) 육장(육장)의 뜻에 그 자세한 것을 오히려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가로되 천하의 도(道)가 두 가지가 있으니 다만 선(善)과 악(惡)일 뿐이다. 그러나 그 근원을 헤아려 그 차례를 따라가 보면 선(善)이란 것은 하늘로부터 품부(稟賦)를 받은 본연(本然)이고 악(惡)이란 것은 물욕(物欲)이 낳은 사예(邪穢)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사람의 떳떳한 성품(性品)은 선(善)만 있고 악(惡)은 없으며 그 본심(本心)은 선(善)은 좋아하고 악(惡)은 미워할 뿐이다. 그러나 이미 이러한 형체(形體)의 누(累)가 있고 또한 기질(氣質)의 구속(拘束)을 받는지라. 이렇기 때문에 물욕(物欲)의 사사로움이 가려서 천명(天命)의 본연(本然)이 사물(事物)의 이치(理致)에 드러나지 못하니 진실로 흐리멍텅하게 선악(善惡)의 소재(所在)를 알지 못하게 되고 또한 겨우 그 거친 것만 알아서 능히 참으로 극단적으로 좋아하고 미워할 줄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대개 선(善)함이 진실로 좋아할 만한 것인 줄을 모른다면 그 선(善)을 좋아함이 비록 좋아한다고 말할지라도 능히 좋아하지 아니하여 이것을 내부에서 거절하고 악(惡)함이 진실로 미워할 만한 것인 줄을 모른다면 그 악(惡)을 미워함이 비록 미워한다고 말할지라도 능히 미워하지 아니하여 이것을 가운데에서 만회(挽回)하지 못하는지라. 이렇기 때문에 구차(苟且)함을 면할 수 없어서 스스로를 속임으로써 뜻의 발한 바가 정성스럽지 못함이 있다. 대개 선(善)을 좋아하되 정성스럽지 못하면 오직 족히 선(善)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선을 해롭게 하며 악(惡)을 미워하되 정성스럽게 하지 못하면 오직 족히 악(惡)을 제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악(惡)을 조장(助長)하게 된다. 이러한즉 그 해로움이 한갓 심할 뿐만 아니라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성인이 여기에서 대개 이러한 것을 근심한 까닭에 대학(大學)의 가르침을 펼 때에 반드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항목으로써 으뜸을 삼아 그 심술(心術)을 열어 밝게 하시어 배우는 자로 하여금 이미 선악(善惡)의 소재(所在)와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해야 하는 필연(必然)을 알게 하였다. 여기에 이르러서 다시 그 뜻을 반드시 정성스럽게 해야 한다는 말을 진언(進言)한 것은 곧 또한 유독(幽獨)하고 은미(隱微)함의 깊숙함을 삼가게 하여 그 구차(苟且)하게 스스로를 속이는 발단(發端)을 금지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무릇 마음의 발한 바에 있어서 선(善)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 같은 것은 반드시 가운데를 말미암아 외부에 미쳐서 일호(一毫)라도 좋아하지 아니함이 없고 악(惡)을 미워한다고 말하는 것 같은 것은 반드시 가운데를 말미암아 외부에 미쳐서 일호(一毫)라도 미워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다. 대개 선(善)을 좋아하면서 심중(心中)에 좋아하지 아니함이 없으면 이것은 그 좋아하는 것이 참으로 호색(好色)을 좋아함과 같아서 자기의 눈을 상쾌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어서 처음부터 남을 위하여 좋아한 것이 아니고 악(惡)을 미워하면서 심중(心中)에 미워하지 아니함이 없으면 이것은 그 미워하는 것이 참으로 악취(惡臭)를 미워함과 같아서 자기의 코를 만족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어서 처음부터 남을 위하여 미워한 것이 아니니 발동(發動)한 바의 실제가 이미 이와 같지만 잠깐 사이에 가느다란 지푸라기 같은 미미(微微)한 것이 생각마다 서로 잇고 또한 감히 조금의 간단(間斷)이라도 없다면 거의 내외(內外)가 밝고 융합(融合)하고 표리(表裏)가 맑고 징철(澄澈)하여 마음이 바르지 아니함이 없고 몸이 수양(修養)되지 아니함이 없을 것이다. 저 소인(小人) 같은 자들은 은미(隱微)한 사이에 실제로는 선(善)하지 아니한 짓을 하면서도 오히려 바깥으로는 선(善)을 가탁(假託)하여 스스로를 엄폐(掩蔽)한다면 또한 전연(全然) 선악(善惡)의 소재(所在)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다만 참으로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할 줄을 알지 못하고 또한 능히 혼자 있는 것을 삼가서 그 구차(苟且)하게 스스로를 속이는 발단(發端)을 금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영락(零落)함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러도 스스로를 알지 못할 뿐이다. 이 장(章)의 말이 그 자세함이 이와 같으니 이것이 진실로 스스로를 수양(修養)하는 급선무(急先務)가 되기에 마땅하다. 그러나 그 지식의 참을 열어주지 못한즉 능히 그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하는 실상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에 반드시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자 하면 먼저 그 지식을 이루라고 말하고 또한 지식이 이른 뒤에 뜻이 정성스럽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 지식이 이미 이르고 들음이 스스로 하는 것인 줄을 감히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반드시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반드시 그 혼자 있음을 삼가서 스스로 속임이 없어야 한다고 말한즉 대학(大學) 공부의 차례가 수미(首尾)가 서로 이어 하나가 되어서 다른 술수(術數)를 빌려 그 사이에 뒤섞이지 않게 함을 또한 볼 수가 있다.

혹자가 묻기를 사람의 마음이 있는 것이 본래 사물(事物)에 응함이 있기 때문인데 이 장(章)의 전(傳) (7장)에는 기뻐하고 성내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바가 있어서 문득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한즉 그 마음이란 것이 마른 나무가 다시 살지 못하고 식은 재가 다시 불탈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이에 바르게 될 수가 있겠는가? 가로되 사람의 한 마음은 잠연(湛然)40)히 비고 밝아서 거울의 텅 빔과 같고 저울의 공평함과 같아서 한 몸의 주인이 된 것이 진실로 참된 체(體)의 본연(本然)이 되는데 기뻐하고 성내고 근심하고 두려워함이 느낌을 따라서 예쁘고 추하고 굽히고 우러름에 응하니 사물(事物)을 인하여 형체를 부여한 것이 또한 그 용(用)이 능히 없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느끼지 못하는 때에 지극히 비고 지극히 고요하니 이른바 거울같이 텅 비고 저울같이 공평한 체(體)가 비록 귀신(鬼神)이라 하더라도 능히 그 즈음을 엿보지 못하니 진실로 그 득실(得失)을 가히 의논할 수가 없다. 그 물건에 감응(感應)하는 즈음에 미쳐서 응하는 바가 또한 모두 절도(節度)에 맞는다면 거울같이 텅 비고 저울같이 공평한 용(用)이 유행하여 막히지 아니하고 바르고 크며 빛나고 밝아 이것이 곧 천하의 통달한 도(道)가 될 수 있는 까닭이니 또한 어찌 바른 소유(所有)를 얻지 못하겠는가? 오직 사물(事物)의 오는 것에 살피지 못하는 바가 있으면 여기에 응한 것이 이미 혹 능히 잃음이 없지 아니할 것이고 또한 능히 이것과 더불어 함께 못 가지 아니한즉 그 기뻐하고 성내고 근심하고 두려워함이 반드시 마음 가운데에서 움직이니 이 마음의 용(用)이 처음부터 그 바른 것을 얻지 못함이 있다. 전(傳)한 사람의 뜻이 진실로 마음이 사물(事物)에 응함이 문득 그 바름을 얻지 못함이 아니고 반드시 마른 나무와 식은 재와 같이 한 뒤에 곧 그 바름을 얻을 수 있다. 오직 이 마음의 허령(虛靈)함이 이미 한 몸의 주인이 되어 진실로 그 바름을 얻어서 여기에 있지 않음이 없다고 한즉 이목구비(耳目口鼻)와 사체백해(四體百骸)가 명령한 것을 들어서 그 일을 제공하지 아니한 바가 없다. 그 움직이고 고요하며 말하고 침묵함과 나가고 들어가며 일어나고 거처(居處)함에 오직 내가 시키는 바대로 하여 이치(理致)에 합당하지 아니함이 없다. 만약 그렇지 아니한즉 몸은 여기에 있으면서 마음은 저기로 달려가서 피와 살이 있는 몸이 관섭(管攝)41)하는 바가 없어서 얼굴을 들고 새 보는 것을 탐하고 머리를 돌려 다른 사람에게 잘못 응답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드물 것이다. 공자(孔子)가 이른바 잡으면 곧 있고 놓으면 곧 없어지며 맹자(孟子)가 이른바 그 도망간 마음을 잡아와서 그 대체(大體)를 따른다는 것이 대개 모두 이 배우는 사람을 말한 것이니 가히 깊이 생각하고 여러 번 반성(反省)하지 아니하겠는가?

