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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심학도(第八心學圖)

심학도설(心學圖說)


    임은 정씨(林隱 程氏) 복심(復心)1)이 말하였다. “적자심(赤子心)은 아직 인욕에 빠지지 않은 착한 마음이고, 인심(人心)은 곧 욕망에 눈을 뜬 것이다. 대인심(大人心)은 의리가 갖추어진 본래의 마음이고, 도심(道心)은 곧 의리에 눈을 뜬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니, 실제로 형기(形氣)에서 생겨난 까닭에 누구나 인심(人心)이 없을 수 없고, 성명(性命)에 근원하니 그런 까닭에 도심(道心)이 된다. 유정(惟精)․유일(遺逸)과 택선(擇善)․고집(固執)으로부터 그 이하는 인욕(人欲)을 억제하고 천리(天理)을 보존하는 공부가 아닌 것이 없다.

  신독(愼獨) 이하는 인욕을 억제하는 바의 공부이니, 모름지기 부동심(不動心)에 이르게 되면, 부귀에 처해도 능히 음란하지 않고 빈천에 처해도 능히 변치 않으며 위무(威武)에 대해서도 능히 굴하지 않으니, 가히 그 사람의 도(道)가 밝고 덕(德)이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계구(戒懼) 이하는 천리(天理)를 보존하는 바의 공부이니, 모름지기 마음대로 해도 법도를 어기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야, 마음은 체(體)가 되고 욕망은 용(用)이 되고 체(體)는 곧 도(道)이고 용(用)은 곧 의(義)이며 목소리는 규율이 되고 몸은 법도가 되어, 가히 생각하지 않아도 깨닫고 힘쓰지 않아도 적중하게 될 것이다.

  요컨대 공부의 요점은 어느 경우나 하나의 경(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대개 심(心)이라는 것은 일신의 주재이고, 경(敬)은 또한 일심의 주재이다. 배우는 사람은 ‘한 가지에 집중하여 다른 데로 빠지지 않는다.[主一無適]’는 주장과 ‘몸가짐을 가지런히 하여 엄숙하게 한다.[整齊嚴肅]’는 주장 그리고 ‘마음을 거두어 들인다.[其心收斂]’는 주장과 ‘언제나 정신을 깨어 있게 한다.[常惺惺]’는 주장을 익숙하게 연구하면 그 공부는 완전하게 될 것이며 성인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도 또한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상은 임은(林隱) 정씨(程氏)가 심학에 관해 논한 성현의 명언들을 모으고 이 도(圖)를 만든 것입니다. 분류하고 대치시켜 놓은 것이 많지만 싫증나지 않으며, 이로써 성현의 심법을 보여주는 것이 또한 한 가지만이 아니니, 어느 것 하나 공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배열한 것은 단지 천박한 것과 심오한 것, 생소한 것과 익숙한 것의 대개를 말한 것일 뿐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그 공부의 절차, 예컨대 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에 선후가 있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대개를 서술하였다는 것을 의심하여, 구방심(求放心)은 공부에 있어서 초반의 일로서 심재(心在) 뒤에 있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신이 생각하기에, 구방심은 쉽게 말하면 참으로 처음 착수하는 바이지만 그 심오한 곳에서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일순간에 조금만 잘못 생각했다 해도 또한 방심하는 것입니다.

    안자(顔子)가 3개월이 지난 후에는 (仁을) 어김이 없도록 하지 못하였으니, 어김이 없도록 하지 못했다는 것은 바로 방심했다는 것입니다. 오직 안자만이 실수를 했다 하면 곧 그것을 알 수 있고, 알면 곧 다시 생겨나지 않으니, 또한 구방심의 류입니다.

    그러므로 정씨가 그린 그림의 순서가 이와 같습니다. 정씨의 자는 자현(子見)이며 신안(新安) 사람으로, 은거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행실과 의리가 심히 갖추어졌습니다. 늙도록 경전을 궁구하여 깊이 얻은 바가 있었으며, 저술로는 사서장도(四書章圖) 3권이 있습니다. 원(元)나라 인종(仁宗)조에 천거를 받아 불러서 등용하려고 하였으나 자현은 원하지 않았으니, 곧 향군박사(鄕郡博士)로 치사(致仕)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사람됨이 이와 같으니, 어찌 근거없이 함부로 지었겠습니까?


부록(附錄)


    맹자가 말하였다.

    우산의 나무가 본래 아름다웠는데 그것이 큰 나라의 교외에 있는 까닭으로 도끼로 찍어대니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이는 밤낮으로 자라고 비와 이슬을 받아 먹음에 싹이 돋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소와 양이 연이어 뜯어 먹으니 이런 까닭에 저같이 민둥산으로 된 것이다. 사람들이 거기에 나무가 없는 것을 보고 본래 재목이 없었다 하니, 이것이 어찌 그 산의 본래 성격이겠는가? 비록 사람에 있어서도 어찌 인(仁)․의(義)의 마음이 없겠는가마는 그 양심을 버리기를 또한 도끼로 나무를 날마다 찍어 넘기는 것처럼 하니 아름다울 수가 있겠는가? 그 밤낮으로 자라나는 것과 새벽의 기운에도 불구하고 좋아하고 싫어함이 남과 비슷한 점이 거의 없거늘, 그 아침부터 낮까지 하는 행동이 그것을 짓눌러서 없애 버리는 것이다. 짓누르는 것이 반복되면 그 밤 동안에 쌓인 기운이 남아 있을 수 없고 밤 기운이 남아 있지 않으면 금수와 다를 바가 거의 없게 된다. 사람들이 금수와 가까워진 모습을 보고 본래 재질이 없었다고 하지만, 이것이 어찌 사람의 본래 정이겠는가? 그러므로 진실로 기를 수 있으면 자라지 않는 것이 없고 기르지 않으면 없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2)

    《사서집주》양심이라는 것은 본연의 착한 마음이니 이른바 인의(仁義)의 마음이다. 평온한 아침의 기운이란 아직 외물과 접하지 않았을 때의 청명한 기운이다. 좋아하고 싫어함이 남과 비슷하다는 것은 사람 마음이 모두 그러함을 말한다. 거의 없다는 것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곡(梏)은 형구이다. 반복은 거듭함이다. 사람의 양심이 비록 이미 흩어져 없어졌으나 그 낮과 밤 동안에 반드시 생장하는 것이 있는 까닭에 새벽에 아직 외물과 접하지 않아서 그 기운이 청명한 때에는 이 마음이 반드시 발현함이 있음을 말한다. 다만 발현함이 지극히 미미하고 또 아침과 낮 동안에 행하는 선하지 못한 일들이 연이어서 짓눌러 없애버리니, 마치 산에 나무가 이미 베어지고 나서도 싹은 나지만 소와 양이 이를 뜯어먹어 버리는 것과 같다. 낮에 한 행동이 치열했다면 반드시 그날 밤에 자라나는 것을 해치게 되고 밤에 자란 것이 희박하다면 낮에 하는 행동을 이겨내지 못한다. 이렇게 점점 서로 해쳐서 결국 아침의 기운이 또한 청명하지 못하여 그 인의의 양심을 지켜내지 못하게 된다.

    맹자가 말하였다.

    생선도 내가 먹고 싶은 것이고 곰 발바닥도 내가 먹고 싶은 것이지만, 두 가지를 다 먹지 못할 바에는 생선을 버리고 곰 발바닥을 먹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이며 의(義) 또한 내가 원하는 바이다. 두 가지를 다 겸하지 못할 바에는 삶을 버리고 의를 택하겠다. 삶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삶보다 더 원하는 것이 있는 까닭에 구차하게 얻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죽음 또한 내가 싫어하는 것이지만 죽음보다 더 싫어하는 것이 있는 까닭에 환난에도 피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사람이 원하는 바가 삶보다 더한 것이 없다면 무릇 살 수 있는 방도를 어찌 쓰지 않겠는가? 사람이 싫어하는 바가 죽음보다 더한 것이 없다면 무릇 환난을 피할 수 있는 방도를 어찌 쓰지 않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삶의 방도가 있다 하더라도 쓰지 않는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환난을 피할 수 있는 방도가 있다 하더라도 쓰지 않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원하는 것이 삶보다 더한 경우가 있고 싫어하는 것이 죽음보다 더한 경우가 있으니, 비단 현자에게만 이러한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마음이 있지만 현자는 능히 이러한 마음을 상실하지 않을 뿐이다.

    한 그릇의 밥과 한 그릇의 국을 얻으면 살고 얻지 못하면 죽는다 해도, 욕하면서 주면 길가는 사람도 받지 않을 것이며 발로 차서 주면 걸인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높은 벼슬이라고 하면 예의를 갖추었는지를 따져 보지도 않고 받으니 높은 벼슬이 나에게 어떤 보탬이 되는가? 궁실의 아름다움과 처첩을 부양할 수 있다는 것과 내가 아는 가난한 사람들이 나에게 은택을 받기 때문인가? 전에 자신을 위해서는 죽어도 받지 않더니 지금은 궁실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받고, 전에 자신을 위해서는 죽어도 받지 않더니 지금은 처첩을 부양하기 위해서 받고, 전에 자신을 위해서는 죽어도 받지 않더니 지금은 내가 아는 가난한 사람들이 나로부터 은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받으니, 이를 또한 그만두지 못하는가? 이를 일러서 그 본심을 잃었다고 한다.3)

    《사서집주》본심은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세 가지는 몸 밖에 있는 것이어서 그것을 얻고 잃음이 삶과 죽음에 비하면 크게 중요치 않음을 말하였다. 전에 자신을 위해서는 죽어도 욕하거나 차서 주는 음식을 받으려 하지 않더니, 지금은 세 가지를 위해서라면 예의를 갖추지 않아도 높은 벼슬을 받으니 이를 어찌 그만두지 못하는가? 대개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나, 어떤 사람은 급박할 때는 능히 생사를 결단하지만 편안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풍족함과 빈궁함을 따지게 되니, 이런 까닭에 군자는 잠시라도 이에 대해 살피지 않을 수 없다.

    맹자가 말하였다.

  대인이란 그 어린아이 때의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4)

    《사서집주》대인은 지혜가 만물에 두루 미치고 어린아이는 전혀 아는 것이 없으니, 그 마음이 심히 다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사물에 의해 유혹되지 않고 순일하여 거짓이 없는 것은 동일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대인이 되는 소이가 다만 여기에 있음을 말하였다.

