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이황선생 영정

退溪先生年譜
  연보 1
  연보 2
  연보 3
  연보 4
선생의 생애와 학문
  一. 생애편
  1. 태어나신 환경
  2. 어진 천품
  3. 부단한 탐구
  4. 벼슬길
  5. 인재양성,도덕교육
  6. 원숙한 인간상
  7. 조용한 최후
  二. 학문편
  1.선생이 남긴 저술
  2. 선생의 학문적전승
  3. 선생의 학문

 

퇴계 선생 연보(3)

 

1560년<선생 60세> 정월에 南冥 曺植의 遊頭流錄의 跋을 지으셨다.<남명의 성명은 조식이요 유두류록은 남명이 두류산에 遊山하여 기록한 글이니 끝에 의논한 말에 잘못된 것이 있으므로 선생께서 辨正하여 모든 사람들이 알게 하셨다> 11월에 奇高峯에게 답장하여 四端七情을 의논하셨다.<기고봉은 선생의 제자이다. 四端이란 말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타고난 본성이니 인과 의와 예와 지를 말하는 것이다. 理는 性으로 불쌍한 것을 보고 애처롭게 여기는 것은 惻隱한 마음이니 仁으로 동하여 난 끝이요 사나운 것을 보면 부끄러워하며 애처로와하는 것은 羞惡하는 마음이니 義로써 동하여 난 끝이요, 辭讓하는 마음은 禮로써 동하여 난 끝이요 是非하는 마음은 智로써 동하여 난 끝이니 이것이 四端이다. 기쁜 일을 보면 기뻐하는 것이 喜요 노하는 일을 보면 노하는 것이 怒요 슬픈 일을 보면 슬퍼하는 것이 哀요 두려운 것을 보면 두려워 하는 것의 懼요 사랑하는 것을 보고 사랑하는 것이 愛요 싫어하는 것을 보면 싫어하는 마음이 惡요 하고자 하는 마음은 欲이니 이것이 七情이다. 사단과 칠정이 다 마음에 느껴서 동하는 것이나 사단은 理에 붙어 있어 순하고 선하여 악이 없는 것이고 칠정은 氣에 속해서 본래는 선하나 악으로 들기 쉬운 것이다. 선생께서 천명도를 수정하실 때 사단은 이에 붙이시고 칠정은 기에 붙여 도에 올려 놓으셨다> 기대승 명언<기고봉의 자이다>이 그것을 보고 “사단과 칠정은 본래 한 가지 정이니 이와 기로 나누어 속한 것이라고 한 것은 너무 심하고 이와 기가 잘라져 두 가지 物이 되며 칠정이 이에서 나오지 않고 사단은 기를 타지 않는다고 한 말뜻에 병폐가 없지 않습니다.” 하며 선생께 글을 올려 분변함에 선생께서 대답하시니 대강 말씀하시기를 “사단은 정이요 칠정도 또한 정이니 다같이 정인데 어떻게 해서 사단과 칠정의 다른 이름이 있겠는가? 來喩의<기고봉이 편지에 했던 말을 말하는 것이다> 이른바 ‘나아가 말한 바가 같지 않다.’ 한 것입니다. 대개 이와 기는 본래 서로 힘입어 體가 되었고 서로 힘입어 用이 되니 진실로 이가 없는 기는 있지 않으며 기가 없는 이도 있지 않다. 그러나 나아가 말한 바가 갖지 않으면 또한 분별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또 性이라는 한 자로써 말하자면<성은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 자사께서 말씀하신 하늘이 명하신 것을 성이라 하는 것과 맹자께서 말씀하신 性善의 성이니 이 두 성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와 기를 사람이 타고 나서 하늘이 주신 가운데로 나아가 이 理의 근본이 본래 그러한 곳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가르킨 바가 理에 있고 氣에 있지 않은 것이므로 이것에 말미암아 순선하여 악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理와 氣가 서로 떠나지 못하는 까닭으로 氣를 겸하여 말을 한다면 이미 이것은 性 본연의 것이 아닐 것이다. 자사와 맹자께서 道體의 전부를 환하게 보심으로써 그 말을 주장하기를 이같이 한 것은 그 하나만 알고 그 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진실로 기를 섞어 성을 말한다면 성 본래의 어진 것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程. 張의 諸子에 이르러 부득이 氣質之性이라 하는 의논을 둔 것은 또한 남보다 낫기를 구하여 다른 것을 주장한 것이 아니다. 지적하여 말한 것은 사람이 타고난 후의 것이 있으므로 본연의 그러한 성으로써 섞어서 말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愚妄이 보건대<선생께서 겸사하시는 말씀이다> 정이 사단과 칠정으로 나누어짐이 있는 것은 성의 본성과 기품이 다름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하면 성을 이미 이와 기로써 나누어 말할 수 있다면 정에 이르러 홀로 이와 기로 나누어 말하지 못하겠는가? 측은과 수오와 사양과 시비는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인의예지의 성에서 발하여 나오는 것이다. 喜, 怒, 哀, 懼, 愛, 惡, 欲은 어디로부터 발하는가? 그것은 밖의 物이 그 얼굴에 부딪히면 속에서 동하여 지경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다. 사단이 발한 것을 맹자께서 이 마음이라고 하셨는데 마음이란 것은 진실로 이와 기가 합한 것이다. 그러나 지적하여 말한 바가 이를 주재함은 어찌된 것인가? 인의예지의 성이 粹然히 속에 있어 네 가지는 그 끝이다.<수연은 섞은 것이 없이 좋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칠정이 발함을 程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안에서 발한 것이라고 하셨고 朱子 또한 말씀하시기를 각각 마땅한 바가 있다고 하신 즉 진실로 또한 이와 기를 겸한 것이다. 그러나 지적하여 말한 것이 기에 있음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외물이 오는 것은 느끼기 쉽고 먼저 움직이는 것은 形氣와 같은 것이 없으니 이 일곱 가지가 그 苗脈이다.<외물은 밖으로서 오는 일을 말하는 것이니 기뻐하는데 기뻐하고 노한 일 보면 노하는 일곱 가지를 말하는 것이다. 형기는 사람의 얼굴과 기를 말하는 것이요 묘맥은 곡식의 갓 돋아 나는 싹이며 사람의 맥에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사단이 다 어질기 때문에 ‘네 가지의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하며 ‘정은 선이 될 수 있다.’ 하셨고<맹자의 말씀이다> 칠정은 본래 선한 것이나 악으로 흐르기 쉽기 때문에 그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을 和라 말하고<자사의 말씀이다> 한 번 마음이 있고서 능히 살피지 못하면 마음은 벌써 그 바름을 얻지 못한 것이다고 하니<주자의 말씀이다> 이로 말미암아 보면 이 두 가지는 자주<이 두 가지는 사단과 칠정이다> 비록 이와 기의 밖으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고 말하나 그 좇아온 바에 인하여 각각 주장한 곳을 가리켜 말한다면 어떤 것은 이요 어떤 것은 기라 말하는 것이 어찌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대개 이의 학문은 바르고 미묘한 극치로 반드시 크게 마음을 두며 높이 눈을 붙여 일제히 먼저 한 가지 말로써 주장을 삼지 말고 마음을 비워 기운을 편하게 하여 천천히 그 의에 돌아가는 것을 보아 같은 것 가운데에 나아가 그 다른 것이 있는 줄을 알며 다른 것 가운데에 나아가 그 같음이 있는 줄을 알아 나누어져 둘이라 하여도 그 일찍이 떠나지 않는 것이 문제되지 않고 합의하여 하나라 하여도 실로 서로 섞이지 않는 데에 돌아가 주변하고 자세하여 일편됨이 없을 것입니다.<일찍이 떠나지 않았다 하는 것은 이기가 가운데서 갈라지지 않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요 서로 섞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비록 이기가 합하여 있어 다른 것이 없는 듯하나 그 가운데에 이는 이요 기는 기니 서로 섞이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 분변하는 바는 이것과 달라 합하는 것을 좋게 여기고 떠나는 것을 미워하며 渾全한 것을 즐기고 剖析함을 싫어하며<혼전은 하나인데 합하여 혼동이 일어난 것이요 剖析은 갈라 분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단과 칠정의 좇아온 바를 궁구하지 않고 대체로 이와 기를 겸하며 선과 악이 있다 하여 깊이 분변하여 말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하니 이는 바로 羅整庵이<나정암은 大明 때의 선비이다> 이와 기는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한 말을 처음으로 하여 주자의 말씀이 옳지 않다고 하기에 이르렀으나 나는 尋常히 그 뜻을 알지 못했는데 내유에 한 뜻이 또한 이와 같은 줄 생각하지 못했다.<내유는 기고봉 편지의 말이다> 무릇 학문을 강구하나 분석함을 싫어하고<분석은 부석이라 하는 말과 같다> 합하여 하나라고 하는 말을 옛 사람은 말하기를 鶻圇呑棗라 하니 그 병폐가 적지 않다고 하였으니<골륜탄조는 대추를 씹지 않아 그 맛을 모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를 그치지 않으면, 駸駸然히<점점이다> 기로써 성을 의논하는 데에 가리워짐에 들어가서 인욕<사람의 욕심이다>을 하늘의 이치로 잘못 아는 근심에 떨어질 것이니 어찌 옳다고 하겠는가? 보내온 편지를 받은 즉시 어리석은 소견을 보내고자 하였으나 그래도 스스로 내 소견이 옳아 의심이 없어질 것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오래도록 보내지 못하였는데 요즈음 朱子語類를 보니<어류는 주자의 말씀을 종류대로 기록한 책이다> 맹자의 사단을 의논하신 끝의 한 조목에 정히 일을 의논하시니 그 말씀에 이르시기를 ‘사단은 이것이 理에서 발한 것이요 칠정은 이것이 氣에서 발한 것이다.’ 하였으니 옛 사람이 말하지 않았는가? ‘감히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그 스승을 믿는구나.’ 하였으니 이 주자의 말씀을 얻은 후에야 바야흐로 어리석은 소견이 크게 잘못되지 않은 줄을 믿어 감히 주자의 말씀을 粗述하여 구구히 써 가르침을 청하노라.” 하셨다. 奇明彦이 또 조목 조목 분변하여 의논을 여러 번 왕복함에 선생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의리를 분석하고 정하고 넓힘이 진실로 마땅하나 돌아보건대 그 의논하는 조건과 끝이 번거러워 잡되고 말씀이 散漫하여 왕왕 임시로 先儒의 말씀을 채취하여 자신의 부족한 것을 보완하여 대답하니 분변하는 말을 하는 것이 과거를 보는 擧子<으뜸 재주>가 場中에 들어가서 글제를 본 후에 옛 사실을 얻어다가 대답하는 자료로 삼는 것과 어찌 다르겠는가? 설사 십분 옳고 마땅하다 하더라도 자기의 몸에는 一毫도 받들어 가까운 것이 없으면서 다만 속절없이 다투는 것이니 聖門에서 크게 금하는 것을 범할 뿐이거늘 하물며 참으로 옮음이 아닌 것에 있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다시 뜻을 일으켜 받들어 대답하기를 전같이 선뜻 하지 않았다.”하셨다. 그 후에 명언이 전의 소견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아 자기의 말을 버리고 선생을 좇아 사단칠정이란 글을 지어 말하기를 “맹자께서 사단을 논하여 말씀하시기를 ‘무릇 사단이 나에게 있는 것을 모두 확충할 줄 안다.’고 하셨으니 확충할 줄을 알 것이다. 무릇 이 사단을 두고 확충하고자 한 즉 사단이 이 理로 발한 것은 진실로 그러한 것이고 정자가 칠정을 의논하여 말씀하시기를 ‘정이 이미 성하여 더욱 방탕하면 그 성이 상한다. 그러므로 깨달은 자는 그 정을 절약하여 중도에 맞게 하여야 한다.’ 하셨으니 무릇 칠정이 성하여 더욱 방탕함으로써 그것을 절약하여 그 중도에 합하고자 한 즉 칠정이 이 氣에서 발한 것이 옳지 않겠는가? 이 일로써 본다면 사단과 칠정이 이와 기로 나누어 속함을 스스로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 일이 한 해의 일이 아니나 분변하여 의논하시던 시말과 나중에 歸宿한 곳을 보는 사람이 알고자 하므로 이에 기록하였다. 도산 서당을 다 지으셨다. 이로부터 별호를 陶翁이라 하셨다. 집이 삼간이다. 헌은 巖栖軒이요 재는 玩樂齋이다. 精舍는 일곱간이니 이름을 隴雲이라 하셨다. 선생께서 늘 도산에 이르러 항상 안락재에 계실 때에 좌우에 도서를 쌓아 놓고 굽어 읽으시며 우러러 생각하시기를 밤으로써 낮을 이으셨다. 집이 가난하여 蔬糲로<속에서의 쌀이다> 겨우 끼니를 이으셨는데 공부하시기를 매우 힘쓰시고 드시는 것이 담박하여 다른 사람이 보기에 감당하지 못하실 것 같았으나 선생께서는 더욱 裕如하신 듯하셨다. 선생께서는 더욱 도의 소견이 친절하시고 나아가시는 바가 더욱 깊어져서 스스로 즐기시며 밖을 사모할 것을 잊으셨기에 비록 궁약한 가운데에 계셔도 怡然히<이연은 마음이 평안한 것이다> 自得하여 늙음이 이르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 후에 학도들이 정사 서쪽에 집을 지어 거처하니 이름을 亦樂이라 하였는데 논어의 ‘벗이 먼 곳에서 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하는 뜻을 취한 것이다. 12월에 소명을 입으시니 그 때에 天使가 오게 되어서 宋純과 林億齡 등이 계청함에 인한 것이다.

