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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경재잠도(第九敬齋箴圖)

경재잠(敬齋箴)


  의관을 바로하고 눈매를 존엄하게 하고, 잠심(潛心)하여 거처하면서 상제(上帝)를 대해 모시듯 하라. 발짓은 무겁게 하고, 손짓은 공손하게 하여 땅을 골라 밟되 개미 둑에서 구비 돌듯이 하라. 문을 나가면 손님 같이 하고 일을 받들면 제사를 드리듯 하여 조심조심 두려워하여 감히 잠시도 안이하게 하지 마라. 입을 지키기를 병마개 막는 것처럼 하고 집 생각을 막기를 성문 지키듯이 하여 성실하고 진실하여 감히 잠시도 경솔하게 하지 마라. 동으로써 서로 가지 말며, 남으로써 북으로 가지 말고1), 일에 당하여 보존하고, 다른 데로 가지 마라. 두 가지 일이라고 두 갈래로 하지 말고, 세 가지 일이라고 세 갈래로 하지 마라2). 마음을 전일하게 하여 만 가지 변화를 살펴라. 이것에 종사함이 경(敬)을 지킴이니 동(動)에나 정(靜)에나 어기지 말고, 밖이나 안이나 서로 바르게 하라. 잠시라도 틈이 나면 만 가지 사욕이 불길이 없어도 뜨거워지고3) 얼음이 없이도 차가와 진다4). 털끝만큼이라도 틀림이 있으면 하늘과 땅이 뒤바뀌고 삼강(三綱)이 무너지고 구법(九法)5)이 퇴폐한다. 오오, 아이들이여! 생각하고 조심하라. 먹글[墨卿6)]로 써서 경계하여 감히 마음[靈臺]에 아뢰노라.

    주자가 말하였다.

    주선(周旋)이 규(規)에 맞는다고 함은 회전할 때에는 그 둥긂[圓]이 컴퍼스에 맞는 것처럼 되길 바란다는 것이고, 꺾을 때 구(矩)에 맞는다고 함은 꺾어 돌 때 그 모남[方]이 곧은 자에 맞는 것처럼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의봉(蟻封)’이란 개미 둑이다. 옛 말에, ‘말을 타고 개미 둑 사이로 굽어서 돌아갔다.’고 하는데, 그것은 개미 둑 사이의 길이 구부러지고 좁아서 말을 타고 그 사이를 절도를 잃지 않고 꼬불꼬불 달려 돌아간다는 것이 바로 어려운 일임을 말한 것이다.

    입 다물기를 병마개 막듯[守口如甁]이 한다는 것은 말을 망령되게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고, 잡념 막기를 성을 지키듯[防意如城] 한다는 것은 사악한 생각이 일어남을 막는다는 것이다.

    또 주자가 말하였다.

    경(敬)은 모름지기 하나를 주로 해야 한다. 본래 하나의 일이 있던 데에 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되고, 본디 하나가 있던 데에 둘을 더하면 셋이 된다. 잠깐 사이란 때를 말함이고, 터럭만큼의 차이란 일을 말함이다.

    임천 오씨가 말하였다.

    이 잠(箴)은 모두 10장으로 되어 있는데, 한 장은 4구씩이다. 첫째 장은 정(靜)할 때에 어김이 없는 것을 말함이고, 둘째 장은 동(動)할 때에 어김이 없는 것을 말함이다. 셋째 장은 표(表)의 바름을 말한 것이고, 넷째 장은 이(裏)의 바름을 말한 것이다. 다섯째 장은 마음이 바로잡혀 일에 통달하는 것을 말하였으며, 여섯째 장은 일에 집중하되 마음에 ??을 둘 것을 말하였다. 일곱째 장은 앞의 여섯 장을 총괄한 것이며, 여덟째 장은 마음이 흐트러지는 폐단을 말한 것이다. 아홉째 장은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폐단을 말한 것이고, 열째 장은 한편을 총괄적으로 결론지은 것이다.

    서산 진씨가 말하였다.

    경(敬)에 대한 뜻은 여기서 더 이상 남김이 없게 되었다. 성학(聖學)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것을 잘 되풀이해야 할 것이다.


  위의 〈경재잠(敬齋箴)〉제목 아래에 주자(朱子)가 자서(自敍)하여 말하기를, “장경부(張敬夫)7)의〈주일잠(主一箴)〉을 읽고, 그 남은 뜻을 주워 모아 〈경재잠〉을 지어 재실(齋室)의 벽에 써 붙이고 스스로 경계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이것은 경의 조목으로서 여러 지두(地頭)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臣)은 지두라는 말이 실제 공부에 있어서 좋은 의거(依據)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금화(金華)의 노재 왕백(魯齋 王柏)8)이 지두를 배열하여, 이 그림을 그려서 명백하고 짜임새가 있게 하여 다 낙착됨이 있게 하였으니, 일상생활을 하며 마음의 눈을 체험․음미하고, 경성(警省)하여 얻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경(敬)이 성학의 시작과 끝이 된다는 말을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


부록(附錄)


    정자(程子)가 말하였다.

