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이황선생 영정

退溪先生年譜
  연보 1
  연보 2
  연보 3
  연보 4
선생의 생애와 학문
  一. 생애편
  1. 태어나신 환경
  2. 어진 천품
  3. 부단한 탐구
  4. 벼슬길
  5. 인재양성,도덕교육
  6. 원숙한 인간상
  7. 조용한 최후
  二. 학문편
  1.선생이 남긴 저술
  2. 선생의 학문적전승
  3. 선생의 학문

 

퇴계 선생 연보(2)

 

1540년<선생 40세> 정월에 司諫院 正言이 되시고 부름을 받고 서울로 가셨다. 2월에 奉訓郞이 되시고 奉直郞에 오르셨다. 3월에 承文院 敎檢을 겸하셨다. 4월에 지제교가 되셨다. 이후로는 당하관 벼슬하실 적마다 예사로 겸하셨다. 司憲府 持平이 되어 經筵에서 아뢰어 말씀하시기를 “요즈음 가뭄이 매우 심하오니 政殿을 피하시고 수라를 감하시고 풍류를 그치시는 일이 비록 文具의 일이오나 행하심을 마땅히 지성으로 하실 것입니다. 가뭄으로 인하여 자주 赦하는 것은 매우 옳지 아니하오니 옛 사람도 말씀하시기를 ‘赦를 자주 하면 모든 어진 사람이 해를 입고 간사한 사람들이 기뻐한다.’하였으니 요즈음 간사한 무리가 생각하기를 ‘가뭄이 極하면 반드시 은사를 내릴 것이다’하여 죄를 짓는 자는 희망을 가지므로 죄를 범하는 자는 기탄이 없으니 그 폐가 적지 않습니다.” 하시니 주상께서 아름답게 여겨 들으셨다. 옮겨 刑曹正郞이 되셨다가 얼마 안되어 事情에 의해 벼슬을 그만두셨다. 9월에 敍用되어 다시 형조정랑이 되시고 承文院 敎理를 겸하시다가 弘文館 副敎理에 임명되시고 經筵 侍讀官과 春秋館 記注官을 겸하셨다. 12월에 通善郞을 제수하셨다.

1541년<선생 41세> 3월에 경연에 들어가셔서 일을 아뢰셨다. 이 때에 牛疫이 심하였기 때문에 선생께서 아뢰어 이르시기를 “五行志에 이르기를 ‘흙이 만물을 생성하는데 흙 기운을 기르지 못하면 곡식이 잘 되지 아니 하니 이에 소의 화가 있다.’ 하였으니 작년 가을에 지진이 일어나는 변이 있었고 지금에는 癘疫과 牛疫이 일어나니 옛 사람의 말이 진실로 거짓이 아닙니다. 또 바야흐로 봄에 가뭄을 근심하고 土脈이 윤택하지 않아 凶荒할 징조가 벌써 보이니 농사 풍흉을 점칠 수 있겠습니다. 災變이 겹쳐서 일어남이 지금같이 심한 적이 없었으니 바라옵건대 주상께서는 더욱 더 몸을 닦아 살피심을 더하십시오.” 그 뒤에 저녁 강의하실 때에 들어와 이르시기를 “漢나라 明帝 때에 하늘이 가물어서 種離意가 상소하여 간하니 명제가 즉시 營繕을 파하고 잘못한 것을 百官에게 일러주었더니 때에 맞추어 큰 비가 내렸습니다. 요즈음 재변이 있다 하여 주상께서 근심하시며 부지런히 惕慮하시고 스스로에게 죄를 주시는 말씀이 또한 간절하심으로 하늘이 때에 맞추어 비를 내리시니 이 일로써 보건대 하늘과 사람이 서로 응한다는 이치가 어긋나지 않으니 대개 안으로 진실되게 정성을 다하면 그 보답이 이르는 것입니다. 주역에 이르기를 ‘군자는 날이 다하도록 乾乾하고 밤에 惕若하기를 힘쓰면 허물이 없다.’하였습니다. <乾은 부지런하여 쉬지 않는다는 뜻이요 惕若은 마음이 경동한다는 뜻이요 힘쓰니 허물이 없다하는 것은 변이 있으나 재앙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中庸에 이르기를 ‘中과 和를 이루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에 있어서 시절을 편하게 하고 만물을 생육하게 한다.’하였으니 무릇 擧措하는 일이 사람의 마음에 합하게 하기를 힘쓸 것이니 사람의 마음이 화합하면 재변을 없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讀書堂에서 글읽을 여가를 주셨다. 그 집은 한강 동쪽에 있으니 나라에서 인재를 儲畜하여 기르는 곳이다. 문학하는 선비를 뽑아서 그 곳에 두고 두어 번 번갈아 가며 글을 읽히니 거기에 뽑힌 자는 영광스럽게 여기기를 신전에 오르는 것과 같이 하였다. 그러나 뽑힌 사람들이 놀며 스스로 평안하게 지내는 이가 많았는데 선생께서는 늘 차례가 되면 가시고 글 읽기를 일삼으셨다. 남쪽 누각 왼쪽에 작은 집을 지어 이름을 文會堂이라 하였는데 해마다 서당의 모든 사람이 唱和하여 지은 글이 있었다. 4월에 사헌부 지평이 되시고 5월에 홍문관 수찬이 되셨다. 咨文의 點馬官으로 義州로 가셨다. 義州雜詠이라 하는 글 열 두 절구가 있다. 부교리에 올라 재촉하여 부르시는 유지를 받들어 서울로 오셨다. 10월에 世子 侍講院 文學을 겸하시고 11월에 사헌부 지평이 되시고 12월에 病辭하셨으나 옮겨 成均館 典籍이 되시고 또 형조정랑이 되셨다.

