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이황선생 영정

退溪先生年譜
  연보 1
  연보 2
  연보 3
  연보 4
선생의 생애와 학문
  一. 생애편
  1. 태어나신 환경
  2. 어진 천품
  3. 부단한 탐구
  4. 벼슬길
  5. 인재양성,도덕교육
  6. 원숙한 인간상
  7. 조용한 최후
  二. 학문편
  1.선생이 남긴 저술
  2. 선생의 학문적전승
  3. 선생의 학문

 

퇴계 선생 연보(1)

 

 退溪先生年譜

 

1501년 11월 26일 己亥 辰時(79)에 선생께서 禮安縣 溫溪 마을 집에서 나셨다. 선생의 先世께서는 眞寶縣에서 사셨는데 5대조 松安君께서 왜적을 피하여 安東府 豊山縣 남쪽 磨崖촌에 옮겨 계시다가 조부 判書公 때에 이르러 예안현 북쪽 온계 마을의 泉石이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비로소 卜居하셨다.

1502년 <선생 2세> 6월 贊成公께서 돌아가셨다. 선생께서 지으신 先妣貞敬夫人朴氏墓碣에 이르시기를 “선군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셨을 때에 맏형이 娶妻를 하시고 그 남은 이는 다 어려 眼前에 가득하였으니 모친께서 자식이 많고 일찍이 과부가 되심에 장차 가업을 유지하지 못할까 매우 염려하셔서 농사짓기와 누에치기에 더욱 힘을 써서 옛 가업을 잃지 않으셨다. 모든 자녀들이 점점 자람에 미쳐서는 가난한 가운데도 뒷바라지 하시고 먼 데나 가까운 데나 보내어 배우게 하시고 늘 가르쳐 경계함을 더하시니 한갖 글재주만 일삼을 뿐 아니라 모가짐과 행실을 삼가기를 더욱 중하게 여겨서 늘 丁寧히 일깨워 말씀하시기를 ‘세상 사람이 늘 과부의 자식은 가르치지 못하였다고 말하며 허물하니 너희들이 그 공을 백 배나 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비난을 면하겠는가?’ 하시니.” 이 말씀을 보면 선생께서 비록 일찍 찬성공을 여의셨으나 학문을 성취함에 대부인께 얻으신 것이 많으셨다.

1503년 <선생 3세>

1504년 <선생 4세>

1505년 <선생 5세>

武宗, 正德 원년 (중종 대왕 원년) 丙寅(1506)년 <선생 6세>에 선생께서는 처음으로 글을 읽을 줄 아셨다. 이웃에 어떤 늙은이가 있어 天字文을 조금 알거늘 선생께서 가 배우셨는데 아침마다 반드시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그 사람의 울타리 밖에 가서 배운 글을 두어 번씩 가만히 외우신 후에 들어가서 엎드려 배우기를 엄한 스승같이 하셨다.

1507년<선생 7세>

1508년<선생 8세> 둘째 형이 칼에 손을 다치니 선생께서 붙들고 우시거늘 모친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형은 손을 다쳤으나 울지 않는데 네가 어찌 우느냐?” 하시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형이 비록 울지 않으나 피가 저렇게 흐르는데 어찌 아프지 않겠습니까?”하셨다. 선생께서는 溫恭하시고 遜順하여 어른을 잘 섬기셨는데 尊丈을 대할 때에는 감히 거동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고 비록 밤중에 깊이 잠들었다가도 어른이 부르시면 즉시 깨어나 대답하심을 매우 삼가시니 6, 7세 때부터 그러하셨다.

1509년<선생 9세>

1510년<선생 10세>

1511년<선생 11세>

1512년<선생 12세> 論語를 숙부 松齋公 堣<송재공의 휘는 堣이다>에게서 배우셨다. ‘제자는 들어오면 어버이께 호도하고 나서면 어른께 공순하여야 한다.’ 하는 말에 이르러서 근심하여 스스로 깨우쳐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도리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하셨다. 하루는 ‘理’자의 뜻을 송재공께 물어 말씀하시기를 “무릇 일의 옳은 것이 理입니까?” 송재공께서 기뻐하면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벌써 文義를 아는구나.”하셨다. 송재공께서는 성품이 간략하고 엄하여 제자에게 許하여 옳다고 하시는 것이 적었는데 선생께서 형 大憲公 瀣와 같이 글을 배울 때에는 송재공께서 늘 칭찬하시기를 “죽은 형이 이 두 아이를 두었으니 죽은 것이 아니다.”하시고 또 선생을 가리켜 말하기를 “가문을 부지하는 것은 이 아이가 할 것이다.”하셨다.