    ‘단지 가지런하게 하고 엄숙하게[整齊嚴肅]만 하면 마음이 문득 한결 같으며, 마음이 한결 같으면 저절로 어긋난 간섭이 없다.’고 한 이 말뜻은, 함양(涵養)을 오래 동안 하면 천리(天理)가 저절로 밝아진다.

    주자(朱子)가 말하였다.

    경(敬)을 유지하는 도는 많은 말이 필요 없다. 다만 가지런하게 하고 엄숙하게 함[整齊嚴肅], 엄숙하게 위엄을 지키고 근엄하게 삼감[嚴威儼恪], 움직이는 모습[動容貌], 생각을 정리함[整思慮], 의관을 바로 함[正依冠], 받들어 바라봄[尊瞻視], 이들 몇 말을 깊이 음미해서 실제로 노력을 더하면, 마음을 정직하게 하느니[直內], 한가지에 주력하느니[主一] 하는 것이 저절로 힘들이지 않고도 안배되어, 몸과 마음이 숙연해지고 겉과 속이 한결 같아질 것이다.

    모름지기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위에서 노력해 나아가야 된다. 대개 사람의 마음은 형체가 없으며, 나고 듦에 정(定)함이 없다. 모름지기 법도[規矩繩墨] 위에서 수정(守定)해야, 문득 저절로 안과 밖이 드러나게 된다. 어찌 마음속에는 방벽(放辟)하고 사치(邪侈)로움이 있으면서, 참으로 밖으로는 바른 모습과 삼가는 예절이 있겠는가? 또 방벽사치(放辟邪侈)는 바로 장정제숙(莊整齊肅)과 서로 반대가 된다. 진실로 장정제숙(莊整齊肅)을 할 수 있으면 방벽사치(放辟邪侈)는 결단코 용납할 곳이 없음을 알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공부함에 지극히 요약’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한 가지 일로 증험해 보면, 점잖게 단정히 앉아 일을 함에 공경하고 삼갈 때 이 마음이 어떠한가? 게으르고 퇴미(頹靡)할 때에 이 마음이 어떠한가? 여기에서〈마음을〉살펴보면, 안과 밖이 처음에는 서로 벗어나지 않으니, 장정제숙(莊整齊肅)이라는 것은 바로 그 마음을 보존하는 것이다.

    정자가 말하였다.

    주일(主一)함을 일러 경(敬)이라 하고, 무적(無適)함을 일러 일(一)이라 한다.

    문(問): 경(敬)은 주일(主一)이 아니다.

    주자가 말하였다. 주일(主一)은 다만 경(敬)자로 풀이이다. 일에 크고 작음이 없이 항상 자기의 정신과 생각을 모두 여기에 두게 하여, 일이 있을 때에도 이와 같으며, 일이 없을 때에도 또한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문(問): 동(動)하면서 두 셋의 섞임이 없는 것은 이 일(一)을 주장함이요, 정(靜)하면서 사특하고 망령된 생각이 없는 것은 또한 이 일(一)을 주장함이다. 주일(主一)은 동정(動靜)을 아울러 말한 것이다.

    답(答): (그 말이) 맞다.

    어떤 이가 말하였다.

    주일(主一)은 한 가지 일을 주관함이 아니다. 예를 든다면 하루에 만 가지 기미가 모름지기 아울러 일어나기 바라면서 말하기를, ‘하루에 만 가지 기미’라고 하지만, 또한 아울러 응하는 도리가 없고, 모름지기 또한 한 가지 일을 쫓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물었다.

    이천(伊川)이 말하기를, “한 가지 일에 집중하여 다른 데로 빠지지 않는다[主一無適].”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항상 살아서 두루 사방으로 흐르기를 끝없이 하여 한 곳에 정체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데, 어떤 사람이 의심하기를, ‘정체하면 두루 흐르기가 무궁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한 가지 일에 집중하면 이 마음이 문득 존재한다. 마음이 있으면 사물이 와서 순응하니, 무슨 정체함이 있겠는가?

    대답하였다.

    참으로 옳다. 그러나 주일(主一)이라고 하는 것이 어찌 일찍이 한 가지 일에 빠진 적이 있었는가? 주일 하지 않으면 바야흐로 이 일을 이해하지만, 마음이 저 일에 머물러 있으니, 이것이 도리어 한 모퉁이에 빠진 것이다.

    또 물었다.

    바야흐로 이 일에 반응함이 끝나지 않았는데, 다시 한 가지 일에 이름이 있다면 마땅히 어찌 해야 합니까?

    답하였다.

    또한 모름지기 한 가지 일을 주로 하면서 또 한 가지 일을 이해해야 또한 뒤섞여 응답하는 이치가 없다. 그러나 대단히 마지 못한다면, 그 경중(輕重)을 따지는 것이 옳을 것이다.

    화정 윤씨가 말하였다.

    경(敬)에 무슨 형체와 그림자가 있는가? 다만 마음과 몸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곧 주일(主一)이다. 예를 들자면, 사람이 신사(神祠)에 이르러 치경(致敬)할 때에 그 마음이 수렴(收斂)하여 붙어 털끝만큼의 일도 얻지 못하니, 주일(主一)이 아니면 무엇인가?  

