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이황선생 영정

退溪先生年譜
  연보 1
  연보 2
  연보 3
  연보 4
선생의 생애와 학문
  一. 생애편
  1. 태어나신 환경
  2. 어진 천품
  3. 부단한 탐구
  4. 벼슬길
  5. 인재양성,도덕교육
  6. 원숙한 인간상
  7. 조용한 최후
  二. 학문편
  1.선생이 남긴 저술
  2. 선생의 학문적전승
  3. 선생의 학문

 

퇴계 선생의 생애와 학문

 

 

  6. 원숙한 인간상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퇴계선생은 거듭 내려진 벼슬을 한사코 거절하고 시골에 묻혀 제자들 가르치기를 좋아 하였다. 많은 훌륭한 제자를 길러내고 그 제자들을 통하여 방방곡곡에 도덕적인 기풍을 불러 일으키게 하였다. ꡔ대학ꡕ에 「군자는 집을 나서지 아니하고 나라에 모화를 편다」는 말이 있다. 퇴계선생이야 말로 바로 그러한 분이라고 할 수 있다. 퇴계선생은 가정생활에 있어서 지역사회에 있어서 그리고 조정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우러러 받들고 그의 말을 높이고 따랐던 것이다. 어떠한 덕을 갖추면 이와같이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받들고 진심으로 따르게 될 것인가? 이러한 경지는 사람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라고 해야 하고 본받아야 할 경지라고 할 것이다.

  퇴계선생의 이러한 원숙한 덕의 경계를 기록을 통하여 살펴 보기로 하자. 우선 가정생활 특히 부부생활에 있어서 살펴 보자.

  퇴계선생의 부부생활은 결코 행복했다고 할 수 없다. 퇴계선생은 21세에 진사였던 허찬(許瓚)의 따님과 결혼하였다. 젊은 남녀가 처음 결혼을 하게 되면 서로 사랑에 겨워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퇴계선생은 그렇지 아니하였다. 그 아내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나 정중하고 천연스러워 남들은 모두 부부간에 정이 없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결코 그런 것은 아니었다. 퇴계선생은 그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다. 다만 정도를 넘어서서 흐트러진 행동을 삼가했을 따름이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가르침에 부부의 도리는 「서로 공경하기를 마치 귀한 손님 대하듯 해야 한다」(相敬如賓)는 말이 있다. 그리고 오륜(五倫)에 있어서도 부부의 윤리는 부부유별이라고 하였다. 부부유별에 있어서 유별(有別)의 뜻이 무엇인가? 흔히 부부는 맡은 바 일에 있어서 구별이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즉 남편은 바깥 일을, 여자는 안의 일을 맡는 직능적인 구별의 뜻으로 해석한다. 물론 그러한 뜻도 없는 바 아니나, 유별의 보다 절실한 뜻은 부부간에 지켜야 할 행위의 한계가 있어야 된다는 뜻이다. 부부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 무관한 사이이다. 그렇듯 가깝고 무관함으로 그 사이에서 지켜야 할 인격적인 행위, 도덕적인 행위의 한계를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이 점을 감안하여 옛 성현들이 부부는 특히 부부로서 지켜야 할 행위의 한계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고, 그 구체적인 예로서 손님 대하듯 하라는 가르침을 남겼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이 가르침을 백번 천번 듣고, 알면서도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것이 또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그런데 퇴계선생은 이 어려운 윤리를 실천했던 것이다. 부부사이에 있어서 인격적인 행위의 한계를 지키고 그 행위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도록 스스로를 억제할 수 있다면 그 밖의 어떠한 일도 참고 견디어 낼 수 있는 자제력을 가졌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달리 표현하면 확고부동한 인격적인 자아가 형성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퇴계선생은 초년에 이 부부의 도를 실천했던 것이다. 그러나 퇴계선생이 지극히 사랑했던 허씨부인과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퇴계선생 27세 되던 해 10월에 둘째 아들 채(寀)를 낳고 11월에 허씨부인은 세상을 떠났다. 첫째 부인이 죽고 3년 후인 퇴계선생 30세 때 둘째 부인으로 권씨부인을 맞이하게 되었다. 권씨부인은 권질(權礩)의 따님으로 그 집안은 대대로 벼슬을 한 명문가였다. 그러나 권씨부인의 할아버지 권주(權柱)는 갑자사화때 억울하게 희생되고 그의 아버지 권질과 삼촌 권전(權磌)도 또한 정치적 음해로 인하여 아버지는 예안으로 귀양을 가게 되고 삼촌은 형장에서 매맞아 죽어서 시체로 돌아오고 숙모는 관비로 끌려가는 등 참변을 겪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권씨부인은 어린 처녀시절에 이러한 참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혼비백산하여 그 때 이후로 온전한 정신을 가지지 못했다고 한다. 평소 절의를 중아헤 여겼던 퇴계선생은 이 권씨가문의 억울한 사정을 마음아파 하던 차에 예안에 귀양와 있던 권질이 퇴계선생에게 자기 딸을 둘째 부인으로 맞이해 달라고 제의함으로써 이 혼인이 성립되었다고 한다. 정신이 남들처럼 온전하지 못한 부인과 함께 사는 고충이 어찌 한 두가지일까마는 퇴계선생은 결코 그 어려움을 입밖에 내지 않으셨다고 한다. 이 권씨부인도 퇴계선생이 46세 되던 해 7월에 죽었다. 이 부인에게는 자식이 없었음으로 퇴계선생은 첫째 부인한테서 난 아들들로 하여금 친어머니를 모시듯 초상장례와 3년상을 잘 모시게 하였다.