    주자가 말하였다.

    어린아이는 아는 것이 없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대인이란 바로 이 아는 것이 없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 만약 이러한 마음을 상실하면, 곧 하찮은 기관은 하찮은 이해관계를 따지고, 곧 소인이 되어 버린다. 대인의 마음에는 많은 일이 없다.5)

    우서(虞書)에서 말하였다.

    인심(人心)은 단지 위태롭기만 하고 도심(道心)은 그저 가려져 드러나지 않으니 오직 정밀하게 하고 오직 한결 같이 하여 진실로 그 중도(中道)를 잡아야 하느니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6)

    주자가 말하였다.

  마음의 허령지각(虛靈知覺)은 한 가지인데 인심과 도심의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서 생겨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성명의 올바름에서 근원하기도 하여 지각되는 것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어떤 것(인심)은 위태하여 불안하고 어떤 것(도심)은 은미하여 드러나기 어렵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이 형기가 없는 사람이 없으므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심이 없을 수 없고, 마찬가지로 성명이 없는 사람이 없으므로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도심이 없을 수가 없다. 두 가지는 사람의 마음 가운데 함께 있어서 그것을 다스릴 줄 모르면 위태한 것은 더욱 위태로와지고 은미한 것은 더욱 은미해져서 천리의 공정함이 마침내 인욕의 사사로움을 이겨내지 못한다. 정밀히 한다는 것은 두 가지의 서로 다름을 분명히 알아서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요 한결 같이 한다는 것은 본심의 올바름을 지켜서 거기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 일에 힘껏 노력하여 잠깐 동안이라도 단절되지 않도록 하여 반드시 도심으로 하여금 항상 일신의 주재가 되게 하고 인심은 도심의 명에 따르도록 하면, 위태함은 저절로 편안해지고 은미함은 저절로 드러나게 되어서 움직이거나 쉬거나 말하거나 행함에 있어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주자가 말하였다.

    요(堯)․순(舜)임금 이래로 아직 학문적인 논의가 없을 때 먼저 이 말이 있었으니 성인의 심법(心法)에 이와 바꿀 만한 것이 없다. 경전 가운데는 이러한 뜻이 지극히 많으니 소위 “선을 택해서 그것을 굳게 지켜라”는 구절에서 선을 택한다는 것은 곧 정밀히 함이고 굳게 지킨다는 것은 곧 한결 같이 함이다. 《대학》에서 “앎에 이르고 사물의 이치를 연구한다.” 함은 정밀하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요, 뜻을 성실하게 할 수 있으면 한결 같이 하는 것이다. 배우는 사람은 다만 이 이치를 배우는 것인데, 맹자 이후로 그 전통을 잃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공부 방법을 잃은 것이다.

    선사(先師)께서 말씀하셨다.

  오래 전부터 마음에 관한 논의가 여기서 시작하였는데, 다만 마음이 발하는 곳에서 나누어 말한 까닭에 이(理)를 따르고 기(氣)를 따르는 구별이 있었다. 대개 성인께서 학설을 내세울 때는 반드시 발한 후에 쉽게 알 수 있는 곳에서 하지, 난데없이 본원의 미묘한 이치를 가볍게 사람에게 말하지는 않는다. 후세의 편협한 학자들이 오히려 체(體)․용(用)이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하여, 도심(道心)을 성(性)이라 하고 인심(人心)을 정(情)이라 하니, 비록 스스로는 마음이 성․정을 통섭하는 묘리를 깨쳤다고 하나, 이미 성인의 뜻을 상실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심(心)․성(性)의 이름을 붙인 것이 다르다는 것을 보고, 곧 성(性)은 이(理)이고 심(心)은 기(氣)라 하여, 담일(湛一)한 기를 순수한 성(性)에 대비시켜 미발(未發)에 소속시키고, 도심(道心)의 본연한 기를 인심(人心)의 변화하는 기에 대비시켜 모두 기가 발한 것으로 간주하니, 기(氣)를 길들여서 대본(大本)이라 하고 마음은 그 주재의 정당함을 잃어버리니 한심한 일이로다.

    《중용》에서 말하였다.

    도(道)라는 것은 잠시라도 떠날 수 없으며 떠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군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계하고 삼가며 들리지 않는 곳에서 두려워하고 무서워 한다. 숨겨져 있는 것 보다 더 잘 보이는 것이 없고 은미한 것 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혼자 있을 때 삼간다.[君子愼其獨]7)

    《장구》도(道)라는 것은 일상 사물에 있어서 마땅히 행해야 하는 이치이다. 모두가 본성의 덕으로서 마음에 갖추어져 있어서, 없는 사물이 없고 그렇지 않은 때가 없으니, 그러므로 잠시라도 떨어질 수 없다. 만약 그것이 떨어질 수 있다면, 어찌 본성을 따르는 것이라 했겠는가? 이런 까닭에 군자의 마음은 언제나 경외하는 자세를 지켜서, 비록 보이지 않거나 들리지 않더라도 감히 소홀히 하지 않으니, 그런 까닭에 천리(天理)의 본연을 지켜서 잠시라도 떨어지지 않게 한다. 혼자 있을 때라고 하는 것은 남들은 알지 못하고 나 혼자 아는 경우로서 그윽하고 어두운 가운데나 미세한 일을 말한다. 흔적은 비록 드러나지 않으나 기미는 이미 움직여서, 사람들이 비록 알지 못하지만 나는 혼자 그것을 알고 있으니, 천하의 일이 두드러지게 보이고 밝게 드러남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이런 까닭에 군자는 언제나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왔지마는 여기서 더욱 삼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욕이 장차 싹트려고 하는 것을 억제하여 그것이 은미한 가운데서 남모르게 자라나 도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도록 한다.

    안연(顔淵)이 인(仁)에 관해 물으니, 공자가 말하였다. “자기를 극복하고 예로 돌아감이 인이다. 하루라도 자기를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그 사람의) 인을 인정할 것이다. 인을 행함이 자기 자신에서 시작되지 남으로부터 시작되겠는가?” 안연이 “그 구체적인 조목을 청하여 묻습니다.” 하니, 공자는 “예가 아니면 보지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 하였다.8)

    《사서집주》인(仁)이라고 하는 것은 본심의 온전한 덕이며, ‘나(己)’란 일신의 사욕을 말한다. 예(禮)라고 하는 것은 천리의 절도를 표현한 글이니, 인(仁)을 행하는 것은 그 마음의 덕을 온전히 하기 위함이다. 대개 마음의 온전한 덕은 천리가 아닌 것이 없지만, 또한 인욕 때문에 무너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인(仁)을 실천한다는 것은 반드시 사욕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인 즉, 그렇게 함으로써 본심의 덕이 나에게 회복되어 온전하게 된다.

    하루를 극기복례(克己復禮)하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그 사람의 인(仁)함을 인정한다 하였으니, 그 효과가 매우 빠르고 지극히 크다는 것을 극진하게 말하였으며, 또 인을 실천하는 것이 나에게서 시작되는 것이지 타인이 끼어들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하였고, 또한 그 기미가 나에게 있어서 어려울 것이 없음을 알았다. 하루하루 극복하여 가서 그것을 어렵다고 여기지 않으면 사욕은 깨끗하게 없어지고 천리가 유행하며 인(仁)은 넘쳐날 것이다.

    예가 아니라는 것은 나의 사사로움이며, ‘만다(勿)’는 것은 금지하는 말이다. 이것은 인심이 위주로 하는 바로서 사사로움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기틀이다. 사사로움을 이기면, 몸가짐과 움직임이 예에 맞지 않음이 없고 일상 생활 가운데에 천리가 유행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정자(程子)가 말하였다.

    예가 아닌 것은 곧 사사로운 생각이니, 이찌 인(仁)을 이룰 것인가? 보통 사람은 모름지기 자기의 사사로움을 남김없이 극복하여 모든 것이 예로 돌아갔을 때 비로소 인(仁)인 것이다.

    사씨(謝氏)가 말하였다.

  자기를 극복함에 있어서 모름지기 성품이 편벽하여 극복하기 어려운 곳에서부터 극복하여 가야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잡으면 있고 놓아버리면 없어지며 출입에 때가 없어서 그 근원을 알지 못하는 것이 오직 마음인저!” 하였다.9)

    《집주》마음은 다잡으면 여기에 있고, 놓아 버리면 없어져 버리며, 그것이 출입함에 정해진 때가 없고 또한 정해진 곳이 없으니, 마음의 신명하고 예측할 수 없으며 움직임이 위태하고 편안하기 어려운 것이 이와 같다. 정자(程子)는 “마음에 어찌 출입이 있으리오. 또한 다잡고 놓는 것으로써 말했을 뿐이다. 다잡는 방법은 경(敬)으로써 내심을 바르게 할 뿐이다.” 하였다.

    《대학》에서 말하였다.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아니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10)

    《장구》마음이 없으면 그 몸을 단속할 수 없으니, 이런 까닭으로 군자는 반드시 이점을 잘 살펴서 경(敬)으로써 마음을 바르게 한다. 그런 연후에 이 마음은 늘 있게 되고 몸은 닦이지 않음이 없다.

    공도자(公都子)11)가 묻기를, “다 같은 사람인데 어떤 사람은 대인이 되고 어떤 사람은 소인이 되는 것은 어째서 입니까?” 하니, 맹자가 말하였다.

    “그 대체(大體)를 따르는 이는 대인이 되고 그 소체(小體)를 따르는 이는 소인이 된다.”12) 또 묻기를, “다 같은 사람인데 어떤 이는 대체를 따르고 어떤 이는 소체를 따르는 것은 어째서 입니까?” 하니, 대답하였다.

    이목(耳目)이 주관하는 것은 생각하지 아니하여 외물에 가리는 바 되니, 외물이 이목에 접촉하면 끌려가 버릴 뿐이다. 마음이 주관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지 못하니,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바이다. 먼저 그 대체를 세운 사람이라면 그 소체를 빼앗을 수 없으니 이런 사람이 대인이 될 따름이다.13)

    《집주》관(官)이라는 말은 주관한다는 것이다. 귀는 듣는 것을 주관하고 눈은 보는 것을 주관하지만 생각하지는 못하니, 이런 까닭으로 외물에 가리워진다. 마음은 생각하는 것을 주관하여 외물이 가리지 못한다. 이것이 곧 귀와 눈은 소체가 되고 마음은 대체가 되는 까닭이다. 귀와 눈이 이미 소체가 되어 외물에 가리워지면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물일 뿐이다. 외물을 가지고 이 사물에 접촉시키면 끌려가는 것은 필연적이다. 마음이 비록 대체로서 능히 외물에 가리지 아니하지만 혹 생각하지 아니하면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귀와 눈이 작용하여 마침내 또한 외물에 끌려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비록 모두 하늘이 부여한 것이니, 그 대체를 먼저 확립하지 않을 수 없다.