    주자(朱子)가 말하였다.

    마음이 이 한 일을 주장하면, 다른 일로 어지럽지 않아서, 문득 한 가지 사물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 마음이 모두 한 사물에 집착하지 않고 문득 거두어들인다. 사람이 신사(神祠)에 들어간 때에는 집착하여 사소한 일에 집착하지 않고 공경만이 있는데, 이것이 가장 친절하다. 지금 사람들이 만약 이 마음을 오로지 한결같이 하여 긴밀함을 거두어들인다면, 전혀 (마음에) 빈틈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이 일에 대한 생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또 다른 방법을 해 나간다면 마음이 문득 두 갈래로 갈라지게 된다.

    사람의 정신이 날아올라 마음이 가슴 안에 있지 않다면 문득 일을 해치게 된다.

    사람은 모름지기 몸과 마음을 거두어 들여서 정신이 항상 이 안에 있게 해야 함이 마치 백․십 근 나가는 짐을 들고 있는 것과  비슷하니, 반드시 근육과 뼈를 단련시켜서 들어야 한다.

    대개 마음을 거두어들이면 여기에서 문득 이미 팔․구 푼은 이루었다. 그러나 도리(道理)가 막힘이 있는 것을 보니, 곧 여기에서 배우게 됨을 이해한다. 또 오로지 이 한 가지 일을 이해하고자 하면, 다만 한 가지 일만 이해한다. 길을 갈 때에는 마음이 문득 길 위에 있으며, 앉아 있을 때는 마음이 곧 앉은 자리 위에 있을 따름이다.

    문(問): 공부를 시작한다.

    답(答): 다만 이 마음을 수렴(收斂)해서, 마음이 달아나게 해서는 안 된다. 만약에 외부로 바람이 불어 풀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 가서 그것을 보고, 많은 마음이 가서 그것에 응하는 것을 아니, 또한 마음을 수렴하지 않음이다. 주일(主一)은 경이 덕을 드러낸 것이니, 다만 마음을 수렴해야 한다. 종묘(宗廟)에서는 경건(敬虔)하고, 조정(朝廷)에서는 엄숙(嚴肅)하며, 집안에서는 화목한 것이 곧 경(敬)을 유지하는 것이다.

    상채 사씨가 말하였다. “경(敬)이란 것은 항상 깨어 있는 법[常惺惺法]이다.”

    주자(朱子)가 말하였다.

    깨어 있다는 것은 곧 마음이 어둡지 않음을 가리킨다. 이것이 바로 경(敬)이다. (마음을)가지런하게 하고 엄숙하게 하는 것이 진실로 경(敬)이다. 그러나 마음이 만약 어두워서 이치를 밝힘이 밝지 않다면, 비록 억지로 붙잡았다고 해도 어찌 경(敬)이 될 수 있겠는가?

    학문이란 모름지기 경계하고 살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서암사(瑞巖寺)의 중이 매일 묻기를, “네 주인은 깨어 있는가?”라고 하니, 스스로 대답하기를, “깨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요즈음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 사람만도 못하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불가에서도 또한 이러한 말이 있습니까?”

    대답하였다. “그들도 마음을 불러 일으켜 깨어 있게 한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그 도를 행하는 데 있어서는 다르다. 우리 유가에서는 이 마음을 불러 일깨워서 수많은 도리를 밝게 살피고, 불가(佛家)에서는 헛되이 일깨우는 것이 있기는 하나 아무런 일삼는 바가 없다. (유가와 불가의)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지금 사람의 마음이 공경히 여기에 있어, 여전히 게으른 기운이 없거늘, 하물며 항상 깨어 있을 수 있는 사람에 있어서랴? 그러므로 마음이 항상 깨어 있으면, 저절로 딴 생각이 없어진다.

    문(問): 먼저 경(敬)을 지탱하여 이 마음으로 하여금 깨어 있게[惺惺] 하면 바야흐로 사물을 응접(應接)할 수 있습니까?

    답(答): 그렇지 않다.

    또 문(問): 모름지기 사물상(事物上)에 가서 구해야 합니까?

    답(答): 그렇지 않다. 만약에 사물이 없을 때는 사물에 나아가서 이해할 수 없다. 사물이 없을 때 그대는 무엇을 하겠는가?

    문(問): 가지런하게 하고 엄숙하게 하면[整齊嚴肅] 오로지 마음을 주관하고, 상채(上蔡)9)가 주장한 깨어 있음은[惺惺] 오로지 일에 힘쓰는 것이다.

    답(答): 두 가지 설(說)은 내외를 분간하기 어렵다. 모두 자기의 마음상의 공부니, 일에서 어찌 가지런히 하고 엄숙[整齊嚴肅]하지 않을 수 있으며, 고요한 곳에서 어찌 항상 깨어 있지(常惺惺) 않을 수 있겠는가?

    마음이 이미 항상 깨어 있고, 또 규범으로 마음을 검속하면, 이것이 내외(內外)를 서로 기르는 도(道)이다.