  위와 같이 퇴계선생은 인간윤리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부의 도리를 인간으로서는 더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하게 실천하였다. 그리하여 가정의 화평을 유지하고 남편으로서 신의를 다하고 아내로 하여금 인간다운 대접을 받으며 일생을 마칠 수 있게 하였다. 사람이란 자기자신이 굳건하게 설 수 있어야 남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법이다. 퇴계선생 자신이 이러한 도리를 실천했음으로 남의 어려움도 해결해 줄 수 있었다. 퇴계선생의 제자에 이함형(李咸亨, 자는 平叔, 호는 山天齋)이라는 분이 있었다. 그는 전라도 순천 사람으로 멀리 퇴계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으러 왔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부부간에 화합하지 못하였다. 이를 알게 된 퇴계선생은 이함형이 가르침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편지 한장을 써 주었다. 그 편지의 전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공자가 말씀하기를 「천지가 있은 후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은 후에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은 후에 군신이 있고 군신이 있은 후에 예의가 있게 된다」 하고, 자사(子思)는 말씀하기를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되나, 그 궁극적인 경지에서는 천지의 모든 원리와 직결된다」고 하고, 또 시(詩)에서 말하기를 「처자와 잘 화합하되 마치 거문고와 비타가 조화되듯 한다」고 하고 또 공자는 말씀하시기를 「부모란 자식이 화합하면 그저 따를 뿐이로다」고 하였으니 부부의 윤리란 이같이 중대한 것이니 마음이 서로 맞지 아니한다고 하여 어찌 박하게 대할 수 있을 것인가?

  ꡔ대학ꡕ에 말하기를 「그 근본이 어지럽고서 그 말절이 잘 다스려지는 법은 없으며 후(厚)하게 대접해야 할 자리에 박(薄)하게 대하면서 박하게 대해도 좋을 곳에 후하게 대하는 법은 없느니라」고 하였다. 맹자께서 이 말을 부연하여 말씀하기를 「후하게 대해야 할 자리에 박하게 하는 사람은 어떠한 일에 있어서나 박하게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 그 사람됨이 이미 각박하다면 어찌 부모를 섬길 것이며 어찌 형제와 일가친척과 고을사람들과 잘 지낼 것이며 어찌 임금을 섬기고 남들을 부리는 근본적인 일을 할 수 있으리오?

  들으니 그대는 부부가 화합하지 못하다고 하는데 무슨 이유로 이러한 불행이 있는지 알지 못하겠네. 살펴 보건데 세상에는 이러한 불행을 겪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 그 가운데는 부인의 성품이 악독해서 고치기 어려운 경우와 모양이 못나거나 지혜롭지 못한 경우도 있고 반대로 그 남편이 방탕하거나 취미가 별달라서 그렇게 되는 등 여러가지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말하면 그 성품이 악독해서 고치기 어려운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드 남편이 항상 반성하여 잘 대해 줌으로써 부부의 도리를 잃지 아니하면 가정이 파괴되고 자신이 더할 수 없는 각박한 인간으로 전락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는 법일세. 그 성품이 악독하여 고치기 어렵다는 사람도 그 정도가 아주 심하지 아니하면 또한 상황에 따라 잘 처리하여 마침내 서로 헤어지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하며, 옛날에는 아내를 내쫓으면 딴 사람에게 시집을 갈 수 있었으므로 7가지 이유로 아내를 내쫓을 수도 있었으나 지금은 여자란 한번 시집가면 평생 한 남자를 따라야 하는데 어찌 마음이 맞지 아니한다고 아무런 관계없는 사람처럼 또는 원수보듯 하여 자기 아내를 허무하게 천리 밖으로 내쫓아서 가도를 망가뜨리고 자손이 끊기게 하는 불행을 저지를 수가 있겠는가? ꡔ대학ꡕ에 말하기를 「자기에게 잘못이 없는 연후에 남의 잘못을 나무란다」고 하였는데, 이 점에 있어서 내 경우를 들어 말하리라.