혹자가 묻기를 상장(上章) (9장)에서는 제가(齊家)와 치국(治國)의 도(道)를 논함에 이미 효도(孝道)와 공손(恭遜)함과 자애(慈愛)로써 말을 했고 여기에서는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의 도(道)를 논하고 다시 이것으로써 말을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10장)에 가로되 세 가지는 사람 도리의 큰 발단이요 대중(大衆)들의 마음이 한가지로 얻은 것이라. 집으로부터 나라에 미치고 나라로부터 천하에 미치기까지 비록 대소(大小)의 다름은 있다. 그러나 그 도(道)는 이와 같은 것에 불과할 뿐이다. 다만 앞장에서는 오로지 자기를 미루어서 다른 사람을 변화시킴을 말했고 이 장(章)에서는 또한 거듭 말하여 사람 마음이 같아서 능히 그만두지 못함이 이와 같음을 보인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君子)가 오직 이것을 변화시킬 뿐만이 아니라 또한 여기에 처(處)할 수 있는 것이다. 대개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비록 일찍이 같지 아니함이 없다고 말하나 그러나 귀(貴)하고 천(賤)함에 형세(形勢)가 다르고 어질고 어리석음에 기품(氣禀)이 달라서 진실로 위에 있는 군자(君子)가 참으로 실천할 줄을 알아서 이것을 창도(唱導)하지 못한다면 아래에 이 마음을 가진 자가 또한 느껴서 흥기(興起)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다행이 창도(唱導)할 사람이 있으면 흥기(興起)할 것이다. 그러나 위에 있는 사람이 도리어 혹시라도 능히 저들의 마음을 살피지 못하고 여기에 처(處)하는 바의 도(道)를 상실한다면 저들이 흥기(興起)시킬 바를 혹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균등(均等)하지 못하다는 탄식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君子)가 그 마음의 같은 바를 살펴서 혈구(絜矩)의 도(道)를 얻은 연후에 여기에 처(處)하여 드디어 선(善)의 발단(發端)을 흥기(興起)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대개 혈(絜)은 헤아리는 것이요 구(矩)는 그렇게 하는 방법이니 자기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서 다른 사람이 미워하는 것이 자기와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감히 자기가 미워하는 것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아니할 것이요 내 몸으로 하여금 한결같이 여기에 처(處)한다면 상하(上下)와 사방(四方)과 사물(事物)(事物)과 나의 즈음에 각각 그 분수(分數)를 얻어서 서로 침범(侵犯)하고 월권(越權)하지 않을 것이며 각각 그 중도(中道)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차지한 땅을 비교해본다면 그 넓고 좁으며 길고 짧은 것이 또한 다 한결같이 평균(平均)하고 절연(截然)하게 방정(方正)하여 남거나 부족한 곳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곧 이른바 혈구(絜矩)라는 것이다. 대개 천하국가(天下國家)를 다스림에 마음에 처(處)하여 일을 제어(制御)하는 사람이 한결같이 여기에서 나온즉 천지의 사이에 장차 한가지 물건도 제 있을 곳을 얻지 못함이 없을 것이고 무릇 천하에 효도(孝道)와 공손(恭遜)함을 행하여 저버리지 아니하려는 사람이 다 스스로 그 마음을 다하여서 균등(均等)하지 못하다는 탄식이 없을 것이니 천하에 불평한 자가 있겠는가? 그러나 군자(君子)가 이러한 것을 둔 것이 또한 어찌 바깥으로부터 이르러서 억지로 한 것이겠는가? 또한 사물(事物)을 궁구(窮究)하여 지식이 이르렀다고 한 까닭에 천하의 뜻을 통달하고 천만인(千萬人)의 마음을 알아서 한 사람의 마음에 나아감이 있고 뜻이 정성스럽게 되면 마음이 바르게 되었다고 한 까닭에 한 개인의 사사로움을 이기고 능히 한 사람의 마음으로써 천만인(千萬人)의 마음을 삼을 수 있는 것이 이와 같을 뿐이다. 한번 사사로운 뜻이 그 사이에 있게 되면 한 점막(粘膜)의 바깥이라도 문득 북쪽 오랑캐와 월(越)나라와 같이 멀게 되어서 비록 혈구(絜矩)를 하고자 하나 또한 장차 막히고 장애가 되어서 능히 통하지 못하게 된다. 조유(趙由)가 태수(太守)가 되면 태위(太尉)를 바꿀 것이고 태위(太尉)가 되면 태수(太守)를 능멸할 것이며 왕숙(王肅)42)이가 윗사람을 섬김에 모나게 한 것처럼 할 것인데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게 아첨하는 것을 좋아할 것이다. 그 이유를 유추(類推)해 보면 대개 여기에서 나왔고 그 종류를 확충(擴充)하면 비록 걸주(桀紂)43)와 도척(盜跖)44)의 행위라도 또한 장차 어느 곳인들 이르지 아니하겠는가? 가로되 그러한즉 혈구(絜矩)에서 이것을 말한다면 이른바 용서하는 것은 자기가 될 것이다. 가로되 이것이 진실로 앞장에서 이른바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써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과 같고 부자(夫子)가 이른바 몸을 마치도록 행할 수 있는 것이고 정자(程子)가 이른바 확충(擴充)하고 개척(開拓)해 나가면 천지(天地)가 변화하여 초목(草木)이 번성하고 확충(擴充)하고 개척(開拓)해 나가지 못하면 천지가 닫혀서 어진 사람이 숨는다고 하니 모두가 가히 이것을 유추(類推)해서 통하지 아니함이 없을 뿐이다. 그러나 반드시 이치(理致)를 궁구(窮究)하고 마음을 바르게 가짐으로부터 유추(類推)해 보면 내가 사랑하고 미워하며 취하고 버림이 모두 그 바름을 얻을 수 있고 유추(類推)해서 다른 사람에게 미쳐간 것도 또한 그 바름을 얻지 못함이 없다. 그러므로 상하(上下)와 사방(四方)이 이것으로써 헤아려서 절연(截然)하게 각각 그 분수(分數)를 얻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만약 이치(理致)에 분명하지 못함이 있고 마음에 바르지 못함이 있으면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반드시 마땅히 그 하고자하는 바가 아니고 내가 미워하는 것이 반드시 그 마땅히 미워하는 바가 아니다. 곧 이것을 살피지 못하고 문득 이것으로써 다른 사람의 준칙(準則)에 베풀고자 한다면 그 뜻이 비록 공평(公平)해도 일은 곧 사사로운 것이니 이것은 장차 사물(事物)과 내가 서로 침범(侵犯)하며 저것과 이것이 서로 병통이 되어 비록 한 집 안이나 반걸음 사이라도 또한 참성(參星)과 상성(商星)45)처럼 어긋나고 모순(矛盾)이 되어 행할 수 없음을 보게 될 것이니 오히려 몸을 마치도록 바라겠는가? 그러므로 성현들은 무릇 용서를 말함에 또한 반드시 충성으로써 근본을 삼고 정자(程子)도 또한 충성과 용서를 말하니 두 말은 형체와 같고 그림과 같아서 그 하나를 제거하고자 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으니 대개 오직 충성을 한 뒤에 가는 바의 마음이 비로소 그 바람을 얻을 수 있으니 이 또한 이 편의 선후(先後)와 본말(本末)의 뜻이다. 그러한즉 군자(君子)가 학문에 있어서 그 순서를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자(朱子)의 경연강의(經筵講義)에 가로되 신(臣)은 가만히 말하건대 하늘이 이 백성을 낳음으로부터 이들에게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품(性品)을 부여하고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와 형제(兄弟)와 부부(夫婦)와 붕우(朋友)의 윤리로써 차례를 지우지 아니함이 없기 때문에 천하의 이치(理致)가 진실로 이미 한 사람의 몸에 구비(具備)되지 않음이 없다. 다만 사람이 이 세상에 출생함으로부터 혈기(血氣)의 몸이 있기 때문에 능히 기질(氣質)의 치우침이 없지 아니하여 앞에서 구애(拘碍)되고 또한 물욕(物欲)의 사사로움이 있어서 뒤에서 엄폐(掩蔽)가 되니 능히 모두 그 성품(性品)을 알지 못한 까닭에 윤리를 어지럽힘에 이르러서 사악(邪惡)하고 편벽(偏僻)됨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의 성왕(聖王)들이 학교를 설치하여 천하의 사람들을 가르쳐서 왕세자(王世子)와 왕자(王子)와 공경(公卿)과 대부(大夫)와 원사(元士)의 적자(適子)로부터 서인(庶人)들의 아들에 이르기까지 그들로 하여금 모두 팔 세에 소학(小學)에 들어가게 하고 십 오 세가 되면 대학(大學)에 들어가게 하여 반드시 모두 기질(氣質)의 치우침과 물욕(物欲)의 엄폐(掩蔽)를 버리게 하고 그 본성(本性)을 회복하고 그 윤리를 다하게 한 뒤에 그만두게 하니 이것은 선왕(先王)의 세상에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사람도 배우지 않는 사람이 없고 천하국가(天下國家)가 다스려진 날은 항상 많고 어지러운 날은 항상 적은 까닭이다. 주(周)나라가 쇠퇴함에 미쳐서 성현(聖賢)이 나타나지 아니하여 이에 소학(小學)의 가르침이 폐지되어 사람의 행실과 재주가 수양(修養)되지 못하고 대학(大學)의 가르침이 폐지되어 세상의 도덕이 밝지 아니하니 그 책이 비록 존재하고 있으나 모두 세상 선비들이 입으로 외우고 귀로 듣기만 하는 자료가 됨에 불과할 뿐이어서 능히 그 글을 인용하여 그 실질(實質)을 연구하고 반드시 그 이치(理致)를 궁구(窮究)하여 이것을 자기 몸에 꾸짖는 사람이 있지 아니했다. 이럼으로써 풍속(風俗)이 무너지고 인재(人才)가 상실되어 임금 된 사람이 임금의 도리를 알지 못하고 신하된 자가 신하의 도리를 알지 못하며 아버지 된 사람이 아버지의 도리를 알지 못하고 자식이 된 자가 자식의 도리를 알지 못하니 천하의 정치가 다스려진 날은 항상 적고 어지러운 날은 항상 많은 까닭인데 이것은 학문을 강의하지 않은 이유이다. 우리 송(宋)나라 조정에 이르러서는 천운(天運)이 태평스럽게 열려서 이에 하남(河南)의 정호(程顥)46)와 그 동생인 정이(程頤)가 비로소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이래에 전해지지 아니한 실마리를 얻어서 학자들에게 열어서 보여준 까닭은 곧 이 책의 취지(趣旨)에 있어서 깊이 뜻을 이룬 것이다. 뒷날의 군자(君子)가 자기를 수양(修養)하여 다른 사람을 다스리고 천하국가(天下國家)에까지 미치고자 한다면 어찌 가히 이것을 버리고 다른 것에서 구하겠는가?


