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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인설도(第七仁說圖)

인설(仁說)


  주자가 말하였습니다.

  인(仁)이란 것은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이요, 사람이 그것을 얻어서 마음으로 삼은 것이다. 아직 발하기도 전에 사덕(四德)이 갖추어져 있는데, 오직 인만은 네 가지를 포괄한다. 그런 까닭으로 함양하여 기름이 혼연하여 통섭(通攝)을 하지 않음이 없다. 이른바 생(生)의 성(性)이니, 애(愛)의 리(理), 인(仁)의 체(體)라는 것이다. 이미 발하였음에 사단이 드러나는데, 오직 측은(惻隱)만이 사단을 관통하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두루 흘러 관철하여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이른바 성(性)의 정(情)이니, 애(愛)의 발(發), 인의 용(用)이라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말을 한다면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은 체(體)이고, 이미 발한 것은 용(用)이다. 부분적으로 말한다면 인은 체(體)이고, 측은은 용(用)이다. 공(公)이라는 것은 인을 체득하는 방법이니 ‘자기 자신을 극복하여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라는 말과 같다. 대개 공적이면 인이 되고, 인이면 사랑하게 된다. 효제(孝悌)는 그 용이고, 서(恕)는 (仁을) 베푸는 것이며, 지각은 곧 지(知)의 일이다.

  또 말하였습니다.

  천지의 마음에는 그 덕이 네 가지가 있는데, 원(元)․형(亨)․이(利)․정(貞)이라 하며, 원(元)은 통섭하지 않음이 없다. 그것이 운행을 하게 되면 봄․여름․가을․겨울의 차서가 되는데, 봄의 생동하는 기운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이 되는데도 그 덕이 또한 네 가지가 있으니 인․의․예․지로 인은 포괄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것이 발하여져 쓰이게 되면 애(愛)․공(恭)․의(宜)․별(別)의 정이 되는데,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관통되지 않는 곳이 없다. 대체로 인이 도가 되는 것은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이 만물에 갖추어져 있어 정이 아직 발하기 전에 이 체가 이미 갖추어져 있고, 정이 이미 발하였다하면 그 용(用)은 다함이 없다. 실로 체득하여 보존할 수만 있다면 뭇 선의 근원과 온갖 행위의 근본이 여기에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이것이 공문(孔門)의 가르침이 반드시 학자들로 하여금 인을 구하는데 급급하게 하는 까닭이다. 그 말 가운데 “자기를 극복하여 예로 돌아가면 인이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자기의 사욕을 극복하여 천리(天理)로 돌아가면 이 마음의 체가 있지 않음이 없고, 이 마음의 용이 행하여지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또 “가만히 있을 때는 공손하고, 일을 할 때는 공경스런 마음을 가져야 하여, 남과 교유를 맺을 때는 충심으로 하여야 한다.”는 말 또한 이 마음을 보존하는 것이다. 또 말하기를 “어버이를 섬길 때는 효성스러워야 하며, 형을 섬길 때는 공손하게 한다.”는 것과 “남과 관계를 맺을 때는 서(恕)로써 한다.”라 한 것 역시 이 마음을 행하는 것이다. 이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천지에 있으면 한없이 넓은 만물을 낳는 마음이요, 사람에 있어서는 따뜻하게 남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마음이다. 이는 모두 사덕(四德)을 포괄하고 사단(四端)을 관통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대의 말과 같다면 정자가 이른바 ‘사랑[愛]은 정(情)이고 인(仁)은 성(性)이어서 사랑은 인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라는 것은 틀린 것인가요?”라 하니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정자께서 이르신 것은 ‘사랑이 발현한 것을 인이라고 한다.’는 것이고, 내가 논한 것은 ‘사랑의 이치를 인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대체로 이른바 성과 정이라는 것이 그 나누어진 영역은 같지 않으나 그 맥락은 통하여 각각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니, 어찌 따로 떨어져 서로 상관이 없겠는가? 나는 바야흐로 학자들이 정자의 말을 외기는 하면서도 뜻을 추구하지 않아 마침내 사랑을 완전히 떠나서 인을 말하는 것을 걱정한다. 그러므로 특히 이를 논하여 그 남긴 뜻을 밝힌다. 그대가 정자의 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또한 잘못이 아니겠는가?”