1542년<선생 42세> 2월에 홍문관 부교리가 되시고 겸직은 전과 같았다. 3월에 경연에 들어가 주상을 모시고 글을 써서 아뢰기를 “한 시대의 흥함에는 반드시 한 시대의 규모가 있으니 東漢의 光武帝가 외척 등용을 숭상하지 않음에 그 망할 때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외척의 손에 말미암았습니다. 처음으로 창업하는 임금은 친히 규모를 세웠으나 자손이 능히 지키지 못하고 국사를 그릇되게 하는 것입니다. 章帝도 또한 어진 임금이었으나 그 때부터 외척의 전권이 시작되었습니다. 무릇 史記를 읽을 때에는 모름지기 다스려지고 어지럽혀지는 이유를 알고 보면 유익할 것입니다.”하셨다. 선생의 취미와 숭상하시는 것이 높고 깨끗하여 늘 물러나실 뜻을 두심으로 비록 영화로운 벼슬에 계셨어도 그것을 즐겨하시는 바는 아니셨다. 이 해의 봄에 玉堂에 속직하시며 매화를 생각한 시가 있었는데 이르기를<옥당은 홍문관이다.>


뜰에 한 그루 매화, 눈이 가지에 가득하였을 것인데

바람과 티끌의 회쉬와 바다를 꿈꿈에 끝이 분명하지 않도다.

옥당에 앉아서 봄밤의 달을 대하니

기러기 울음소리 가운데에서 생각나는 바가 있도다.


하셨다. 議政府 檢詳으로 어사되어 충청도로 내려가서 各官이 구황을 잘하고 못하는 것을 검찰하시고 4월에 復命하셨다. 주상이 인견하시고 구황의 形止를 물으시거늘 선생께서 아뢰시기를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에 쓸 預蓄이 삼년을 지내지 못한다면 그 나라는 나라가 아니다.’하였는데 지금 한 해만 흉년이 들어도 공․사간에 모두 군색하고 결핍됨이 이와 같은데 올해 만일 또 失農하면 구황의 일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常時에 나라에서 쓰는 것을 撙節하고 저축하여야 비록 생각 밖의 재변이 있어도 窘急할 환이 없을 것입니다.” 하셨다. 또 公州 判官 印貴孫이 悖戾貪汚하여 구황하는 일에 부지런하지 못한 것을 아뢰며 죄를 주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주상께서는 이 말을 좇으셨다. 晦齋 李彦迪선생께서 경주에 근친가심에 南郊에 가서 전송하셨다. 5월에 通德郞이 되어 舍人에 오르시고 承文院 校勘과 侍講院 文學을 겸하셨다. 8월에 聾巖 李公<휘는 현보이다.>이 고향으로 가시거늘 글을 지어 이별하고 災傷御史로 강원도로 가셨다. 過淸平山詩序를 지셨다. 10월에 司憲府 掌令이 되셨다.

1543년<선생 43세> 병환으로 사직하였으나 宗親府 典籤으로 제수되시고 또 장령이 되시어 계시다가 典設司守에 옮기셨다. 6월에 朝奉大夫가 되시고 7월에 成均館 司藝가 되시고 승문원 교감과 侍講院 弼善을 겸하셨다. 8월에 朝散大夫가 되셨다가 사간원 사간에 오르셨으나 병환으로 부임하지 못하시고 司僕寺 僉正으로 제수되셨다. 金厚之 수찬이 근친 말미를 얻어감에 글을 지어 보내셨다. 시에 이르시기를


내 그대와 더불어 泮宮에 놀 때

말 한마디에 도가 합하여 서로 얻음을 기뻐하였다.

그대는 세상 살기를 빈 배같이 볼 줄을 알았고

나는 흩어진 재목이 樗櫟과 같음을 믿노라.

부귀는 내게 뜬 구름과 같으니

우연히 얻었으나 내가 구하는 것은 아니로다.

가을 바람 소슬하게 한강 물에 부니

바다길 산길 천리에 그대 먼저 가는구나.


10월에 成均館 司成이 되시고 말미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성묘하셨다. 11월에 禮賓寺 副正으로 제수되셨으나 가지 않으셨다. 선생께서 뒤에 南冥 曺植께 보내신 편지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한갖 옛 성현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졌으나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께서는 늙으셨으므로 친구들이 억지로 과거를 보아서 利祿을 취하라 하였는데 내가 그 때에 식견이 없어 문득 동요되어 우연히 천거하는 글에 이름이 올라 티끌 속에 골몰하여 날마다 겨를이 없었는데 그 밖에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 후에 병이 더욱 깊고 또 스스로 세상에 해야 할 것이 없다고 생각되어 비로소 머리를 돌리고 발길을 멈추고서 옛 성현의 글을 취하여 읽고 이에 惕然히 깨달음을 얻어 길을 고쳐서 桑楡의 景을 거두고자 하여 벼슬자리를 떠나서 옛 글을 안고 고향의 산 가운데로 돌아가 장차 더욱 못 미친 바를 구하는데 하늘 신령의 힘을 입어 조금씩 쌓아 남은 것의 만분의 일이라도 얻을 것이 있다면 이 일생을 속절없이 보내지 않게 될 것이니 이는 나의 10년 이래의 뜻이요 원하는 일이다. 성은이 허물을 포용하시며 거짓 이름이 사람을 다그쳐 癸卯(1543)년에서부터 壬子(1552)년에 이르는 동안 세 번을 물러나왔으되 세 번 부르심에 다시 돌아갔으나 늙고 병든 몸으로 工程에 더한 것을 이렇게 하고도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하셨다. 또 鄭惟一의 言行錄에 이르기를 “선생께서 본래 벼슬할 마음이 적으셨는데다가 그때의 일에 큰 機關이 있음을 보시고 癸卯 (1543)년부터 물러나실 뜻을 결단하시니 이후로는 비록 여러 번 부르심을 입어도 조정에 계시지 아니하셨다.”하였다. 12월에 奉列大夫에 오르셨다.