 


1) 주일무적(主一無適): 마음이 한 곳에 머물러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2) 사씨(謝氏): 송나라의 학자로서 정이천(程伊川)의 제자 가운데 정문 사선생(程門四先生)의 한 사람. 이름은 양좌(良佐), 자는 현도(顯道). 상채인(上蔡人)이었으므로 후인들이 상채선생(上蔡先生)이라고 불렀다.


3) 윤씨(尹氏): 송나라 때의 학자 윤돈(尹焞)을 말함. 자는 언명(彦明). 정이천(程伊川)의 문인으로 화정처사(和靖處士)라고 불렸다.


4)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7장의 말.


5) 《맹자》 〈고자장 상(告子章上)〉의 말.


6) 《논어》 〈헌문(憲問)〉의 말.


7) 《중용장구》 제33장의 말.


8) 권근(權近): 1352~1409. 조선전기의 문신 학자. 자는 가원(可遠), 호는 양촌(陽村), 본관은 안동. 저서로는 《양촌집(陽村集)》 《입학도설(入學圖說)》 등이 있다.


9) 《입학도설(入學圖說)》 가운데의 그림을 말한다.


10) 《대학장구(大學章句)》 전(傳) 제2장의 말.


11) 신안 오씨(新安吳氏): 미상.


12) 朱子는 朱熹의 尊稱으로 朱熹(1130~1200)는 宋나라 徽州 婺源 사람으로 紹興 18년에 進士가 되었고 부친은 朱松이다. 字는 元晦 또는 仲晦, 號는 晦菴 또는 遯翁이다. 晩年에 建陽의 考亭으로 옮겨 살았으며 紫陽書院에서 주로 강의하였기 때문에 別稱으로 考亭, 紫陽이라고도 한다. 넷 조정에 歷仕하였으나 조정에 머문 것은 40일이 채 되지 않는다. 그는 伊川 程頤의 三傳 제자로 延平 李侗의 문인으로 유가사상 중에서도 ‘仁’과 中庸과 大學의 철학 사상을 闡發하였고 특히 明道 程顥와 伊川 程頤 등 二程의 理氣關係의 학설을 계승, 발전시키고 理學을 집대성하였기 때문에 후세에는 程朱라고 竝稱되기도 한다.


13) 五臟은 肺臟(魄을 藏함), 心臟(精神을 藏함), 脾臟(意를 藏함), 肝臟(魂을 藏함), 腎臟(志를 藏함)을 말하는데 五內, 五中, 五倉이라고도 함.


14) 百骸는 우리 몸에 있는 모든 뼈를 말함.


15) 周子는 周敦頤의 尊稱으로 周敦頤(1017~1073)는 宋나라 道州 사람으로 字는 茂叔으로 廬山에 살면서 濂溪書堂이란 집을 지었는데 濂溪는 자기가 태어난 곳의 지명이다. 일찍이 太極圖說과 通書 40篇을 지었는데 주로 道家의 학설을 채용하여 太極으로 理를 삼고 陰陽五行으로 氣를 삼았으며 宋明 理學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明道 程顥와 伊川 程頤가 모두 그의 제자로 諡號는 元公이며 세상에서는 濂溪先生이라고 부른다.


16) 二五는 陰陽과 五行을 말함.


17) 堯舜은 唐堯 와 虞舜으로 上古時代 대표적인 聖君으로 알려져 있음.


18) 介然은 暫時 또는 잠깐 동안을 말함.


19) 洞然은 환한 모양 또는 명확한 모양을 말함.


20) 측연(惻然): 가엾게 여겨 속을 태우는 모양 또는 측은(惻隱)하게 생각하는 모양을 말함.


21) 孟子는 孟軻(B․C 372~289)의 尊稱으로 字는 子輿로 戰國時代 鄒人이다. 春秋時代 魯나라 公族 孟氏의 후예로 子思의 門徒에게 수업하였으며 齊와 梁나라에 遊說를 하였으나 임용되지 못하고 제자인 公孫丑과 萬章 등으로 더불어 著書를 하며 學說을 세웠다. 그는 孔子의 학설을 계승하여 ‘仁義’를 특히 강조하였고 井田制의 시행과 性善說을 주장하였다. 元나라 至順 元年에는 그를 높여 ‘鄒國亞聖公’이라 하였고 明나라 嘉靖 9년에는 ‘亞聖孟子’라고 높여 불렀다.


22) 이 구절은 書經 第 六卷 洪範篇 第 六章에 나오는데 ‘二五事 一曰貌 二曰言 三曰視 四曰聽 五曰思 貌曰恭 言曰從 視曰明 聽曰聰 思曰睿 恭 作肅 從 作乂 明 作哲 聰 作謀 睿 作聖’(두 번째 五事는 첫 번째는 모습이고 두 번째는 말이고 세 번째는 봄이고 네번째는 들음이고 다섯 번째는 생각함이다. 모습은 공손하고 말은 순종하고 봄은 밝고 들음은 귀밝고 생각함은 지혜롭다. 공손함은 엄숙함을 만들고 순종함은 다스림을 만들고 밝음은 지혜를 만들고 귀밝음은 헤아림을 만들고 지혜로움은 성스러움을 만든다.)로 되어 있다.