1561년<선생 61세> 정월에 소명이 내려 서울로 가려 하시다가 마침 낙마하여 병으로 사양하셨다. 이윽고 天使가 오지 않으므로 부르심을 그치셨다. 3월에 節友社를 쓰셨다. 이날 선생께서 溪上에서부터 도산으로 걸어나와 매화를 찾으실 때 시를 지어 이르시기를


꽃은 바위가에 피었는데 봄은 고요하고

새는 시내 나무에서 우는데 물은 잔잔히 흐르는도다.

우연히 산 뒷길을 좇아 아이와 갓 쓴 사람을 데리고

한가하게 산 아래에 이르러 考槃을 보노라.


<고반은 毛詩에 있는 말이니 근거한 땅을 말하는 것이다> 李德弘이 묻기를 “이 시는 천지와 상하가 같이 흐르며 만물이 각각 그 곳을 얻은 묘함이 있습니다.”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비록 그러한 의사는 있으나 미루어 말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 하셨다. 4월 旣望에 濯纓潭에 가서 배를 타고 달을 보실 때에 형의 아들 ■와 손자 安道와 문인 이덕홍이 같이 갔다. 淸風明月 이 네 자로 운을 나누어 글을 지으시고 前, 後赤壁賦를 읊으시고 밤이 깊어서야 돌아오셨다. 12월 陶山記를 지으셨다.