  말하기를, “정씨의 무리에는 만물이 나와 하나 되는 것을 인의 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또한 마음에 지각이 있는 것을 가지고 인의 명칭을 풀이하는 사람도 있는데 모두 틀린 것입니까?”라 하니 말하였다.

  “만물과 내가 하나라는 것에서는 인이 사랑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인이 체의 참모습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마음에 지각이 있다고 이르는 것에서는 인이 지를 포괄하는 것을 볼 수는 있지만 인이라고 불리게 된 참된 이유는 아닌 것이다. 공자가 자공의 ‘널리 베풀고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것을 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라 물은 것에 대한 대답과 정자가 ‘각(覺)은 인이라 할 수 없다.’라고 한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대는 어찌 이것을 가지고 인을 논할 수 있는가!”1)


    위의 〈인설(仁說)〉은 주자가 짓고 아울러 스스로 그림을 그린 것인데, 인의 도리를 밝게 밝혀 더 이상 남겨놓은 것이 없습니다. 《대학》의 주석[傳]에서 이르기를, “임금이 되어서는 인에 머무른다.”라 하였으니, 이제 옛 제왕들의 마음을 전하고 인을 체득한 묘법을 구하고자 한다면 어찌 이에 뜻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부록(附錄)


    정백자(程伯子)2)가 말했다.

    의서(醫書)에서 말하기를, 수족이 오그라들고 마비된 것은 인(仁)하지 못한 것이라 하였는데, 이 말은 가장 훌륭하다. 이름과 형상이 어진 사람은 천지만물을 일체로 생각하여 자기 것이 아님이 없다. 자기가 됨을 알게 된다면 어느 곳이든 이르지 못하겠는가? 만약에 자기에게서 가지고 있지 않다면 저절로 자기와 더불어 상관하지 않는다. 이는 수족이 인하지 못하여 기(氣)가 자기를 관통하지 못함과 같아 모두 자기에게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널리 베풀고 뭇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은 성인의 공용이다. 인은 지극히 말하기가 어려우므로 자기가 서고자 한다면 남을 세워주고, 자기가 현달하고자 하면 남을 현달하게 하라고 말한 것이다. 가까이서 비유를 얻을 수 있으면 이를 인의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이와 같이 하고자 한다면 인을 살피면 인의 체(體)를 얻을 수 있다.

    주자가 말했다.

    널리 베풀어 많은 사람을 구제한다는 것은 사물을 가지고 말한 것이지 마음을 가지고 말한 것이 아니다. 부자께서 제기한 것은 바로 마음에서 인의 본체를 가리켜 말하기를 널리 베풀고 여러 사람을 구하라 한 것인데, 실로 인의 지극한 공효이다. 다만 언뜻 어린애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이 보일 때 두려워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있게 되는 것이 또한 바로 인인데, 이곳이 가장 좋다.

    평암(平巖) 섭씨3)가 말했다.

    천지만물은 나와 하나의 몸을 이루며 마음에 사적으로 덮인 것이 없으면, 자연스럽게 사랑하고 공평하게 된다. 이른바 인은 실로 이치가 밝지 못하고 사사로운 뜻이 되어 멀어지고 끊기게 되면 너의 형체를 이루고 있는 분수가 교섭이 없게되는데, 이를테면 수족이 저리고 마비되어 기가 서로 관통하지 못하고 질병을 앓아도 모두 상관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이는 사체(四體)가 인(仁)하지 못함이다.

    정숙자4)가 말했다.

    인(仁)의 도는 요컨대 다만 하나의 공(公)자를 말한 것이다. 공(公)은 다만 인의 이치이므로 공을 가지고 인이라 부를 수는 없다. 공평하면서 사람이 그것을 체득하므로 인이 되며, 다만 공평하게만 된다면 사물과 나를 겸하여 비추게 된다. 그러므로 인은 용서[恕]하고 사랑할 수 있는 까닭이며, 용서는 인을 베풂이고 사랑은 인의 쓰임이다.

    주자가 말했다.

    공평[公]하면 정이 없고 인(仁)하면 사랑이 있다. 공(公)자는 이(理)에 속하고, 애(愛)자는 인(人)에 속한다. 자기를 극복하고 예를 회복하는 것은 터럭 하나만큼의 사적인 것을 용납치 않으니 어찌 공평하지 않겠는가! 어버이를 친하게 여기고 백성들을 인으로 대하며 사랑하지 않는 사물이 하나도 없으면 어찌 인이 아니겠는가?