    문(問): 세 선생10)이 경(敬)을 말한 것이 다르다.

    답(答): 이 방이 사방 어느 쪽으로도 모두 들어올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약에 어느 한 쪽으로 들어와서 여기에 이르면, 다른 세 방향으로 들어온 곳이 모두 그 안에 있다.

    문(問): 총괄하여 말하면, 항상 이 마음으로 하여금 항상 존재하게 할 수 있는가?

    답(答): 그 실제는 일반(一般)인데, 다만 가지런하게 하고 엄숙하게 하는[整齊嚴肅] 뜻을 문득 나누어 이해했다. 가지런하게 하고 엄숙하게 하면, 이 마음이 문득 존재하여 능히 깨어 있을[惺惺] 수 있다.  겉모습이 가지런하고 엄숙하지 않다면, 마음속이 깨어 있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한 시간 동안 겉모습이 가지런하고 엄숙하게 하면 한 시간 동안 깨어 있고, 한 시간 동안 마음을 흐트러뜨려 놓으면, 문득 마음이 어둡고 게으르게 된다.     

    주자가 말하였다. “경(敬)의 의미는 외경(畏敬)의 뜻에 가깝다.”

    주자가 말하였다.

    경(敬)은 온갖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일에 따라 오로지 삼가고 두려워하여 흐트러뜨려 게으르지 않아야만 할 따름이다. ‘경(敬)’자의 의미는 ‘외경(畏敬)’에 가깝다. 오로지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서 귀는 듣지 않고, 눈으로는 보지 않아 사물을 접하지 않은 뒤에 경(敬)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거두어들여서, 함부로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이 바로 경(敬)이다.

    면재(勉齋) 황씨(黃氏)11)가 말하였다.

    사람의 마음이 항상 숙연해서 어지럽지 않고, 밝아서 어둡지 않으면, 고요해서 이(理)의 체(體)가 존재하지 않음이 없고, 감응해서 이(理)의 용(用)이 행하지 않음이 없다. 오직 허령지각(虛靈知覺)하기만 하면, 이미 기(氣)에 갇히지 않을 수 없고, 욕(欲)에 움직이지 않을 수 없으니, 장차 기(氣)에 가리고, 욕(欲)에 어지럽게 된다. 이 경(敬)의 뜻은 나가서 섬[所出而立]에 두려워하고 삼가서, 언제나 귀신과 부모, 선생님이 자기의 위에 계시는 것 같이 하고, 깊은 못이나 얇은 얼음[深淵薄氷]이 자기 (발) 밑에 있는 것과 같이한다면, 허령지각(虛靈知覺)이 스스로 혼미함과 난잡함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선사(先師)께서 말씀하셨다. “경(敬)자의 의미가  오직 외경에 가깝다. 대개 경(敬)은 이 마음이 숙연(肅然)해서 두려워함이 있는 것을 가리킨다. 두려워하면 마음이 주일(主一)하게 된다. 종묘(宗廟)에 들어가거나, 군부(君父)를 뵐 때 저절로 잡념이 없는 것과 같다.”

    주자가 말하였다. “경(敬)은 다만 이 마음이 스스로 주재(主宰)하는 것이다.”

    문(問): 마음을 스스로 잡지 못한다.

    주자(朱子)가 대답하였다.

    본디 이와 같다. 대개 마음이 능히 자기를 잡을 수 있으면, 자기가 도리어 어떻게 잡아 그것을 얻겠는가? 오직 의리(義理)로써 함양(涵養)함에 있을 따름이다.

    경(敬)은 사람을 채찍질하는 것이다. 사람이 방자하고 게으른 때에 경(敬)하면, 문득 채찍질하여 이 마음을 일으킨다. 항상 이렇게 할 수 있으면, 비록 조금의 흐트러지고 간사하고 사치스러운 마음이 있어도 또한 스스로 물러나게 된다.

    사람이 학문함에 온갖 단서들이 어찌 본령(本領)이 없을 수가 있겠는가? 이는 정(程)선생이 경을 지탱[持敬]한다는 말이 있게 된 까닭이다. 다만 이 마음을 다잡아 밝게 빛나게 하면, 일에 있어서 오래도록 굳세고 힘이 있는 것을 보지 않음이 없다. 

    주자가 말하였다. “경(敬)은 동정(動靜)을 두루 통하여 실행한다.”

    주자가 말하였다.

    배우는 사람이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에 경(敬)을 위주로 한다. 느끼고 느끼지 않음을 막론하고, 평소에 항상 이와 같이 함양(涵養)하면 착함의 단서[善端]가 피어나 저절로 밝게 드러나서, 중간에 끊어짐이 적다. 살펴 마음을 잡고 성을 기를 줄[存心養性] 알아서 이것을 확충하면, 모두 힘을 발휘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문(問): 미발(未發)한 처음에 착하지 않은 단서를 곧 없애버리면 쉽게 힘쓸 수 있거니와, 만약에 발(發)한 뒤라면 다스리기 어렵다.