1562년<선생 62세> 3월 上巳에<첫 보름날이다.> 도산에 나오셔서 배를 타고 靑溪에 이르러 시내를 임하여 대를 쌓고 이름을 靑溪臺라 하셨다. 李龜巖이 와 뵙고 두어 날을 머물고 감에 선생께서 石磵臺에 가서 송별하셨다. 7월 旣望, 16에 風月潭에서 놀아 소동파의 옛 일을 잇고자 하여 아는 벗들과 언약하셨으나 큰 비를 만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두 절귀가 있다.<절귀는 小詩이다>

1563년<선생 63세> 3월에 黃錦溪의 부음이 오니 곡하셨다. 금계의 이름은 俊良이요 자는 仲擧니 글짓는 것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었다. 늦게 다시 성리학에 뜻을 두어 자주 선생을 좇아 의심되는 것을 질정하며 가르침을 청하여 왕래하는 서적이 매우 많았는데 이 때에 星州牧使의 직책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길에서 죽음에 선생께서 매우 애석하게 여기시고 제문을 지어 두 번 사람을 보내어 제하시고 장사지낼 때에는 行狀을 지으셨다. 9월에 왕세자의 장사를 들으시고 도산에 나오셔서 設位하여 예를 행하시고 10월 초 4일에 복을 다하셔서 5일에 除服하셨다.

1564년<선생 64세> 윤 2월에 안동땅에 가서 고,증조묘에 제하시고 族會하셨다. 4월에 제생과 더불어 청량산에서 노셨다. 遊山하여 지으신 글이 있다. 9월에 靜菴 趙선생의 행장을 지으셨다. 心無體用辯을 지으셨다. 宗室에 鍾城令이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별호는 蓮坊이었다. 일찍이 徐花潭을 좇더니 이 때에 이르러 심무체용서를 지어 金就礪를 통하여 선생께 질정함에 선생께서 변정하셨다. 대강 말씀하시기를 “寂과 感으로써 體用이라 하는 것은 주역에 근본하였고 動과 靜으로써 체용이라 하는 것은 맹자께 근본하였으니 다 마음의 체며 용이다.<戴記는 예기편명이다. 寂은 고요하고 나즈막한 것을 말하는 것이요 感은 일이 보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動은 感과 같고 靜은 寂과 같다. 성은 마음이 있으나 발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정은 성으로써 이미 발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체는 마음의 본체요 용은 마음으로써 내어 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대개 사람의 한 마음이 六合에 가득하고<육합은 천지와 사방이다> 고금에 뻗쳤으며 幽明에 관통되어 있으며 만사에 투철한 것이나 그 중요한 것은 이 두 자에서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두 자는 체와 용이다> 체용이라 하는 일이 비록 先秦 때의 글에 보이지 않으나<선진은 진나라 이전을 말하는 것이다> 程朱 이래로 모든 선비가 도를 의논하며 마음을 의논함에 이것으로써 주를 삼았으며 강론하고 辯析하여 오직 밝히지 못할까를 두려워 하셨고 陳北溪의 心說에서<진북계는 옛 선비요 심설은 마음에 옳은 글이다> 더욱 주장하였는데 어찌 일찍이 사람의 마음에 체용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이제 蓮老가 말하기를<연노는 연방이다> ‘마음에는 진실로 체용이 있으나 근본을 더듬으면 체용은 없다.’ 하였는데 내가 들으니 정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하나일 뿐이나 체를 가리켜 말한 사람도 있고 용을 가리켜 말한 사람도 있다.’ 하셨으니 이제 이미 체용이 있는 것을 가리켜 마음이라고 한 즉 마음을 말하는 것이 남은 것이 없는데 또 어찌 별도로 체용이 없는 마음이 근본이 되어 마음 이전이 되겠는가? 또 말하기를 ‘동정은 實한 이요 체용은 虛를 말하는 것이니 도와 이는 본래 체용이 없으나 동정으로써 체용을 삼았다.’ 하였는데 내가 생각하건대 도와 이에는 동도 있고 정도 있으므로 정 이 한 자를 가리켜 체라 하고 동 이 한 자를 가리켜 용이라 하니 그러한 즉 도리의 동과 정이 실한 것이요 도리의 체와 용도 실한 것이니 또한 어찌 별도로 한 도리가 체용이 없는 것이 근본이 되어 동정의 앞에 있을 수 있겠는가? 또 말하기를 ‘체는 형상 위에서 생긴 것이고<상은 형상이다> 용은 또 동 위에서 생겨나는데 어찌 동 이전에 용이 있겠으며 어찌 상 이전에 체가 있겠습니까?’ 하였고 또 邵子의 ‘본래 체가 없다.’ 하는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체가 없은 즉 용이 없는 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내가 생각하건대 체용은 두 가지가 있으니 도리에 나아가 말하는 것은 沖漠無眹한 것이나 만상이 이제 막 생겨나려고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 것과 같은 것이요<충막무진은 혼합하여 징조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만상이 森然已具란 말은 일만 일이 일일히 다 갖추어졌다는 말이다> 사물에 나아가 말하는 것은 배가 물에서 가며 수레가 뭍에서 가니 배와 수레가 물과 뭍에서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께서 呂子約에게 답한 글에 이르기를 ‘형이상의 것으로 말한다면 충막한 것이 진실로 체가 되고 그 사물 사이에서 발한 것이 용이 되는데 만일 형이하의 것으로 말한다면 사물이 또 체가 되고 그 이가 발하여 보이는 것이 용이 되니 하나로써 형이상의 것을 도의 체라 말하고 천하에 통용된 도가 다섯 도의 용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다섯 도는 부자, 군신, 부부, 형제, 벗이 사귀는 오륜도이다> 배와 수레의 형상으로써 체라 하고 물에서 가며 뭍에서 가는 것으로써 용이라고 한다면 형상 이전에는 체가 없고 동 이전에는 용이 없다고 말하여도 옳겠지만 만일 충막으로서 체라고 한다면 이 체는 형상 이전에 있지 않으며 만상이 이에 갖춘 것을 용이라고 한다면 이 용이 동 이전에 있지 않으니 이것으로써 본다면 蓮老가 말한 체는 형상에서 생겨나고 용은 동에서 생겨난다고 하는 것이 다만 형이하의 사물의 체용을 말하여 아래에 있는 한 쪽으로 떨어져서 실로 형이상의 충막하여 근심이 없으며 체와 용이 한 근원인 묘한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오직 그 형상의 끝에 치우쳐져서 형상 이전의 체가 없다고 말하였고 소자의 말을 인용하여 증명하였으나 소자가 말한 체가 없다고 하는 것은 형체가 없다고 말한 것이지 충막한 체가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닌 줄을 알지 못한 것이다. 체를 알기를 원만하게 하지 못한 즉 용을 알기를 원만하게 하지 못한 줄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호라.<탄식하는 말씀이다> 충막하여 조심이 없는 것은 乾坤에 있어서 無極太極의 體가 되어 만상이 이미 갖춘 것이요 사람의 마음에 있어서는 지극히 허하고 지극히 안정된 체가 되어 일만 가지 용이 다 갖추어진 것이요 그 사물에 있어서는 문득 발하여 보이고 흘러 행하는 용이 되어 때를 좇으며 장소를 좇지 않는 데가 없는 까닭에 程선생께서 이미 체용이 한 근원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반드시 나타나며 微한 것이 간격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무릇 체용 이 두 자가 살아 죽은 것이 아니라면 원래가 모든 것을 포괄하여 묘한 것을 궁진하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이것으로써 생각해보건대 어찌 한갖 체자가 형상 위에서 생겨나 형상 이전에는 체가 없다고 말하며 어찌 용자가 동 위에서 생겨나 동 이전에는 용이 없다고 말하겠는가? 그리고 어찌 태극을 성인이 억지로 지으신 이름이라고 하여 체용이 없다고 말하겠는가? 하물며 ‘사람의 마음이 그 간 곳을 알지 못한다’ 하는 것은 맹자께서 다만 마음이 周流하고 변화하여 神明不測한 묘를 얻으며 잃기 쉽고 안보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바로 이 마음의 용이 사물 사이에서 발하여 보이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니 진실로 마음에 체용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에 어디로부터 이 용이 있는지를 알지 못하겠다.” 하셨다.