  섭씨가 말했다.

    서(恕)라는 것은 여기에서 미루는 것이고, 애(愛)라는 것은 저기에 미치는 것이다. 인(仁)은 비유컨대 샘의 근원이다. 서(恕)는 샘이 흘러나오는 것이고, 애(愛)는 샘이 윤택하게 하는 것이며, 공(公)은 소통시켜 막힘이 없게함을 이른다. 그 소통하여 막힘이 없게 하므로 흘러서 사물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인(仁)에 대하여 물으니 맹자가 말하기를 “측은지심이 인이다.”라 하였다. 후인들이 마침내 애(愛)를 인으로 생각하였는데, 애는 곧 정이고, 인은 곧 성이니 어찌 오로지 애를 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맹자가 말하기를 “측은지심은 인의 단서이다.”라 하였는데, 이미 인의 단서이니 곧 인이라고 이르면 안된다. 한퇴지가 말하기를, 널리 사랑하는 것을 인이라 하였는데5) 이는 옳지 않다. 인이라는 것은 실로 널리 사랑하는 것이나 곧 널리 사랑하는 것을 인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주자가 장남헌의 〈인설(仁說)〉에 답하여 말했다.

    정자가 말하는 인(仁)은 본말이 매우 잘 갖추어져 있는데, 이제 그 대요를 잡아보면 몇 마디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체로 인이라고 하는 것은 생(生)의 성(性)이며, 애(愛)는 그 정(情)이고, 효제(孝悌)는 그 용(用)입니다. 공(公)이란 것은 인을 체득하는 것으로 “자기를 이기고 예를 회복하는 것이 인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배우는 사람들은 앞의 세 마디 말에서 인의 명의(名義)를 알 수 있고, 뒤에서 한 마디 말한 것에서는 힘을 쓰는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그 본말과 뜻을 가리키는 소재는 깊이 고찰하지 않았지만 그 성정을 분별하는 다름을 보고서 곧 그것을 사랑함과 인은 아무것도 간섭하지 않음을 말하였으며, 공(公)을 인에 가까운 것으로 보고는 곧 바로 인의 체를 가리킴이 가장 심절함을 가리켰는데, 특히 인이 곧 성의 덕이자 애의 근본임을 모르고서 그 성(性)에 인이 있음을 따른 것이며, 이 때문에 그 정은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의(義)․예(禮)․지(智) 또한 성(性)의 덕입니다. 의는 미워함의 근본이며, 예는 겸손의 근본이고, 지는 앎의 근본인데, 성에 의가 있기 때문에 정이 미워할 수 있으며, 성에 예가 있기 때문에 정이 겸손할 수 있고, 성에 지가 있기 때문에 알 수가 있는 것인데 또한 이와 같을 따름입니다. 다만  어쩌다 나에게 있는 사적인 것에 가리움이 있어서 그 체용의 묘를 다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자신을 극복하고 예를 회복하여 크게 공평해진 연후라야 이 체가 온전하게 되고 이 용이 밝게 드러나 동정(動靜)과 본말(本末)의 혈맥이 관통될 따름입니다. 정자의 말뜻은 대체로 이와 같은 것이지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 인과는 아무런 간섭이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고, “공(公)” 한 자가 바로 직접 인의 체를 가리킴을 이른 것이 아닙니다. 자세하게 보내주신 편지에서 이른바 “천하에 공평하게 하여 물아의 사적인 것이 없게 하면 그 사랑이 두루 미치지 않음이 없다.”라 한 곳을 세밀히 살폈으나 이 두 구절의 심한 곳이 인의 체가 되는 곳을 가리킨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만약에 사랑이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을 인의 체로 보았다면 정을 성으로 생각하는 실수에 빠진 것으로 고명한 견해가 반드시 이곳에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천하에 공평하고 사물과 나 사이의 사적인 것이 없는 것을 곧 인(仁)의 체(體)라고 생각한다면, 아마 이른바 공이라는 것은 막연하게 정이 없어 다만 허공이나 목석과 같아 비록 동체(同體)의 사물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서로 사랑함이 있을 수 없게 되거늘 하물며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수 있음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두 구 가운데 애초에 일찍이 인의 체를 말한 것이 한 자도 없고 모름지기 인은 본래부터 있는 성(性)이며, 생물의 마음임을 알아 오로지 공만이 그것을 체득할 수 있으며, 공을 따른 후에 있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공평하면서 인체(人體)인 까닭에 인(仁)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자세히 보면 오히려 “인(人)”자의 안에 “인(仁)”자를 띠고 있는 것입니다. 한나라 이래로 애(愛)를 가지고 인(仁)을 말하는 폐단이 바로 성정을 살피지 않는 변별이 되어 마침내 정을 성으로 생각하게 되었을 따름입니다. 지금 그 폐단을 바로잡고자 하여 오히려 “인(仁)”를 귀숙하는 곳이 없게 하였으며, 성정은 마침내 서로 상관하지 않게끔 하기에 이르렀으니 굽은 것을 바로잡다가 지나치게 곧게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 또한 구부러지게 된 것일 따름입니다. 그 폐단은 장차 학자들로 하여금 종일토록 인을 말하자 기실 일찍이 그 명의를 알지 못하게 할 것이며 아울러 또한 천지의 마음과 성정의 덕과 더불어 어둑해지게 될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정자의 뜻이 반드시 이렇지는 않을 것이므로 감히 상세하게 늘어놓습니다.6)