    순자(荀子)가 말하였다.

    이목구비(耳目口鼻)가 주관하는 것이 각기 중첩되는 바가 있으나 서로 주관하는 바를 대신하지는 못하니 이를 일러 천관(天官)이라 한다. 마음은 중허에 거처하면서 오관(五官)을 다스리니 이를 일러서 천군(天君)이라 한다. 성인은 그 천군을 맑게 하여 그 천관을 바르게 한다.14)

    또 말하였다.

    허령하고 한결 같으면서 고요한 것을 청명(淸明)이라 한다. 마음이라는 것은 형체의 군왕이며 신명의 주인이다. 명을 내리지만 받지는 않는다.

    주자가 말하였다.

    마음에는 원래 생각함이 있는데, 모름지기 사람이 스스로 주장하여 드러내니 이점이 제일 중요하다.

    맹자가 말하였다.

    학문하는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흩어진 마음을 구하는 것 뿐이다.

    《사서집주》학문하는 일이 진실로 한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방법은 그 흩어진 마음을 구하는 데 있을 뿐이다. 대개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지기(志氣)가 청명하고 의리(義理)가 밝게 드러나서 하늘의 이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어리석고 방만하여 비록 학문에 종사한다고 하지만 끝내 발명하는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성현의 천언만어는 단지 사람들로 하여금 이미 놓쳐버린 마음을 간략히 하여 다시 몸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스스로 위를 향하여 나아가 일상적인 것을 실천함으로써 하늘의 이치에 도달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였다.

    《대학》에서 말하였다.

    이른바 몸을 닦는 것이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 있다고 하는 것은 마음에 노여워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을 수 없고,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을 수 없고, 좋아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을 수 없고, 근심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장구》분치(忿懥)는 노여워함이다. 대개 네 가지는 모두 마음의 용(用)으로서 사람에게 없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한 가지라도 살피지 못하면 욕심이 발동하고 정욕이 지배하여 그 용(用)의 지향하는 바가 혹 그 올바름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맹자》에서 말하였다.

    그 마음을 다하는 사람은 자신의 본성을 알고, 자신의 본성을 알게 되면 하늘을 안다.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자신의 본성을 기르는 것은 하늘을 섬기기 위함이다.

    《사서집주》 마음[心]이라는 것은 사람의 신명(神明)으로서, 모든 이치를 갖추고서 모든 일에 응하는 것이다. 본성[性]은 마음에 갖추어진 이치이며, 하늘[天]은 또한 이치가 그것을 통해 나오는 곳이다. 사람에게 이 마음이 있으니 누구나 본체[體]를 온전히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치를 궁구하지 않으면 (물욕에) 가려지는 바가 있어 이 마음의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마음의 온전한 본체를 다 발휘하여 남김이 없도록 하는 사람은 이치를 궁구하여 모르는 것이 없도록 할 수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 이치를 알게 되면 이로부터 나오는 것 또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대학》의 서문을 가지고 말하자면, 본성을 안다[知性]는 것은 사물을 인식한다[格物]는 말이고, 마음을 다한다[盡心]는 것은 앎이 지극하다[知至]는 말이다. 지킨다는 말은 다잡아서 버리지 않는 것이고, 기른다는 말은 순리대로 하여 마음을 다하는데 방해함이 없는 것이다.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알고, 그리하여 이치에 나아가는 것이다. 마음을 지키고 본성을 기름으로써 하늘을 섬기니, 그것은 섬기기를 실천하기 위함이다. 그 이치를 알지 않으면 실로 섬기지를 못하지만, 그저 그 이치를 알기만 하고 섬기기를 실천하지 못하면 또한 자기 것이 아니다.

      주자가 말하였다.

      하늘이라는 것은 이치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며 사람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다. 본성이라는 것은 이치의 온전한 본체이며 사람이 그것을 얻어서 생겨나는 것이다. 마음은 사람이 그것을 몸의 주인으로 삼는 것이며 이치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하늘은 커서 밖이 없고 사람은 그 온전한 상태를 받은 까닭에 사람의 본심은 그 본체가 확연하여 또한 한량이 없다. 오직 형기의 사사로움에 붙잡혀 듣고 보는 자잘한 것에 얽매이니, 이런 까닭에 (물욕에) 가리워져서 다하지 못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사람이 능히 일에 직면하거나 물건에 직면하여 그 이치를 궁구할 수 있으면, 언젠가 전체를 통달하고 관통하여 남김이 없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본연의 체를 온전히 지킬 수 있을 것이며, 나의 성이 본성이 되는 이유와 하늘이 하늘로 되는 이유가 모두 여기서 벗어나지 않고 하나로 통할 것이다. 이천(伊川)이 ‘마음을 다한 연후에 본성을 알게 된다.’ 하였는데, 이는 그렇지 않다. ‘다한다’는 것은 큰 것이고 ‘안다’는 것은 작은 것이다. 성(性)은 내 마음의 진실한 이치이니, 만약 그것을 알지 못하면 다한다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선사(先師)께서 말하였다.

      육경(六經) 중에는 마음과 성에 관해 거듭 말하고 있지만 이보다 더 상세하지는 않다. 정자가 맨 먼저 마음과 성은 한 가지 이치라는 묘한 논리를 가지고 말하였고, 주자가 또 본심은 온전한 체(體)라는 취지로 해석하였는데, 후세에 와서 마음과 성을 상대화시켜 판연히 두 가지의 체라고 하는 것은 그 또한 이점에 있어서 통달하지 못한 것이다.

    맹자가 말하였다.

    사십이 되어 부동심에 이르렀다.[四十不動心]15)

    《집주》사십은 굳센 선비와 군자에게 도가 밝아지고 덕이 확립되는 시기이다. 공자는 사십이 되어 미혹되지 아니하였으니, 또한 부동심을 이른다.

    공자가 말하였다.

    칠십이 되면 마음대로 해도 법도를 넘지 않는다[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집주》종(從)은 따라 가는 것이다.

    신안진씨(新安陳氏)16)가 말하였다.

    성인의 마음은 하늘의 이치와 하나가 되어 털끝만큼도 사욕에 얽매이는 바가 없다. 그 마음이 욕망하는 대로 따라 가도 모두 천리가 크게 발휘되어 유행하는 것이다.”

    정자가 말하였다.

    마음은 본래 텅 비어 있으니 외물에 응하되 자취가 없다.

    장자(張子)가 말하였다.

    천지의 도는 지극히 빈 것으로 실질을 삼지 않는 것이 없다.

    사람은 모름지기 비어 있는 가운데서 실질을 구해야 한다. 성인은 빈 것이 지극한 까닭에 선을 택함이 저절로 정밀하다. 마음을 비우지 못하는 것은 사물이 장애가 되기 때문이니, 무릇 형체를 갖춘 물건이 있으면 곧 무너지기 쉽다. 오로지 태허(太虛)만이 동요하거나 왜곡됨이 없으므로 지극히 실하게 된다. ꡔ시경ꡕ에 이르기를, “하늘이 하는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네[上天之載 無聲無臭]”17) 하였으니, 지극하도다.

    주자(朱子)가 말하였다.

    이(理)를 위주로 한다면, 이 마음은 텅비고 밝아서 털끝만한 사사로운 마음도 생기지 못한다.

    선사(先師)께서 말하기를, “비었다는 것은 이 이(理)가 형체가 없음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주자(周子)가 말하였다.

    오직 사람만이 그 빼어난 부분을 얻어서 가장 신령하다.《태극도설》에 나온다.

    주자(朱子)가 말하였다.

    사람과 사물이 생겨남에 태극의 도를 갖추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러나 음양과 오행의 기질이 번갈아 운동하였고, 사람이 부여받은 것은 그 가운데 빼어난 부분을 얻었다. 그런 까닭에 그 마음은 가장 신령하고 또한 그 본성의 온전함을 잃지 아니하였으니, 이른바 천지의 마음이며 사람의 근본이다.《도설해》

    또 말하였다.

    가장 신령하다는 것은 이른바 순수하고 지극히 선한 성(性)이니, 이것이 이른바 태극(太極)이다.

    선사(先師)께서 말하였다.

  주자(朱子)가 일찍이 말하기를, “신령한 것은 심(心)이지 성(性)이 아니다.” 하였으니, 이는 신령한 것을 성이라고 함에 있어서 합하여 말하고 나누어서 말하는 것의 차이이다. 나누어서 말하면, 성은 움직임이 없고 마음은 깨달음이 있으니 마음은 본래 비어 있고 성은 오히려 실속이 있으므로 신령함은 따라서 마음에 속한다. 합하여 말하자면, 마음의 본체는 곧 성이고 한 가지로 되는 것은 태극의 본래의 신묘한 본성이니, 신령함은 따라서 성(性)인 것이다.

    주자(周子)가 말하였다.

    그 뚜렷함과 그 은미함은 신령하지 않으면 드러내지 못한다[厥彰厥微, 非靈不瑩]

    주자(朱子)가 말하였다.

    이것은 이(理)를 말한다. 햇빛은 밝고 그늘은 어두우니, 사람의 마음과 태극의 지극한 신령스러움이 아니면 누가 그것을 밝혀낼 것인가.

    또 말하였다.

    뚜렷함이란 도의 현저함을 말하고, 은미함이란 도가 숨어있음을 말하니, 뚜렷함과 은미함은 모름지기 신령해야만 밝게 비추어 보아서 거리낌없이 할 수 있다. 이 세 구절은 이(理)를 말한 것이다.

    주자(朱子)가 말하였다.

    허령하다는 것은 마음의 본체이고 내가 허령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귀와 눈이 보고 듣지만, 보고 듣게 되는 소이는 그 마음이니 어찌 형상이 있으리오. 그러나 귀와 눈으로 보고 듣게 되면 오히려 형상이 있으니, 마치 마음의 허령함에 일찍이 사물이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면재황씨(勉齋黃氏)18)가 말하였다.