1565년<선생 65세> 4월에 글을 올려 同知中樞府事 벼슬을 해직시켜 주시기를 청하시니 주상께서 좇으시고 전교하시기를 “내가 경을 기다리노라. 자리를 비운지 여러 해 되나 억지로 물러가 한가로이 있기를 구하니 이는 내가 어진 사람을 대접하는 정성이 부족하여 그러한 것이다. 다만 경의 뜻이 깊고 간절하므로 勉從하노라.”하시고 얼마 후에는 本道에 명하여 食物을 주셨다. 은혜를 입어 물러감을 허락하셨다고 하는 여덟 절귀가 있다. 文定王后의 상사를 들으시고 곡하시고 성복하셨다. 敬齋箴圖와 白鹿洞規圖와 名堂室語를 써서 완락재 벽위에 붙이셨다. 8월에 제생과 더불어 啓蒙을 강론하셨다. 景賢錄을 개정하셨다. 龜巖 李公이 기록한 것을 보면 “楨<귀암의 이름이다>이 일찍이 寒喧堂선생의 家範과 行狀과 議得 등 책을 얻어 편찬하여 한 책을 만들었으나 문견이 얕고 좁아 소루하기가 매우 심하였다. 이에 의심되는 것을 퇴계 선생께 취품하여 질정하니 선생께서 義興 金立과 秀才 鄭崑壽 등이 기록한 것을 아울러 취해 參訂하여 결정본을 만드셨다.” 하였으니 이것이 경현록을 개정한 始末인 까닭에 여기에 붙여 보인다. 12월에 特旨로 불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불민하기 때문에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정성이 없어 전부터 여러 번 불렀으나 늘 늙고 병든 것으로 사양하니 내 마음이 편하지 못하니, 경이 나의 지극한 뜻을 받아 속히 올라오라” 하시고, 또 역마타는 것을 허락하시고 다시 중추부사가 되셨다.

1566년<선생 66세> 정월에 소명을 받으시고 서울로 가시다가 榮川에서 辭狀하시고 豊基에 가서 머물면서 왕명을 기다렸으나 주상께서 허락하지 않으시고 교지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경의 사장을 보니 내 마음이 缺然하다. 사양하지 말고 잘 조리해서 올라와 여러 번 부르는 정성을 저버리지 말라.”하시고 또 沿路의 각 관에 명하여 호송하게 하고 內醫에게 약을 주어 문병하게 하셨다. 풍기에서 醴泉으로 가서 또 글을 올려 사면하기를 청하셨다. 주상께서 허락하지 않으시고 資憲大夫工曹判書 겸 藝文館 提學으로 임명하심에 또 사양하셨다. 선생께서는 승직되었다는 말을 듣고 예천으로부터 鶴駕山 廣興寺로 들어가 3월에 또 글을 올려 아뢰기를 “신이 지난 번 무오(戊午, 1558)년에 조정에 들어가 성균관 장관이 되었으나 병이 이미 심하여 서너달 동안에 출근 날을 5. 6일 밖에 채우지 못하였는데도 도리어 명으로 승직시켜 본조참판이 되었으나 두어달 동안 겨우 사흘을 다녔고 한치 만큼의 남은 힘도 없어서 보답할 가망이 없으므로 어쩡정하게 물러나 돌아왔는데 이제 까닭없이 갑자기 승진되니 自古 以來로 언제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엎드려 비옵건대 성상께서는 특별히 불쌍히 여기시고 살펴주시어 신의 해골이나 고향에 가서 묻을 수 있게 해 주시고 지난해 4월 20일의 일처럼 신을 同知指揮에서 직분없는 자리로 두어 주시면 조금이나마 신의 명을 이어 도리를 다하고 죽음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하셨으나 허락하지 않으시고 재촉하여 부르셨다. 선생께서 이미 사장을 올리고 관흥사에서 鳳停寺로 옳겨 또 글을 올려 아뢰기를 “새로 제수하신 벼슬은 도리나 자격과 이력으로 보나 받을 만한 이유가 없으며 留連하여 명을 기다린 것이 오히려 승직되기를 원하는 뜻이 있는 것 같아 신의 죄가 더욱 중합니다.” 하시고 봉정으로부터 집으로 돌아오셨다. 홍문관 대제학과 예문관 대제학과 성균관사 동지경연 춘추관사를 겸하게 하셨다. 4월에 갈려 지중추부사로 임명되고 또 교지를 내리시어 부르셨다. 사장이 미쳐 주상께 올라가기 전에 문형의 명을 또 내리셨다. 얼마 후에 주상께서 사장을 보시고 선생께서 나올 뜻이 없음을 알고 대신을 불러 의논하시니 대신들이 “六卿은 오래 비워둘 자리가 아니며 대제학은 나라의 글이 나오는 곳이므로 더욱 비울 수 없는 관직이니 가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주상께서 그 말을 따라 한직을 주라 하시니 지중추로 임명되고 또 교지를 내려 안심하고 조리하면서 병이 차도가 있으면 올라오라 하셨다. 7월에 글을 올려 자헌의 加資와 지중추의 직명을 사면하시고 전의 벼슬로 취사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시고 병의 차도가 있으면 올라오라고 명하셨다. 주상께서 선생을 간절히 기다렸는데도 여러 번 사양하고 가지 않으셨으나 주상의 뜻이 더욱 간절하시니 현인을 불렀으나 오지 않는 것을 탄식한다라는 것으로 글제를 삼아 독서당 신하들에게 각각 글을 지어 올려라 하시고 또 선생이 계신 도산을 그리게 하시고는 礪城君 宋寅을 시켜 지으신 도산기와 雜詠을 그 위에 쓰게 하고 병풍을 만들어서 거처하는 곳에 펼쳐놓게 하셨다. 10월에 晦齋 이선생의 행장을 지으시고 그 문집을 교정하셨다. 心經後論을 지으셨다. 선생께서 心經을 존중하고 숭상하는 것을 더욱 지극히 하여 四子와 近思錄보다 못지 않다 하였는데 錦溪 黃俊良이 선생께 글을 올려 심경을 배척하여 말하기를 “眞西山은 빛만 있고 실하지 않고 范蘭溪는 지번하여 절당하지 않고 黃慈溪의 소견은 두 사람에 비하여 더욱 떨어지고 程篁墩은 보는 것이 분명하지 않고 선택한 것이 정하지 못합니다.” 하여 선생께 고쳐 刪定하시기를 청하니 선생께서 회답에서 그렇지 않은 것을 분변하였고 지금에 이르러 이 논설을 지으시니 “심학에 연원을 천명하였고 異端의 榛荊을 물리친 것이 깊고 간절하여 밝히시고<심학 연원은 심학의 근원이요 이단은 성인의 도가 어진 것이요 진형은 이단이 우리 선비가 정한 길이 가시같다는 말이다> 草廬와 篁墩 두 사람의 말을<초려와 황돈 두 사람은 대명 때의 사람이다> 자세히 그 잘못된 것을 분석하고 그 소장을 없애지 않아 바른 학문의 소맥이 환하게 밝혀져서 다른 갈림길에서 헤매지 않게 하셨으니 그 후세를 위하여 생각한 것이 지극한 것이다.” 하고 선생께서 또 중국의 학술이 틀려 白沙와 陽明의<다 禪學하였던 사람이다> 여러 학설이 세상에 성행하고 증자와 주자가 서로 전해 오던 도통이 날로 湮滅해 가는 것을 민망하게 여겨 일찍이 계속 근심하여 깊이 탄식하고 이에 백사의 詩敎와 양명의 傳習錄 등의 책을 다 의논하여 분변하여서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셨다. 柳仁仲에게 편지하셔서 續蒙求란 책을 의논하셨다.