23) 董子는 董仲舒(B․C179~104)로 그는 漢나라 廣川 사람이다. 젊어서 春秋公羊傳을 공부하였고 景帝 때에는 博士가 되었다. 특히 그는 공부를 할 때에 장막을 드리우고 독서를 하였는데 삼 년 동안이나 정원을 엿보지 않았다. 武帝 때에 賢良對策으로 황제의 신임을 얻어 江都相에 拜命되었다. 그는 儒術을 推尊하고 百家를 억압하여 封建社會에서 儒學을 正統으로 確立하는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24) 顔子는 顔回(B․C521~490) 의 존칭으로 春秋時代 魯나라 사람으로 字는 子淵이며 孔子의 제자이다. 배우기를 좋아하고 安貧樂道를 즐겼으며 한 도시락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도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아니하였고 분노를 옮기지 아니하고 허물을 거듭하지 아니하여 孔子의 門下에서 德行으로 일컬어졌다. 31세로 夭折하여 孔子가 몹시 슬퍼하였으며 후세에 儒家들이 ‘復聖公’이라 尊稱하였다.


25) 脫然(탈연)으로 읽으면 병이 바로 깨끗이 낫는 모양을 말하고 脫然(태연)으로 읽으면 천천히 가는 모양 또는 기뻐하는 모양을 말함.


26) 豁然은 시원하게 트인 모양 또는 환히 깨달은 모양을 말함.


27) 汎然은 세밀하지 못하고 물에 뜨듯이 대체적으로 넓게 살펴보는 모양을 말함.


28) 渾然은 둥글어 모가 없는 모양 또는 구별이나 차별이 없는 모양을 말함.


29) 夫子는 孔子에 대한 尊稱으로 ‘道德貫天曰夫 百世師表曰子’에서 유래함.


30) 子思(B․C483?~402)는 孔子의 孫子로 이름은 伋이다. 그는 일찍이 魯나라 繆公의 스승이 되어 子思 23篇을 지었다고 함.


31) 張子는 張載(1020~1077)의 尊稱으로 宋나라 鳳翔 郿縣 橫渠鎭 사람으로 字는 子厚이다. 嘉祐 2년에 進士가 되었고 熙寧 初年에 崇文院校書가 되었다가 오래지않아 南山 아래에 물러나 살면서 여러 생도들을 가르쳤다. 이로 인해 배우는 사람들이 ‘橫渠先生’이라고 불렀다.


32) 邵子는 邵雍(1011~1077)의 尊稱으로 그는 宋나라 共城 사람으로 字는 堯夫이다. 易理를 좋아하여 그 학문을 李之才에게서 배웠고 李之才는 穆修에게서 배웠다. 太極으로써 宇宙의 本體를 삼아 象數의 학문을 정립하였다. 洛陽에서 30여 년을 거주하며 자신의 거처를 ‘安樂窩’라고 이름짓고 自號를 安樂先生이라 하였다. 二程과 동시대를 살았으며 明道 程顥는 內聖外王의 학문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감탄하였으며 저서에 ‘皇極經世’와 ‘伊川擊壤集’이 있다.


33) 茫然은 넓고 멀어 아득한 모양을 말함.


34) 詖淫邪遁은 偏頗的이고 淫亂하며 邪惡하고 蹤迹을 감춤을 말함.


35) 陸象山은 陸九淵(1139~1193)으로서 그는 宋나라 撫州 金谿 사람으로 字는 子靜이다. 乾道 8년에 進士가 되었고 벼슬이 知荊門軍에 이르렀다. 뒤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貴溪의 象山에 거처하면서 講學하였는데 배우는 사람들이 ‘象山先生’이라 일컬었다. 일찍이 朱熹와 더불어 鵝湖에서 모여 講學하였는데 의논이 많이 합치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朱熹는 ‘道問學’을 중시하고 陸九淵은 ‘尊德性’을 중시하였으며 朱熹는 경전에 註解다는 것을 좋아하고 陸九淵은 학문은 겨우 도를 아는 정도이고 六經은 모두 나의 註解라고 하였다. 그리고 朱熹는 ‘理在氣先’을 주장하였고 陸九淵은 ‘心卽是理’를 인정하였다. 이로 인해 理學은 ‘朱陸’ 二家로 분리되었다.


36) 程伊川은 程頤(1033~1107)로 그는 宋나라 洛陽 사람으로 字는 正叔이요 世稱 ‘伊川先生’이다. 哲宗 초에 崇政殿說書로 拔擢되었고 뒤에 西京國子監管勾監事가 되었다. 紹聖 시대에 黨論으로 추방되었다가 돌아왔고 4년에는 涪州로 보내졌다가 峽州로 옮겼으며 곧이어 사면되었다. 젊어서 형인 明道 程顥와 더불어 周敦頤에게 수학하였고 함께 北宋 理學을 創立하였다. 30여 년을 講學하여 門徒가 매우 많았으며 학문하는 방법은 大學과 論語와 孟子와 中庸 등 四書로써 표준을 삼아 六經에 통달하여야 한다고 하며 窮理로써 根本을 삼았다.


37) 李子는 退溪 李滉을 높여서 부르는 稱號임.


38) 奇大升을 말함. 奇大升(1527~1572)은 조선 중기의 文臣이자 性理學者로 本貫은 幸州, 字는 明彦, 號는 高峯 또는 存齋로 退溪 李滉의 문인이다. 그는 1549년 司馬試에, 1558년 式年文科에 乙科로 급제한 뒤 承文院副正字를 시작으로 각종 벼슬을 역임하였는데, 특히 1572년에는 成均館 大司成, 宗系辨誣奏請使를 역임하였고 大司諫과 工曹叅議를 지내다가 병을 얻어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다가 全羅道 古阜에서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는 退溪와 1559년에서 1566년에 이르는 8년 간의 四七論辨을 주고  받았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유학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유명하다. 사후에 그는 光州의 月峯書院에 祭享되었고 諡號는 文憲이고 文集으로는 高峯集이 있다.


39) 而精은 潛齋 金就礪의 字로 그는 京畿道 安山出身으로 退溪가 준 詩와 편지가 있음.


40) 湛然은 물이 깊고 고요한 모양 또는 침착하고 黙重한 모양을 말함.


41) 管攝은 關與하여 支配하는 것을 뜻함.


42) 王肅(195~256)은 三國 시대 魏나라 東海의 郯 사람으로 王朗의 아들이며 字는 子雍이다. 벼슬이 中領軍에 이르렀고 散騎常侍에 더해졌다. 특히 賈逵와 馬融의 학문을 잘 했다. 자기의 딸이 司馬昭의 부인이 되어 晉 武帝인 司馬炎을 낳았기 때문에 帝王의 힘으로 그의 註解가 學官에 사용되었다.


43) 桀紂는 夏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桀王과 商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紂王으로 모두 暴惡한 짓을 많이 하여 나라를 망하게 하였으므로 後代에는 暴君과 亡國의 임금이란 뜻으로 사용함.


44) 盜跖은 春秋時代 末期의 柳下屯 사람으로 유명한 盜賊이다.


45) 參商은 두 개의 별 이름으로 參星은 서쪽에 있고 商星은 동쪽에 있어서 이것이 뜨면 저것이 지고 저것이 뜨면 이것이 져서 영원히 서로 볼 수가 없어서 參商은 영원히 서로 만날 수 없는 사이를 말함.


46) 程顥(1032~1085)는 宋나라 洛陽 사람으로 字는 伯淳이며 世稱 ‘明道先生’이다. 嘉祐 2년에 進士가 되었고 鄠와 上元의 主簿가 되었다. 神宗과 熙寧 초에 太子中允과 監察御史가 되었다. 王安石과 새로운 정치를 논의했으나 합치되지가 않아 外任으로 나갔다. 哲宗이 즉위함에 宗正丞이 되었으나 취임하지 못하고 卒하였다. 그는 동생 伊川 程頤와 더불어 함께 周敦頤에게 수학하여 ‘二程’으로 竝稱되었다. 그의 학문은 諸家를 섭렵하면서 老釋을 출입하여 六經에 되돌아와서 진리를 추구하였다. 洛陽에서 십여 년을 講學하였는데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는 것을 ‘如坐春風’이라고 稱道하였다.


 

 

第四大學圖

大學經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 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欲治其國者, 先齊其家, 欲齊其家者, 先修其身, 欲修其身者, 先正其心, 欲正其心者, 先誠其意, 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 在格物. 物格而后知至, 知至而后意誠, 意誠而后心正, 心正而后身修, 身修而后家齊, 家齊而后國治, 國治而后天下平. 自天子, 以至於庶人, 壹是皆以修身爲本. 其本亂而末治者, 否矣, 其所厚者薄, 而其所薄者厚, 未之有也.


