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이황선생 영정

退溪先生年譜
  연보 1
  연보 2
  연보 3
  연보 4
선생의 생애와 학문
  一. 생애편
  1. 태어나신 환경
  2. 어진 천품
  3. 부단한 탐구
  4. 벼슬길
  5. 인재양성,도덕교육
  6. 원숙한 인간상
  7. 조용한 최후
  二. 학문편
  1.선생이 남긴 저술
  2. 선생의 학문적전승
  3. 선생의 학문

 

퇴계 선생의 생애와 학문

 

 

  7. 조용한 최후


  퇴계선생은 1570년 선조 3년 음력 12월 8일 유시(酉時 ― 6시경)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 최후는 일생동안 부지런히 학문하신 학자답게 담담하고 조용한 최후였다. ꡔ퇴계전서ꡕ에 수록된 퇴계선생언행록 말미에 고종기(考終記)라는 짤막한 기록이 실려 있다. 그 기록은 퇴계선생이 돌아가시기 한 달 전인 11월 9일부터 돌아가시기까지의 주요한 일지를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그 내용을 옮겨 보자.


○ 경오 11월 9일 시사(時祀) 때문에 온계(溫溪)로 올라가 종가에서 주무셨는데 한증(寒症)을 느끼셨다. 제사를 지낼 때 신위를 모셔오는 일과 제물을 바치는 일 등을 몸소 하셨다. 기운이 더욱 불편했으므로 자제(子弟)들이 「몸이 불편하시니 제사에 참사하지 마십시요」하였다. 그러나 「내가 이제 늙어서 제사에 참여할 날도 많지 않으니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 12일, 이 날부터 일기쓰시기를 그만 두셨다. 15일에 기명언(奇明彦 ― 기대승의 자(字) 호는 고봉)의 편지를 가지고 온 심부름꾼을 기다리게 하여 병석에서 치지격물설(致知格物說)을 수정하는 답서를 쓰시고 자제들을 시켜 정서토록 하여 기명언과 정자중(鄭子中, 이름은 유일(惟一), 호는 문봉(文峰)) 등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 12월 2일, 병이 심하여 약을 드신 후 「오늘이 내 장인 제사날이니 고기반찬을 쓰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다.

○ 3일, 설사가 났다. 매화분이 옆에 있었으므로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고 말씀하기를 「매화형한테 불결하여 마음으로 미안하다」고 하였다.

   같은 날 병증세가 심히 위독했다. 자제들에게 명하여 남에게서 빌린 책들을 빠짐없이 반환하라고 하셨다. 또 손자 안도(安道)에게 명하기를 「전에 교정한 경주본(慶州本) 심경(心經)을 아무가 빌려 갔는데 너가 찾아와서 한참봉(韓參奉)에게 보내어 판본 중에 잘못된 부분을 고치도록 하라」고 하였다. ― 이 말씀은 전에 집경전(集慶殿) 참봉(參奉)인 한안명(韓安命)이 경주에서 발간한 심경(心經) 가운데 틀리고 잘못된 부분이 많다고 하면서 선생에게 고쳐 달라고 부탁한 바가 있었는데 이 때 그 책을 남이 빌려 가서 미쳐 부쳐주지 못했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 4일에 조카인 영(甯)에게 명하여 유언을 받아 쓰도록 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나라에서 내리는 일반적인 예장(禮葬)은 사양하고, 반드시 유언대로 시행하겠다고 소를 올려 굳이 사양할 것.

     둘째, 유밀과(油密果)는 쓰지 말 것.

     셋째, 비석은 쓰지 말고, 작은 돌의 앞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쓰고 그 뒷면에는 태어난 곳, 조상의 갈래, 평소의 생각과 행실,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 선 내력의 대략을 ꡔ가례ꡕ(家禮)의 형식에 따라 쓰도록 하라. 이것을 만약 남에게 부탁하여 짓도록 하면 기고봉(奇高奉)과 같이 나를 잘 아는 사람도 반드시 야단스레 없는 사실을 늘여 놓음으로써 세상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 평소의 생각을 스스로 서술할까 하여 먼저 명문(銘文)을 짓고, 그 나머지는 그럭저럭 하는 사이 완성치 못하였는데 그 글이 원고뭉치 속에 있을 것이니 찾아서 그 명문을 쓰도록 하라.