    답(答): 성현의 논의는 발한 곳[發處] 나아가 다스리려고 한다. 오직 자사(子思)가 말하기를, “희(喜)․노(怒)․애(哀)․락(樂)의 감정이 발하지 않음을 가리켜 중(中)이라 한다.”고 하였다. 공자나 맹자는 사람들을 가르침에 발(發)한 곳에 따라 말한 것이 많다. (감정이) 일어나지 않은 때는 진실로 함양(涵養)함이 이루어지지 않고, 감정이 일어난 뒤에는 모두 관여하지 않는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이것이 가장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자 대답하기를, “이 또한 어렵지 않다. 다만 하나의 선과 악을 분명히 깨달으면 날마다 일을 맞아 체험하게 되고, 보는 것이 선하게 된다. 이것을 좇아 보존하고 기르면 자연히 나쁜 곳에 나아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경(敬)’자는 모름지기 동정을 관통해야 한다. 방향을 보고 방향을 알고, 일이 없을 때 마음을 보존하여 해이해지지 않은 것이 진실로 경(敬)이다. 그 외물에 응함에 이르러 주고받음이 어지럽지 않은 것이 또한 경이다. 따라서 “경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 단정하고 엄숙하기가 무엇을 생각하는 것 같이 한다12).”라고 하였고, 또 “일을 생각하여도 경(敬)하고, 일을 맡아도 경(敬)한다.”고 하였으니, 어찌 반드시 마음을 잡아 좌선(坐禪)하는 것을 일러 경(敬)으로 하겠는가?

    문(問): 경(敬)은 동정을 통하여 실행하나, 정(靜)할 때는 적고 동(動)할 때는 많으니, 쉽게 어지러울까봐 염려스럽다.

    답(答): 어찌 모두 정(靜)할 수 있겠는가?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반응해야 한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일이 없을 때가 없다. 일이 자신의 앞에 이르렀는데, 자기 자신은 도리어 정(靜)하고자 해서 우두커니 있으면서 반응하지 않으면, 이 마음이 모두 죽은 것이다. 일이 없을 때 경(敬)함이 마음속에 있지만, 일이 있을 때는 경(敬)함이 일에 있다. 일이 있으나 없으나, 나의 경(敬)함은 중간에 끊어짐이 없었다. 또 손님을 접대할 때에 경은 손님을 접대하는 데에 있다. 손님이 간 뒤에도 경은 또한 이 가운데 있다. 만약에 손님을 싫고 귀찮아해서 마음을 괴로워하면, 이 마음은 도리어 어지러워지니, 경(敬)한다고 하지 못한다. 따라서 정자가 말하였다. “배움이 전일(專一)함에 이를 때 곧 좋다.” 대개 전일(專一)하면 일이 있고 없고 간에 모두 이와 같다.

    주자(朱子) 〈명당실기〉에서 말하였다.

    회당(晦堂)은 (내가) 평소에 거처하는 곳이다. 집 양쪽에 있는 곁방에 한가한 날에는 묵묵히 앉아 있거나 그 사이에서 독서하였는데, 그 왼쪽 방을 ‘경재(敬齋)’라 하고 오른 쪽 방을 ‘의재(義齋)’라 하여 그곳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일찍이 주역을 읽고 두 마디 말을 얻었으니, 즉 경(敬)으로써 내면을 정직하게 하고[敬以直內], 의(義)로써 겉으로의 행동을 방정하게 함이다. 이것으로 학문하는 요점을 삼았으니, 이와 바꿀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공부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였는데, ꡔ중용ꡕ을 읽음에 이르러 수도(修道)의 가르침을 논한 내용과 반드시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한 것을 본 뒤에 경(敬)을 지키는 근본을 얻었다. 또 《대학》을 읽고 덕을 밝힌 순서를 논한 내용과 반드시 격물(格物)․치지(致知)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본 뒤에 의(義)를 밝히는 단서를 깨달았다. 그리고 무릇 두 가지 일에 한번 동(動)하고 한번 정(靜)함에 따라 서로 용(用)이 되고, 또 주렴계의 ‘태극론’과 부합함이 있다는 것을 본 뒤에 천하의 이치가 어둡거나 밝거나, 크거나 작거나, 멀거나 가깝거나, 깊거나 얕거나 간에 하나로 관통하지 아니 함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즐거운 마음으로 완상하면 내 몸이 다하더라도 싫증나지 않을 것이니, 또 바깥에 있는 것을 그리워할 틈이 어디 있겠는가?” 생각하건대 이 경재(敬齋)는 곧 잠(箴)의 제목이다.

    남헌장씨(南軒張氏)가 〈주일잠(主一箴)〉에서 말하였다.

