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이황선생 영정

退溪先生年譜
  연보 1
  연보 2
  연보 3
  연보 4
선생의 생애와 학문
  一. 생애편
  1. 태어나신 환경
  2. 어진 천품
  3. 부단한 탐구
  4. 벼슬길
  5. 인재양성,도덕교육
  6. 원숙한 인간상
  7. 조용한 최후
  二. 학문편
  1.선생이 남긴 저술
  2. 선생의 학문적전승
  3. 선생의 학문

 

퇴계 선생의 생애와 학문

 

 

二. 학 문 편


  1. 퇴계선생이 남긴 저술


  퇴계선생이 남긴 글들은 퇴계선생이 돌아가신 후 40년이 지난 1,600년에 도산서원에서 『퇴계선생문집』으로서 발간되었다. 51권 31책이었다. 오늘날 학자들의 학문적 저술은 일정한 제목아래 체계적인 이론을 나열하는 것이 보통이나 옛날 문집의 형식은 이와 같지 아니하였다. 먼저 시(詩)가 소개되고, 다음에 벼슬을 한 사람이면 나라에 올린 소(疏) 계(啓) 차(箚) 등의 글이 소개되고 다음에는 살았을 때 주고 받은 편지를 소개하고, 그 다음에 잡저(雜著)라 하여 오늘날의 학문이론에 해당하는 저술을 소개하고, 그 다음에는 글의 앞뒤에 실은 서(序) 기(記) 발(跋) 등의 글을 소개하고 이어 제문(祭文) 묘갈(墓碣) 행장(行狀) 등을 소개하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이다.

  퇴계선생의 문집도 이러한 순서로 편집되어 있다. 그 내용을 대략 정리해 보면 1~5권까지는 시로서 대략 1,000여 수에 해당하는 많은 시가 소개되고 있다. 5~6권까지는 임금의 뜻을 전하는 교서(敎書), 무진6조소(戊辰六條疏), 그 밖에 많은 사직소(辭職疏) 등으로 되어 있다. 9~40卷까지는 서(書), 즉 편지로 되어 있다. 이 편지가 문집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 800통에 가까운 편지가 실려 있다. 그러나 이 편지는 물론 일상 생활의 문안편지도 있지마는 퇴계선생의 편지내용은 대부분 학문에 관한 것이다. 철학적인 이론에 대한 해명,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 공부하는 자세에 대한 가르침 등 제자들의 학문의 정도, 자질의 차이 등에 따라 각양각색의 답변과 가르침을 담고 있다.

  41권은 잡저로서 천명도(天命圖)에 대한 설명과 자신의 견해를 밝힌 「천명도설후서」(天命圖說後序), 진서산(眞西山)의 저술인 심경(心經)에 대한 견해를 밝힌 「심경후론」(心經後論), 서화담(徐花潭)의 제자인 이연방(李蓮坊)이 주장한 「마음에는 체용이 없다」(心無體用)는 이론을 반박한 「심무체용변」(心無體用辯), 서화담이 주장한 「이기는 하나이다」(理氣爲一物)는 이론을 반박한 「비이기위일물변증」(非理氣爲一物辯證), 명나라 때의 학자 왕양명(王陽明)의 학설인 전습록(傳習錄)을 비판한 「전습록론변」(傳習錄論辯) 등을 싣고 있다. 42권은 서(序)와 기(記)를 싣고 있는데 서로는 「주자서절요」에 대한 서, 「계몽전의」의 서 등이 있고, 기는 단양(丹陽)의 산수를 찬양한 기, 경복궁을 다시 짓고 난 후 그 사실을 서술한 기, 이산서원(伊山書院), 영봉서원(迎鳳書院), 역동서원(易東書院) 등의 기가 있다. 43권은 발(跋)을 싣고, 44권은 잠명(箴銘), 표전(表箋), 상양문(上양文) 등을 싣고, 45권은 축문(祝文)과 제문(祭文)을 싣고, 46, 47권은 묘갈(墓碣)을 싣고 48, 49권은 행장(行狀) 등을 싣고 있다.

  위의 내용은 퇴계선생문집 초간본의 내용이고 그 후 외집, 별집, 속집 등이 계속 간행되었다. 그리고 이들 문집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별도로 단행본으로 간행된 책들이 또 많다. 「삼경석의」(三經釋義), 「사서석의」(四書釋義), 「계몽전의」(啓蒙傳疑),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등이 있다.