  나는 일찌기 재혼을 햇으나 한결같이 불행이 심하였네. 그러나 나는 스스로 각박하게 대하지 아니하고 애써 잘 대하기를 수십년이나 했다네. 그간에 더러는 마음이 뒤틀리고 생각이 산란하여 고뇌를 견디기 어려운 적도 없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어찌 내 생각대로 인간의 근본도리를 소홀히 하여 홀로 계시는 어머니의 근심을 사게 하겠는가? 옛날 후한 때 사람 질운(郅惲)이 「아내가 부부의 도를 어기어 자식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자는 실로 진리를 어지럽히는 사특한 자이다」고 말한 바가 있는데 이 말을 빌려 그대에게 충고하노니 그대는 마땅히 거듭 깊이 생각해서 고치도록 힘쓰라. 이 점에 있어서 끝내 고치는 바가 없다면 학문은 해서 무엇하며, 무엇을 실천한단 말인가?


  이 편지를 읽은 이함형은 그 때부터 아내를 대하는 태도를 고치게 되고 부부가 화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함형의 부인은 퇴계선생이 돌아가신 후 감사의 뜻을 표하는 의미에서 3년동안 마음으로 상복을 입었다고 한다.

  만약 이 편지를 퇴계선생이 아닌 다른 사람이 썼다고 가정했을 때 이함형이 과연 그렇듯 쉽게 그의 행동을 고쳤을까? 편지글에 인용된 「자기에게 잘못이 없는 연후에 남의 잘못을 나무란다」는 말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자. 이 말은 ꡔ대학ꡕ의 해설 제9장에 나오는 말이다. 그 앞뒤의 말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요순(堯舜)이 천하를 다스림에 인(仁)으로써 하니 백성들이 그에 따랐고, 걸주(桀紂)가 천하를 다스림에 포악함으로써 하니 백성들도 따라서 그렇게 되었느니라. 지도자가 명령하는 것이 그 자신의 행동과 반대되는 것이면 백성들이 따라가지 아니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자기 자신에게 선함이 있는 연후에 남에게 선을 권하고 자기자신에게 악함이 없는 연후에 남의 잘못을 나무라는 법이다. 자기자신에 남을 용납하고 남과 함께 선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자는 없는 법이다.


  이 말은 실로 진리이다. 남의 윗자리에 있는 사람,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 자기는 온갖 못된 짓을 하면서 아랫사람에게는 착한 짓을 하라고 아무리 명령하고 가르쳐도 그 말은 먹혀 들지 아니한다. 명령하는 사람, 가르치는 사람에게 일호의 사특함이 없을 때 그 말이 위엄을 가지고 남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이함형도 퇴계선생이 실천하는 올바른 생활을 눈으로 보고 그 말의 권위에 감복되고 거기에 따랐던 것이다.

  위 이야기는 퇴계서생이 제자를 가르친 한 가지 예에 불과하다. 앞에서도 이야기하였듯이 부부유별의 실천하기 가장 어려운 윤리를 실천한 퇴계선생이니 다른 윤리야 더 말할 여지가 없다. 퇴계선생의 학문은 모두 머리로 외우고 입으로만 말하는 학문이 아니라, 옛 성현의 말을 마음에 새기고 이를 몸으로 실천하는 학문이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옛 성현들의 가르침으로 가득했고 그의 행동은 그러한 정신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럼으로 해서 퇴계선생은 남에게 감명을 줄 수 있었고 따라서 많은 훌륭한 제자를 키울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다시 퇴계선생이 남들에게 끼친 교화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몇가지 기록을 더 제시해 보자. 퇴계선생 언행록 성덕(成德)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선생의 학문은 사욕이란 깨끗이 없어지고 진리가 환히 밝아져서 나와 만물 사이에 너와 나라는 구별과 한계가 없었다. 그 마음은 바로 천지만물과 함께 움직이고 조화되어 그때그때마다 사리에 들어맞는 오묘함이 있었다.