    사람이 하늘의 성질을 받아, 그 태어남이 곧다. 능히 삼가 떳떳하여, 사특함이 있지 아니함을 본받았네. 사물에 감응함에, 아침저녁으로 어지럽다. 행동함에 절도가 없고, 도(道)를 낳음에 간혹 그친다. 오직 배움이 요긴하여, 경(敬)을 지탱하여 잃지 않는다. 그것을 징험하여 잡고 버리니, 마침내 나고 듦을 안다. 어떻게 경을 할까, 그 묘책은 한 가지에 주력[主一])함에 있다. 어떻게 한 가지에 주력할 수 있는가? 오직(마음이) 다른 곳으로 가지 않음에 있다. 안거함에 지나친 생각을 하지 않고, 일은 다른 데에 미치지 않는다. 마음속에서 함영(涵泳)하여, 잊지도 않고 서두르지도 않는다. 잠시 눈 깜짝할 사이라도, 보존하고 쌓는다. 이미 오래되어 가지런해지면, 지극함에 이른다.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않으면, 성현을 본받을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하건대, 이 잠(箴)은 곧 주자가 스스로 서술하여 일컬은 것이다.



 


1) ‘주일무적(主一無適)’의 ‘무적(無適)’을 뜻하는 말이다.


2) ‘주일무적(主一無適)’의 ‘주일(主一)’을 뜻하는 말이다.


3) 열화(熱火)처럼 화내고 초조해 하는 것을 묘사한 말이다.


4) 우구(憂懼)․전율(戰慄)을 묘사한 말이다.


5) 《서경(書經)》권에 실려 있는〈홍범구주(洪範九疇)〉를 가리킨다.


6) 묵경(墨卿)은 먹을 의인화 하여 부르는 말이다.


7) 장경부(張敬夫: 1133~1180), 이름은 식(栻), 호는 남헌(南軒)이고, 경부는 자인데 또 흠부(欽夫)라고도 한다. 주자가 매우 존경하는 벗이었다.


8) 노재 왕백(魯齋 王柏, 1197~1274)), 남송(南宋) 때의 학자. 자는 회지(會之), 초호(初號)는 장소(長嘯)였는데 뒤에 노재(魯齋)로 고쳤다. 주자의 삼전(三傳) 제자로, 시와 그림에 능했으며《서의(書疑)》․《시의(詩疑)》노재집(魯齋集)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9) 사량좌(謝良佐)를 가리킨다. 자는 현도(顯道), 상채(上蔡) 출신, 정자(程子)의 고제(高弟)이다.


10) 세 선생은 정이(程頤), 윤돈(尹焞), 사량좌(謝良佐)를 가리킨다.


11) 송(宋)대 사람. 이름은 간(榦)이고 자는 직경(直卿)으로 복주(福州) 민현(閩縣) 출신이다. 주자의 제자이면서 사위이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12) 《예기․곡례(曲禮)》편에 있는 말이다.

 

 

敬 齋 箴

正其衣冠, 尊其瞻視, 潛心以居, 對越上帝. 足容必重, 手容必恭, 擇地而蹈, 折旋蟻封, 出門如賓, 承事如祭, 戰戰兢兢, 罔敢或易, 守口如甁, 防意如城, 洞洞屬屬, 罔敢或輕, 不東以西, 不南以北, 當事而存, 靡他其適, 弗貳以二, 弗參以三, 惟心惟一, 萬變是監, 從事於斯, 是曰持敬, 動靜弗違, 表裏交正, 須臾有間, 私欲萬端, 不火而熱, 不氷而寒, 毫釐有差, 天壤易處, 三綱旣淪, 九法亦斁, 於乎小子, 念哉敬哉, 墨卿司戒, 敢告靈臺. 

朱子曰, 周旋中規, 其回轉處欲其圓如中規也, 折旋中矩, 其橫轉處欲其方如中矩也, 蟻封, 蟻垤也. 古語云, 乘馬折旋於蟻封之間, 言蟻封之間, 巷路屈曲狹小, 而能乘馬折旋於其間, 不失其馳驟之節, 所以爲難也, 守口如甁, 不妄出也, 防意如城, 閑邪之入也, 又云, 敬須主一, 初來有个事, 又添一个, 便是來貳, 他成兩个, 元有一个, 又添兩个, 便是參, 他成三个, 須臾之間, 以時言, 毫釐之差, 以事言. ○ 臨川吳氏曰, 箴凡十章, 章四句, 一言靜無違, 二言動無違, 三言表之正, 四言裏之正, 五言心之正而達於事, 六言事之主一而本於心, 七總前六章, 八言心不能無適之病, 九言事不能主一之病, 十總結一篇. ○ 西山眞氏曰, 敬之爲義, 至是無復餘蘊, 有志於聖學者, 宜熟復之.

○ 右箴題下, 朱子自敍曰, 讀張敬夫主一箴, 掇其遺意, 作敬齋箴, 書齋壁以自警云, 又曰, 此是敬之目, 說有許多地頭去處, 臣竊謂地頭之說, 於做工好有據依, 而金華王魯齋 排列地頭作此圖, 明白整齊, 皆有下落又如此, 常宜體玩警省於日用之際心目之間, 而有得焉, 則敬爲聖學之始終, 豈不信哉. 


附 錄


程子曰, 只整齊嚴肅, 則心便一, 一則自無非辟之干, 此意, 但涵養久之, 則天理自然明.