    마음이 성․정의 주재자가 되는 것은 그것의 허령지각 때문이다. 이 마음의 이치가 밝게 빛나서 어둡지 않는 것은 또한 그 허령지각 때문이다.

    선사(先師)께서 말하였다.

    마음의 본체는 곧 태극이 사람에게 존재하여 있는 것이다. 도의 지극히 빈 것과 성의 가장 신령한 것이 겨우 거기에 해당한다. 그런 까닭에 주자는 보고 듣는 것으로 말하였던 것이다.

    주자가 말하였다.

    지각하는 것은 마음의 덕이다.

    또 말하였다.

    지각은 지(智)에 관한 일이다.

    주자가 말하였다.

    지(智)는 곧 거두어 간직하는 것이니, 그 지(智)가 크면 클수록 그 간직하는 바가 더욱 깊다. 지(智)는 곧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니 이것은 거두어 들이는 것이다. 예컨대 옳은 것을 알거나 그른 것을 알거나, 아는 것으로 끝나고 다시 작용함이 없으니, 인․의․예 3가지가 작용이 따르는 것과는 다르다. 지(智)는 다만 앎이 완료되고 나면 측은․수오․사양이라는 세 가지를 제공한다. 그것은 거두어들임으로써 쾌감을 얻는다.19)

    주자가 말하였다.

    지(知)는 사람의 신명함으로, 여러 이치들을 묘합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것이다.

    묻기를, “지(知)는 마음의 신명함으로 이른바 지(智)와는 다른 것 같습니다.” 하니, 주자가 말하였다.

    이 지(知)자는 참으로 그러합니다. 공자도 인(仁)과 지(智)에 관해 많은 말을 하였습니다. 사단에서도 인․지가 가장 비중이 큰데, 지가 비중이 큰 이유는 그것이 지(知)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묻기를, “어째서 ‘여러 이치를 묘합한다.’고 합니까?” 하니, 대답하였다.

    대개 도리는 모두 스스로 있는 것이지 밖에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른바 지(智)라고 하는 것은 단지 이(理)를 아는 것으로서, 안다는 것은 곧 나에게 있는 것을 아는 것이지 내가 아는 것을 가지고 저것의 도리를 알아 가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는 본래 발용함이 있어서 앎이 거기로부터 나올 수 있습니다. 만약 도리를 알지 못한다면 무엇으로부터 알겠습니까? 안다는 것은 곧 스스로 먼저 갖고 있던 도리를 아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여러 이치를 묘합한다고 하는 것이니, 여러 이치를 운용(運用)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운용이라는 말에는 병통이 있는 까닭에 그저 묘(妙)자를 쓰는 것입니다.

    묻기를, “앎이 어떻게 사물을 주재합니까?” 하니, 대답하였다.

    지각하는 바가 없으면, 만물을 주재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주재하는 것이 모름지기 지각하는 것입니다.

    격암조씨(格菴趙氏)가 말하였다.

    지(知)는 그렇게 해야 마땅한 바를 아는 것이고, 각(覺)은 그러한 원인을 깨닫는 것이다.

    정자(程子)가 말하였다.

    하늘을 그 자체를 가지고 말하면 도(道)라고 하고, 주재하는 것으로써 말하면 제(帝)라고 한다.

    주자(朱子)가 말하였다.

    마음이 만약 몸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곧 주재하는 것이 없다.

    주자가 말하였다.

    천하에 이(理)보다 더 존귀한 것은 없다. 그런 까닭에 제(帝)라고 이름하였다. 오직 높으신 상제(上帝)께서 백성들에게 사랑을 내렸으니, 내린다 함은 주재의 뜻을 갖고 있다.

    또 말하였다.

    천명지성(天命之性)을 가지고 본다면, 명(命)은 성(性)이고 천(天)은 마음이니, 마음에는 주재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분별을 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지나치게 구분해서도 안된다. 두 가지로 하되 충분히 살펴서 그 주재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또 말하였다.

    마음은 진실로 주재하는 것이니, 이른바 주재하는 것은 곧 이(理)이다. 마음 밖에 달리 이(理)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理) 밖에 달리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니, 사람 인(人)자는 하늘 천(天)자와 닮았고 마음 심(心)자는 임금 제(帝)자와 닮았다.

    선사(先師 : 한주 이진상)께서 말하였다.

    이(理)가 하늘에 있어서 만물을 주재하니, 그런 까닭에 제(帝)라고 한다. 마음은 사람에 있어서 일신의 주재가 되니, 그런 까닭에 천군(天君)이라고 한다. 제(帝)라고 하고 군(君)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가장 높이는 칭호이다. 마음은 이(理)가 하나로 모인 것을 가지고 말하고, 성(性)은 이(理)가 각각에게 갖추어진 것을 가지고 말하니, 이것이 마음과 성의 구별이다. 마음을 넓게 말하자면 이(理)․기(氣)를 겸하였고, 주재하는 것을 가지고 말하면 다만 이(理)를 가리킨다. 이것은 마치 천(天)을 넓게 말하면 이․기를 겸하였지만 높은 것으로 말하자면 다만 이(理)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마음이 따로 한 가지가 되고 성이 따로 한 가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 주장하는 바가 있다.

    주자가 말하였다.

    경(敬)은 한 마음의 주재(主宰)요, 만사의 근본(根本)이다.

    주자가 말하였다.

  성인(聖人)은 중(中)․정(正)․인(仁)․의(義)로써 정하여 정(靜)을 주로 하니, 바로 그 마음을 고요하고 안정하여 스스로 주재(主宰)하기를 바란다.

    또 말하였다.

    성인(聖人)은 오로지 도심(道心)이 주재하기 때문에 인심(人心)이 저절로 위태롭지 않다.

    또 말하였다.

    경(敬)은 곧 마음이 주재함이 있어, 치우쳐 매임이 없다.  

    선사께서 말씀하셨다.

    주재하는 실제의 이치는 본디 하늘에서 받았고, 주재의 공부는 오로지 사람에게 있으니, 곧 마음이 지실로 한 몸의 주재이며, 경(敬)이 한 마음의 주재이다. 정(靜)을 주장하여 동(動)을 기르고, 하나를 주장하여 만 가지에 반응하며, 마음을 주장하여 행동을 다스리고, 이(理)를 주장하여 기(氣)를 검속하니, 모두 경(敬)의 일이다. 한다. 엄숙하여 마치 두려워하는 듯하며, 열기가 있으면서도 어지럽지 않으며, 잊지도 않고 돕지도 않으며, 둘도 아니요 셋도 아니며, 그것을 법으로 삼는다. 그러나 경(敬)을 주장하는 방법은 정(精)에 붙어 안배함을 기다리지 않고, 한결 같이 하늘의 법칙에 따를 따름이다.

    노이재(盧伊齋)가 말하기를, “경(敬)은 일(一)일 따름이다.”라고 하니, 이자(李子 : 퇴계)가 말하였다.

    공(公)은 일찍이 주자의 능(能)과 소능(所能)의 주장을 보았는가? 지금 그 주장으로 이것을 헤아리면, 경(敬)은 소위 능(能)이요, 일(一)은 소능(所能)을 가리킨다. 일(一) 위에 주(主)자를 놓고, 또는 일(一) 아래에 지(之)자를 놓으면 곧 능(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그가 말한 경(敬)은 일(一)일 따름이라고 한 것은 능(能)을 소능(所能)으로 생각하는 잘못이 아니겠는가?

    내가 살펴보건대, 능(能)과 소(所) 두 글자는 선어(禪語)에서 나왔다. 주자(朱子)가 여자약(呂子約)에게 답한 편지에 상세한데, 이자(李子)가(이 말을) 인용하여 드러내 밝혔다. 배우는 사람들이 만약에 능(能)과 소(所)의 의미를 알 수 있다면, 그가 심학(心學)에 있어서는 어지간할 것이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사람이 학문함은 심(心)과 이(理)뿐이다. 대개 심(心)이 나에게 있는 것이 능(能)에 속하고, 이(理)가 외물에 있는 것이 소(所)에 속한다.  ‘꽃을 보고 버드나무 가지를 꺾다’는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보고[看]와 꺾는다[折]는 기(氣)에 속하고, 꽃[花]과 버드나무[柳]는 이(理)에 속한다고 한다. 이는 심(心)과 이(理)가 일(一)의 뜻이 되는 것을 살피지 않은 사람이다.

    이자(李子)가 이숙헌[율곡]에게 답한 편지에서 말했다.