  1958년에 성균관대학교 부설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위의 퇴계선생의 모든 저술들을 모으고 그 위에 퇴계선생언행록, 퇴계선생에 대한 만제록(輓祭錄),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 교남빈흥록(嶠南賓興錄), 퇴계선생문집고증(退溪先生文集攷證) 등 퇴계선생에 관한 후인들의 기록을 총집성하여 「퇴계전서」(退溪全書)를 간행하였다.


  2. 퇴계선생의 학문적 전승


  퇴계선생을 일러 유학자이다, 주자학자이다, 혹은 성리학의 대가이다 등 여러가지로 표현한다. 한 사람의 학자에 대한 규정이 어찌하여 이렇듯 여러가지로 표현될까? 그것은 유학이란 학문성격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유학은 중국의 정통사상으로서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시대에 따라 그 학문성격을 각기 달리하면서 발전되어 왔다. 그러므로 큰 테두리에서는 다같이 유학에 속하면서도 학자들이 살았던 시대에 따라 그가 전공한 유학의 성격이 달랐던 것이다.

  퇴계선생이 유학자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 유학가운데 있어서 그가 관심을 가졌떤 유학은 송대에 발달된 유학, 특히 주자가 주장한 유학을 탐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퇴계선생을 일러 주자학의 대가이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리학의 대가란 또 무슨 뜻인가? 주자의 학문내용이 곧 사람의 본성과 우주의 이치를 따지는 학문이었기 때문에 이를 성리학이라고 했던 것이니 퇴계선생은 이 성리학에 대하여 깊이 연구한 학자라는 뜻이다.

  우리는 퇴계선생의 학문내용을 말하기 전에 먼저 퇴계선생이 이어 받았던 유학이 어떤 학문이며, 그리고 주자학의 내용이 어떠한 것이었던가에 대하여 대강이나마 알아 두는 것이 필요하다.


  (1) 유학의 발생과 흐름

  유학이 공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바이다. 공자는 B.C. 551년 중국의 노(魯)나라에서 태어 났다. 노나라는 주(周)나라의 제후국(諸侯國)이었다. 주(周)나라는 문왕(文王)이 덕을 쌓아 나라의 기초를 닦고,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군사를 일으켜 은(殷)나라를 멸하고 세운 나라이다. 그런데 이 주나라를 세운 사람은 무왕이지만 주의 모든 정체적인 제도를 정한 것은 무왕의 아우인 주공(周公)이었다. 주공은 지혜가 뛰어나고 덕이 높은 분이었다. 그는 주나라의 운명이 오래 계속되도록 정치적인 두 가지 기본제도를 정하였다. 첫째는 장자상속(長子相續)제도이고, 둘째는 봉건제도(封建制度)이었다. 주나라 보다 앞선 왕조인 은나라는 맏아들이 왕노릇을 하다가 죽으면 그 아우가 이어서 왕이 되는 이른 바 형제상속제도이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형제간에 누가 왕이 되느냐의 문제를 두고 항상 문제가 생기고 왕실이 서로 친목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여 주공은 언제나 맏아들만이 임금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천자가 다스리는 왕기(王畿) 지방을 제외한 변두리의 땅을 종친들에게 나누어 주어 다스리게 하는 정치제도를 마련하였다. 땅을 나누어 주고(封土) 그 땅을 다스리는 임금을 세운다(建侯)는 낱말의 첫 글자를 따서 이를 봉건(封建)제도라고 한다. 노(魯)나라도 이러한 봉건제도의 한 제후국이었다.

  언제나 맏아들이 왕이 된다는 대원칙 아래 왕실에 문제가 없어 잘 단결되고, 변방에는 종친들이 울타리가 되어 왕실을 잘 보호해 주면 주나라는 오래도록 나라가 번창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완전무결한 제도란 없는 것이다. 이 주공의 사려깊은 제도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문제가 생기게 된 것이다. 즉 처음에는 형제, 숙질 등 가까운 혈연들이 제후국을 다스렸으므로 문제가 없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혈연이 멀어지게 되고, 따라서 제후국간에 상호갈등이 잦아지게 되었다. 제후국 상호간의 국경문제로 인한 분쟁이 생겨나고, 따라서 그로 인한 전쟁이 생겨나고, 전쟁으로 인하여 제후국의 존패문제가 생기면 거기서 또 신분상의 변화가 생겨나게 되는 등 여러가지 사회문제가 복잡하게 엉켜가기 시작했다.