1567년<선생 67세> 2월에 주상께서 다시 부르셨다. 嘉靖皇帝께서 崩御하시고 새 황제께서 즉위하시므로 天使가 오게 되었기에 대신 李浚慶 등이 아뢰어 문학하는 선비를 불러 모아 그들로 하여금 天使를 대접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 일로 말미암아 召命이 또 내렸다. 주상께서 5월에 諭旨를 내려 올라오기를 재촉하시므로 6월에 서울로 올라가셨다. 明宗께서 승하하셨다. 선생께서 서울에 올라가신지 사흘만에 병으로 미처 肅拜를 드리지 못하고 계시다가 변을 들으시고 烏紗帽와 黑角帶를 하고 대궐에 나아가 곡을 하셨다. 7월에 大行王의 行狀 修撰廳의 堂上官이 되시어 행장을 지으셨다. 禮曹判書 兼 同知經筵春秋館事를 제수받고 두 번을 사양하셨으나 주상께서는 듣지 않으셨다.

8월에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시고 즉시 東으로 돌아오셨다.

9월에 大行王의 挽詞를 지어 올리셨는데 五言排律 이십운(韻)의 서문에 말한 대략을 들면 “6월 25일에 臣이 서울에 들어와서 26일에야 비로소 주상께서 편안치 못함을 들었는데 27일에 大漸하여<병세가 위중하시다는 말이다> 28일에 宮車晏駕하시니 신은 서울 오는 길에 병이 심하여져서 미처 拜命치 못하고 갑자기 큰 변을 만나게 되어 우러러 통곡하니 오장의 끝이 헐리고 天使 맞을 준비로 분주하여 과로해서 몸이 상하고 천한 병이 매우 깊어 심한 데까지 이르렀는데 마침 春館의 명이 있어서<춘관은 禮曹이다> 하루도 소임을 수행하지 못하고 사면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前朝에 병이 들어 물러간 신하로서 뒤를 이으신 왕께서 새로 정치를 시작하심에 은혜로운 명령을 저버리기를 이와같이 하니 신하로서의 의리가 땅에 떨어진 것 같은지라. 만일 다시 因循하여 가지 않고 소임을 수행하지 않으면서 자리만 차지하며 녹을 먹다 죽으면<소임은 수행하지 못하면서 벼슬만 尸童같이 지낸다는 말이다> 수십 년을 괴롭게 사양하여 물러나기를 빌던 의리가 어디에 있으며 致仕와 해골의 보존을 청하는 것을 다 행하지 못하게 될 것이므로 벼슬이 바뀌는 틈을 타 몸을 빼서 돌아오니 이것은 진실로 부득이한 일이며 또 이미 하였던 일입니다. 신이 서울에 있을 때 들으니 군신으로 하여금 각각 挽詞를 지어올리라고 하신다 함에 신이 병든 탓으로 소견이 아득하고 어두워져서 짓지 못할 것 같았으나 죽지 못한 날들의 정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여 겨우 한편의 挽詞를 지어 사람에게 부쳐 서울로 올려보내 죄스러움을 무릅쓰고 都監에 바쳤습니다만 신이 山陵을 마치지도 아니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많은 지탄을 받는 중에 있으니 받아 줄런지도 알 수 없습니다.” 하시고, 그 시에

 

     벼슬을 명하시면 벼슬에서 지켜야 할 것을 잃었고

녹(祿)을 말하면 녹이 오히려 과하다.

옛 의리는 마땅히 빨리 가는 것 같고

지금의 정은 깊히 꾸짖음이 있구나.

의리와 정은 같이 있기 어려우니

지금과 예전의 다름을 어찌알까.


하는 글귀가 있다.

18일에 龍壽寺에 계셨다. 19일이 大行王의 發靷날이므로 집에 계시기가 편치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奇明彦의 편지에 회답하셨다. 선생이 물러나 돌아오신 것이 山陵의 일을 마치기 이전이라 하여 이 때의 여론이 분분하였기에 奇明彦이 편지를 보내어 물으므로 선생께서 회답하셨다는데 대략 말씀하시기를 “因山이 참담하고 欽衛가 임하여 있으니<欽衛는 나라 상여가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일백 관원들이 따라가며 붙잡고 애통해 하는데 병든 신하는 길이 없어 예절에 와서 의지하고 있다가 마침 편지가 와서 옛 의리로써 책망을 하니 부끄러워 죽을 지경인데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나의 사람됨이 또한 이상하지 않았겠습니까? 나의 처신함이 또한 어렵게 되었으니 어찌된 까닭이겠습니까? 크게 어리석고 심한 병이 든 탓이며 헛된 명성 때문이며 잘못 입은 은혜 때문입니다. 크게 어리석으면서 거짓된 명성을 받아들이고자 한 즉 망령된 짓이 될 것이고 심한 병이 들어서 잘못된 은혜를 입고자 한 즉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망령된 짓을 행하면 덕과 의리는 상서롭지 못한 것이 되고 사람에 있어서는 吉하지 못하고 나라에 있어서는 害가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벼슬을 즐겨하지 않으며 떳떳이 몸이 물러나고자 하는 것이 어찌 다른 까닭이 있어서 이겠습니까? 옛날의 군자는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을 분명히 알아 한 가지 일도 지나치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벼슬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 즉 비록 크게 참지 못할 정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것 때문에 물러나기를 버리지 않은 것은 어찌 몸을 바치는 마당에 의리를 행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 몸이 물러난 후에야 그 의리를 좇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 때를 당하여 비록 크게 참지 못할 정이 있으나 의리에 굽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부득이하여 그러한 것입니다. 道가 같은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 통하고 도가 같지 않은 사람은 일천 말을 하여도 알지 못하니 제 몸이 堂 위에 있어야 바야흐로 堂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인데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대의 뜻이 어느 것이 옳으며 어느 것이 그르며 어느 것을 취하며 어느 것을 버릴 것인지를 말입니다. 수고롭겠지만 가르쳐 주시길 아끼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라고 하셨다.

10월에 龍驤衛大護軍 兼 同知經筵春秋館事를 제수 받으셔서 부르심을 받으셨다. 諭旨에 이르시기를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어지럽혀지는 것은 임금의 덕에 달려있고 임금의 덕이 이루어지는 것은 어진 사람을 존경하며 학문을 강구하는데 있으므로 經筵에 부지런히 나아가 날마다 어진 선비와 서로 만나 마음과 지혜를 높고 밝게한 후에야 그 사람됨이 어질며 사특한지를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經筵에 모실 만한 사람이 멀리 있으면 마땅히 그로 하여금 가까이 오게 하여 經筵의 所任을 맡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경이 내려갈 때에 마침 과인이 皇皇罔極한 가운데 있어서 미처 살피지 못하였으나 이제 새롭게 정사를 보려함에 沈滯하였던 사람들을 모두 발탁하여 쓰고자 하는데 하물며 어진 재상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경은 역마를 타고 빨리 서울로 올라오라.” 하셨다. 大司諫 睦詹이 아뢰기를 “李滉은 학문에 있어 해박하고 공부를 돈독히 하니 마땅히 敎旨를 내려 불러서 經筵에 두시면 반드시 聖學을 펴는 것을 돕고 인도하는 공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이 일로 말미암아 召命을 내리셨다. 同知中樞府事를 제수받으셨고 겸직은 예전과 같았다.

辭狀을 올려 召命을 거두시고 講職을 갈아주시고<講職은 經筵에서 강의하는 벼슬이다> 禮法에 의하여 致仕하게하여 주시기를 청하셨다.