1544년<선생 44세> 2월에 홍문관 교리로 부르셔서 서울로 가셨다. 독서당의 매화를 두고 지으신 글이 둘 있다. 4월에 世子 侍講院 左弼善을 제수받으셨으나 병으로 다니지 못하시고 사헌부 장령으로 계시다가 6월에 병으로 사직하고 成均館 直講을 옮겨지셨다. 또 홍문관 교리가 되셨으나 병으로 체직되시고 종친부 전첨이 되셨다. 圭菴 宋麟壽가 북경으로 가거늘 주신 글이 있다. 8월에 홍문관 응교가 되시고 經筵 侍講官과 春秋館 編修官과 승문원 교감을 겸하셨다. 9월에 말미를 얻어 집에 와 계시다가 10월에 서울로 가셨다. 11월에 中宗께서 승하하시니 천조에 사신을 보내어 부음을 아뢰고 시호를 청할 때 두 表文을 다 선생께서 지으시고 쓰셨다. 사신이 中朝에 들어가니 禮府官員이 글을 보고 매우 차탄하여 이르기를 “표문이 매우 좋고 필법이 또한 묘하다.”하였다. 사신이 돌아와 그 일을 아뢰니 명하여 선생께 말(馬)을 내리셨다.

1545년<선생 45세> 정월에 遠接使의 종사관이 되었으나 병으로 가지 못하셨다. 林士遂를 의주로 보내는 글이 있다. 3월에 병환으로 체직되고 內贍寺僉正에 옳기셨고 5월에 중훈대부가 되셨다. 6월에 홍문관 응교로서 典翰에 오르셨고 겸직은 전과 같았다. 7월에 인종께서 승하하시고 명종께서 즉위하셨다. 상소하여 왜인과의 화친을 허락하시기를 청하셨다. 이전 庚午년에 三浦에서 왜적이 난을 일으켜 邊將을 죽였기에 나라에서 柳聃年과 黃衡 등을 보내어 討平하고 이로 인하여 예를 거절하고 왕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 때에 이르러 왜인이 화친함을 빌었으나 나라에서는 지난 일 때문에 다시 물리쳤다. 이 때에 나라에 큰 喪事가 있었고 선생께서는 왜적들이 그 틈을 타 여러 가지 화를 일으킬까 근심하시어 상소하셨는데 대략 말씀하시기를 “전번에 섬 오랑캐가 일으킨 變亂은 개나 쥐와 같은 도적에 불과했던 것으로 이미 도적의 무리를 죽여 물리쳤고 또 왜관에 머물렀던 자들을 쓸어 내쫓아 나라 위엄이 이미 진동하였고 왕법이 또한 바로 잡혔습니다. 저들이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을 부끄럽게 여겨 마음을 고치고 허물을 고쳐 머리를 숙여 불쌍히 여기심을 빌며 꼬리를 흔들어 가련히 여겨줄 것을 비니, 왕의 도가 넓고 넓어 간사한 것을 미리 짐작하지 아니하며 미덥지 못한 것은 억측하지 아니하니 진실로 옳은 마음으로 온다면 이에 받을 따름입니다. 지금 天變은 위에서 보이고 人事는 아래서 빠져서 큰 화가 거듭되고 나라 안이 어렵게 되었으니 이는 우리 나라의 어떠한 시절입니까? 또 나라에서는 북쪽 오랑캐와 더불어 틈이 생겼으니 만약 남북의 두 도적이 일시에 발하면 무엇을 믿고 막겠습니까? 들으니 조정에서 禮로 청하는 것을 끊는다 하는데 마음에 이상하게 여겨져 탄합니다. 이 일은 백년사직에 관계되는 근심이요 억만 백성의 목숨에 관계되는 것이니 바라옵건대 신의 이 글로써 慈殿께 취품하시고 조정에 있는 신하들에게 널리 의논하시고 절충하고 살펴서 처리하십시오.”하셨다. 8월에 中直大夫에 오르셨으나 병으로 홍문관 직을 사양하여 通禮院相禮로 계시다가 9월에 司饔院正에 제수되시고 홍문관 전한으로 제수되시니 겸직은 예전과 같았다. 10월에 李芑가 계청하여 선생의 직위를 삭탈하였다. 이 때에 權奸이 일을 일으켜 士禍가 크게 일어나 죽고 귀향간 사람이 계속 잇달았으니 사람이 모두 발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右相 이기는 더욱 凶險하여 여론이 자신을 허용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자기와 뜻이 다른 사람을 다 몰아내어 모든 입을 箝制하고자 하여 대궐에 홀로 나아가 아뢰기를 “요즈음 죄 정하기를 각각 맞게 하였으나 朝士들 중 坐罪하여 파면될 자가 아직 미진한 것이 있으니 청하옵건대 李天啓와 李滉과 權勿과 李湛과 丁熿 등을 파직하시기 바랍니다.”하여 선생께서 그 사람들과 같은날 삭직당하시니 朝夜의 사람들이 놀라고 통분히 여겼다. 12일에 仁廟의 梓宮을 陵으로 발인하였는데 선생께서는 반열에 들어가지 못하셨기에 홀로 들 밖에 가서 望哭하시고 예를 행하셨다. 주상께서 명하여 職牒을 도로 주셨다. 이기의 조카인 李元祿은 본래 선생을 중히 여겼기에 林百齡은 이기의 黨 사람으로 또한 기에게 말하기를 “이황이 근신하여 스스로를 지키는 것은 사람들이 다 같이 아는 것이니 지금 그 사람을 죄주면 지난 날에 죄입은 사람도 다 거짓 일로 잡았다고 할 것입니다.” 하니 이기가 다시 대궐에 나아가 전번의 啓辭에 살피지 못한 것을 사죄하고 도로 직첩을 줄 것을 청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敍用하여 司僕寺正에 제수하고 承文院 參校를 겸하게 하셨다. 11월에 통훈 대부가 되시고 迎接都監郞廳으로 임명되셨다.