    또 말했다. 그것을 사랑하는 이치가 바로 인(仁)입니다. 만약 천지만물이 없다면 이 이치 또한 이지러지게 됩니다. 이에 ‘인의 체를 알아서 터득한 연후에 천지만물의 혈맥이 관통되어 용(用)이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이 이치는 본래 매우 집약된 것입니다. 이제 곧 천지만물을 섞어서 말하게 되면 도리어 불분명해지게 됩니다. 공자가 자공의 ‘널리 베풀어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면 이를 어질다 할 수 있습니까?’7)라 한 물음에 대답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더욱이 “복(復)에서 천지의 마음을 본다.”8)라는 설을 가지고 살펴보면 또한 알 수 있습니다. 대개 하나의 양(陽)이 되돌아오는 곳은 천지의 마음이 온전히 자족되어 있어서 바깥에서 기다릴 것이 없습니다. 또한 주렴계가 이른 “(창밖의 풀들도) 자기의 마음과 일반이다.”9)라 한 것 같은 것도 지금과 같이 말한다면 다만 “일반(一般)”이라는 두 글자만 설명할 뿐 이른바 “자기의 마음” 같은 것은 도리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10)

    또 말하기를, 상채(上蔡)가 이른바 지각은 바로 춥고 따뜻함, 배부르고 주림 따위를 아는 것일 따름입니다. 미루어 신(神)을 돕는다는 수작에까지 이르렀는데 이 또한 다만 이 지각을 말할 뿐 별다른 것이 없고 다만 쓰임에 작고 큰 것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다만 지(智)가 발용(發用)하는 것일 뿐 인자(仁者)만이 그것을 겸할 수 있기 때문에 인자(仁者)의 마음에 지각이 있다고 이르는 것은 괜찮으나 마음에 지각이 있는 것을 인이라고 이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대체로 인자의 마음에 지각이 있다는 것은 곧 인이 네 가지 쓰임을 포괄한다는 것을 가지고 한 말로 인자는 수오(羞惡)와 사양(辭讓)이 되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과 같을 따름입니다. 마음에 지각이 있는 것을 인이라고 한다면 인이 그 이름을 얻은 까닭은 처음부터 이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그 이름을 얻게 된 까닭을 궁구하지 않고 곧 그 겸한 것을 바로 인(仁)의 체(體)라고 가리켰는데, 마치 인을 말하는 사람은 반드시 용기가 있으며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말을 하게된다는 것과 같으니 어찌 마침내 용기를 인이라 하고 말[言]을 덕(德)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11)


 


1) 《주문공집》 권67 〈잡저․인설(雜著․仁說)〉


2) 정백자(程伯子) : 이정자 가운데 형인 정호(程顥)를 말함.


3) 평암섭씨(平巖葉氏) : 송나라 소무(邵武) 사람인 섭채(葉采)를 말함.


4) 정숙자(程叔子) : 이정자 가운데 아우인 정이(程頤)를 말함.


5)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 권11 〈원도(原道)〉에 나오는 말.


6) 《주문공집》 권32.


7) 《논어․옹야(雍也)》편에 나오는 말.


8) 《주역․복괘(復卦)》의 단전(彖傳).


9) 《이정전서》 〈유서(遺書) 3〉.


10) 《주문공집》 권32 〈장흠부의 인설에 답함(答欽夫仁說)〉.