知中樞府事로 직무를 바꾸시고 겸직은 예전대로 하시고 또 敎書로써 특별히 부르셨다. 許曄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帝王이 어진 스승을 얻어서 배운 후에야 事業이 높이 돋아나니 李滉이 병이 있어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만일 주상께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禮를 다해 스승으로 삼고자 하신다면 오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니 주상께서 말을 좇아서 선생과 曺植과 李恒을 똑같이 敎書로써 특별히 부르셨는데 이윽고 날씨가 추워 올라오지 못할까하여 “더디고 빠름에 구애받지 말고 따뜻할 때를 기다려 평안히 올라오라.” 하셨다.

12월에 교지를 내려 빨리 올라올 것을 재촉하셨는데 天使가 장차 오게 될 것이므로 應接할 일이 급하였기 때문이었다.

1568년 정월에 상소하여 自劾하시고<自劾은 스스로를 탄핵한다는 말이다> 다시 致仕할 것을 빌으시고 召命을 사양하시는 辭狀을 올리셨다. 疏에 대략 말씀하시기를 “신이 듣자오니 聖帝明王 중에서 어진 사람을 존경하는 선비를 등용하는 것에 힘쓰지 아니한 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른바 어진 선비로서 반드시 모두 바른 사람을 얻어서 진실로 그 실지를 취하였던 것이니, 만일 한갖 어진 사람을 좋게 여기는 뜻과 어진 일을 즐겨하는 정성은 갖고 있으나 사람 알기가 어려운 줄을 생각하지 않으며 사람의 그릇이 어떠한지도 묻지 않고 재주도 없고 덕도 없는 사람을 잘못 불러서 받아들이기를 부지런히 할 뿐만 아니라, 거짓 이름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속이는 선비를 갑자기 어진 사람으로 존경하고 예를 받게 하시면 이는 굽은 것을 들어서 곧은 것을 버리는 것과 같아서 많은 백성이 복종하지 않을 것이며, 어진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섞이어 나라의 政事가 날로 흐트러질 것입니다. 신이 先朝 때에 여러 번 선왕께서 내리신 召命을 받았었는데 그 중 앞서 세 번 부르실 때에는 다만 벼슬의 品階가 낮아 별달리 嫌疑될 것이 없었기에 신이 명을 받고 즉시 행함에 일찍이 의심하고 주저하여 나아가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그 후의 두 번 부르실 적에는 한 번은 장차 벼슬의 品階를 올려서 중한 책임을 맡기시려 하시며 또 한 번은 이미 品階를 올려서 중한 소임을 주시므로 신이 區區하고 위태롭다는 생각에 극력히 사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지난 해에 서울로 들어가서 망극한 변<국상>을 만나고 천한 병이 갑자기 더욱 심하여져서 능히 소임을 행하지 못하고 義理를 이미 펴지 못하였기 때문에 홀로 몸이 물러나는 것만이 의리에 的然하고 매우 분명한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山陵이 바로 있었으나<山陵은 國葬이다> 능히 머물러 기다리지 못하고 경솔히 질러 돌아오니 이것은 또한 理가 극에 달하고 의리가 변한 것으로 부득이 나온 것인데 한 때의 物情이 모두 괴이하게 여겨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명예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며 또 어떤 사람은 ‘거짓 병이다.’고 말하고 혹은 산짐승에게 비유하기도 하고 혹은 指斥하여 이단이라고 하니 이것은 신이 신하로서의 도리를 잃었기 때문에 그 때의 어진 사람들에게서 큰 죄를 얻은 것인데 다시 무슨 도리로써 주상께서 권고하시는 뜻을 받들어 이 시대의 쓰임이 될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원하옵건대 虞人이 이르지 않은 죄를 너그러이 보아주시며 先王의 사람 물리친 禮를 詳考하셔서 잘못 내리신 有旨를 도로 거두시고 이것으로 인해 召命을 파하시고 致仕하는 법전을 다시 거행하여 신의 목숨을 들어 비는 청을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셨다.<虞人은 산을 지키는 천한 소임을 맡은 이로 齊나라 경공이 사냥하려 할 때 虞人을 부름을 대부(大夫)의 禮로써 하거늘 虞人이 감당하지 못하여 가지 아니하였는데 孔子께서 옳다고 하셨다. ‘先王은 옛 어진 임금으로 옛 어진 사람 부름을 禮로써 하였다.’는 말이 있다>