  공자가 태어난 때는 바야흐로 이와같이 주나라가 혼란기로 접어드는 시기이었다. 이 때를 일러 중국역사상 춘추시대(春秋時代)라고 하는데 춘주시대는 B.C. 772년부터 B.C. 481년까지 242년이 계속되고 이 춘추시대를 이어 전국시대(戰國時代)가 계속되는데 전국시대는 B.C. 480년부터 B.C. 222년까지 259년의 시기를 말한다. 중국역사 특히 중국정신사에 있어서 이 춘추전국시대 약 500년간은 실로 중요한 시기이다. 고대의 중국 통일국가였던 주나라의 질서가 근본적으로 뒤흔들리고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가 열리려고 하던 시대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의 생각에 일정한 기준이 없고, 갈팡질팡하던 정신적인 암흑기였다. 그러므로 뜻이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러한 무질서에서 벗어나서 하루 속히 인간사회의 질서를 회복할 수 있을까 걱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걱정이 뚜렷한 체계를 이루게 될 때 그것이 사상이 되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중국역사상에서 가장 많은 사상이 생겨났던 시대이다. 그 때의 많은 사상가들을 표현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표현한다. 여러 선생과 수많은 사상가라는 뜻이다. 공자도 이러한 많은 사상가 중의 한 분이었다. 그러나 그 많은 사상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사상가이었다. 그리고 유가(儒家)란 공자를 중심으로 한 학파를 표현한 말이다.

  그러면 공자가 주장한 사상의 핵심은 무엇이었던가? 그 핵심사상은 인(仁)이었다. 인(仁)은 무엇인가? 사람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덕(德)을 말함이다. 더욱 쉬운 말로 하면 사람이면 누구나 간직해야 할 정신적인 자세를 말함이다. 공자는 사회가 혼란한 까닭은 사람들이 모두 사람다운 자세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각기 사람다운 자세를 가지고 서로 어울리게 되면 인간사회는 질서있는 사회가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사람다움의 내용! 그것을 공자는 인(仁)이란 말로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공자의 사상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바람직한 인간상의 확립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참으로 인간다운 인간노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것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공자는 인(仁)이란 인간상을 내걸어 만인에게 인간은 이러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다. 여기에 공자의 위대성이 있다.

  그러면 인간다운 인간은 어떠해야 하는가? 모든 다른 사람들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잘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무리를 이루어 함께 어울려 살기 마련이다. 많은 사람이 어울려 살아야만 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생각이 같지 아니하고 이익이 서로 엇갈리는데 어찌 사이좋게 어울릴 수가 있는가? 그러나 어울려 살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사회이다.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한 해답이 공자의 인의 사상이다.

  공자는 사람들이 서로 원활하게 지내지 못하는 이유는 각기 제 욕심껏 제 하고 싶은대로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공자의 훌륭한 제자인 안회(顔回)가 공자에게 인간다운 자세, 즉 인이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제 하고 싶은대로의 욕심을 억누르고 이치대로 행동하면 된다」고 하였다. 또 공자는 사람이 남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방법으로서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남이 내게 행하는 것이 내 마음에 들지 않거든 그런 방식으로 남에게 대하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 하기도 하고, 이를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여 「내가 서고 싶은 자리이거든 남을 그 자리에 세워 주고, 내가 그렇게 되고 싶거든 남을 그렇게 되게 해 주라」(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고 하였다. 사람이란 공통성이 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이면 남도 싫어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이면 남도 하고 싶어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 마음을 헤아려 남에게 내가 싫어하는 바를 강요하지 말며 내가 바라고 싶은 것을 남에게 실현시켜 주면 그 상대가 나를 고맙게 여기고 잘 대해 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위의 원리는 개인과 개인과의 일반적인 관계원리이다. 인간은 개인간의 관계에 그치지 아니한다. 개인과의 관계를 넘어서서 사회적으로 복잡한 관계를 가지기 마련이고 나아가서 인간의 집단은 국가를 형성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공자는 인간의 사회적인 윤리, 그리고 국가를 다스리는 정치윤리는 어떻게 생각했던가? 여기에 공자의 정치윤리, 정치사상이 전개된다. 그 원리만을 간단히 설명하면, 사회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자기가 위치한 명분(名分)에 합당하도록 행동해야 된다는 것이다. 「임금은 임금의 명분에 합당하게, 신하는 신하의 명분에 합당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면 대통령은 대통령이란 명분에 합당하게, 장관은 장관이란 명분에 합당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자기가 위치한 신분에 알맞는 행동을 하면 사회는 질서가 서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정명(正名)사상이라 한다. 공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원리에 있어서도 권모술수나 힘으로써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덕(德)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법치(法治)를 배격하고 덕치(德治)를 주장하였다.