或曰, 敬, 若何以用力耶. 朱子曰, 程子, 嘗以主一無適, 言之, 嘗以整齊嚴肅, 言之, 門人謝氏之說, 則有所謂常惺惺法者焉, 尹氏之說, 則有其心收斂不容一物者焉, 云云, 敬者, 一心之主宰而萬事之本根也. 知其所以用力之方, 則知小學之不能無賴於此以爲始, 知小學之賴此以始, 則夫大學之不能無賴於此以爲終者, 可以一以貫之而無疑矣. 蓋此心旣立, 由是, 格物致知, 以盡事物之理, 則所謂尊德性而道問學, 由是, 誠意正心, 以修其身, 則所謂先立其大者而小者不能奪, 由是, 齊家治國, 以及乎天下, 則所謂修己以安百姓篤恭而天下平, 是皆未始一日而離乎敬也. 然則敬之一字, 豈非聖學始終之要也哉.

○ 右, 孔氏遺書之首章. 國初, 臣權近, 作此圖, 章下所引或問通論大小學之義, 說見小學圖下. 然非但二說當通看, 並與上下八圖, 皆當通此二圖而看. 蓋上二圖, 是求端擴充體天盡道極致之處, 爲小學大學之標準本原, 下六圖, 是明善誠身崇德廣業用力之處, 爲小學大學之田地事功, 而敬者, 又徹上徹下, 著工收效, 皆當從事而勿失者也. 故朱子之說如彼, 而今玆十圖, 皆以敬爲主焉. 太極圖說, 言靜不言敬, 朱子註中, 言敬以補之.


附錄


(朱子章句)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 大學者, 大人之學也. 明, 明之也. 明德者, 人之所得乎天而虛靈不昧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 但爲氣禀所拘, 人欲所蔽, 則有時而昏. 然其本體之明, 則有未嘗息者. 故學者, 當因其所發而遂明之, 以復其初也. 新者, 革其舊之謂也. 言旣自明其明德, 又當推以及人, 使之亦有以去其舊染之汚也. 止者, 必至於是而不遷之意. 至善, 則事理當然之極也. 言明明德, 新民, 皆當止於至善之地而不遷, 蓋必其有以盡夫天理之極而無一毫人欲之私也. 此三者, 大學之綱領也.

朱子曰, 天之賦於人物者, 謂之命, 人與物, 受之者, 謂之性, 主於一身者, 謂之心, 有得於天而光明正大者, 謂之明德. ○ 問, 明德, 是心是性. 曰心與性, 自有分別. 靈底是心, 實底是性. 性便是那理, 心便是盛貯該載敷施發用底. 心屬火, 緣他是箇光明發動底物, 所以具得許多道理. 如向父母則有那孝出來, 向君則有那忠出來, 這便是性. 如知道事親要孝, 事君要忠, 這便是心. 張子曰, 心統性情. 此說最精密. ○ 虛靈不昧, 便是心, 此理具足於中, 無少欠闕, 便是性, 隨感而動, 便是情. ○ 只虛靈不昧四字, 說明德, 意已足矣, 更說具衆理應萬事, 包體用在其中, 又却實而不爲虛, 其言的確渾圓, 無可破綻處. ○ 明德, 未嘗息時, 時發見於日用之間. 如見孺子入井而怵愓, 見非義而羞惡, 見賢人而恭敬, 見善事而歎慕, 皆明德之發見也. 雖至惡之人, 亦時有善念之發, 但當因其所發之端, 接續光明之. ○ 明德, 是一箇光明底物事. 如一把火將去照物, 則無不燭, 便是明德. 若漸隱微, 便暗了, 吹得這火著, 便是明其明德. ○ 又曰, 此理, 人所均有, 非我所得私. 旣自明其德, 須當推以及人, 見人爲氣與欲所昏, 豈不惻然欲有以新之. ○ 又曰, 說一箇止, 又說一箇至字, 直是要到那極至處而後止, 故曰, 君子無所不用其極也. ○ 至善, 如言極好道理十分盡頭. 善在那裡, 自家須去止, 他止, 則善與我, 一未能止, 善自善, 我自我. ○ 明德新民, 非人力私意所爲, 本有一箇當然之則, 過之不可, 不及亦不可. 如孝是明德, 然自有當然之則, 不及固不是, 若過其則, 必有刲股之事. 須是到當然之則, 處而不遷, 方是止於至善. 止至善, 包明德新民, 己也要止於至善, 民也要止於至善. 在他雖未能, 在我所以望他, 則不可不如是也. ○ 新安吳氏曰, 止至善, 爲明明德新民之標的, 極盡天理, 絶無人欲, 爲止至善之律令. 然旣言事理當然之極, 又言天理之極者, 蓋自散在事物者而言, 則曰事理, 是理之萬殊處, 一物各具一太極也, 自人之得於天者而言, 則曰天理, 是理之一本處, 萬物統體一太極也. 然一實萬分, 故曰事理衆理, 會萬爲一, 則曰天理一理而已.


知止而后能得 止者, 所當止之地, 卽至善之所在也. 知之則志有定向. 靜謂心不妄動. 安謂所處而安. 慮謂處事精詳. 得謂得其所止.

朱子曰, 知止, 是識得去處, 旣識得, 心中便定, 更不他求. 如行路, 知得從這一路去, 心中自是定. 如求之此, 又求之彼, 卽是未定. 定靜安慮得五字, 是功效次第, 不是工夫節目, 纔知止, 自然相因而見.


物有本末近道矣. 明德爲本, 新民爲末, 知止爲始, 能得爲終. 本始所先, 末終所後. 此結上文兩節之意.

問, 事物何分別. 朱子曰, 對言則事是事物是物, 獨言物則兼事在其中. 知止能得, 如耕而種而耘而斂, 是事有箇首尾如此. 明德是理會己之一物, 新民是理會天下之萬物, 以己之一物, 對天下之萬物, 便有箇內外本末. 知所先後, 自然近道, 不知先後, 便倒了, 如何能近道.


古之欲明明德在格物 明明德於天下者, 使天下之人, 皆有以明其明德也. 心者, 身之所主也. 誠, 實也, 意者, 心之所發也, 實其心之所發, 欲其必自慊而無自欺也. 致, 推極也, 知, 猶識也, 推極吾之知識, 欲其所知, 無不盡也. 格, 至也, 物, 猶事也, 窮至事物之理, 欲其極處, 無不到也. 此八者, 大學之條目也.

朱子曰, 六箇欲與先字, 謂欲如此, 必先如此, 是言工夫節次. 若致知, 則便在格物上, 欲與先字, 差慢, 在字, 又緊得些子. ○ 致知誠意, 是學者兩箇關, 致知乃夢與覺之關, 誠意乃善與惡之關. 透得致知之關則覺, 不然則夢, 透得誠意之關則善, 不然則惡. ○ 格物是夢覺關, 誠意是人鬼關. 過得此二關, 上面工夫, 一節易如一節了, 至治國平天下, 地步愈濶, 但須照顧得到.


物格而后天下平. 物格者, 物理之極處, 無不到也, 知至者, 吾心之所知, 無不盡也. 知旣盡, 則意可得而實矣. 意旣實, 則心可得而正矣. 修身以上, 明明德之事也, 齊家以下, 新民之事也. 物格知至, 則知所止矣. 意誠以下, 則皆得所止之序也.

朱子曰, 致知者, 理在物而推吾之知以知之也, 知至者, 理雖在物而吾心之知已得其極也.


自天子以下修身爲本 壹是, 一切也. 正心以上, 皆所以修身也, 齊家以下, 則擧此而措之耳.


其本亂未之有也. 本, 謂身也. 所厚, 謂家也. 此兩節, 結上文兩節之意. ○ 右經一章, 蓋孔子之言而曾子述之, 其傳十章, 則曾子之意而門人記之也.