崇政大夫로 승진시 議政府右贊成으로 제수하시고 諭旨를 내려 빨리 올라오라고 재촉하셨다. 선생의 상소가 미처 주상께 올라가지 못하였는데 주상께서 또 대신들에게 이르시기를 “李滉을 軍職에 있게 하는 것은 尊賢하는 도리에 족하지 못한 것이 있으니 가히 특별히 贊成을 제수하고 다시 일러서 올라오게 하라.” 하시며 이러한 벼슬을 주신 일이 있었는데 그때에야 상소가 주상께 들어가니 주상께서 친히 批答하여 말씀하시기를 “卿의 상소에 담긴 글을 보니 謙謹하여 사양하는 것이 지나치도다. 卿이 累朝의 옛 신할 德과 행실이 높고 학문이 바른 것을 비록 閭巷사람이라 한들 어느 누가 모르겠는가? 나 또한 그대의 명성을 들은 지 오래되었노라. 卿이 先朝때에 여러 번 부름을 받고 서울로 들어왔고 말년에 이르러서도 또한 都下에 이르렀으나 불의의 망극한 변을 만나 갑자기 도로 돌아가니 이는 반드시 新政이 도리를 잊고 尊賢하는 것을 정성으로 하지 않은 연고이라. 나의 뉘우치고 한스러워함을 가히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 人君은 비록 밝고 어질어도 반드시 어진 사람을 구하여 스승으로 삼았거늘 하물며 나는 어려서부터 엄한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서 갑자기 어렵고 큰 덕을 이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慈殿께서도 역시 말씀하시되 ‘내가 지식이 없고 더구나 망극한 가운데에 있으니 내가 어찌 주상을 가르쳐 인도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李滉 같은 이가 있는 것이 좋을 것이오.’ 하시며 항상 卿이 올라오기를 바라시니 慈殿의 뜻이 이렇듯이 간절하신데에도 卿이 즐겨 올라오지 않는 것은 卿이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지금에 이르러 조정에 비록 나이가 많고 德이 있는 사람이 많으나 내가 卿을 바라는 것을 또한 북두성과 같이 하니 卿은 모름지기 進退로써 嫌疑를 삼지 말고 올라와 병을 降仍하고 조정에 머물러서 나의 憂末한 기질을 도우라.” 하셨다. 3월에 또 상소하여 새로 올리신 벼슬을 사양하시고 “전의 벼슬로 致仕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비셨으나 허락하지 않으시고 다시 敎書를 내려 올라오라 재촉하시거늘 또 사양하셨다. 疏에 대략 말씀하시기를 “臣이 지난 해 10월부터 금년 2월 그믐에 이르는 동안 무릇 7번이나 聖旨를 받았으니 모두 불러 벼슬을 제수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臣은 극히 無狀하여 족히 주상께서 간절하게 바라시는 것을 막으며 밝은 뜻에 부응하지 못하게 될 것을 알기 때문에 늘 한 번 명을 내리실 때마다 곧 붉은 정성을 드러내어 엎드려 疏를 올려 벼슬을 갈아 주시기를 빌었으나 정성이 주상께 통하지 않아 허락하시는 말씀을 오히려 내려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대개 천하에 있는 인재의 品은 큰 것도 있으며 작은 것도 있으니 큰 것을 가히 작은 것으로 삼지 못하며 작은 것을 가히 큰 것으로 삼지 못하는 것입니다. 先王께서는 그것이 그러한 줄을 알았기 때문에 벼슬주기를 각각 그 才品에 따라 큰 재주를 가진 이에게는 큰 소임을 주시며 작은 재주를 가진 이에게는 작은 소임을 주어 일찍이 분에 넘쳐 지나치게 주지 않으시니 어찌 人君이 사람 쓰는 것에만 이러했겠습니까? 신하로서 나아가 세상에 쓰이는 자는 그 능하며 능하지 못한 것을 스스로 헤아려 보지도 않고 나아간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옛 사람이 이르기를 ‘헤아린 후에 들어가고 들어간 후에 헤아리지 말라.’ 하였습니다. 臣이 지극히 어리석고 비루한 자질로써 여러 해 동안 沈痼한 병이 들어서 농사를 지으러 돌아가 힘껏 일해 먹고 살며 본래 타고난 본분을 지켜 예전에 논란이 되던 죄를 면하고자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거짓 이름을 더 얻게 되어 先朝께서 잘못된 은혜를 더 자주 내리시게 된 것은 뜻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臣은 이에 바야흐로 본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 쉬고자 하였거늘 조정에서는 그 사양하는 것으로 인해 발탁하여 품계를 올려주셨고 신은 또 승진된 것을 힘써 사양하거늘 조정에서는 올리신 것을 또 올리시니 공로로써 말하면 한 가닥의 털끝 만큼도 나타난 것이 없는데 벼슬로 말한다면 높다랗게 六卿의 줄에 있는지라 이는 古今天下에 한 번도 없었던 일이며 신의 큰 허물이 되는 것이니 굽어보며 우러러보니 부끄럽고 두려워 어떻게 할 지를 모르겠습니다. 이제 九五의 용이 날고 만물이 모두 우러러 보는지라 어진 사람을 좋게 여기시며 어진 일을 즐겨하시는 것이 至誠에서 나오셨거늘 所見固滯한 신하가 있어 외람되게 臣의 이름을 들어 과장되게 表裝하고 의논하여 천거하여서 자리가 평안치 못하여 어진 사람을 구하시는 아름다운 뜻을 잘못되게 하고 신을 부르시는 것이며 다만 신에게 명하신 것이 거듭되어 성하며 무거우니 모두 臣이 받들어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에 臣은 바야흐로 또 疏를 펴서 스스로 죄를 청하여 벼슬을 갈아주시는 은혜를 베푸시기를 워하였는데 그 疏가 미처 올라가지 못한 동안에 또 특별히 贊成으로 벼슬을 올려주시는 명이 계시니 신이 일찍이 벼슬을 사양하기를 원했던 뜻에 비해 보면 그 가볍고 중한 것과 크며 작은 것과 능히 감당하며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엎드려 비옵건대 억지로라도 軫念하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덕의 소리를 渙發하여 전에 冒諂하여 받은 벼슬을 비록 모두 갈아주시기를 바라지는 못하나 이번에 새로 주신 높은 品階와 벼슬과 經筵官을 兼帶하게 하신 것을 빨리 도로 명하여 거두시지 않으시고 다시 敎書를 내려 간절히 타이르시고 또 各道의 監司에게 명을 내려 ”수로와 육로에서 가마나 말과 배로써 호송하라.“ 하시거늘 선생께서 또 글을 올려 높은 品階를 힘써 사양하셨다. 그 때에 天使가 돌아간 후에 모든 신하들에게 비단과 향을 나누어 주셨는데 이에 선생께서도 참여하시게 되었으나 선생께서는 아뢰시기를 “이것은 조정이 皇恩을 공경하여 받들어 조정에 있는 신하들과 더불어 아름답게 같이 하실 일로서 臣은 贊成의 벼슬을 명하신 것을 받들지 못하였는데도 그 벼슬을 일컬어 물건을 내려주시니 진실로 祉受하기 어려우며 또 몸이 멀리 서울 밖에 있어 天使가 돌아갈 때까지 한 가지도 해드린 일이 없는데도 모든 신하들과 똑같이 물건을 내려주시는 것은 감히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시고 모두 사양하여 받지 않으셨다.

5월에 贊成을 갈고 判中樞府事로 부르셨다. 선생께서 힘써 새 명을 사양하시니 조정에서는 억지로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經筵에서 知中樞府事를 내려 주셨는데 또 지성으로 부르시면 마땅히 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청하는 이가 있어 이에 贊成을 갈아 判中樞府事를 제수하시고 諭旨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내 조그마한 몸으로 민간에서 나고 자라 들어와서 大統을 받들어 臨御하였기 때문에 즉위한 이래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어진 덕이 있는 선비를 모아서 내가 미치지 못한 일을 보충할까 생각하였다. 卿은 본래 성품이 冲澹하고 마음 두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純一하고 밝아 한가한 곳에 있어 安靜함을 지켜서 선비의 학문에 潛心하니 또한 진심을 쌓고 힘쓴 것이 오래라. 그 의리와 性命이 깊은 것과<性命은 사람이 타고난 성이고 命은 하늘이 주신 명이다> 理를 궁구아여 지극함에 다다르며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요점을 반드시 脫然히 알고 깨달아 洞然히 나아가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經筵의 위에 두고 그 의리와 법도를 보며 의견을 들으면 족히 나의 어리석으며 어두운 것을 없게 하고 나의 마음과 지혜를 키워낼 수 있을 것이므로 여러 번 부름을 다 지극한 정성으로 하였는데도 끝내 일어나 나올 뜻이 없으니 내가 심히 缺然하다. 지난 번에 卿에게 右贊成의 벼슬을 준 것은 내가 卿을 사모하는 마음이 깊고 卿에게 바라는 것을 중하게 여겼기 때문이오. 모든 의견의 공정함을 좇아한 것이거늘 卿은 도리어 이 일로써 嫌疑로 여겨 물러가 사양하기에 더욱 힘쓰니 내가 경을 褒獎하려는 것이 다만 족히 卿을 막는 것이 되었구나. 이미 명하여 갈았으니 경이 다시 무엇을 嫌疑로 여길 것이 있는가. 예전에 先王께서는 卿을 寵眷하여 남달리 높게 대접을 하신 것이 가히 지극하다 할 수 있었다. 諸葛武候께서 말씀하시기를 ‘先帝께서 남다른 대접을 하신 것을 좇아 폐하께 갚고자 합니다.’ 하셨으니 卿이 진실로 先王을 잊고 나를 버리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할 것이니 卿은 이것을 생각하여 가히 평안하게 있으면서 더디게 오지는 말라.” 하셨다. 

6월에 명을 받들어 서울로 가셨는데 가시는 길에 연이어 글을 올려 높은 職品을 사양하고 모두 갈아주시기를 빌었으나 주상께서는 들어주지 않으셨다. 선생께서 벼슬이 갈렸다는 명을 받으시고 즉시 글을 올려 謝禮하여 말씀하시기를 “미천한 정성을 굽어 살피시어 특명으로 贊成 벼슬을 갈아주셨으니 聖眷이 이에 이르셨는데 어찌 갚을 것을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臣이 마땅히 병으로 부축받아 나아가더라도 恩命을 謝禮해야 할 것이나 다만 一品의 외람된 品階는 끝까지 그대로 받을 이유가 없으니 바라옵건대 벼슬을 모두 갈아주시는 큰 은혜를 베푸소서.” 하시고 聞慶에 가셔서 다시 글을 올려 사양하시고 忠州에 가셔서 또 글을 올려 힘써 사양하셨으나 주상께서는 모두 허락하지 않으시고 辭狀 중에 길에서 병이 났다는 말이 있다 하여 內醫를 보내어 달려가서 돌보라고 하셨다.