  이상이 공자사상의 큰 줄거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인간은 누구나 강렬한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가진 존재이다. 그러한 인간이 과연 제 욕망을 억누르고 공자가 제시한 도덕과 윤리를 실천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쉬운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길이 인간다운 길이라는 것은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것이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그렇게 해야만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이다. 공자는 인간에게 그 높은 이상을 제시해 준 것이다. 그리고 공자는 그 길만이 인간의 길이라는 것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보여 주었다. 공자는 말하기를 「육신을 희생시킬지언정 인간다움(仁)은 성취시켜야 한다」(殺身成仁)고 확실하게 말하였다. 또 『논어』에 이런 대화가 있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나라가 유지될려면 구비해야 할 조건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경제(食)와 국방(兵)과 도의(信)니라」고 하였다. 자공이 다시 묻기를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부득이 희생시켜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국방을 희생시켜야지」 하였다. 자공이 다시 「남은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희생시켜야 한다면 무엇을 희생시키겠습니까?」 하였다. 공자가 이에 대답하기를 「경제를 희생시켜야지」 하였다. 경제(먹는 것)는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다. 경제를 희생시킨다는 것은 목숨을 버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은 우선 살고 봐야 하는 것인데 목숨을 버리고서 어쩌자는 것인가? 이것은 상식과 어긋나는 것이다. 공자도 이 점을 생각했는듯 하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사람은 언제나 죽기 마련이다. 인간사회에 도의가 없으면 사회가 성립되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도의가 없으면 왜 사회가 성립되지 못하는가? 사람이 도의를 지키지 아니하고 각자의 욕심대로 행동하면 짐승처럼 서로 싸우게 되어 공동사회가 성립되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위의 공자의 말을 뒤집어서 표현한다면, 「나는 동물처럼 살기 보다는 사람으로서 죽겠다」는 뜻이 된다. 「차라리 목숨을 버릴지언정 사람답게 살겠다」는 공자의 이 확실한 태도가 공자이래 수천년 동안 동양의 삶의 지침이며 삶의 힘이 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공자의 이러한 사상이 맹자에 의하여 더욱 내면적으로 깊이 계승발전되었다. 맹자는 공자가 주장한 인(仁)의 사상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그 근거를 밝혔다. 즉 남을 사랑하고 남과 어울릴 수 있는 근거가 사람에게 본래 있다는 것이다. 맹자는 주장하기를 사람은 나면서부터 남을 사랑하는 성품(仁)과 옳음을 좋아하는 성품(義)과 남에게 사랑하는 성품(禮)과 옳고 그름을 분간할 줄 아는 성품(智)을 타고 난다는 것이다. 사람이 이러한 성품을 타고 났음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맹자는 그것을 증명하기를 만약 사람이 철 모르는 어린 아이가 우물가로 엉금엉금 기어가는 것을 보게 되면 누구나 깜짝 놀라 그를 붙들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행동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배우지 아니하여도 알 수 있고(良知), 배우지 아니하여도 행할 줄 아는 것(良能), 이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그런데 그 본성이 남을 사랑하고 옳음을 좋아하고 남에게 사양할 줄 알고 옳고 그름을 분간할 줄 알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본성이 착한 것(性善說)임에 틀림없다는 것이 맹자의 주장이다. 사람은 누구나 나면서부터 이 보배로운 본성을 타고 났으면서도 그 보배로움을 알지 못하고 육신적인 욕망에 이끌리어 함부로 행동하기 마련이다. 맹자는 이 점을 지극히 안타까워 하였다. 맹자는 말하기를 「집에 기르는 강아지나 병아리가 해가 저물어도 돌아오지 아니하면 온 동리가 소란스럽게 찾아 다니면서도 막상 제 보배로운 본성을 잃어 버리고서는 이를 찾으려 하지 아니하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고 탄식하였다. 그러므로 맹자의 사상은 보배로운 본성을 되찾고 이를 크게 드러내는 일이 중심사상이다. 사람과 사람과의 사귐에 있어서도 사랑하고 옳음을 좋아하는 마음이 드러나야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서도 역시 이 마음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지도자가 이 마음을 충분히 발양할 때 진실로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民本政治)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왕이 이 마음을 발양하지 못하고 함부로 못된 짓을 하면 그러한 왕은 갈아 치워야 한다는 혁명사상을 주장하였다.