1546년<선생 46세> 2월에 말미를 얻어 시골로 내려와 外舅 權礩을 장사지내셨다. 5월에 병으로 올라가지 못하시어 해직되셨다. 7월 초2일부인 권씨께서 돌아가셨다. 8월에 校書館 校理로 제수되시고 승문원 교리를 겸하셨다. 11월에 禮賓寺正이 되셨으나 모두 가지 않으셨다. 養眞菴을 퇴계 동쪽 바위 위에 지으셨다. 이전에  작은 집을 온계 마을 남쪽의 芝山 북쪽에 지었으나 마을이 많아 고요하고 아늑하지 않다고 하시고 이 해에 비로소 退溪 아래 수삼리쯤에 假寓하시고 동쪽 바위 곁에 작은 집을 지어 이름을 養眞이라 하셨다. 그 시냇물의 속명은 兎溪인데 선생이 물러갈 ‘退’자로써 토끼 ‘兎’자를 고치시고 인하여 스스로 별호로 삼으셨다.

1547년<선생 47세> 7월에 안동 부사를 제수받으셨으나 가지 않으셨다. 8월에 홍문관 응교를 제수하시고 예전대로 겸직하여 부르시므로 서울로 가셨다. 12월에 병으로 사양하시니 儀賓府 經歷으로 제수되셨다. 이 때에 나라의 의논이 더욱 怪慮하여 兩司와 홍문관이 서로 글을 올려 鳳城君에게 죄주기를 청하거늘 선생께서는 힘으로 능히 구하지 못할 줄을 아시고 병으로써 사직하셨다.

1548년<선생 48세> 정월에 외임을 구하신 것은 깊은 뜻이 있어서였다. 청송을 구하시다가 얻지 못하시고 단양군수가 되시니 글을 지어 이르시기를 “청송과 백학은 비록 연분이 없으나 푸른 물과 丹山은 진실로 인연이 있도다.”하셨다. 선생께서 고을을 다스리시기를 誠信으로 하시며 墾惻하시고 다스림이 淸簡하시니 아전과 백성이 다 편하게 여겼다. 고을에 奇勝한 땅이 많았는데 龜潭과 島潭 같은 곳이 더욱 아름다웠다. 선생께서 공사하신 겨를에는 놀고 읊으시고 구경하셨는데 蕭然히 세상 밖에 나간 듯한 자취가 있었다. 단양에서 산수가 놀만한 곳 기록한 것을 말한 것과 二樂樓와 花灘 등이 지으신 글에 있다. 2월에 아드님 寀의 상사를 들으셨다. 8월에 향교에 釋奠하셨고 9월에 말미를 얻어 집에 돌아와 성묘하셨다. 10월에 형 대헌공이 충청감사가 되시니 단양이 그 도내에 있으므로 풍기군수로 옮기셨다.

1549년<선생 49세> 2월에 향교에서 釋奠禮를 행하였다. 한식날 선영에 성묘하셨다. 4월에 小白山을 유람하셨다. 9월에 감사에게 辭狀하시고 10월에 감사께 글을 올려 白雲洞 서원의 扁額과 서책을 청하시니 감사께서 啓問하여 頒降하셨다. 백운동은 고을 북쪽 소백산 아래의 竹溪 위에 있는데 前朝 때 文成公 安裕께서 예전에 사셨던 땅이다. 周世鵬이 그 땅의 군수가 되었을 때 서원을 그 곳에 처음으로 지어 문성공을 제사하고 모든 선비들이 머물면서 배우는 곳으로 삼았었다. 선생께서 생각하시기를 동방에는 옛날에 서원이 없었는데 지금 비로소 처음으로 생겼으니 가르치는 것이 위에 말미암지 않으면 다시 폐하게 될까 두려워하여 감사께 글을 올려 청하여 위에 아뢰어 송나라 때의 옛 일에 의거하여 서책과 서원 편액을 내려주시고 田地와 종을 겸하여 주어 학자로 하여금 의지하여 돌아갈 곳이 있게 해 줄 것을 청하셨다. 감사 沈通源이 조정에 아뢰니 이에 이름을 紹修書院이라 하시고 대제학 申光漢을 시켜 記를 짓게 하고 四書와 五經과 性理大全 등의 책을 주시니 서원의 일어남이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감사께 세 번을 사장하여 벼슬을 해임해 주기를 청하셨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돌아오시니 行裝이 쓸쓸하여 서책 두어 상자일 따름이었다.

1550년<선생 50세> 정월에 마음대로 임소를 버렸다 하여 파직당하셨다. 2월에 비로소 퇴계 서쪽에 卜居하셨다. 이보다 먼저 河明洞 紫霞奉 아래에 땅을 얻어 집을 짓다가 끝내지 못하고 竹洞에 옮겨 계시다가 또 골이 좁고 시내가 없다 하여 溪上에 옮기시니 세 번 옮겨 定居하신 것이다.

寒栖菴을 지으시고 堂 이름을 靜習이라 하고 그 가운데서 글을 읽으셨다. 시를 지어 말씀하시기를


몸이 물러나니 어리석은 분수가 편안하고

학문이 물러가니 暮境이 근심이로다.

시내 위에 비로소 정거하니

흐르는 물에 임하여 날로 살핌이 있도다.