    심학도(心學圖)에 대해서 논한 그대의 여러 설(說)은 더욱 수긍할 수가 없습니다. 숙헌(叔獻)의 설(說)과 같다면, 당시 정씨(程氏)가 이 심학도(心學圖)를 만든 것은 바보 앞에서 꿈 이야기를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세상에서 깊이 꿰뚫어 보지는 못하면서 남을 공격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하는 말을 본디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숙헌(叔獻)의 고명한 견해로도 이 도(圖)를 보는데 이렇게 구애되고 막힙니까? 가령 정(程)씨가 이 도(圖)를 보고 말하기를, “그 도심(道心)을 온전히 보존하려면 반드시 먼저 대인심(大人心)20)이 있어야 하고, 대인심(大人心)을 가지려는 사람은 먼저 그 본심(本心)을 얻어야 한다.”라고 하거나, 또 “흐트러진 마음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마음이 제자리에 있도록 해야 하고, 마음이 제자리에 있도록 하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자신의 사욕(私慾)을 이겨 예(禮)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하였다면, 숙헌이 이처럼 힘껏 공박(攻駁)하여 없애버리려고 해도 되겠지만, 이제 그 설(說)을 말하는데 그쳤거늘 어찌 숙헌이 공박한 것처럼 용공(用工)하는 차례대로 하나하나 앞뒤를 구분해야 하겠습니까? 심(心)자 테두리 주변 상하․좌우에 놓인 여섯 가지의 마음은, 다만 성현들의 마음을 이야기한 것이고, 각각 이렇게 가리키는 바가 있다는 것을 이른 것입니다. 본연지선(本然之善)을 양심(良心)이라 하고, 본유지선(本有之善)을 본심(本心)이라 한다. 순일(純一)하여 거짓이 없는 것뿐인 것을 적자심(赤子心)이 하고, 순일하여 거짓이 없으면서도 온갖 변화에 통달한 것을 대인심(大人心)이라 한다. 형기(形氣)에서 생겨나온 것을 인심(人心)이라 하고, 성명(性命)에 근원한 것을 도심(道心)이라 합니다. 이에 양심과 본심은 그 뜻과 유형이 서로 가까우므로 윗부분 좌우에 대응시켜 배치시켰고, 적자심․인심․도심은 그 본래의 말이 서로 대응되므로 가운데 부분과 아랫부분의 좌우에 배치했습니다. 이 여섯 가지의 마음은 주자(朱子) 〈서명(西銘)〉의 앞 부분은 바둑판처럼 똑 같습니다. 바둑판이라고 이야기 했을 때, 어찌 공부를 선후로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정(程)씨 자신의 설(說)은 이 정도에서 그쳐서, 일찍이 공부와 공효(功效)의 앞뒤에 관한 설은 말한 적이 없습니다. 이제 보내온 편지에서 운운하였으니, 어찌 정(程)씨에게 비웃음을 사지 않겠습니까? 대인심(大人心)이 다른 사람과 공효(功效)를 따져 그 높고 낮음을 다투는 것이라면, 맹자(孟子)가 어찌 적자심(赤子心)과 함께 일컬었겠습니까? 다만 지금 이루어져 있는 대인(大人)에 대해서 그 마음이 이러하다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자(朱子)가 일찍이 말하기를, “적자(赤子)의 마음은 순일(純一)하여 거짓됨이 없고, 대인의 마음도 순일하여 거짓됨이 없다. 다만 적자(赤子)는 아는 것도 없고 능한 것도 없이 순일(純一)하여 거짓됨이 없는 것이고, 대인(大人)은 아는 것도 있고 능한 것도 있으면서 순일(純一)하여 거짓됨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모름지기 이러한 설(說) 등을 가지고 자세히 생각한다면, 정(程)씨 〈심학도(心學圖)〉의 본래 뜻은, 대인(大人)의 공부 수준이 마땅히 여기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마음이란 형태가 적자(赤子)에게 있을 때는 어떠하고, 대인에게 있을 때는 어떠한가를 말하여, 성현들이 마음을 논한 것이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보여주어, 사람들로 하여금 이쪽으로부터 체인(體認)하고 저쪽으로부터 잠완(潛玩)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체인(體認)과 잠완(潛玩)하기를 여러 가지로 많이 하여 거의 서로 증험(證驗)하게 되고, 두루 이해하고 꿰뚫어보아[融會貫通], 마음의 체용(體用)을 인식한다면, 도(圖)에서 정일(精一) 이하는 용공(用工)하는 것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내가  젊은 시절에 《심경(心經)》을 얻어 보고서 이〈심학도(心學圖)〉를 대단히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여섯 가지 마음 심(心)자를 배치한 것이 전혀 이해되지 되지 않아, 의심스럽고 알지 못하는 실마리가 마음에서 없어지지 않는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10여 년 전에 임은(林隱)의 본도(本圖)와 본설(本說)을 얻어 읽고서야 비로소 그 정미(精微)한 뜻을 깨달았습니다. 대개 여섯 가지 마음을 두 갈래로 나누어 설명한 것은 그 이취(理趣)와 맥락(脈絡)이 저절로 분명하고 일관되면서도, 공부와 공효(功效)의 앞뒤와 같은 것들의 설(說)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 견해가 얕지 않습니다. 갑작스러이 반론(反論)을 만들어서 그를 능가하기는 아마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유정유일(惟精惟一) 이하에서 바야흐로 공부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도 또한 〈서명(西銘)〉의 뒷부분은 바둑알을 놓는 것과 한가지라는 말과 같습니다. 사람의 욕심을 막고[遏人欲]라는 것과 천리를 보존한다[存天理]라는 것은 상대되는 공부(工夫)로 본 것을 숙헌(叔獻)도 잘못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상대(相對)로 본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진서산(眞西山)도, “사욕(私慾)을 이기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보존하고 기르는 일[克治存養]은 서로 작용하여 그 공효(功效)에 이른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상대적(相對的)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 어찌 안 되겠습니까? 그 공부는 정일(精一)에서 다했고, 계구(戒懼)와 근독(謹篤)에서 치밀합니다. 공자가 인(仁)을 하는데, “극기복례(克己復禮)로써 한다21).”고 말한 것과 맹자가 “밤에 얻은 맑은 기운으로 마음을 잡아 보존한다.”고 논한 것으로 이미 충분합니다. 이런 몇 가지를 들어서 곧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從心]22)과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不動心]23)으로 끝마치는 것이 어찌 되지 않습니까? 반드시 그 나머지 것을 두루 들어서 말한 것이지 어찌 꼭 이쪽 한 층으로부터 말미암아 저쪽 한 층을 올라가고, 또 저쪽 한 층을 사다리나 계단으로 삼아 그 위 몇 째 층에 오른다고 말한 것이겠습니까? 대개 생각하건대, 성현(聖賢)들이 심법(心法)을 논한 것은 한 가지만은 아닙니다. 어떤 이는 이렇다고 여기고, 어떤 이는 저렇다고 여깁니다. 두루 가리켜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모두 알지 않아서는 안 된다거나, 모두 공력을 쏟아야 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 위로부터 아래로 배치한 것도 또한 도(圖)를 만드는 형세상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 대학 8조목(八條目)의 공정(工程)에 앞뒤가 있는 것과 같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정(程)씨의 설은  다만 신독(愼獨) 이하를 들어 사람의 욕심을 막는[遏人欲] 공부로 삼고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不動心]으로 끝을 맺었고, 계구(戒懼) 이하를 들어서 천리(天理)를 보존하는[存天理] 공부로 삼고서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從心]으로 끝맺었을 다름입니다. 어찌, “어떤 것을 하려 하면 반드시 먼저 어떤 것을 해야 한다.” 거나, “어떤 것을 거친 뒤에 어떤 것에 이른다.”고 하겠습니까? 흩어진 것을 구하는 것[求放心]이 넷째 도(圖)인데, 이에 대해서도 학자 가운데 또한 비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릇 (求放心이란) 세 글자를 어설픈 견해로 대충 논하게 되면, 반드시 보내오신 편지와 같게 됩니다. 오늘날의 논의가 이러할 뿐만 아니고, 선현(先賢)들의 논의에도 역시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이치나 그 일이 이에 그칠 따름이라면, 맹자는, “학문하는 처음에 그 흩어진 마음을 구해야 한다.”라고만 말해도 충분했을 것인데, 왜 “학문의 도는 다름이 없다24).”라고 했겠습니까? 또 명도(明道:정호(程顥))도 마땅히, “성현이 사람을 가르칠 처음에 사람들로 하여금 이미 흩어진  마음을……”이라고만 말해도 충분했을 것인데, 어찌 “성현의 천만 마디 말이 다만 사람들로 하여금 흐트러진 마음을 단속하여 반복해서 몸으로 돌아오게 한 것이다.”라고 말했겠습니까? 이제 막 이 구절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겨, 배우는 사람이 처음에 한번씩 거쳐가는 관문으로 삼고, 이곳을 한번 지나고 나면 완전히 통발이나 덫처럼 여겨서 나의 정밀하고 요긴한 공부에 관계없다고 한다면, 맹자의, “학문의 도는 다른 것이 없다……”라는 말이나, 명도(明道)의 “천만 마디 말이 다만 ……”이라는 말이 모두 터무니없이 사람을 속이는 것이 될 것입니다. 만약 “안자(顔子)의 지위에 이르면 공부가 이제 정세(精細)하여 터럭만큼의 흐트러진 마음도 논의할 것이 없다.”고 한다면, “잘못이 있자마자 곧 알아차린다.[纔差失, 便能知之]”는 설을 붙일 수가 없겠고, “성인이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미치광이가 된다.(惟聖罔念作狂25))”는 말은, 실제로 그런 일이 없는데도 성인이 아무렇게나 헛말을 지어내어 천하 후세 사람들을 속인 것이 되고, 또 예로부터 성인이나 현인들은 그 학문이 이미 지극하고 그 지위가 이미 높으니, 마음을 편안히 갖고 뜻을 멋대로 가져, 다시 벌벌 떨며 두려워하고 신중히 하는 말이 없어도 된다는 말이 됩니다. 주자(朱子)가 평소에 늘 배우는 이들을 위해서 〈도성선장(道性善章)〉과 이 장을 만들어서 그들을 힘써 노력하게 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뜻이 다만 배우는 이들로 하여금 그 처음에 대충대충 이 대목의 공부를 잠시 빌려서 한번 자고 지나가는 여관으로 생각하도록 한 것이겠습니까? 사실은 시작도 본디 여기에 있고, 그 끝도 이 것으로부터 성현의 천만 마디 말을 이해하는 ??으로 삼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망령되이 이 말을 어설프게 대충 들어서 이야기하고, 이어서 이 도(圖)에 맞춘 것이니, 참으로 사람들이 의심할 만한 점도 있습니다. 만약에 맹자나 명도(明道)의 설을 그 극단적인 데까지 미루어 나가 자세히 논한다면, 안자(顔子)가 “머지않아 곧 돌아온다26).”는 것도 여기에 넣어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정(程)씨가 이러한 뜻을 서술한데 대해서 쉽사리 깎아내리거나 공박(攻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 도(圖)에서 심재(心在)․심사(心思)․진심(盡心)․정심(正心)의 순서가 바꾸었다는 것에 이르러서는, 보내온 편지에도 일리가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성찰(省察)이 아니면 무엇으로부터 존재하고 생각하며, 큰 것에 두는 것이 어찌 함양(涵養)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여긴다면 그 두 가지의 소속이 처음부터 구애(拘礙)됨이 없고, “성냄[忿懥]과 두려워함[恐懼]에서 한 가지만 있어서도 살피지 못한다면 욕심이 움직이고 감정이 이기게 된다.”고 했으니, 정심(正心)이 어찌 반드시 함양(涵養) 한쪽에만 속해야 하겠습니까? 진심(盡心)이 비록 지(知)에 속한다고 하였지만, 이 도(圖)는 지(知)와 행(行)으로 나눈 것이 아니고, 다만 사람의 욕심을 막는 것[遏人欲]과 천리를 보존하는 것[存天理]으로 나누었을 뿐입니다. 진심(盡心)이란 말의 뜻을 풀이하여, “그 마음의 전체를 극진히 하여 다하지 않은 것이 없는 사람은 반드시 능히 이치를 궁구(窮究)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정(程)씨가 이를 나누어 소속시킨 것은 그 의미가 혹시 이런 것이 아닌지요? 내가 가만히 생각하기를, 선현(先賢)들의 저술이라도 의리가 크게 어긋나고 틀려서 후세 사람들을 그르치는 것이라면, 이들을 따져서 바른 곳으로 돌리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러나 그대가 논한 바와 같은 것은 본디 잘못되지 않았고, 우리의 견해가 아직 미치지 못한 것이니, 억지로 의논(議論)을 만들어 빼거나 취하려고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혹 정미(精微)한 글의 뜻을 이쪽저쪽으로 나누어 소속시킬 때, 양쪽에 다 어긋나지 않은 곳에서는 또한 마땅히 지금 되어 있는 것을 따르고 바꾸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모름지기 그대로 받아들여서 이러한 일이 자기에게 있는지 없는지, 능한지 능하지 못한지 상태가 어떠한지를 점검하여 날마다 채찍질하여 힘쓰는 것이 중요하고 절실한 일입니다. 반드시 때를 씻고 헌 데를 찾아내어 옮기고 바꾸고 빼어버리거나 그냥 두려고 하는 것은 아마도 급한 일이 아닌 듯합니다.