1513년<선생 13세>

1514년<선생 14세> 글 읽기를 좋아하셔서 비록 사람이 많이 앉은 곳이라도 반드시 벽을 향하여 잠심하고 완미하셨다. 陶淵明이 지은 시를 사랑하여 그 사람됨을 사모하셨다.

1515년<선생 15세>

1516년<선생 16세>

1517년<선생 17세>

1518년<선생 18세> 봄에 놀아 들못을 읊으신 한 절귀가 있으니 가로되


이슬 머금은 가녀린 풀이 물가를 둘러 있으니

적은 못이 淸活하고 좋아 모래도 없다.

구름 날고 새 지나감은 원래 서로 어울리지만

다만 때때로 제비가 물결을 차는 것이 두려울 뿐이로다.


<이는 理를 형용하여 지으신 글이다.>

1519년<선생 19세> 회포를 읊으신 글이 있는데 이르시기를


홀로 여막 얽어 일만 권 책을 사랑하니

한 가지 심사가 십 년이 넘었도다. 

요사이 源頭로 깨달은 듯 하니

모두 내 마음으로 太虛를 보았노라.


<원두는 理의 근원을 말하는 것이요 태허는 하늘의 理를 말하는 것이     다.>

1520년<선생 20세> 주역을 읽고 그 뜻을 밝혀 궁구하여 자고 먹는 것을 잊으셨다. 이로부터 항상 파리하고 곤한 병환이 계셨다. 뒤에 선생께서 趙士敬에게 주신 편지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어릴 적에 일찍이 글에 뜻을 두었으나 그 방향을 알지 못하고 한갖 刻苦하기만을 너무 심하게 해서 파리해지는 병을 얻었다.” 하셨다. <뜻을 두었다 하신 것은 학문에 뜻을 두심이요 각고는 힘을 매우 괴롭도록 쓰는 것이다.>

1521년<선생 21세>에 부인 許氏를 맞아들이셨는데 진사 瓚의 따님이셨다.

1522년<선생 22세>

1523년<선생 23세> 10월에 자제 僉正公을 낳으셨다. 이 해에 선생께서는 처음으로 太學館에 들어가셨다. 이 때는 己卯의 화를 지낸 뒤여서<靜菴 趙光祖와 모든 현사가 소인에게 잡혀 돌아가신 화이다> 선비들의 풍습이 浮薄하여 선생의 법도 있는 행동을 많이 비웃더라. 더불어 상종하는 이는 河西 金麟厚 한 사람 뿐이었다. 얼마 안되어 선생께서 시골로 내려가시니 河西가 글을 지어 이별하였는데 “夫子는 영남의 빼어난 사람이다. 李杜의 문장이요 王趙의 글씨이다.”하는 글귀가 있었다.

1524년<선생 24세>

1525년<선생 25세>

1526년<선생 26세>

1527년<선생 27세> 가을에 경상도에서 과거를 보시어 進士初試에서는 장원하시고 生員初試에서는 2등하셨다. 10월에 둘째 아드님 寀가 나셨다. 11월 초 7일에 부인 許氏께서 돌아가셨다.

1528년<선생 28세> 봄에 진사 會試에서 일등하셨다.

1529년<선생 29세>

1530년<선생 30세> 부인 權氏를 맞으셨다. <奉事 權礩의 따님이셨다>

□  1531년<선생 31세> 6월에 側室에게서 아들 寂이 태어났다.

1532년<선생 32세> 진사시에 합격하신 이후로는 선생께서 擧業하실 뜻이 없으셨으나<거업은 과거 공부이다> 형 大憲公이 모친께 권하여 과거를 보라고 하시니 이 해에 문과 初試에서 이등하셨다. 서울에서 시골로 내려오실 때 길 가 마을에서 주무셨는데 밤중에 도적을 만나 동행은 당황하여 失措하였으나 선생께서는 凝然히 동요하지 않으셨다.