하셨다. 이로부터 쫓아오는 선비가 날로 많아졌다. 聾巖 李公을 汾川에 가서 뵈었다. 4월에 光影塘이란 못을 팠는데 못이 한서암 앞에 있으니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가 같이 배회한다고 하는 뜻을 취하여 이름을 지으신 것이다. 8월에 형 左尹公 瀣의 부음을 들으셨다. 좌윤공께서 전에 사헌부에 계실 때에 李芑가 정승되는 것이 합당하지 못하다고 의논하였었는데 지금에 이르러 이기의 모함에 빠져 매를 맞고 귀양가시다가 길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1551년<선생 51세> 이 해에는 선생께서 벼슬을 하지 않으시고 집에 계셨다. 3월에 安東 馬鳴洞에 가서 선조 분묘에 성묘하셨다.

1552년<선생 52세> 입춘에 지으신 시가 두 수 있는데 그 중 한 시에 이르기를


   누른 책 중간에서 성현을 마주 대하여

   밝은 한 집에 초현히 앉았도다.

   매화 창에서 또 봄 소식을 보니

   보배로운 거문고를 향하여 줄 끊어진 것은 탄식하지 말라.


하셨다. 聾巖을 臨江寺로 찾아가서 지으신 글이 있다. 4월에 홍문관 교리 지제교겸 경연시독관, 춘추관 記注官, 승문원 교리로 부르시니 서울로 가셨다. 5월 초 8일에 입시하여 進講하실 때 글을 써서 아뢰기를 “積善하는 집은 남은 경사가 있고 積不善하는 집은 반드시 남은 殃禍가 있나니 무릇 사람이 악한 일을 할 때에 스스로 그 일이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겠지만 그 악이 점점 쌓여 마침내 큰 화에 이릅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어진 일을 쫓음은 올라가는 것 같고 악을 쫓음은 내려가는 것 같다.’하였으니 위로 제왕으로부터 아래로 모든 백성에 이르기까지 다 마땅히 정히 살피며 굳게 지키어 中正한 도를 잡으라 하는 성인의 말씀을 가슴에 담아 한결같이 지키고 사사로운 것을 섞이지 않게 하면 사특한 念慮가 저절로 미치지 아니하며 그 마음가짐의 바르기가 한결같을 따름이니 바라옵건대 주상께서는 公과 私와 義와 利의 분별을 살펴 염려하십시오.” 하셨다. 司憲府 執義로 임명됨에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6월에 동료와 더불어 箚子를 올려 일을 의논하시고 병으로 辭狀하셨으나 弘文館 副應敎로 옮기셨다. 7월에 通政大夫 成均館 大司成에 오르셨다. 그 때에 대사성이 비었기에 吏曹에서 대신의 뜻으로써 堂下官 중에서 글 잘하고 재주와 행실있는 사람을 택하여 擬望하기를 계청하니 선생께서 首望으로 추천되어 오르셨다. 愼齋 周世鵬의 遊淸凉山錄의 跋을 지으셨다. 11월에 병으로 사직하고 上護軍이 되셨다.

1553년<선생 53세> 4월에 대사성이 되셨다. 임금께서 학교가 폐하고 해이하다고하여 勸學하는 節目을 내리시어 다시금 밝혀 거행하도록 하시니 선생께서 사양하여 사임하시고 다시 師丈을 택하여 맡길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四學에 通文하여<사학은 南學, 西學, 中學, 東學이다.> 모든 선비를 깨우치니 대강 이르시기를 “학교는 風化의 근원이요 착한 것을 따르는 곳이며 선비는 예의의 주인이고 元氣가 붙어 있는 곳이다. 나라에서 학교를 베풀어서 선비를 가르치는 것은 그 뜻이 매우 중한 것이다. 스승과 선비 사이에는 마땅히 예의로써 서로 먼저하여 스승은 엄하고 선비는 공경하여 각각 그 도를 다할 것이니 이제부터 모든 선비는 무릇 일상의 음식먹는 것을 예의 가운데서 주선하지 않는 것이 없게 하고 또 서로 계획하고 가다듬기를 힘써 옛 습관을 씻어 버리고 들어와서는 부형을 섬기는 마음으로 미루어 나가서는 어른과 웃사람을 섬기는 예를 삼으며 안으로는 효제를 행하고  충신을 으뜸으로 하여 나라에서 문교를 숭상하고 교화를 일으키기 위해 학교를 열어 선비를 가르치는 뜻에 보답해야 합니다.” 6월에  學田을 주셨기에 모든 선비를 거느리고 글을 올려 사례하셨다. 7월에 대왕대비께서 정사를 왕께 돌려 보내시는 교서를 지어 올리셨다. 병으로 사직하셨으나 副護軍으로 제수되셨다. 8월에 親試하시는 과거의 對讀官이 되셨다. 9월 丙申일에 景福宮이 불에 타서 종묘를 慰安하는 제문을 지어 올리셨다. 忠武衛上護軍이 되셨다. 洪應吉의 遊金剛山錄의 서를 지으셨다. 10월에 鄭之雲의 「天命圖」를 고쳐 정하셨다. 之雲의 자는 靜而요 별호는 秋巒이다. 「천명도」를 지었거늘 선생께서 그를 위하여 고쳐 정하고 그 뒤에 서를 쓰시니 대강 말씀하기를 “내가 벼슬하기 시작할 때 한양 서쪽 성문 안에 우거한 지 20년이나 이웃에 있는 鄭靜而와 더불어 서로 알고 왕래하지 못하였다. 하루는 「천명도」라 하는 것을 얻었는데 그림과 말이 잘못 그린 것이 있거늘 사람을 시켜 정이에게 청하여 정이의 本圖를 보라고 청하였다. 얼마 안 있어 또 정이 보기를 청하니 서너 번 왕복한 후에야 허락하였다. 정이가 말하기를 ‘慕齋와 思齋 두 선생의 문하에 가서 배우면서 그 의논을 들었으나 성리학은 미묘하여 밝힐 곳이 없는 것을 근심하다가 시험삼아 주자의 말씀을 취하고 다른 모든 말로써  相參하여 한 그림을 만들어 선생께 質疑하여 그 잘못된 것을 지적해 줄 것을 청하였더니 선생께서는 쌓은 공부가 아니면 가볍게 의논할 것이 못된다고 이르시거늘 그 후에 내 스스로 잘못된 것을 깨달아 고친 것이 많으나 아직도 정한 것이 없습니다.’ 하거늘 내가 이르기를 ‘두 선생께서 가벼이 의논하지 않으신 것은 진실로 반드시 깊은 뜻이 계셨기 때문이나 지금 우리가 학문을 강구하다가 매일 未安한 곳이 있음을 깨달으면 어찌 한갖 구차히 같이 하며 굽히고 덮어 마침내 그 옳은 것을 분변하지 않겠는가?’하고는 周濂溪가 만든 태극도와 그 말을 인증하고 지적하여 이르기를 ‘어떤 곳은 잘못되었으니 고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어떤 곳은 있어야 할 것이 없으니 깁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어떠한가?’하니 정이가 말을 다 듣고 즉시 옳게 여겨 성내는 빛이 없고 오직 황의 말이 마땅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힘써 분변하여 지극히 마땅한 것에 돌아간 후에 그치고 전라도 선비 李恒이 의논하여 情은 氣의 권역 가운데 두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 말을 취하여 여려 장점을 모은 자료로 삼았다. 그리고 두어달 만에 정이가 고친 그림과 그에 붙은 말을 가지고 와 보이거늘 다시 서로 같이 상참하고 교정하여 비록 잘못된 곳이 없는지 있는지를 알지 못하나 우리들의 소견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였다. 이에 좌우에 걸어 두고 조석으로 잠심하여 살펴 玩味하니 그림으로 인하여 깊은 속을 밝혀내어 조금이나마 유익함이 있을까 한다.” 하셨다.