     넷째, 윗대의 묘갈을 다 마치지 못하고 이에 이르렀으니 지극히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모든 일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으니 모름지기 집안 사람들에게 물어서 세우도록 하라.

     다섯째, 구경하는 사람들이 사방에 들러 설 터이니 너의 상주노릇은 다른 사람의 경우와 다르니 모든 일을 반드시 집안과 고을에서 예를 아는 유식한 사람에게 널리 묻고 상의해서 해야 오늘날의 예속에도 합당하고 옛날의 법도에도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 밖에 몇 가지 집안 일에 관한 유언이 있었다.

     이 날 오후에 여러 제자(弟子)들을 만나 보고자 하였다. 이 때 자제(子弟)들이 몸이 불편함을 걱정하여 그만 두시기를 권했으나 선생께서 「죽음과 삶의 갈림길이니 만나 보지 않을 수 없다」 하시면서 웃옷을 입히게 하여 여러 제자들을 불러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평소에 옳지 못한 견해로써 여러분들과 종일토록 강론을 하였는데 이것도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고 하셨다.

○ 5일에 영(甯)에게 「대간(臺諫)에서 올린 요구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하셨다(당시에 양사(兩司)에서 을사(乙巳)년의 공훈을 삭제할 것을 논하고 있었다). 영이 「아직 허락이 나지 않았습니다」고 대답하니 「결국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겠구나」하고 거듭 탄식하셨다.

○ 7일에 아들 적(寂)에게 명하여 「덕홍(德弘 ― 자는 굉중(宏仲), 호는 간재(艮齋))에게 책을 정리하도록 이르라」고 하였다. 덕홍이 그 말씀을 듣고 물러나 동문들과 함께 점을 쳤더니 점괘가 겸괘(謙卦)의 「군자가 마침이 있도다」(君子有終)라는 괘사였다. 제자 김부륜(金富倫 ― 자는 돈서(惇叙), 호는 설월당(雪月堂)) 등이 책을 덮고 실망하였다.

○ 8일, 아침에 매화분에 물을 주라고 일렀다. 이 날 날이 밝았는데 유시(酉時) 초에 갑자기 흰 구름이 선생의 집 위에 모이더니 눈이 안 치(寸) 남짓 내렸다. 이 때 선생이 누웠던 자리를 정돈케 하고 붙들어 일으켜 앉게 한 후 돌아가셨다. 그러자 곧 구름이 흩어지고 눈이 내렸다.

   이 날 유시에 돌아가시자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상관하지 아니하고 평소에 알던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달려와 조문하였다. 비록 일찌기 왕래가 없었던 사람들도 모두 거리에서 만나면 서로 조문하고 슬퍼하였으며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리석고 천한 백성에 이르기까지 비통해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여러 날 고기를 먹지 아니하였다.


  고종기에는 위의 기록 외에도 상례절차 문제 등에 관한 몇가지 기록이 더 실려 있다. 그러나 그런 사실들은 퇴계선생의 최후와 직접 관련되는 사실이 아니니 여기에 소개할 필요는 없다.

  위의 기록으로서 우리는 퇴계선생의 최후가 얼마나 조용한 것이었으며 질서있고 여유있는 것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것은 현실적인 생명이 다하고 영원한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갈림길이다. 캄캄한 미지의 세계는 두려울 수 밖에 없다. 더구나 다정한 형제처자를 떠나 홀로 가야하는 미지의 세계는 두려울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며 심지어는 몸부림치며 제 정신을 가누지 못하게 된다. 그러다가 마침내 인간의 힘으로서는 어찌 할 수 없음을 알게 되면 초인간적인 능력에 의지하여 정신적인 안주를 얻고 영생을 길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평소에 종교를 믿지 아니하던 사람들도 죽음의 순간에 종교에 귀의하는 경우가 많다.