1) 자는 자현(子見), 호는 임은(林隱)이며 신안(新安) 사람으로 은거하면서 벼슬을 하지 않았다. 행실이 반듯하였으며 노년에 이르기까지 경전을 연구하여 성과를 내었다. 저서로는 《사서장도(四書章圖)》 3권이 있지만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2) 《맹자․고자(告子) 상》편에 나온다.


3) 《맹자․고자(告子) 상》편에 나온다.


4) 《맹자․이루(離婁) 하》편에 나온다.


5) 《주자어류》 권57 〈맹자․이루하(離婁下)․대인자(大人者)〉장에 나온다.


6) 《서경․우서(虞書)․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말이다.


7) 《중용장구(章句)》 제1장에 나오는 말이다.


8) 《논어․안연(顔淵)》편에 나온다.


9) 《맹자․고자(告子)》상편에 나오는 말이다.


10) 《대학》 전(傳) 7장에서 나온 말이다.


11) 전국시대 사람으로 맹자(孟子)의 제자이다.


12) 대체(大體)는 마음이고 소체(小體)는 이목(耳目)이다.


13) 《맹자․고자(告子)》상편에 나오는 말이다.


14) 《순자(荀子)․천론(天論)》에 나오는 말이다. 원문에는 이목구비(耳目口鼻)가 아닌 이목구비형(耳目鼻口形)으로 되어 있다.


15) 《맹자․공손추(公孫丑)》상편에 나오는 말이다.


16) 이름은 역(櫟)이고 자는 수옹(壽翁) 혹은 무재(茂材)이다. 휴녕(休寧) 사람으로 성품은 강직하고 효성과 우애를 겸하였다. 원우(延祐: 원 인종대의 연호. 1314~1320) 연간에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회시에 응하지 않았다. 집안에서 교수에만 힘쓰며 문밖에 나가지 않은 것이 수십년이었다. 거처하던 집을 정우당(定宇堂)이라 하였으므로, 그의 문인들은 정우(定宇)선생으로 불렀다.


17) 《시경․문왕지십(文王之什․문왕(文王)》에 나온다.


18) 송대 사람으로 이름은 간(幹)이고 자는 직경(直卿)으로 복주(福州) 민현(閩縣) 출신이다. 주자의 문인이며 사위이다. 주자의 의발(衣鉢)을 그에게 전수하였다는 말이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19) 《주자어류》 권6〈성리(性理) 3․인의예지 등 명의(仁義禮智等名義)〉에 나온다.


20) 대인심(大人心)은 《맹자․이루(離婁) 하》편의 “대인이란 어린 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大人者, 不失其赤子之心者也)”라는 대목에서 나왔다.


21) 《논어․안연(顔淵)》편에, “자기를 이겨 예를 회복함이 인이다.(克己復禮爲仁)”라는 말이 있다.


22) 《논어․위정(爲政)》편에, “일흔이 되어서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라는 말이 있다.


23) 《맹자․공손추(公孫丑) 상》편에, “나는 마흔이라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我四十不動心)”라는 말이 있다.


24) 《맹자․고자(告子) 상》편에 “학문의 도는 다른 것이 없다. 그 흩어진 마음을 구할 뿐이다.(學問之道無他, 求其放心而已矣)”라는 말이 있다.


25) 《서경․다방(多方)》편에, “성인이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미치광이가 되고, 미치광이라도 생각을 잘하면 성인이 된다.(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라는 말이 있다.


26) 《논어․옹야(雍也)》편에, “안회는 마음이 석 달 동안 인에서 떠나지 않았다.(回也其心三月不違仁)”라는 말이 있다.

 

 

心 學 圖 說


林隱程氏復心曰, 赤子心, 是人欲未汨之良心. 人心, 卽覺於欲者. 大人心, 是義理具足之本心. 道心, 卽覺於義理者. 此非有兩樣心, 實以生於形氣, 則皆不能無人心, 原於性命, 則所以爲道心. 自精一擇執以下, 無非所以遏人欲而存天理之工夫也. 愼獨以下, 是遏人欲處工夫, 必至於不動心, 則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可以見其道明德立矣. 戒懼以下, 是存天理處工夫, 必至於從心, 則心卽體欲卽用, 體卽道用卽義, 聲爲律而身爲度, 可以見不思而得, 不勉而中矣. 要之, 用工之要, 俱不離乎一敬. 蓋心者, 一身之主宰, 而敬又一心之主宰也. 學者, 熟究於主一無適之說, 整齊嚴肅之說, 與夫其心收斂常惺惺之說, 則其爲工夫也盡, 而優入於聖域, 亦不難矣.

○ 右林隱程氏, 掇取聖賢論心學名言, 爲是圖. 分類對置, 多而不厭, 以見聖學心法, 亦非一端, 皆不可不用功力云爾. 其從上排下, 只以淺深生熟之大槩言之. 有如此者, 非謂其工程節次, 如致知誠意正心修身之有先後也. 或疑旣云以大槩敍之, 求放心是用工初頭事, 不當在於心在之後. 臣竊以爲求放心, 淺言之, 則固爲第一下手著脚處, 就其深而極言之, 瞬息之頃, 一念少差, 亦是放. 顔子猶不能無違於三月之後, 只不能無違, 斯涉於放. 惟是顔子, 纔差失, 便能知之, 纔知之, 便不復萌作, 亦爲求放心之類也. 故程圖之敍如此. 程氏字子見, 新安人, 隱居不仕, 行義甚備, 白首窮經, 深有所得, 著四書章圖三卷. 元仁宗朝, 以薦召至, 將用之, 子見不願. 卽以爲鄕郡博士, 致仕而歸. 其爲人如此, 豈無所見而妄作耶.


附 錄


孟子曰, 牛山之木, 嘗美矣, 以其郊於大國也, 斧斤伐之, 可以爲美乎. 是其日夜之所息, 雨露之所潤, 非無萌蘗之生焉, 牛羊又從而牧之, 是以若彼濯濯也. 人見其濯濯也, 以爲未嘗有材焉, 此豈山之性也哉. 雖存乎人者, 豈無仁義之心哉, 其所以放其良心者, 亦猶斧斤之於木也, 旦旦而伐之, 可以爲美乎. 其日夜之所息, 平旦之氣, 其好惡, 與人相近也者幾希, 則其旦晝之所爲, 有梏亡之矣. 梏之反覆, 則其夜氣不足以存, 夜氣不足以存, 則其違禽獸不遠矣. 人見其禽獸也, 而以爲未嘗有才焉者, 是豈人之情也哉. 故苟得其養, 無物不長, 苟失其養, 無物不消. (集註) 良心者, 本然之善心, 卽所謂仁義之心也. 平旦之氣, 謂未與物接之時, 淸明之氣也. 好惡與人相近, 言得人心之同然也. 幾希, 不多也. 梏, 械也. 反覆, 展轉也. 言人之良心, 雖己放失, 然其日夜之間, 亦必有所生長, 故平旦未與物接, 其氣淸明之際, 此心, 必猶有發見者. 但其發見至微, 而旦晝所爲之不善, 又己隨而梏亡之, 如山木旣伐, 猶有萌蘗, 而牛羊又牧之也. 晝之所爲旣熾, 則必有以害其夜之所息, 夜之所息旣薄, 則愈不能勝其晝之所爲, 是以展轉相害, 至於平旦之氣, 亦不能淸, 而不足以存其仁義之良心也.

孟子曰, 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 生亦我所欲, 所欲有甚於生者, 故不爲苟得也. 死亦我所惡, 所惡有甚於死者, 故患有所不避也. 如使人之所欲, 莫甚於生, 則凡可以得生者, 何不用也. 使人之所惡, 莫甚於死者, 則凡可以避患者, 何不爲也. 由是則生而有不用也, 由是則可以避患而有不爲也. 是故, 所欲有甚於生者, 所惡有甚於死者, 非獨賢者有是心也. 人皆有之賢者, 能勿喪耳. 一簞食一豆羹, 得之則生, 不得則死, 嘑爾而與之, 行道之人不受, 蹴爾而與之, 乞人不屑也. 萬鍾則不辨禮義而受之, 萬鍾於我何加焉. 爲宮室之美, 妻妾之奉, 所識窮乏者, 得我與. 鄕爲身死而不受, 今爲宮室之美爲之, 鄕爲身死而不受, 今爲妻妾之奉爲之, 鄕爲身死而不受, 今爲所識窮乏者得我而爲之, 是亦不可以己乎. 此之謂失其本心. (集註) 本心, 謂羞惡之心, 言三者身外之物, 其得失比死生爲甚輕. 鄕爲身, 死猶不肯受嘑蹴之食, 今乃爲三者而受無禮義之萬鍾, 是豈不可以止乎. 蓋羞惡之心, 人所固有, 然或能決死生於危迫之際, 而不免計豊約於宴安之時. 是以, 君子不可頃刻而不省察於斯焉.

孟子曰, 大人者, 不失其赤子心也. (集註)大人智周萬物, 赤子全未有知, 其心疑若甚不同矣. 然其不爲物誘, 而純一無僞, 則未嘗不同也. 故言其所以爲大人者, 特在於此.

朱子曰, 赤子, 無所知, 無所能. 大人者, 是不失其無所知無所能之心. 若失了此心, 便些子機關, 計些子利害, 便成箇小底人了. 大人心下, 沒許多事.