1554년<선생 54세> 2월에 東宮의 上梁文을 지으셨다. 5월에 형조참의가 되시고 6월에 병조 참의로 옮기셨다. 7월에 周愼齋의 訃音을 받고 우셨다. 盧伊齋<守愼>에게 편지하여 夙興夜寐箴의 주해를 의논하셨다. 그 때에 이재가 진도에 귀양가서 숙흥야매잠을 주해하였거늘 선생께서 편지하여 의논하시니 대강 이르시기를 “숙흥야매잠을 옛날부터 일찍이 가슴에 담아들었으나 아직도 조리의 치밀함과 공부의 엄함이 이같이 지극한 줄은 알지 못하였는데 이제 주해를 얻어 보니 章을 나누며 句를 분석하였고 정한 뜻과 높은 의논이 중요한 곳에 넓게 놀며 홀로 밝고 넓은 근원에 이른 것을 차탄하여 감복하기를 이기지 못하나 다만 그 사이에 두어 군데 의심되는 것이 없지 않아 삼가 다 내어 쓰니 바로잡아 주기 바랍니다.”하셨다. 경복궁의 새로 수리한 모든 편액 글자를 쓰셨다. 延平答問에 발을 지으셨다.<이 책은 송나라 선비 延平先生이 주자의 묻는 말에 대답하신 글이다.> 청주 목사 李楨이 새로 새기고 발을 청하므로 지으셨다. 9월에 체직하여 상호군이 되셨다. 10월에 思政殿에 大寶箴을 써 올리셨다. 11월에 上舍 洪仁祐의 죽음에 우셨다. 선생께서 남에게 편지하여 이르시기를 “이 사람이 학문이 있고 문장에 능하더니 문득 죽음에 이르니 늘 깊이 탄식하고 아까워한다.”하셨다. 첨지 중추부사가 되셨다. 12월에 重修景福宮記를 지어 올리시니 주상께서 馬을 하사하셨다.

1555년<선생 55세> 2월에 康寧殿에다 七月篇을 써 올리셨다. 병으로 세 번 사양하여 벼슬을 사직하고 즉시 성 밖에 나가 배를 세내어 동으로 돌아가셨다. 이날 상호군이 되셨다. 첨지 중추부사를 제수하시고 食物을 주시고 諭旨하여 부르시며 서울에 와서 의원에게 보이라고 하심에 글을 올려 사은하시고 소명을 사양하셨으나 주상께서 듣지 않으시고 5월에 다시 부르셨다. 선생께서 돌아오신 후에 李龜壽가 아뢰기를 “이황은 병으로 고향에 돌아간 지가 거의 한 달이나 되었는데도 위에서 알지 못하시니 옛날에 이른바 ‘이전에 등용된 자가 오늘 그 나간 바를 알지 못한다.’하는 것이 이 경우를 말한 것일 것입니다. 이황은 문장과 操行이 있으나 산야에 恬退하였으니 이 사람을 숭상하여 권장하시면 선비의 풍습을 북돋워 가다듬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고 申汝悰이 또 아뢰기를 “서울에 있으면 의원을 찾아가서 약을 쓰기가 편할 것이니 이황을 올라 오게 하십시오.”하였다. 이에 다시 僉知를 제수하고 명하여 부르셨다. 선생께서 글을 올려 사례하는 뜻을 진술하시고 병이 들었으니 벼슬을 해임해 주시기를 청하셨다. 얼마 후에 鄭惟吉이 아뢰기를 “이황은 학술과 재주가 있으니 한 시대에 인재는 한정이 있는데 이같은 사람이 또 얼마나 있겠습니까?” 하니 이로 말미암아 두 번 부르실 때 유지에 이르시기를 “그대의 재주가 文翰에 오르고 淸謹한 덕을 갖추었기에 바야흐로 서울에 두고 顧問을 갖추고자 하였는데 어찌 한 병으로 갑자기 향촌으로 물러가시는가? 이제 狀辭와 사례한 箋文을 보니 내마음이 섭섭하도다. 안심하고 조리하여 늦고 빠른 것을 생각하지 말고 올라오라.” 하셨다. 家廟에 祭하여 恩賜가 계신 것을 고하셨다. 6월에 聾巖께서 별세하셔서 그 집에 가 우시고 행장을 지으셨다. 先妣 김씨․박씨의 墓標를 지으셨다.<선생께서는 박씨에게서 나셨고 김씨는 전의 모친이시다> 겨울에 淸涼山에 들어가서 달이 넘은 후에야 돌아오셨다.