김성일(金成一) 기록


우성전(禹性傳 ― 퇴계선생 제자)이 오래 화산(花山 ― 안동의 옛 이름)에 머물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읍내 사람들은 아무리 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두 퇴계선생을 알고 존경하고 먼 시골사람으로서 퇴계선생의 문하에 출입하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또한 선생을 사모하고 두려워하여 함부로 행동하지 아니하였다. 혹 옳지 못한 짓을 하게되면 퇴게선생이 알게 될까 두려워 하니 선생의 교화가 사람들에게 미침이 이와 같았다.

우성전(禹性傳) 기록


  앞의 인용문에서 우리는 퇴계선생의 학문의 경계를 알 수 있고 뒤의 인용문에서는 퇴계선생의 교화의 위대성을 알 수 있다. 퇴계선생에게는 사욕이란 말끔이 가려지고 진리가 마치 태양처럼 밝아서 그 행동이 그대로 자연의 이치와 합치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너와 나의 구별이 없어져서 혼연히 하나의 세계가 된 경지를 성스러운 경지라고 한다. 퇴계선생의 정신세계는 성스러운 경지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들어 있었기에 그 교화가 아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온 고을에 퍼질 수가 있었다. 한번 뵈옵지도 못하고 말씀 한 마디도 듣지 못했는데도 그저 존경하고 따르며 행여라도 못된 짓을 하고는 퇴계선생이 아실까 두려워 할만큼 퇴계선생의 교화는 온 고을에 퍼졌던 것이다. 이러한 교화를 「함이 없이 이루어지는 교화」(無爲而化)라고 한다.

  퇴계선생의 「함이 없이 이루어진 교화」는 안동의 시골사람에게만 행하여진 것이 아니다. 율곡선생의 「경연일기」란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있다. 당시 어려운 나라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훌륭한 학자들을 조정으로 불러 올려야 한다는 대신들의 의견이 모여 시골에 묻혀 지내는 많은 학자들을 왕명으로 불러 올리게 되었다. 물론 퇴계선생은 그 첫째로 꼽히는 학자였다. 성화같이 재촉하는 왕명으로 퇴계선생은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올라 갔다. 여러 대신들과 나라일을 걱정하는 자리에 마침 경기도 파주로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모시러 갔던 관원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성혼은 서울로 올라 올 의사가 없더라고 아뢰었다. 이 말을 들은 율곡선생이 「올라 올 생각이 없거든 그만 두도록 하라」고 했다. 퇴계선생이 이 말을 듣고 「아니 숙헌(叔獻, 율곡의 자)은 어째 호원(浩原, 성혼의 자)에게는 너그러우면서도 나에게는 왜 그렇게도 각박한가?」 하였다. 그것은 퇴계선생을 모시는데 율곡이 앞장서서 어떻게든지 모셔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때 율곡선생의 말씀이 「선생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호원은 아직 공부하는 과정에 있으니 본인이 굳이 공부를 더 하겠다고 하면 억지로 불러 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경우는 다릅니다. 선생님이 서울에 와 계시면 선비들의 기풍(士風)이 달라집니다. 그러니 어찌 선생님을 모시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선생님은 굳이 조정에 나오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서울에 와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고 하였다. 아무 말없이 서울에 와 계시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순화된다고 한 율곡선생의 말씀. 율곡선생이 퇴계선생에게 아첨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을까? 결코 그런 일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퇴계선생은 말없이 남을 교화시키는 위대한 힘을 가졌던 것이다. 어째서 그럴 수가 있을까? ꡔ노자ꡕ에 「말없는 가르침을 행한다」(行石言之敎)는 말이 있다. 참된 교육은 말없는 가르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로 하는 교육은 낮은 차원의 교육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다. 보다 높은 차원의 심성을 교화하는 방법은 말을 넘어선 교육이어야 한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사육이라곤 찾아 볼 수 없이 말끔이 씻어진 순수 선(善)의 화신이 되었을 때 가능하다. 퇴계선생의 정신세계는 앞에서 이미 서술한 바로서 바로 이러한 세계를 채현했던 것이다. 이러한 경계는 사람이 수양을 통하여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계로서 모든 사람들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라고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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