(朱子或問)曰, 此篇所謂在明明德在新民在止於至善者, 亦可得而聞其說之詳乎. 曰天道流行, 發育萬物, 其所以爲造化者, 陰陽五行而已而, 所謂陰陽五行者, 又必有是理而後, 有是氣. 及其生物則又必因是氣之聚而後, 有是形故, 人物之生, 必得是理然後, 有以爲健順仁義禮智之性, 必得是氣然後, 有以爲魂魄五臟百骸之身, 周子所謂無極之眞, 二五之精, 妙合而凝者, 正謂是也. 然, 以其理而言之則萬物一原, 固無人物貴賤之殊, 以其氣而言之則得其正且通者, 爲人, 得其偏且塞者, 爲物, 是以, 或貴或賤而不能齊也. 彼賤而爲物者, 旣梏於形氣之偏塞而無以充其本體之全矣, 惟人之生, 乃得其氣之正且通者而其性, 爲最貴故, 其方寸之間, 虛靈洞徹, 萬理咸備, 盖其所以異於禽獸者, 正在於此而其所以可爲堯舜而參天地, 以贊化育者, 亦不外焉. 是則所謂明德者也. 然, 其通也, 或不能無淸濁之異, 其正也, 或不能無美惡之殊故, 其所賦之質, 淸者智而濁者愚, 美者賢而惡者不肖, 又有不能同者, 必其上智大賢之資, 乃能全其本體而無少不明, 其有不及乎此則其所謂明德者, 己不能無蔽而失其全矣, 况乎又以氣質有蔽之心, 接乎事物無窮之變則其目之欲色, 耳之欲聲, 口之欲味, 鼻之欲臭, 四肢之欲安佚, 所以害乎其德者, 又豈可勝言也哉. 二者, 相因反覆深固, 是以, 此德之明, 日益昏昧而此心之靈, 其所知者, 不過情欲利害之私而已, 是則雖曰有人之形而實何以遠於禽獸, 雖曰可以爲堯舜而參天地而亦不能有以自充矣, 然而本明之體, 得之於天, 終有不可得而昧者, 是以, 雖其昏蔽之極而介然之頃, 一有覺焉則卽此空隙之中而其本體, 已洞然矣, 是以, 聖人施敎, 旣已養之於小學之中而復開之以大學之道, 其必先之以格物致知之說者, 所以使之, 卽其所養之中而因其所發, 以啓其明之之端也, 繼之以誠意正心修身之目者則又所以使之, 因其已明之端而反之於身, 以致其明之之實也. 夫旣有以啓其明之之端而又有以致其明之之實則吾之所得於天而未嘗不明者, 豈不超然無有氣質物欲之累而復得其本體之全哉. 是則所謂明明德者而非有所作爲於性分之外也, 然, 其所謂明德者, 又人人之所同得而非有我之得私也, 向也, 俱爲物欲之所蔽則其賢愚之分, 固無以大相遠者, 今吾旣幸有以自明矣則視彼衆人之同得乎此而不能自明者, 方且甘心迷惑, 沒溺於卑汚苟賤之中而不自知也, 豈不爲之惻然而思有以救之哉. 故, 必推吾之所自明者, 以及之始於齊家, 中於治國而終及於平天下, 使彼有是明德而不能自明者, 亦皆有以自明而去其舊染之汚焉, 是則所謂新民者而亦非有所付畀增益之也, 然, 德之在己而當明, 與其在民而當新者則又皆非人力之所爲而吾之所以明而新之者, 又非可以私意苟且而爲也, 是其所以得之於天而見於日用之間者, 固已莫不各有本然一定之則, 程子所謂以其義理精微之極, 有不可得而名者故, 姑以至善目之而傳所謂君之仁臣之敬, 子之孝父之慈, 與人交之, 信乃其目之大者也, 衆人之心, 固莫不有是而或不能知, 學者, 雖或知之而亦鮮能必至於是而不去, 此爲大學之敎者, 所以慮其理雖粗復而有不純, 已雖粗克而有不盡, 且將無以盡夫修己治人之道故, 必指是而言以爲明德新民之標的也, 欲明德而新民者, 誠能求必至是而不容其少有過不及之差焉則其所以去人欲而復天理者, 無毫髮之遺恨矣, 大抵大學一篇之指, 總而言之, 不出乎八事而八事之要, 總而言之, 又不出乎此三者, 此愚所以斷然以爲大學之綱領而無疑也, 然, 自孟子沒而道學, 不得其傳, 世之君子, 各以其意之所便者爲學, 於是, 乃有不務明其明德而徒以政敎法度, 爲足以新民者, 又有愛身獨善, 自謂足以明其明德而不屑乎新民者, 又有略知二者之當務, 顧乃安於小成, 狃於近利而不求止於至善之所在者, 是皆不考乎此篇之過, 其能成己成物而不謬者, 鮮矣.