虞書曰,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朱子曰, 心之虛靈知覺一而己矣, 而以爲有人心道心之異者, 則以其或生於形氣之私, 或原於性命之正, 而所以爲知覺者不同, 是以或危殆而不安, 或微妙而難見爾. 然人莫不有形, 故雖上知不能無人心, 亦莫不有是性, 故雖下愚不能無道心. 二者雜於方寸之間, 而不知所以治之, 則危者愈危, 微者愈微, 而天理之公, 卒無以勝夫人欲之私矣. 精則察夫二者之間而不雜也, 一則守其本心之正而不離也. 從事於斯, 無所間斷, 必使道心常爲一身之主, 而人心每聽命焉, 則危者安, 微者著, 而動靜云爲, 自無過不及之差矣.

朱子曰, 堯舜以來, 未有議論時, 先有此言, 聖賢心法, 無以易此. 經中此意極多, 所謂擇善而固執之. 擇善, 卽惟精也, 固執, 卽惟一也. 大學致知格物, 非惟精, 不可, 能誠意則惟一矣. 學者, 只是學此理. 孟子以後, 失其傳, 亦只是失此. ○ 先師曰, 千古論心, 始於此, 而特就心之發處分言, 故有從理從氣之別. 蓋聖人立言, 必於發後易見之處, 而不遽以本原微妙之理, 輕以告人也. 後之拘儒, 反疑軆用之不備, 而欲以道心爲性․人心爲情, 則雖自謂有見於心統性情之妙, 而已失聖人之旨矣. 其或見心性立名之異, 而便謂性卽理․心卽氣, 每以湛一之氣, 去對純粹之性, 而屬之未發, 以道心本然之氣, 去對人心所變之氣, 而都作氣發看, 馴致氣爲大本, 而心失其主宰之正, 可勝歎哉.

中庸曰,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也. 是故, 君子戒愼乎其所不覩, 恐懼乎其所不聞,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 (章句) 道者, 日用事物當行之理, 皆性之德而具於心, 無物不有, 無時不然, 所以不可須臾離也. 若其可離, 則豈率性之謂哉. 是以, 君子之心, 常存敬畏, 雖不見聞, 亦不敢忽, 所以存天理之本然, 而不使離於須臾之頃也. 獨者, 人所不知而己所獨知之地也, 言幽暗之中, 細微之事, 迹雖未形而幾則己動, 人雖不知而己獨知之, 則是天下之事, 無有著見明顯而過於此者. 是以, 君子旣常戒懼, 而於此尤加謹焉. 所以遏人欲於將萌, 而不使其潛滋暗長於隱微之中, 以至離道之遠也.

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顔淵曰, 請問其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集註) 仁者, 本心之全德, 己謂身之私欲也. 禮者, 天理之節文, 爲仁者, 所以全其心之德也. 蓋心之全德, 莫非天理, 而亦不能不壤於人欲. 故爲仁者, 必有以勝私欲而復於禮, 則本心之德, 復全於我矣. 一日克復, 天下之人, 皆與其仁, 極言其效之甚速而至大也, 又言爲仁由己而非他人所能預, 又見其機之在我而無難也. 日日克之, 不以爲難, 則私欲淨盡, 天理流行, 仁不可勝用矣. 非禮者, 己之私, 勿者, 禁止之辭. 是人心之所以爲主, 而勝私復禮之機也. 勝私, 則動容周旋, 無不中禮, 而日用之間, 莫非天理之流行矣. ○ 程子曰, 非禮處, 便是私意, 如何得仁. 凡人須是克盡己私, 皆歸於禮, 方始是仁. ○ 謝氏曰, 克己須從性偏難克處, 克將去.

子曰, 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 (集註) 心操之則在此, 舍之則失去, 其出入無定時, 亦無定處, 心之神明不測, 危動難安如此. 程子曰, 心豈有出入, 亦以操舍而言耳. 操之之道, 敬以直內而已.

大學曰, 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章句) 心有不存, 則無以檢其身. 是以, 君子必察乎此, 而敬以直之, 然後此心常存, 而身無不修也.

公都子問曰, 鈞是人也, 或爲大人, 或爲小人, 何也. 孟子曰, 從其大體爲大人, 從其小體爲小人. 曰, 鈞是人也, 或從其大體, 或從其小體, 何也. 曰, 耳目之官, 不思而蔽於物, 物交物則引之而已矣. 心之官則思, 思則得之, 不思則不得也. 此天之所與我者. 先立其大者, 則其小者弗能奪也, 此爲大人而已矣. (集註) 官之爲言主也. 耳主聽, 目主視, 而不能思, 是以蔽於外物. 心則主思, 而外物不得蔽. 此耳目所以爲小體, 而心所以爲大體也. 耳目旣爲小體而蔽於物, 則亦一物耳, 以外物交於此物, 則引之而去必矣. 心雖大體而能不蔽於物, 然或不思則不得於理, 而耳目用事, 終亦不免爲物所引而去也. 此二者, 所以雖皆出於天賦, 而其大者, 又不可以不先立也.

荀子曰, 耳目口鼻, 能各有接, 而不相能也, 夫是之謂天官. 心居中虛, 以治五官, 夫是之謂天君. 聖人淸其天君, 正其天官. 又曰, 虛一而靜, 謂之淸明. 心者, 形之君也, 而神明之主也, 出令而無所受令. ○ 朱子曰, 心元有思, 須是人自家主張起來, 此最要緊.

孟子曰, 學問之道, 無他, 求其放心而已矣. (集註) 學問之事, 固非一端, 然其道則在於求其放心而已. 蓋能如是, 則志氣淸明, 義理昭著, 而可以上達. 不然則昏昧放逸, 雖曰從事於學, 而終不能有所發明矣. 故程子曰, 聖賢千言萬語, 只是欲人將已放之心約之, 使反復入身來, 自能尋向上去, 下學而上達也.

大學曰, 所謂修身在正其心者, 心有所忿懥則不得其正, 有所恐懼則不得其正, 有所好樂則不得其正, 有所憂患則不得其正. (章句) 忿懥, 怒也. 蓋是四者, 皆心之用而人所不能無者. 然一有之而不能察, 則欲動情勝, 而其用之所向, 或不能不失其正矣.

孟子曰, 盡其心者, 知其性也. 知其性, 則知天矣. 存其心․養其性, 所以事天也. (集註) 心者, 人之神明, 所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 性則心之所具之理, 而天又理之所從而出者也. 人有是心, 莫非全體. 然不窮理, 則有所蔽而無以盡乎此心之量. 故能極其心之全體而無不盡者, 必其能窮夫理而無不知者也. 旣知其理, 則其所從出, 亦不外是矣. 以大學之序言之, 知性則物格之謂, 盡心則知至之謂也. 存謂操而不舍, 養謂順而無害盡心. 知性而知天, 所以造其理也. 存心養性以事天, 所以履其事也. 不知其理, 固不能履其事, 然徒造其理, 而不履其事, 則亦無以有諸己矣.

朱子曰, 天者, 理之自然而人之所由而生者也. 性者, 理之全體而人之所得而生者也. 心則人之所以主於身而具是理者也. 天大無外, 而性稟其全, 故人之本心, 其體廓然, 亦無限量. 惟其梏於形氣之私, 滯於聞見之小, 是以有蔽而不盡. 人能卽事卽物, 窮究其理, 至於一日, 會通貫徹而無所遺焉, 則有以全其本然之體, 而吾之所以爲性, 天之所以爲天, 皆不外此, 而一以貫之矣. 伊川云, 盡心然後知性, 此不然. 盡字大, 知字零星. 性者, 吾心之實理, 若不知得, 却盡箇甚. ○ 先師曰, 六經中, 互言心性, 莫詳於此, 而程子首以心性一理之妙言之, 朱子又以本心全體之旨釋之, 則後世之將心對性, 判爲兩體者, 其亦不達於此矣.

孟子曰, 四十不動心. (集註) 四十, 彊仕君子道明德立之時. 孔子, 四十而不惑, 亦不動心之謂.

子曰,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集註) 從, 隨也.

新安陳氏曰, 聖人之心, 渾然天理, 無一毫私欲之累. 隨其心之所欲, 皆天理大用之流行.

程子曰, 心兮本虛, 應物無迹. ○ 張子曰, 天地之道, 無非以至虛爲實.

人須於虛中求出實. 聖人虛之至, 故擇善自精. 心之不能虛, 由有物礙, 凡有形物, 卽易壞. 惟太虛無動撓, 故爲至實. 詩云, 上天之載, 無聲無臭, 至矣.

朱子曰, 以理爲主, 則此心虛明, 一毫私意, 著不得. ○ 先師曰, 虛, 以此理之無形者言.

周子曰, 惟人也, 得其秀而最靈. 見太極圖說

朱子曰, 人物之生, 莫不有太極之道. 然陰陽五行, 氣質交運, 而人之所稟, 獨得其秀, 故其心爲最靈, 而有以不失其性之全, 所謂天地之心, 而人之極也. 圖說解 又曰, 最靈, 所謂純粹至善之性也, 是所謂太極. ○ 先師曰, 朱子嘗言, 靈底是心, 不是性, 而此則以靈爲性者, 分合之異也. 分言則性無爲而心有覺, 心本虛而性却實, 靈所以屬心也. 合言則心之體便是性, 而渾然是太極本然之妙, 靈所以爲性也.

周子曰, 厥彰厥微, 非靈不瑩.

朱子曰, 此言理也. 陽明陰晦, 非人心太極之至靈, 孰能明之. 又曰, 彰言道之顯, 微言道之隱, 彰與微, 須靈乃能了然照見, 無滯礙. 此三句, 是言理.

朱子曰, 虛靈, 自是心之本體, 非我所能虛也. 耳目之視聽, 所以視聽, 卽其心也, 豈有形象. 然有耳目以視聽之, 則猶有形象也. 若心之虛靈, 何嘗有物.

勉齋黃氏曰, 心之能爲性情之主宰者, 以其虛靈知覺也. 此心之理, 炯然不昧者, 亦以其虛靈知覺也. ○ 先師曰, 心之本體, 卽太極之在人者也. 道之太虛, 性之最靈, 方可當之. 故朱子以所以視聽者言之.

朱子曰, 知覺便是心之德. 又曰, 知覺乃智之事.