11) 《주문공집》 권32 〈또 인설을 논함(又論仁說)〉.


 

仁 說


朱子曰, 仁者, 天地生物之心, 而人之所得以爲心, 未發之前, 四德具焉. 而惟仁則包乎四者. 是以, 涵育渾全, 無所不統, 所謂生之性, 愛之理, 仁之體也. 已發之際, 四端著焉. 而惟惻隱則貫乎四端, 是以, 周流貫徹, 無所不通, 所謂性之情愛之發, 仁之用也. 專言則未發是體, 已發是用, 偏言則仁是體, 惻隱是用, 公者, 所以體仁, 猶言克己復禮爲仁也. 蓋公則仁, 仁則愛, 孝悌其用也. 而恕, 其施也. 知覺, 乃知之事.

又曰, 天地之心, 其德有四, 曰元亨利貞. 而元無不統, 其運行焉. 則爲春夏秋冬之序, 而春生之氣, 無所不通. 故人之爲心, 其德亦有四, 曰仁義禮智, 而仁無不包, 其發用焉. 則爲愛恭宜別之情, 而惻隱之心, 無所不貫. 蓋仁之爲道, 乃天地生物之心. 卽物而在情之未發, 而此體已具, 情之旣發, 而其用不窮, 誠能體而存之. 則衆善之源, 百行之本, 莫不在是. 此孔門之敎, 所以必使學者汲汲於求仁也. 其言有曰, 克己復禮爲仁, 言能克去己私, 復乎天理, 則此心之體無不在, 而此心之用, 無不行也. 又曰, 居處恭, 執事敬, 與人忠, 則亦所以存此心也. 又曰, 事親孝, 事兄悌, 及物恕, 則亦所以行此心也. 此心, 何心也. 在天地則坱然生物之心. 在人則溫然愛人利物之心. 包四德而貫四端者也. 或曰, 若子之言, 程子所謂愛情仁性, 不可以愛名仁者非歟? 曰, 不然, 程子之所謂, 以愛之發而名仁者也. 吾之所論, 以愛之理而名仁者也. 蓋所謂情性者, 雖其分域之不同, 然其脈絡之通, 各有攸屬者, 則曷嘗離絶而不相管哉. 吾方病夫學者誦程子之言, 而不求其意, 遂至於判然離愛而言仁, 故特論此, 以發明其遺意, 子以爲異乎程子之說, 不亦誤哉? 曰, 程氏之徒, 有以萬物與我爲一爲仁之體者, 亦有以心有知覺釋仁之名者, 皆非歟? 曰, 謂物我爲一者, 可以見仁之無不愛, 而非仁之所以爲體之眞也. 謂心有知覺者, 可以見仁之包乎智矣. 而非仁之所以得名之實也. 觀孔子答子貢博施濟衆之問, 與程子所謂覺不可以訓仁, 則可見矣. 子安得以此而論仁哉!

○ 右仁說, 朱子所述. 幷自作圖, 發明仁道, 無復餘蘊. 大學傳曰, 爲人君, 止於仁. 今欲求古昔帝王傳心體仁之妙, 盍於此盡意焉.


附 錄


程伯子曰, 醫書言手足痿痺爲不仁, 此言最善. 名狀仁者以天地萬物爲一體莫非己也. 認得爲己何所不至若不有諸己自不與己相干如手足不仁氣己不貫, 皆不屬己故博施濟衆, 乃聖人之功用. 仁至難言, 故止曰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可謂仁之方也. 己欲令如是, 觀仁可以得仁之體.

朱子曰, 博施濟衆, 是就事上說, 却不就心上說. 夫子所以提起正是就心上指仁之本體, 而告之曰博施濟衆, 固仁之極功, 但只乍見孺子將入井時, 有怵惕惻隱之心, 亦便是仁, 此處最好看. ○ 平巖葉氏曰, 天地萬物, 與我同體心無私蔽, 則自然愛而公矣. 所謂仁也, 苟是理不明而爲私意所隔截, 則形骸爾汝之分了無交涉, 譬如手足痿痺氣不相貫, 疾痛疴痒皆不相干, 此四體之不仁也.

程叔子曰, 仁之道, 要之, 只消道一公字公只是仁之理, 不可將公便喚做仁公而以人體之, 故爲仁只爲公, 則物我兼照, 故仁所以能恕, 所以能愛. 恕則仁之施, 愛則仁之用也.