曰此經之序, 自誠意以下, 其義明而傳悉矣, 獨其所謂格物致知者, 字義不明而傳復闕焉, 且爲最初用力之地而無復上文語緖之可尋也, 子乃自謂取程子之意, 以補之則程子之言, 何以見其必合於經意而子之言, 又似不盡出於程子, 何耶, 曰或, 問於程子曰學, 何爲而可以有覺也, 程子曰學, 莫先於致知, 能致其知則思, 日益明, 至於久而後, 有覺, 爾書所謂思曰睿, 睿作聖, 董子所謂勉强學問則聞見, 博而智益明, 正謂此也, 學而無覺則亦何以學爲也哉, 或問忠信則可勉矣而致知爲難, 奈何, 程子曰誠敬, 固不可以不勉, 然, 天下之理, 不先知之, 亦未有能勉以行之者也, 故, 大學之序, 先致知而後誠意, 其等, 有不可躐者, 苟無聖人之聰明睿知而徒欲勉焉, 以踐其行事之迹則亦安能如彼之動容周旋, 無不中禮也哉, 惟其燭理之明, 乃能不待勉强而自樂循理爾. 夫人之性, 本無不善, 循理而行, 宜無難者, 惟其知之不至而但欲以力爲之, 是以, 苦其難而不知其樂耳, 知之而至則循理爲樂, 不循理爲不樂, 何苦而不循理, 以害吾樂耶. 昔嘗見有談虎傷人者, 衆莫不聞而其間一人, 神色獨變, 問其所以, 乃嘗傷於虎者也. 夫虎能傷人, 人孰不知, 然, 聞之, 有懼有不懼者,知之, 有眞有不眞也, 學者之知道, 必如此人之知虎然後, 爲至耳. 若曰知不善之不可爲而猶或爲之則亦未嘗眞知而已矣. 此兩條者, 皆言格物致知所以當先而不可後之意也. 又有問進修之術, 何先者, 程子曰莫先於正心誠意, 然, 欲誠意, 必先致知而欲致知, 又在格物, 致, 盡也, 格, 至也. 凡有一物, 必有理, 窮而至之, 所謂格物者也, 然而, 格物, 亦非一端, 如或讀書, 講明道義, 或論古今人物而別其是非, 或應接事物而處其當否, 皆窮理也. 曰格物者, 必物物而格之耶, 將止格一物而萬理皆通耶. 曰一物格而萬理通, 雖顔子, 亦未至此, 惟今日而格一物焉, 明日, 又格一物焉, 積習旣多然後, 脫然有貫通處耳. 又曰自一身之中, 以至萬物之理, 理會得多, 豁然有箇覺處. 又曰窮理者, 非謂必盡窮天下之理, 又非謂止窮得一理便到, 但積累多後, 自當脫然有悟處. 又曰格物, 非欲盡窮天下之物, 但於一事上窮盡, 其他, 可以類推, 至於言孝則當求其所以爲孝者, 如何, 若一事上窮不得, 且別窮一事, 或先其易者, 或先其難者, 各隨人淺深, 譬如千蹊萬逕, 皆可以適國, 但得一道而入則可以推類而通其餘矣, 蓋萬物, 各具一理而萬理, 同出一原, 此所以可推而無不通也. 又曰物必有理, 皆所當窮, 若天地之所以高深, 鬼神之所以幽顯, 是也. 若曰天, 吾知其高而已矣, 地, 吾知其深而已矣, 鬼神, 吾知其幽且顯而已矣則是, 已然之詞, 又何理之可窮哉. 又曰如欲爲孝則當知所以爲孝之道如何而爲奉養之宜如何而爲溫凊之節, 莫不窮究然後, 能之, 非獨守夫孝之一字而可得也. 或問觀物察己者, 豈因見物而反求諸己乎. 曰不必然也, 物我一理, 纔明彼, 卽曉此, 此合內外之道也, 語其大, 天地之所以高厚, 語其小, 至一物之所以然, 皆學者所宜致思也, 曰然則先求之四端, 可乎, 曰求之情性, 固切於身, 然, 一草一木, 亦皆有理, 不可不察, 又曰致知之要, 當知至善之所在, 如父止於慈, 子止於孝之類, 若不務此而徒欲汎然以觀萬物之理則吾恐其如大軍之游騎, 出太遠而無所歸也, 又曰格物, 莫若察之於身, 其得之尤切, 此九條者, 皆言格物致知所當用力之地, 與其次第工程也, 又曰格物窮理, 但立誠意以格之, 其遲速則在乎人之明暗耳, 又曰入道, 莫如敬, 未有能致知而不在敬者, 又曰涵養, 須用敬進學則在致知, 又曰致知, 在乎所養, 養知, 莫過於寡欲, 又曰格物者, 適道之始思, 欲格物則固已近道矣, 是, 何也, 以收其心而不放也, 此五條者, 又言涵養本原之功, 所以爲格物致知之本者也. 凡程子之爲說者, 不過如此, 其於格物致知之傳, 詳矣. 今也, 尋其義理, 旣無可疑, 考其字義, 亦皆有据, 至以他書論之則文言, 所謂學聚問辨, 中庸所謂明善擇善, 孟子所謂知性知天, 又皆在乎固守力行之先而可以驗, 夫大學始敎之功, 爲有在乎此也. 愚嘗反復考之而有以信其必然, 是以, 竊取其意, 以補傳文之缺, 不然則又安敢犯不韙之罪, 爲無證之言, 以自託於聖經賢傳之間乎. 曰然則吾子之意, 亦可得而悉聞之乎. 曰吾聞之也, 天道流行, 造化發育, 凡有聲色貌象, 盈於天地之間者, 皆物也, 旣有是物則其所以爲是物者, 莫不各有當然之則而自不容已, 是皆得於天之所賦而非人之所能爲也, 今且以其至切以近者, 言之則心之爲物, 實主於身, 其體則有仁義禮智之性, 其用則有惻隱羞惡恭敬是非之情, 渾然在中, 隨感而應, 各有攸主而不可亂也, 次而及於身之所具則有口鼻耳目四肢之用, 又次而及於身之所接則有君臣父子夫婦長幼朋友之常, 是皆必有當然之則而自不容已, 所謂理也, 外而至於人則人之理, 不異於己也, 遠而至於物則物之理, 不異於人也, 極其大則天地之運, 古今之變, 不能外也, 盡於小則一塵之微, 一息之頃, 不能遺也, 是乃上帝所降之衷, 烝民所秉之彛, 劉子所謂天地之中, 夫子所謂性與天道, 子思所謂天命之性, 孟子所謂仁義之心, 程子所謂天然自有之中, 張子所謂萬物之一原, 邵子所謂道之形體者, 但其氣質, 有淸濁偏正之殊, 物欲有淺深厚薄之異, 是以, 人之與物, 賢之與愚, 相與懸絶而不能同耳. 以其理之同故, 以一人之心而於天下萬物之理, 無不能知, 以其禀之異故, 於其理, 或有所不能窮也, 理有未窮故, 其知, 有不盡知, 有不盡則其心之所發, 必不能純於義理而無雜乎物欲之私, 此其所以意有不誠, 心有不正, 身有不修而天下國家, 不可得而治也. 昔者聖人, 蓋有憂之, 是以, 於其始敎, 爲之小學而使之習於誠敬則所以收其放心, 養其德性者, 已無所不用其至矣, 及其進乎大學則又使之卽夫事物之中, 因其所知之理, 推而究之, 以各到乎其極則吾之知識, 亦得以周遍精切而無不盡也, 若其用力之方則或考之事爲之著, 或察之念慮之微, 或求之文字之中, 或索之講論之際, 使於身心性情之德, 人倫日用之常, 以至天地鬼神之變, 鳥獸草木之宜, 自其一物之中, 莫不有以見其所當然而不容已, 與其所以然而不可易者, 必其表裏精粗, 無所不盡而又益推其類以通之, 至於一日脫然而貫通焉則於天下之物, 皆有其以究其義理精微之所極而吾之聰明睿知, 亦皆有以極其心之本體而無不盡矣. 此愚之所以補乎本傳闕文之意, 雖不能盡用程子之言, 然, 其指趣要歸則不合者鮮矣, 讀者, 其亦深考而實識之哉. 曰然則子之爲學, 不求諸心而求諸迹, 不求之內而求之外, 吾恐聖賢之學, 不如是之淺近而支離也. 曰人之所以爲學, 心與理而已矣, 心雖主乎一身而其體之虛靈, 足以管乎天下之理, 理雖散在萬物而其用之微妙, 實不外乎一人之心, 初不可以內外精粗而論也, 然, 或不知此心之靈而無以存之則昏昧雜擾而無以窮衆理之妙, 不知衆理之妙而無以窮之則偏狹固滯而無以盡此心之全, 此其理勢之相須, 蓋亦有必然者, 是以, 聖人設敎, 使人黙識此心之靈而存之於端莊靜一之中, 以爲窮理之本, 使人知有衆理之妙而窮之於學問思辨之際, 以致盡心之功, 巨細相涵, 動靜交養, 初未嘗有內外精粗之擇, 及其眞積力久而豁然貫通焉則亦有以知其渾然一致而果無內外精粗之可言矣. 今必以是爲淺近支離而欲藏形匿影, 別爲一種幽深恍惚, 艱難阻絶之論, 務使學者, 莽然措其心於文字言語之外而曰道必如此然後, 可以得之則是近世佛學詖淫邪遁之尤者而欲移之以亂, 古人明德新民之實學, 其亦誤矣.

問用之微妙, 是心之用否, 朱子曰理必有用, 何必又說是心之用乎, 心之體, 具乎是理, 理則無所不該而無一物之不在, 然, 其用, 實不外乎人心, 皆理雖在物而用實在心也.○問陸象山, 不取伊川格物說, 以爲隨事討論則精神易弊, 不若求之心, 心明則無不照, 其說似省力曰不去隨事討論, 便聽他胡做, 話便信口說, 脚便信步行, 冥冥地去, 都不管他.○李子答奇明彦書曰物格與物理之極虛無不到之說, 前此某, 只知守朱子理無情意, 無計度, 無造作之說, 以爲我可以窮到物理之極處, 理豈能自至於極處, 故, 硬把物格之格, 無不到之到, 皆作已格已到看, 往在都中, 雖蒙提諭理到之說, 亦嘗反復細思, 猶未解惑, 近金而精傳示左右所考出朱先生語及理到處三四條然後, 乃始恐怕己見之差誤, 於是, 盡底裏濯去舊見, 虛心細意, 先尋箇理所以能自到者如何, 蓋先生說見於補亡章或問中者, 闡發此義, 如日星之明, 顧某, 雖常有味其言而不能會通於此耳. 其說曰人之所以爲學, 心與理而已, 心雖主乎一身而其體之虛靈, 足以管乎天下之理, 理雖散在萬物而其用之微妙, 實不外乎一人之心, 初不可以內外精粗而論也, 其小註, 或問用之微妙, 是心之用否, 朱子曰理必有用, 何必又說是心之用乎, 心之體, 具乎是理, 理則無所不該而無一物之不在, 然, 其用, 實不外乎人心, 蓋理雖在物而用, 實在心也, 其曰理在萬物而其用, 實不外一人之心則疑若理不能自用, 必有待於人心, 似不可以自到爲言, 然而又曰理必有用, 何必又說是心之用乎則其用, 雖不外乎人心而其所以爲用之妙, 實是理之發見者, 隨人心所至而無所不到, 無所不盡, 但恐吾之格物有未至, 不患理不能自到也, 然則, 方其言格物也則固是言我窮至物理之極處, 至其言物格也則豈不可謂物理之極處, 隨吾所窮而無不到乎, 是知無情意造作者, 此理本然之體也, 其隨寓發見而無不到者, 此理至神之用也, 向也, 但有見於本體之無爲而不知妙用之能顯行, 殆若認理爲死物, 其去道, 不亦遠甚矣乎, 今賴高明提諭之勤, 得去妄見而得新意長新格, 深以爲幸.