1556년<선생 56세> 5월에 홍문관 부제학 지제교가 되시고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으로 부르심을 받으셨다. 이전의 좌상 尙震이 趙士秀와 같이 경연에서 선생을 부르기를 청하니 주상께서 御札로써 부르시기를 “그대는 탁월하여 맑고 간결하며 세상에 없는 문장으로 공명을 탐내지 않아 촌향에 한가하게 있으니 그 恬退하는 節을 아름답게 여겨 늘 서울로 돌아올 날을 기다렸으나 내가 어진 사람을 구하는 정성이 없어서 조정에 벼슬하지 않으니 내마음이 缺然하다. 내 비록 尙文의 덕이 없으나 그대는 어찌 富春에 숨어 살기를 좋게 여기는가?<尙文은 어진 임금이요 부춘은 옛날에 嚴子陵이 숨었던 곳이다>빨리 올라와 벼슬하여 내 간절히 구하는 뜻에 응하라.” 하시고 食物을 주시고 얼마 후에 부제학을 제수하고 또 부르셨다. 6월에 첨지 중추부사를 제수하시고 諭旨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정과 뜻이 간절하므로 마지못해 따르니 안심하고 병을 조리하라.” 하셨다. 朱子大全에 있는 서찰은 다 공경과 대부와 제자들과 아는 사람과 더불어 往還에 따라 묻는 것을 대답하는 말씀으로 선생께서 각각 사람의 材禀의 높고 낮음과 학문의 얕고 깊음을 억제하고 높여주시며 인도하시며 구하신 것이어서 더욱 학자에게 切當하나 분량이 많아 그 자취를 궁구하기 쉽지 않다고 하시고 학문에 깊이 관계하고 받아쓰기에 적당한 것을 뽑아서 책을 만드시고 이름을 『朱子書節要』라 하셨다. 8월에 族人을 모아 안동땅에 계신 고조 증조의 분묘에 제사 지내셨다. 9월에 온계에 있는 모든 친척과 더불어 落帽峰에 오르셨다. 12월에 鄕約을 초하셨다. 이 때에 나라에서 鄕徒하라고 하시는 명이 계셔서 선생께서 향약을 초하셨으나 다른 일 때문에 실행하지 못하였다. 주자서절요의 서문을 지으셨다.

1557년<선생 57세> 3월에 樹谷菴記를 지으셨다. 수곡은 선생의 선영이 계신 곳이다. 서당의 터를 도산 남쪽에 얻으셨다. 다시 서당터를 얻으시며 느끼신 글 두 수와 다시 도산 남쪽 골에 가셔서 보신 글이 있다. 4월에 太紫山에 놀면서 大方洞을 찾으셨다. 7월에 『啓蒙傳疑』란 책을 완성하셨다. 선생께서 지으시니 대강 말씀하시기를 “理와 數의 학문은<이는 주역이요 수는 河圖洛書八卦를 그린 수다.> 넓고 크며 묘하며 궁구하기 쉽지 않으며 혹 세상에 드문 책에서 나온 말이 많으니 반드시 다 상고하고 의논한 후에야 그 뜻을 알 수 있고 깊이 숨은 뜻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더하며 더는 법을 자세히 하지 않을 수 없다. 혹 생각하여 맞음이 있거나 혹 예를 상고하여 증거되는 것이 있으면 좇아가며 가끔 기록하여 상고해 보기를 편리하게 하였다.”하셨다.