朱子曰公則無情, 仁則有愛. 公字屬理, 愛字屬人, 克己復禮, 不容一毫之私, 豈非公乎! 親親仁民而無一物之不愛, 豈非仁乎! ○ 葉氏曰, 恕者推於此, 愛者及於彼, 仁譬泉之源也. 恕則泉之流出, 愛則泉之潤澤, 公則䟽通而無壅塞之謂也. 惟其䟽通而無壅塞, 故能流而澤物.

問仁曰, 孟子曰惻隱之心仁也. 後人遂以愛爲仁. 愛自是情, 仁自是性, 豈可專以愛爲仁. 孟子言惻隱之心仁之端也. 旣曰仁之端, 則不可便謂之仁. 退之言, 博愛之謂仁非也, 仁者固博愛, 然便以博愛爲仁則不可.

朱子答張南軒仁說曰, 程子言仁, 本末甚備, 今撮其大要, 不過數言. 蓋曰仁者, 生之性也, 而愛其情也, 孝悌其用也. 公者所以體仁, 猶言 “克己復禮爲仁”也. 學者於前三言者可以識仁之名義, 於後一言者可以知其用力之方矣. 今不深考其本末指意之所在, 但見其分別性情之異, 便謂愛之與仁了無干涉; 見其以公爲近仁, 便謂直指仁體最爲深切, 殊不知仁乃性之德而愛之本, 因其性之有仁, 是以其情能愛.義禮智亦性之德也. 義惡之本, 禮遜之本, 智知之本, 因性有義故情能惡, 因性有禮故情能遜, 因性有智故情能知, 亦若此爾 但或蔽於有我之私, 則不能盡其體用之妙. 惟克己復禮, 廓然大公, 然後此體渾全, 此用昭著, 動靜本末血脈貫通爾. 程子之言意蓋如此, 非謂愛之與仁了無干涉也, 非謂“公”之一字便是直指仁體也.細觀來喩所謂“公天下而無物我之私, 則其愛無不漙矣.” 不知此兩句甚處是直指仁體處? 若以愛無不漙爲仁之體, 則陷於以情爲性之失, 高明之見必不至此. 若以公天下而無物我之私便爲仁體, 則恐所謂公者漠然無情, 但如虛空木石, 雖其同體之物尙未能有以相愛, 況能無所不溥乎? 然則此兩句中初未嘗有一字說著仁體, 須知仁是本有之性, 生物之心, 惟公爲能體之, 非因公而後有也. 故曰公而以人體之故爲仁. 細看此語, 却是“人”字裡面帶得“仁”字過來 由漢以來, 以愛言仁之弊, 正爲不察性情之辨, 而遂以情爲性爾. 今欲矯其弊, 反使“仁”字汎然無所歸宿, 而性情遂至於不相管, 可謂矯枉過直, 是亦枉而己矣. 其弊將使學者終日言仁而實未嘗識其名義, 且又幷與天地之心性情之德而昧焉. 竊謂程子之意必不如此, 是以敢詳陳之. ○ 又曰, 愛之之理便是仁, 若無天地萬物, 此理亦有虧欠. 於此識得仁體, 然後天地萬物血脈貫通而用無不周者, 可得而言矣. 蓋此理本甚約, 今便將天地萬物夾雜說, 却鶻突耳. 夫子答子貢博施濟衆之問, 正如此也. 更以“復見天地之心”之說觀之亦可見. 蓋一陽復處, 便是天地之心完全自足, 非有待於外也. 又如濂溪所云“與自家意思一般”者, 若如今說, 便只說得“一般”兩字, 而所謂“自家意思”者, 却如何見得耶? ○ 上蔡所謂知覺, 正謂知寒暖飢飽之類爾. 推而至於酬酢佑神, 亦只是此知覺, 無別物也, 但所用有小大爾. 然此亦只是智之發用處, 但惟仁者爲能兼之, 故謂仁者心有知覺則可, 謂心有知覺謂之仁則不可. 蓋仁者心有知覺, 乃以仁包四者之用而言, 猶云仁者知所羞惡辭讓云爾. 若曰心有知覺謂之仁, 則仁之所以得名初不爲此也. 今不究其所以得名之故, 乃指其所兼者便爲仁體, 正如言仁者必有勇, 有德者必有言, 豈可遂以勇爲仁, 言爲德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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