或問六章之旨,誠意 其詳, 猶有可得而言者耶, 曰天下之道二, 善與惡而已矣, 然, 揆厥所元而循其次第則善者, 天命所賦之本然, 惡者, 物欲所生之邪穢也, 是以, 人之常性, 莫不有善而無惡, 其本心, 莫不好善而惡惡, 然, 旣有是形體之累而又爲氣禀之拘, 是以, 物欲之私, 得以蔽之而天命之本然者, 不得而著其於事物之理, 固有瞢然不知其善惡之所在者, 亦有僅識其粗而不能眞知, 其可好可惡之極者, 夫不知善之眞可好則其好善也, 雖曰好之而未能無不好者, 以拒之於內, 不知惡之眞可惡則其惡惡也, 雖曰惡之而未能無不惡者, 以挽之於中, 是以, 不免於苟焉, 以自欺而意之所發, 有不誠者, 夫好善而不誠則非惟不足以爲善而反有以賊乎其善, 惡惡而不誠則非惟不足以去惡而適所以長乎其善惡, 是則其爲害也, 徒有甚焉而何益之有哉. 聖人, 於此, 蓋有憂之故, 爲大學之敎而必首之以格物致知之目, 以開明其心術, 使旣有以識夫善惡之所在, 與其可好可惡之必然矣, 至此而復進之以必誠其意之說焉則又欲其謹之於幽獨隱微之奧, 以禁止其苟且自欺之萌而凡其心之所發, 如曰好善則必由中及外, 無一毫之不好也, 如曰惡惡則必由中及外, 無一毫之不惡也, 夫好善而中無不好則是其好之也, 如好好色之眞, 欲以快乎己之目, 初非爲人而好之也, 惡惡而中無不惡則是其惡之也, 如惡惡臭之眞, 欲以足乎己之鼻, 初非爲人而惡之也, 所發之實, 旣如此矣而須臾之頃, 纖芥之微, 念念相承, 又無敢有少間斷焉則庶乎內外昭融, 表裏澄澈而心無不正, 身無不修矣, 若彼小人, 幽隱之間, 實爲不善而猶欲外託於善, 以自蓋則亦不可謂其全然不知善惡之所在, 但以不知其眞可好惡而又不能謹之於獨, 以禁止其苟且自欺之萌, 是以, 淪陷, 至於如此而不自知耳, 此章之說, 其詳如此, 是固宜爲自修之先務矣, 然, 非有其開其知識之眞則不能有以致其好惡之實, 故, 必曰欲誠其意者, 先致其知, 又曰知至而后, 意誠, 然, 猶不敢恃其知之已至而聽其所自爲也, 故, 又曰必誠其意, 必謹其獨而毋自欺焉則大學工夫次第, 相承首尾, 爲一而不假他術, 以雜乎其間者, 亦可見矣.

或問人之有心, 本以應物而此章之傳,七章 以爲有所喜怒憂懼, 便爲不得其正, 然則其爲心也, 必如槁木之不復生, 死灰之不府然, 乃爲得其正耶. 曰人之一心, 湛然虛明, 如鑑之空, 如衡之平, 以爲一身之主者, 固其眞體之本然而喜怒憂懼, 隨感而應姸媸俯仰, 因物賦形者, 亦其用之所不能無者也, 故, 其未感之時, 至虛至靜, 所謂鑑空衡平之體, 雖鬼神, 有不得窺其際者, 固無得失之可議, 及其感物之際而所應者, 又皆中節則其鑑空衡平之用, 流行不滯, 正大光明, 是乃所以爲天下之達道, 亦何不得其正之有哉. 惟其事物之來, 有所不察, 應之旣或不能無失, 且又不能不與俱往則其喜怒憂懼, 必有動乎中者而此心之用, 始有不得其正者, 傳者之意, 固非以心之應物, 便爲不得其正而必如槁木死灰然後, 乃爲得其正也. 惟是此心之靈, 旣曰一身之主, 苟得其正而無不在是則耳目鼻口, 四肢百骸, 莫不有所聽命, 以供其事而其動靜語黙, 出入起居, 惟吾所使而無不合於理, 如其不然則身在於此而心馳於彼, 血肉之軀, 無所管攝, 其不爲仰面貪看鳥, 回頭錯應人者, 幾希矣, 孔子所謂操則存, 舍則亡, 孟子所謂求其放心, 從其大體者, 蓋皆謂此學者, 可不深念而屢省之哉.

或問上章九章論齊家治國之道, 旣以孝弟慈, 爲言矣, 此論治國平天下之道而復以是爲言, 何也, 十章曰三者, 人道之大端, 衆心之所同得者也, 自家以及國, 自國以及天下, 雖有大小之殊, 然, 其道, 不過如此而已, 但前章, 專以己推而人化爲言, 此章, 又申言之, 以見人心之所同而不能已者如此, 是以, 君子, 不惟有以化之而又有以處之也, 蓋人之所以爲心者, 雖曰未嘗不同, 然, 貴賤殊勢, 賢愚異禀, 苟非在上之君子, 眞知實蹈, 有以倡之則下之有是心者, 亦無所感而興起矣, 幸其有以倡焉而興起矣, 然, 上之人, 乃或不能察彼之心而失其所以處之之道則彼其所興起者, 或不得遂而反有不均之歎, 是以, 君子, 察其心之所同而得夫絜矩之道然後, 有以處此而遂其興起之善端也, 蓋絜, 度也, 矩, 所以爲方也, 以己之心, 度人之心, 知人之所惡者, 不異乎己則不敢以己之所惡, 施之於人, 使吾之身, 一處乎此則上下四方, 我物之際, 各得其分, 不相侵越而各就其中, 校其所占之地則其廣狹長短, 又皆平均如一, 截然方正, 無有餘不足之處, 是則所謂絜矩者也, 夫爲天下國家而所以處心制事者, 一出於此則天地之間, 將無一物不得其所而凡天下之欲爲孝弟不倍者, 皆得以自盡其心而無不均之歎矣, 天下其有不平者乎. 然, 君子之所以有此, 亦豈自外至而强爲之哉, 亦曰物格知至, 故, 有以通天下之志而知千萬人之心, 卽一人之心, 意誠心正, 故, 有以勝一己之私而能以一人之心, 爲千萬人之心, 其如此而已矣, 一有私意, 存乎其間則一膜之外, 便爲胡越, 雖欲絜矩, 亦將有所隔礙而不能通矣, 若趙由之爲守則易尉而爲尉則陵守王肅之方於事上而好人侫己, 推其所由, 蓋出於此而充其類則雖桀紂盜蹠之所爲, 亦將何所不至哉. 曰然則絜矩之云是則所謂恕者已乎, 曰此固前章所謂如愛己之心, 以愛人者也, 夫子所謂終身可行, 程子所謂充拓得去則天地變化而草木蕃, 充拓不去則天地閉而賢人隱, 皆以其可以推之而無不通耳, 然, 必自其窮理正心者而推之則吾之愛惡取舍, 皆得其正而其所推以及人者, 亦無不得其正, 是以, 上下四方, 以此度之而莫不截然各得其分, 若於理有未明而心有未正則吾之所欲者, 未必其所當欲, 吾之所惡者, 未必其所當惡, 乃不察此而遽欲以是爲施於人之準則則其意, 雖公而事則私, 是將見其物我相侵, 彼此交病而雖庭除之內, 跬步之間, 亦且參商矛盾而不可行矣, 尙何終身之望哉. 是以, 聖賢凡言恕者, 又必以忠爲本而程子亦言忠恕, 兩言, 如形如影, 欲去其一而不可得, 蓋惟忠而後, 所如之心, 始得其正, 是亦此篇先後本末之意也, 然則君子之學, 可不謹其序哉.

朱子經筵講義曰臣竊謂自天之生此民而莫不賦之以仁義禮智之性, 敍之以君臣父子兄弟夫婦朋友之倫則天下之理, 固已無不具於一人之身矣, 但以人自有生而有血氣之身則不能無氣質之偏, 以拘之於前而又有物欲之私, 以蔽之於後, 所以不能皆知其性, 以至於亂其倫理而陷於邪僻也, 是以, 古之聖王, 設爲學校, 以敎天下之人, 使自王世子王子公卿大夫元士之適子, 以至庶人之子, 皆以八歲而入小學, 十有五歲而入大學, 必皆有以去其氣質之偏, 物欲之蔽, 以復其性, 以盡其倫而後, 已焉, 此先王之世, 所以自天子, 至於庶人, 無一人之不學而天下國家, 所以治日常多而亂日常少也. 及周之衰, 聖賢不作, 於是, 小學之敎, 廢而人之行藝不修, 大學之敎, 廢而世之道德不明, 其書雖有存者, 皆不過爲世儒誦說口耳之資而已, 未有能因其文以究其實, 必求其理而責之於身者也, 是以, 風俗敗壞, 人才斲喪, 爲君者, 不知君之道, 爲臣者, 不知臣之道, 爲父者, 不知父之道, 爲子者, 不知子之道, 所以天下之治日常少而亂日常多, 皆由此學不講之故也, 至于我朝, 天運開泰, 於是, 河南程顥, 及其弟頤, 始得孔孟以來不傳之緖而其所以開示學者則於此篇之旨, 深致意焉, 後之君子, 欲修己以治人, 以及於天下國家者, 豈可以舍是而他求哉.

다음▶   

Copyright ⓒ 2004 국제퇴계학회 대구경북지부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