  또 한편 사람의 욕망이란 끝이 없는 것이어서 부귀영화를 위하여 평생 욕망의 노예로 허덕이다가, 죽음에 다달아서는 그 부귀영화를 저 세상에까지 그대로 연장시키고자 한다. 역대의 제왕들이 지하궁전을 마련한다든가, 돈 있는 사람들이 호화분묘를 마련하는 사실 등은 바로 이 죽음 앞에서의 한 몸부림이라고 할 것이다.

  위와 같은 일반적인 죽음 앞에서의 몸부림에 비하면 퇴계선생의 죽음은 얼마나 조용하고 여유있는 것이었던가?

  퇴계선생의 일생은 오직 진리를 찾고 진리를 실천하는데 있었다. 그 생활이 그대로 죽음의 순간까지도 계속된 것이다. 돌아가시기 불과 며칠 전까지도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시고, 학문을 논할 기력이 다했을 때에는 마지막으로 그 제자들에게 이별을 고했던 것이다. 이제 선생에게 더 바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고종기에는 그 기록이 없으나 연보의 기록에 의하면 선생의 병이 위독했을 때 가족들이 조상신과 천지신명에 기도를 올렸는데 선생이 이를 아시고 그러지 말라고 중단을 시켰다고 한다. 평생을 올바르게 살고 이제 하 일 다하였으니 더 바랄 것도 더 구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생은 생전에도 남의 비웃음을 살 일이라곤 아예 없었거니와 돌아가신 후에까지도 행여나 잘못됨이 있어 남의 비웃음을 살까 염려하여 자신의 비문까지도 스스로 마련하려고 하셨던 것이다. 유언에서 밝혔듯이 돌아가신 후 비문의 기록이 혹 자신을 과장표현할까 염려하여 자신의 비문을 미리 마련하려고 했으나 미처 마련하지 못하고 명문(銘文)만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그 명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나면서 어리석고

자라서는 병이 많았다.

젊어서는 학문을 좋아하고

느즈막엔 어쩌다가 벼슬길에 들었네.

학문의 길은 갈수록 아득하고

벼슬은 마다해도 더욱 내려지네.

나아가기를 어려워하고

물러나 지냈나니

나라 은혜 생각하니 부끄럽고

성현 말씀은 두려웁네.

산은 높디 높고

물은 흐르고 흐르는구나.

모든 것 떨쳐버리고 노니르니

세상 비난도 벗어났네.

내 생각 남 모르니

내 뜻 누가 즐기랴?

옛 분들 생각하니

내 마음 꿰뚫었네.

오는 세상엔들

오늘을 알리 없으랴?

근심 가운데 낙이 있고

낙 가운데 근심 있네.

조화따라 돌아가노니

또 바랄 것이 무엇이랴?


生而大癡   壯而多疾

中何嗜學   晩何叨爵

學求愈邈   爵辭愈嬰

進行之跲   退藏之貞

深慚國恩   亶畏聖言

有山嶷嶷   有水源源

婆娑初服   脫略衆訕

我懷伊阻   我佩誰玩

我思古人   實獲我心

寧知來世   不獲今兮

憂中有樂   樂中有憂

來化悌畵   復何求兮


  퇴계선생은 이 세상에서 하실 일을 다 하시고 조용히 가셨다. ꡔ열자ꡕ(列子)의 무덤을 보고 한 말이 있다. 「군자는 쉼이오, 소인은 거꾸러짐이다」(君子休焉 小人伏焉)는 말이다. 사람으로서 할 일을 다한 군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영원한 휴식이오, 욕망에 급급한 소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욕망 앞에 거꾸러짐이라는 뜻이다. 선생에게 있어서 죽음은 영원한 휴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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