1533년<선생 33세> 성균관에 가시니 같이 다니는 사람들이 공경하여 감복하는 이가 많았다. 가을에 시골로 내려 오시는 길에 驪州를 지나실 때 慕齋 金安國선생을 뵈었다. 慕齋의 이름은 安國이다. 그 때에 벼슬을 그만두고 여주 梨湖村에 계셨다. 선생께서 만년에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모재를 뵙고 비로소 正人君子의 의견을 들었다.”하셨다. 이 행차에서 忠定公 權撥을 좇아 동행하셨다. 경상도 향시에 장원하셨다.

1534년<선생 34세> 3월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셨다. 4월에 承文院 權知 副正子에 계셨다. 翰林의 천거를 받아 藝文館 檢閱에 春秋館 記事館을 겸직하시다가 즉시 체직되어 도로 승문원 부정자가 되셨다. 이전의 선생 장인 權礩은 正言 權磌의 형이셨다. 권진께서 기묘사화 때 사류로서 安處謙의 옥사에 참여함에 권질께서도 또한 座罪하여 廢하게 되셨다. 이에 이르러 대간이 權臣의 뜻을 받아 선생은 권질의 사위이니 史官이 될 수 없고 그를 천거한 사람도 또한 옳지 못하다고 하여 藝文館 官員을 推考하고 선생의 사관 벼슬을 바꿀 것을 啓請하였다. 이에 의견이 분분하여 춘추관 관원이 다 파직되고 선생도 체직되셨다. 金安老의 田庄이 榮川 땅에 있었는데 이 곳은 부인 허씨가 살던 땅이므로 김안로가 동향 연고로서 선생을 만나기를 원하였으나 선생께서 가 보시지 않으시니 김안로가 노하여 대간을 부추켜 논박한 것이었다. 6월에 正字에 오르셨다. 7월에 말미를 얻어 시골로 내려와 근친하셨다. 10월에 著作에 오르셔서 서울로 가셨다. 문과 廷試의 耆英會圖라 하는 글제에 선생께서 排律 10韻으로 장원하셨다. 11월에 務功郞 博士에 오르셨다.

1535년<선생 35세> 6월에 護送官이 되어 倭奴를 동래로 데리고 가실 때에 驪州를 지나다가 牧使 李純과 더불어 神勒寺에 오르셨다.<신륵사는 절이름이다.> 지으신 글에


수를 물음에 능히 이치의 속을 더듬을 수 있고

신선을 말할 때에는 바로 時流를 謝絶코자 하네.


하신 절구가 있으니 선생께서 스스로 註를 달아 말씀하시기를 “이순이 皇極經內篇이라 하는 책을 20여 년을 공을 쌓아 비로소 이루었더니 이 날 內篇과 參同契의 수련하는 법을 의논하였다.”하셨다. <수련은 신선의 참동계 책의 기운을 닦아 오래 사는 법이다.> 이번 길에 예안에 들러 근친하고 가셨다.

1536년<선생 36세> 3월에 宣務郞이 되셨다. 6월에 成均館 典籍에 오르시고 中學敎授를 겸하셨다. 7월에 말미를 얻어 근친하시고 9월에 戶曺佐郞이 되셨다.

1537년<선생 37세> 4월에 宣敎郞이 되시고 5월에 承訓郞이 되셨다. 9월에 承議郞이 되셨다. 10월에 모친 朴氏의 喪事를 당하셨다. 선생께서 6품이 되시면서부터 外臨을 구하여 養親하고자 하셨으나 當路에 있는 사람이 막아서 그렇게 하지 못하시다가 이에 이르러 서울로부터 奔喪하여 오시니 상중에 柴毁하여 병을 얻으니 거의 구하지 못할 뻔 하셨다. 12월 甲子일에 박부인을 온계 마을 樹谷 언덕에 장사지냈다.

1538년<선생 38세>

1539년<선생 39세> 12월에 脫喪하셨다. 弘文館 修撰이 되셨다가 이 날 修撰知製敎에 오르시고 經筵檢討官을 겸하셨다. 그 때에 金安老가 이미 폐하였으므로 선생께서 뽑혀 玉堂에 들어가셨지만 형 大憲公께서 舍人으로 춘추관을 겸하여 계심에 선생께서 相避로 기사관을 겸하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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