1558년<선생 58세> 3월에 滄浪臺를 쌓으시고<후에 天然臺라 고쳤다> 4월에 鼇潭에 가 노셨다. 祭酒 禹倬을 위하여 서원을 오담 위에 짓고자 하여 그 터를 보셨다. 6월에 魚灌圃의 시집에 跋을 지으셨다.<관포는 魚得江의 별호이다> 윤 7월에 상소하여 致仕하기를 빌었으나 御批를 내려 허락하지 않으시니 부르심을 입고 서울로 가셨다. 이전 6월에 영의정 沈連源과 대제학 鄭士龍이 경연에서 아뢰어 서울의 벼슬을 줄 것과 감사로 하여금 권하여 올려 보내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선생께서 이를 들으시고 상소하여 병이 들어 벼슬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극진히 진술하셨는데 대강 이르시기를 “신이 비록 무식하오나 어려서부터 임금님을 섬기는 도리를 들어 배웠는데 어찌 말에 멍에 메우기를 기다리지 않은 것이 공순한 것인 줄을 알지 못하겠습니까마는 구태여 한 구석만을 지켜 모두 옳지 못하다고 하고 의심을 쌓아가는 가운데 있으면서도 변통할 줄을 알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 나아감이 임금을 섬기는 의리에 어긋남이 있을까를 두려워한 것입니다. 의라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도에 마땅한 것이라고 한다면 어리석은 것을 숨기고 벼슬을 도적질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할 수 있겠으며 병폐하여 헛 녹만 먹는 것을 마땅하다고 말할 수 있겠으며 헛 이름으로 세상을 속이는 것을 마땅하다고 말할 수 있겠으며 잘못된 것을 알면서 冒諂하여 나아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할 수 있겠으며 소임을 수행하지 못하면서 물러가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다섯 가지 마땅하지 못한 것을 가지고 조정에 있으면 그 신하된 의에 어떠하겠습니까? 엎드려 원하옵건대 신이 사정에 어둡고 어리석은 것을 살피시고 신의 병이 심한 것을 불쌍히 여기셔서 전의 벼슬로써 田里에 물러가서 허물을 고치며 병을 조리하며 여생을 마치게 해주십시오.” 하시니 주상께서 어찰로 대답하시기를 “이번 상소의 사연을 보니 전후에 물러나는 일을 구하던 일을 기록하여 다섯 가지 마땅하지 못한 것을 진술하면서까지 굳게 고집하니 비록 어진 사람을 얻어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나 어찌 그 뜻을 빼앗겠는가? 내가 실로 덕이 적고 밝지 못하고 그대는 또한 생각이 없어서 도를 지키고 의를 지켜 결단하여 와서 도울 뜻이 없으니 내가 매우 부끄러우니 마땅히 내 뜻을 알라.” 하셨다. 이에 선생께서 명을 받들어 서울로 가시어 9월 그믐달 입성하셨다. 10월에 성균관 대사성을 제수하셨다. 주상께서 선생을 불러 政院에 나오라고 명하시고 전교하여 말씀하시기를 “학교는 풍속과 교화의 근원인데 퇴폐함이 심하고 士習을 마땅히 길러 바르게 할 것인데도 浮蕩하여 아름답지 않으니 비록 내가 불민하여 고무하여 교화하지 못한 탓이기는 하나 어찌 또한 師長에게도 관계가 없겠는가? 그대는 글이 능하고 淸謹하여 가르칠 소임에 합당하므로 내가 그대에게 맡기니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 마음을 다하여 부지런히 가르쳐서 학교를 振起하게 하며 士習을 바르게 하라.” 하시고 貂皮의 귀마개를 주시니 선생께서 아뤼기를 “신이 병이 심하여 전에 두 번이나 이 소임을 맡았으나 다 감당하지 못하였는데도 지금 소임을 또 맡게 되니 전같이 감당하지 못할 근심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셨다. 또 명하여 술을 하사하셨다. 11월에는 병으로 사양하시니 갈아 상호군을 제수하셨다. 12월에 어필로 특별히 가선대부 공조참판에 올리셨으나 병으로 사양하셨다. 다 듣지 않으시므로 그 때에야 마지못해 숙배하시고 힘써 사양하셨으나 듣지 않으셨다.

1559년<선생 59세> 2월에 말미를 얻어 시골로 내려와 焚黃하시고 병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상소하여 사직하셨으나 듣지 않으셨다. 이때에 선생께서 분황 때문에 물러나와 돌아가지 않으시니 혹 의심하여 묻는 자가 있음에 선생께서 편지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옛 사람도 매우 부득이 한 것에 이르면 또한 다른 일을 빌어 거취하는 자가 있는데 어찌 임금 섬기는데 성실하지 않아 그러하겠습니까? 싫어하는 것이 가탁하는 것보다 심한 까닭입니다. 더구나 내가 분황으로 말미를 청한 것은 법례를 좇은 것이고 병으로 조정에 돌아가지 못한 까닭에 물러남을 빌었는데 어찌 이것이 일을 가탁하여 성실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사람의 말과 같은 것이 있겠습니까? 돌아보건대 사람이 옛 일을 깊이 상고하지 않고 사람을 꾸짖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입니다.”하셨다. 5월에 또 사직하시니 듣지 않으셨고 7월에 또 사직하시니 주상께서 勉强하여 허락하시고 참판으로 갈으시고 동지중추부사에 옳기셨고 本道로 하여금 食物을 주라고 하셨다. 黃仲擧의 편지에 대답하여 白鹿洞規集解를 의논하셨는데 이것은 松堂 朴英이 지은 것이다. 잘못된 것이 있어 선생께서 분변하여 해석하셨다. <仲擧는 錦溪 黃俊良의 字요 백록동규는 주자께서 만드신 백록동서원 규식이요 집해는 박송당이 해석한 글이다>이 伊山書院記를 지으시고 집 이름을 쓰시고 그 서원의 선비를 가르치는 규식을 정하셨다. 12월에 처음으로 송말과 원과 명의 理學通錄을 편찬하셨다. 주자 이후로 도를 공부하는 선비가 매우 많았으나 기록한 것이 흩어져서 각각 나오므로 그 말이며 의논한 것이 같고 다른 것과 옳고 그른 것과 학문의 얕고 깊은 것과 소활하며 주밀한 것을 다 보지 못하니 학자들이 병으로 여기므로 선생께서 朱子書와 語類와 實記와 史傳과 一通志 등의 책에 의거하여 그 말씀이며 행실이며 사적을 캐어내어 각각 종류대로 분류하여 송나라가 남으로 건너간 뒤부터 원과 명에 이르렀으니 서명은 이학통록이라 하시고 그 陸學을 하는 자에게는 기록하여 각별히 外集을 만들어 그 아래 붙이시니 학술이 통일된 것이 있었다.<어류는 주자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요 실기는 주자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요 사전은 모든 사람이 하던 일을 기록한 글이요 일통지는 대명 때의 책 이름이요 학술은 선비의 배우는 법이요 통일은 배우는 일이 정한 곳을 한 데 모아 갈리지 아니한 것이요 육학은 陸象山의 학이 佛家에 가까워 옳은 듯하나 그른 학이요 이학통록이란 말은 이학하였던 사람을 다 통하여 기록한 책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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