朱子曰, 持敬之道, 不必多言, 但熟味, 整齊嚴肅, 嚴威儼恪, 動容貌, 整思慮, 正依冠, 尊瞻視, 此等數語, 而實加工焉, 則所謂直內, 所謂主一, 自然不費安排, 而身心肅然, 表裏如一矣. ○ 須就視聽言動容貌上做工夫. 蓋人心無形, 出入無定. 須就規矩繩墨上守定, 便自內外帖然, 豈曰放辟邪侈於內, 而姑正容謹節於外乎. 且放辟邪侈, 正與莊整齊肅相反, 誠能莊齊肅, 則放辟邪侈, 決知其無所容矣. 此曰, 用工夫, 至要約處, 請以一事驗之, 儼然端坐, 執事恭恪時, 此心如何. 怠惰頹靡, 渙然不收時, 此心如何. 於此審之, 則知內外未始相離, 而所謂莊整齊肅, 正所以存其心也.

程子曰, 主一之謂敬, 無適之謂一.

問, 敬莫是主一. 朱子曰, 主一, 只是敬字註解, 要知, 事無小無大, 常令自家精神思廬, 盡在此, 遇事時如此, 無事時也如此. ○ 問, 動而無二三之雜者, 是主此一也, 靜而無邪妄之念者, 亦主此一也, 主一, 兼動靜而言. 曰, 是. ○ 或謂, 主一, 不是主一事, 如一日萬機, 須要並應曰, 一日萬機, 也無並應底道理, 須還他逐一件理會. ○ 問, 伊川云, 主一無適, 又曰, 人心常要活, 周流無窮, 而不滯於一遇. 或疑, 主一則滯, 滯則不能周流無窮矣. 竊謂, 主一則此心便存, 存則物來順應, 何有乎滯. 曰, 固是, 然所謂主一者, 何嘗滯於一事, 不主一則方理會此事, 而心留於彼, 這卻是滯於一隅. 又問, 方應此事未畢, 而復有一事至, 則當如何. 曰, 也須是主一件了, 又理會一件, 亦無雜然而應之理, 但甚不得已, 則權其輕重可也.

和靖尹氏曰, 敬有甚形影, 只收斂身心, 便是主一, 如人到神祠, 致敬時, 其心收斂便著, 不得毫髮事, 非主一而何.

朱子曰, 心主這一事, 不爲他事攙亂, 便是不容一物. ○ 這心, 都不著一物, 便收斂. 如人入神祠, 當那時, 便著不得些子事, 只有箇恭敬, 此最親切. 今人, 若能專一此心, 便收斂緊密, 都無些子空罅, 若這事思量未了, 又走做那邊法, 心便成兩路. ○ 人精神飛揚, 心不在殼子裏面, 便害事. ○ 人須常收斂箇身心, 使精神常在這裏, 似擔百十斤, 擔相似, 須硬著筋骨擔. ○ 大抵, 是收斂身心, 在這裏, 便己有八九分了, 卻看道理有窒礙處, 却於這處理會爲學, 且要專一理會這一件, 便只且理會一件, 若行時, 心便只在行上, 坐時, 心便只在坐上. ○ 問, 下手工夫, 曰, 只是要收歛此心, 莫要走作. 若看見外面風吹草動, 去看覰他, 那得許多心去應他, 便也是不收歛. 主一是敬表德, 只是要收歛. 處宗廟只是敬, 處朝廷只是嚴, 處閨門只是和, 便是持敬.

上蔡謝氏曰, 敬, 是常惺惺法.

朱子曰, 惺惺, 乃心不昏昧之謂, 只此便是敬, 整齊嚴肅, 固是敬. 然心若昏味, 燭理不明, 雖强把捉, 豈得爲敬. ○ 學問, 須是警省, 且如瑞巖和尙, 每日常問, 主人翁惺惺否. 又自答曰, 惺惺. 今時學者, 卻不能如此. ○ 或問, 佛氏, 亦有此語. ○ 曰, 其喚此心則同, 其爲道則異, 吾儒喚惺此心, 欲他, 照管許多道理, 佛氏, 則空喚惺在此, 無所作爲, 異處在此. ○ 今人心, 聳然在此, 尙無惰慢之氣, 况常能惺惺者乎. 故心常惺惺, 自無客慮. ○ 問, 先持敬, 令此心惺惺了, 方可應接事物. 曰, 不然. 又問, 須是去事物上求. 曰, 不然, 若無事物時, 不成去求箇事物來理會, 且無事物之時, 只你做甚麽. ○ 問, 整齊嚴肅, 專主於內, 上蔡惺惺, 專於事上作工夫. ○ 曰, 二說難分內外, 皆是自家心地上工夫, 事上豈可不整齊嚴肅, 靜處豈可不常惺惺乎. ○ 心旣常惺惺, 又以規矩繩檢之, 此內外交相養之道也. ○ 問, 三先生, 言敬之異. 曰, 此如此屋四方, 皆入得, 若從一方得這裏, 則那三方入處, 都在這裏了. ○ 問, 總而言之, 常令此心常存否. 曰, 其實只一般, 但整齊嚴肅之說,又更分曉. 整齊嚴肅, 此心便存, 便能惺惺. 未有外面整齊嚴肅, 而內不惺惺者. 人, 一時間, 外面整齊嚴肅, 便一時惺惺, 一時放寬了, 便昏怠也.