  사람이 비록 배우지 아니하고도 알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할지라도 어떻게 하면 이 본성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이를 위해서는 응분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맹자는 주장하기를 이 본래의 마음을 놓치지 말고 내 몸에 간직해 있어야 한다(存心)고 하였다. 마음을 꾸준히 간직해 있으면 그 가운데서 본성이 점차 드러나게 된다(養性)고 하였다. 맹자는 마음을 간직하는 방법을 설명하기를 너무 서둘러도 아니되고, 너무 소홀히 해도 아니되고, 또 억지로 할려고 애써도 아니된다고 하였다. 생명이 자라나듯 자연스럽게 마음을 보담아 간직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 마음 간직하기를 온전히 하고 그 마음 쓰기를 극진히 하면, 자연히 그 마음속에 깃든 본성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된다고 하였다. 사람은 서로 공통성이 있으므로 나의 본성을 온전히 알게 되면 따라서 남의 본성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우주간에 생겨난 만물은 다같이 우주의 이법을 타고 난 것이므로 인간의 본성을 알게 되면 그를 미루어 만물의 본성을 알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물의 본성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게 되면 마침내 우주(天)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제 본성을 꿰뚫어 알고 나아가서 만물의 본성을 꿰뚫어 보고 그리하여 마침내 대우주와 합일될 수 있는 경지(天人合一)를 맹자는 제시해 주었던 것이다.

  위와 같이 공자와 맹자에 의하여 유교의 학설이 확실하게 세워졌다. 그러나 진시황(秦始皇)이 전국시대의 일곱나라를 통일하여 진(秦)을 세우게 되자 유학을 여지없이 탄압했다. 왜냐하면 진나라는 엄격한 법으로 나라를 다스렸는데 유학은 자유의지에 입각한 윤리도덕을 강조하게 되니 이것이 서로 맞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학자를 죽이고 유교서적을 불사르는 등(焚書坑儒) 참혹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포악한 정치는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라 진시황이 죽자 진은 곧 망하고 새로 한(漢)나라가 들어 섰다.

  한(漢)은 유학을 나라에서 장려하는 학문(官學)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진나라 때 흩어진 유학의 경전을 모아 새로 정리하고 시(詩), 서(書), 역(易), 예(禮), 춘추(春秋) 등 다섯가지 경전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제도를 두었다. 그리고 유학의 경전에 밝은 사람을 나라의 관리로 임용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되자 유학에 대한 연구는 자연 활발하게 되었으나 그 학문성격은 유학정신에 대한 창의적인 새로운 탐구보다는 이미 정리된 유학경전의 낱말의 뜻이 무엇인가를 해득하려는데 관심이 쏠렸다. 이러한 학문을 훈고학(訓誥學)이라고 한다. 훈고학적인 학풍은 한으로 부터 수(隋) 당(唐)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졌다.

  유학이 현실적인 정치제도로서 이용되고 낱말의 뜻풀이를 일삼고 있을 무렵 중국사상계에는 새로운 학문적 충격이 있었다. 즉 불교의 전래이었다. 불교는 본래 사람이 나고 죽는 원리를 탐구하는 철학적인 학문이요, 종교이다. 인간에게는 본래 형이상학적인 욕구가 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후의 세계는 어떠한가에 대한 강한 의문이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욕구에 해답하는 불교가 전래하자 중국의 많은 학자들이 불교로 쏠리게 되었다. 이에 자극받아 유학계에도 자기 반성의 한 계기가 생겨났다. 유학에는 철학적 형이상학적 원리가 없는가? 따지고 보면 역경(易經)은 바로 우주와 인간사회의 변화의 원리가 아닌가? 여기서 유학에 대한 철학적 조명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송학(宋學)의 일어남이다.

  송학은 한 마디로 유학의 철학화라고 할 수 있다. 주렴계(周濂溪)의 태극도와 그에 대한 설명(太極圖說)으로써 우주의 생성변화를 그림으로 나타내고,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형제는 이(理)를 강조하여 이 세상은 온통 이의 나타남이라고 하고, 장횡거(張橫渠)는 우주의 실체는 태허(太虛)이고 그 내용을 이루는 것은 기(氣)이며 이 기가 모이고 흩어짐으로써 만물의 변화가 생겨난다고 설명하고, 소강절(邵康節)은 역의 원리로써 이 우주의 생성소멸을 설명했다. 이들을 북송(北宋) 오군자(五君子)라고 하는데 이들의 사상을 집대성한 것이 남송(南宋)의 주자(朱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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