朱子曰, 智便是收藏底, 其智愈大, 其藏愈深. 智便是截然, 更是收斂. 如知得是, 知得非, 知得便了, 更無作用, 不似仁義禮三者有作用. 智只是知得了, 便交付惻隱․羞惡․辭讓三者. 他那箇更收斂得快.

朱子曰, 知則人之神明, 妙衆理而宰萬物者也.

問, 知是心之神明, 似與所謂智不同. 朱子曰, 此知字, 又大然. 孔子多說仁智. 四端仁智最大, 智之所以爲大者, 以其有知也. 問, 何謂妙衆理. 曰, 大凡道理, 皆是自有之物, 非從外得. 所謂智者, 便只是理, 才知得, 便只是知得我底, 非是以我之知去知彼道理也. 道理固本有用, 知方發得出來. 若無知道理, 何從而見. 才知得底, 便是自家先有底道理, 所以謂之妙衆理, 猶言能運用衆理也. 運用字有病, 故只下得妙字. ○ 問, 知, 如何宰物. 曰, 無所知覺, 則不足以宰制萬物, 要宰制他, 也須是知覺. ○ 格菴趙氏曰, 知是識其所當然, 覺是悟其所以然.

程子曰, 天專言之則道也, 以主宰謂之帝. ○ 朱子曰, 心若不存一身, 便無所主宰.

朱子曰, 天下莫尊於理, 故以帝名之. 惟皇上帝降衷于下民, 降便有主宰意. ○ 又曰, 以天命之性觀之, 命是性, 天是心, 心有主宰之義. 然不可無分別, 亦不可太開. 成兩箇, 當熟玩而黙識其主宰之意. ○ 又曰, 心固是主宰底, 所謂主宰者, 卽此理也. 不是心外別有箇理, 理外別有箇心, 人字似天字, 心字似帝字. ○ 先師曰, 理之在天爲萬化之主宰, 故謂之帝. 心之在人爲一身之主宰, 故謂之天君. 曰帝曰君, 皆莫尊之稱也. 心以理之總會者言, 性以理之各具者言, 此心性之別也. 泛言心則兼理氣, 而言主宰則單指理, 猶泛言天則兼理氣, 而言帝則只是理. 非心自爲一物, 性自爲一物, 而各有地頭也.

朱子曰, 敬者, 一心之主宰, 萬事之本根.

朱子曰, 聖人, 定之以中正仁義, 而主靜, 正是要靜定其心, 自作主宰. ○ 又曰, 聖人專是道心主宰, 故人心自是不危. 又曰, 敬, 則心有主宰而無偏繫. ○ 先師曰, 主宰之實理, 本受於天, 而主宰之工夫, 專在於人, 則心固一身之主宰, 而敬爲一心之主宰也. 主靜以養動, 主一以應萬, 主內以制外, 主理以檢氣, 皆敬之事也. 肅然如畏, 烔然不亂, 勿忘勿助, 爲其節度, 弗貳弗參, 爲其準則, 然, 主敬之方, 不待著情安排, 一循其天則而已.

盧伊齋曰, 敬者一而已矣. 李子曰, 公曾見, 朱子能與所能之說乎. 今以其說, 揆之於此, 如敬卽所謂能也, 一則所能之謂也, 而一上著主字, 或一下著之字, 乃可謂能耳. 然則, 其曰敬者, 一而已者, 非以能爲所能之病乎.

愚按, 能所二字, 出於禪語, 而朱子答呂子約書詳之, 李子引而發明之, 學者, 苟能知能所之意, 其於心學, 可庶幾焉. 朱子曰, 人之爲學, 心與理而已. 蓋心是在我底, 是屬能, 理是在物底, 是屬所. 觀於看花折柳之說, 可知也. 或者, 以看折屬氣, 花柳屬理, 是不察於心與理爲一之旨者也.

李子答李叔獻書曰, 心學圖所論諸說, 尤未敢聞命, 而如叔獻說, 是當時程氏之爲是圖, 何異於癡人前說夢耶. 彼世之見未透, 而好功人者云云, 固不足怪. 不意, 叔獻高明脫洒之見, 亦如是, 拘拘率滯於看此圖也. 使程氏爲之言曰, 欲全其道心者, 必先有大人心, 欲其有大人心者, 必先得其本心. 又曰, 欲求放心者, 必先要心在, 欲要心在者, 必先要克復云爾, 則叔獻如是出氣力, 功辯而欲去之, 可也. 今其說止於云云, 則豈盡以用工之次, 一一分先後, 如叔獻所攻者耶. 其心圈上下右左六箇心, 只謂聖賢說心, 各有所指有如此者, 以其本然之善, 謂之良心, 本有之善, 謂之本心, 純一無僞而已, 謂之赤子心, 純一無僞而能通達萬變, 謂之大人心, 生於形氣, 謂之人心, 原於性命, 謂之道心, 於是, 以良心本心, 其義類相近故, 對置諸上左右, 赤子心大人心人心道心, 以其本語之相對故, 對置諸中下左右. 此六者, 正如朱子以西銘前一段爲棊盤者, 同焉. 當其說棊盤時, 安有工夫之可分先後耶. 故程氏自說止如此, 未嘗及於工夫功效先後之說. 今來諭云云, 豈不爲程氏所笑耶. 大人心, 若與人較, 功效爭高下. 孟子, 豈與赤子並稱之耶. 只是就見成底大人上, 指言其心之如此. 故朱子嘗曰, 赤子之心, 純一無僞, 大人之心, 亦純一無僞, 但赤子, 是無知無能底純一無僞,  大人, 是有知有能底純一無僞. 今須以此等說, 而細思之, 則可知程圖意, 非謂大人之工夫地位, 當在此, 只謂心之爲物, 在赤子何, 在大人如何, 以見聖賢論心如此. 如此欲人從這邊體認, 從那邊潛玩, 體認潛玩之多般, 庶幾交相證驗, 融會貫通, 而識心之體用, 以爲精一 以下用工之地爾. 某, 少時得心經, 而愛此圖. 然於六心字處, 未有所領會, 疑晦之端, 不去於心久矣. 十餘年前, 始得林隱本圖本說而讀之, 方悟其精微之意. 蓋以六心兩下分說, 其理趣脈絡, 自然分明貫穿, 而不涉於工夫功效先後等之說, 其見非淺淺, 恐未易以率然立論陵駕之也. 自惟精惟一以下, 方說做工夫底, 亦猶西銘後一段, 下棊子處一般也.其以遏人欲存天理, 爲相對工夫, 叔獻亦非之. 然此之相對, 匪今斯今, 其來尙矣. 眞西山亦云, 克治存養, 交致其功, 於此對說, 何爲而不可乎. 其爲工夫也, 精一盡矣, 戒懼謹獨, 又密矣. 孔子之說爲仁以克復, 孟子之論夜氣以操存, 亦已足矣. 擧此數者, 而徑以從心不動心終之, 奚不可也. 所以必歷擧其餘而言之者, 是豈謂必由於此一層, 而至於彼一層, 又以彼一層爲梯級, 而又上至第幾層耶. 蓋以爲聖賢論心法處, 不止一端, 或以爲如此, 或以爲如彼, 歷指而示人, 以爲皆不可不知, 皆不可不用功力云爾. 其從上排下, 亦以其作圖之勢, 有不得不然者, 非謂其如大學條目之有工程先後也. 故程氏之說, 但擧愼獨以下, 爲遏人欲工夫, 而終之以不動心, 戒懼以下, 爲存天理工夫, 而終之以從心而已. 何嘗曰, 欲爲某者, 必先爲某, 或先由某而後至某也耶. 其求放心之在第四, 此中學者, 亦有詆訾之者, 大抵此三字, 以略綽之見, 粗疎而論, 必皆如來諭之云, 非但今時之論如此, 前賢之論, 亦有如此者, 然若其理其事止於此而已. 孟子, 當言曰, 學問之始, 當求其放心, 足矣, 何得謂學問之道無他云云耶. 明道, 又當曰, 聖賢敎人, 其初, 且欲人將已放之心云云, 足矣, 何得曰, 聖賢千言萬語, 只是欲人將已放之心約之, 使反復入身來耶. 今若將此句, 只作泛泛粗粗, 爲學者始初路頭, 一番過關底, 過此以後, 都作筌蹄看, 不與於吾精底工夫, 則是孟子學問無他之語, 明道千萬只是之說, 皆爲孟浪誑人底說矣. 若謂到顔子地位, 工夫已精細, 無復有一毫放心之可言, 則纔差失, 便能知之說, 著不得矣. 惟聖罔念作狂者, 實無其事, 而聖人謾爲虛設之辭, 以誣天下後世人矣, 而自古聖人賢人, 其學已至, 其地位已高, 則便可安意肆志, 無復戰兢臨履底心矣. 朱子平日, 每每爲學者, 擧道性善章, 及此章, 以勉勵之者, 未知其意, 只欲學者之於始也, 泛泛粗粗, 姑假此一段工夫, 以爲一宿過去之蘧廬耶. 抑以爲始之固在此, 終之亦以此, 以爲了得聖賢千言萬語底基址田地也. 故某妄以爲斯語也. 略綽粗擧而言, 因以揆之於此圖, 固有如或者之疑. 若以孟子明道之語, 推其極而細論之, 顔子之不遠復, 亦可以擬言於此矣. 然則程氏叙此之意, 亦不當遽加貶駁也. 至如心在心思盡心正心之易置, 則如來說亦似有理. 然心非省察, 何由而在思而立乎大. 豈不是涵養, 則二者所屬, 初亦無礙, 忿懥恐懼等, 一有之而不能察, 則欲動情勝云云, 則正心, 豈必偏屬於涵養乎. 盡心, 雖云屬知, 此圖, 非分知行, 只分遏人欲與存天理耳. 盡心之訓曰, 極其心之全體, 而無不盡者, 必其能窮理, 而無不知也. 以此屬之理一邊, 豈有不可, 程氏之分屬, 意或如此乎. 故某竊以謂前賢著述之類, 如或有義理, 大段乖謬, 誤後人底, 不得不論辯, 而歸於正矣. 若今所論彼本不謬, 而我見未到, 固不宜强作議論, 而欲去取之. 或微文精義, 分屬彼此之間, 兩行不悖處, 且當從其見成底, 毋爲動著, 仍須把來, 點檢得此件事於自家這裏有無能否如何, 而日加策勵之, 是爲要切, 必欲爲你洗垢素瘢, 而爲之移易去取, 恐非急務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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