朱子曰, 敬, 惟畏爲近之.

朱子曰, 敬, 不是萬慮休置之謂, 只要隨事專一謹畏不放逸耳. 敬字, 恰似箇畏字, 非專是閉目靜坐, 耳無聞, 目無見, 不接事物然後, 爲敬, 整齊收斂這身心, 不敢放縱便是敬. ○ 勉齋黃氏曰, 人心, 常肅然而不亂, 炯然而不昏, 則寂而理之體, 無不存, 感而理之用, 無不行. 惟夫虛靈知覺, 旣不能不囿於氣, 又不能不動於欲, 則將爲氣所昏, 爲欲所亂矣. 此敬之說, 所出而立也, 惕然悚然, 常若鬼神父師之臨其上, 深淵薄氷之處其下, 則虛靈知覺, 自不容於昏且亂矣. 故,先師曰, 敬字之說, 惟畏爲近之. 蓋敬者, 此心, 肅然有所畏之名, 畏則心主於一, 如入宗廟, 見君父之時, 自無雜念矣.

朱子曰, 敬, 只是此心, 自做主宰處.

問心不能自把捉? 朱子曰, 自是如此, 蓋心便能把捉自家, 自家卻如何把捉得它, 惟有以義理涵養耳. ○ 敬, 是箇扶策人底物事, 人, 當放肆怠惰時, 纔敬, 便扶策得此心起常常會恁地, 雖有些放辟邪侈意思, 也自退聽. ○ 人之爲學, 千頭萬緖, 豈可無本領. 此, 程先生所以有持敬之語, 只是提撕此心, 敎他光明, 則於事, 無不見久之剛健有力.

朱子曰, 敬, 通貫動靜.

朱子曰, 學者, 日用之間, 以敬爲主. 不論感與未感, 平日常是如此涵養, 則善端之發, 自然明著, 少有間斷, 而察識存養, 擴而充之, 皆不難乎爲力矣. ○ 問, 涵養於未發之初, 令不善之端旋消, 則易爲力, 若發後, 則難制. 曰, 聖賢之論, 正要就發處制, 惟子思說, 喜怒哀樂未發謂之中, 孔孟敎人, 多從發處說, 未發時, 固當涵養不成, 發後, 便都不管, 或云, 這處最難. 曰, 此亦不難, 只要明得一箇善惡, 每日遇事, 須是體驗, 見得是善, 從而保養, 自然不肯走在惡上去. ○ 敬字, 須該貫動靜, 看方得方, 其無事而存主不懈者, 固敬也. 及其應物, 而酬酢不亂者, 亦敬也. 故曰, 毋不敬儼若思, 又曰, 事思敬, 執事敬, 豈必以攝心坐禪, 而謂之敬哉. ○ 問, 敬通貫動靜, 然靜時少, 動時多, 恐易得撓亂. 曰, 如何都靜得, 有事須著應, 人在世間, 未有無事時節, 若事至前, 而自家卻要主靜, 頑然不應, 便是心都死了. 無事時, 敬在裏, 而有事時, 敬在事上. 有事無事, 吾之敬, 未嘗間斷也. 且如應接貧客, 敬便在應接上, 賓客去後, 敬又在這裏, 若厭苦貧客, 而爲之心煩, 此却是撓亂, 非所謂敬也. 故程子說, 學到專一時方好, 蓋專一, 則有事無事, 皆是如此. 朱子名堂室記曰, 晦堂者, 燕居之所也. 堂旁兩夾室, 暇日黙坐, 讀書其間, 名其左曰敬齋, 名其右曰義齋, 記之曰嘗讀易而得其兩言, 曰敬以直內, 義以方外, 以爲爲學之要, 無以易此, 而未知所以用力之方也. 及讀中庸, 見所論修道之敎, 而必以戒愼恐懼, 爲治然後, 得所以持敬之本, 又讀大學, 見所論明德之序, 而必以格物致之, 爲先然後, 得所以明義之端, 旣而觀夫二者之功, 一動一靜, 交相爲用, 又有合乎周子太極之論然後, 知天下之理, 幽明鉅細遠近淺深, 無不貫乎一者. 樂而玩之, 足以從吾身而不厭, 又何暇夫外慕哉.按此敬齋卽箴之所題

南軒張氏主一箴曰, 人稟天性, 其生也直. 克愼厥彛, 則靡有忒. 事物之感, 紛綸朝夕. 動而無節, 生道或息. 惟學有要, 持敬勿失. 驗厥操舍, 乃知出入. 曷爲其敬, 妙在主一. 曷爲其一, 惟以無適. 居無越思, 事靡他及. 涵泳于中, 匪忘匪亟. 斯須造次, 是保是積. 旣久而精, 乃會于極. 勉哉無倦, 聖賢可則.按, 此箴, 卽朱子, 自敍所稱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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