7월 병인(丙寅, 19)일에 서울로 들어가시니 도성 사람들이 서로 전하여 말하되 李貳相께서 오셨다고 하였다. 신미(辛未, 24)일에 대궐로 나아가 肅拜를 드리고 召命을 받고도 오는 것을 더디 하였으므로 待罪하셨는데 전교하여 말씀하시기를 “ 待罪하지 말라. 이제 내가 卿을 얻으니 이는 실로 나라의 복이로다.” 하셨다. 또 선생께서 높은 品階를 개정하여 주시기를 아뢰었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임신(壬申, 25)일에 思政殿에 들어가 뵙고 친히 진술하여 힘써 사양하였으나 듣지 않으셨다.

8월에 弘文館副提學을 겸하게 하시거늘 사양하셨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옛 전례에 知經筵은 朝講에만 들어갔는데 正言 吳健이 아뢰기를 “李滉이 올라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 循例로 접견하지 마시고 晝講과 夕講에도 명하여 불러 강론하시면 반드시 유익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주상께서 이 말을 좇으시므로 선생께서 “그것은 법규 밖의 일이니 감히 평안하게 행할 것이 아닙니다.” 하시고 사양하셨으나 주상께서 위로하고 타이르시며 허락하지 않으셨다. 계미(癸未, 6)일에 弘文館 大提學과 藝文館 大提學과 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를 겸하게 하셨다.

상소하여 여섯 조목을 진수하시니 “첫째는 이른바 계통을 중하게 여겨 仁孝를 온전히 하는 것입니다. 주상께서는 왕실의 至親으로 들어와 大統을 이으셨으니 무릇 뜻을 이으시고 사업을 이어 닦으시는 바가 지극한 정성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으니 그 仁孝하시는 도리에 지극하심을 이루지 못할까 근심하지는 않으나 마음은 소반의 물을 받드는 것보다 어렵고 어진 일은 바람 앞의 촛불을 安保하는 것보다 어려우니 다른 때에 귀와 눈을 속여 가리는 것이 어지러이 널려 있으며 사랑하며 미워하는 것과 남을 요괴같이 현혹하는 것이 함께 생겨나 날이 오래되고 달이 깊어 일이 익혀지며 情이 尋常하여서 宗廟를 받들며 長樂을 받드는 것이 동요되고 어그러지며 풀어짐이 있어 마땅히 용서하게 할 것은 降殺하게하여 마땅히 降殺하게 할 것은 융성하게 하는 것이 어찌 반드시 없을 것이라고 보증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예로부터 들어와서 大統을 이으신 임금이 彝敎에 대한 죄를 지은 경우가 많은 까닭이니 오늘날 마땅히 경계하여야 할 바입니다.<長樂은 궁이름이니 계신 곳이라. 彝敎는 성인이 예로부터 하상 가르치시던 人倫을 말하는 것이고 마땅히 융성하게 할 것은 이으신 바를 말한 것이고 마땅히 降殺할 것은 私家의 어버이를 말하는 것이다>

둘째는 讒間을 막아서 兩宮을 친하게 하는 것입니다.<讒間은 참소하여 이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兩宮은 대전의 사이를 말하는 것이다> 효도하는 사랑하는 도리는 천성에서 나온 것이고 그 倫紀가 지극히 중하고 그 정이 매우 간절하니 마땅히 극진히 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나 혹 효도하는 데에 빠진 것이 있으며 사랑하는 하늘이 또한 虧損하는 것이 있음에 이르기를 보통 사람도 진실로 이런 죄를 면하지 못함이 있는데 帝王의 집에 이러한 근심이 더욱 많은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좌우 가까이에서 주상을 모시는 자와 內戰에서 부리는 자는 宦官宮妾들인데 이 무리들의 성품은 陰邪하고 교활하여 간사한 것을 끼며 사사로운 마음을 품으며 분란을 일으키기를 좋아하고 재앙 만들기를 즐겨 패를 나누어 많은 것은 다투며 적은 것은 헤아림에 그 情狀이 일만 가집니다. 그러므로 혹 한 번이라도 귀를 기울여 믿으면 자연히 불효에 빠져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음에 빠질 것이 분명할 것입니다. 또한 이제 전하의 대비 섬기심에 이른바 의리로써 은혜를 두텁게 하고 변칙으로써 常道에 처하실 것이니<이는 친 자제가 아닌 것으로 繼后하셨으니 상도의 친 모자 사이가 아니기 때문이다>이 두 가지는 실로 소인과 여자들이 틈을 엿보고 釁端을 조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궐내에는 늙고 간사한 무리와 늙고 蠱惑하는 무리가 아직도 다 없어지지 않았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周易에 있는 집안의 사람 대접하는 의리를 보시며 小學에 있는 人倫을 밝히는 가르침을 法으로 삼아 몸 다스리기를 엄하게 하시고 집을 바르게 하는 데에 삼가며 어버이 섬기기를 두텁게 하시고 자식의 職任을 극진하게 하셔서 左右近習의 사람으로 하여금 兩宮에 지극한 정으로 효도하고 사랑하시는 것보다 중한 것이 없게 하여 우리를 참소하고 이간하는 것이 그 사이에서 행해지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면 자연히 陰邪한 무리들이 이간하여 분란을 일으킬 걱정이 없어 효도함에 闕함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 마음을 미루어 효도와 공경을 恭懿殿에 이르게 하시면 도리가 이어지며 이어지는 것이 높아져서 仁이 지극하고 의리가 극진하여 三宮의 즐거우심이 지극하게 되고 일만 가지 복이 다 이를 것입니다.<慈殿은 明宗王后이시고 恭懿殿은 仁宗王后이시니 三宮은 慈殿과 恭懿殿과 大殿을 말하는 것이다>

셋째는 임금으로서 배우는 것을 돈독히 하여 그것으로써 다스리는 근본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제왕의 학문은 마음을 다스리는 법의 요점으로 大舜이 禹께 명하신 것에 근원하고 있는데 그 말씀에 이르기를 ‘인심은 위태롭고 道心은 미묘하니 精하고 한결같아야만 진실로 그 中을 잡을 것이라,’하였습니다.<인심은 七情이니 눈으로는 좋은 빛을 보고자 하고 귀로는 좋은 소리를 듣고자 하고 입으로는 맛있는 것을 먹고자 하고 코로는 좋은 냄새를 맡고자 하고 四肢는 평안하고자 하는 마음이니 살피지 않으면 잘못된 일을 하기 쉬우므로 위태롭다 하는 것이고 道心은 四端이니 어진 마음이지만 처음 시작하여 나올 때에 그 끝이 미묘하여 알아보기 어려운 것이라 하시니 精이란 말은 그 사이를 바르게 살펴 함부로 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요 一이란 말은 꼭 지켜 일치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舜의 이 말씀에서는 다만 위태롭고 미묘하다는 것만 말씀하시고 그 위태롭고 미묘한 까닭은 말하지 않으셨으며 다만 精하며 한결같은 것으로 가르치시고 精하며 한결같이 하는 방법은 보여주지 않으시니 후세의 사람들이 이에 의거하여 도리를 진실로 알아서 실지로 실천하고자 하였으나 또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 후에 모든 성인이 서로 이어 孔子께 이르러서 그 법이 크게 갖추어졌으니 大學의 格致誠正과 中庸의 明善誠身이 그것입니다.<格致는 이치를 窮究하는 것이요 誠은 뜻을 實하게 하는 것이요 正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요 明善은 어진 일을 밝게 알림이요 誠身은 몸을 닦고 성실하게 하는 것이다> 臣이 청하옵건대 먼저 말한 첫번째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의 性과 情과 얼굴과 안색과 날마다 쓰는 人倫에 가까운 것으로부터 하늘과 만물과 古今事變의 많은 것에 이르기까지 지극히 실질적인 이치와 지극히 마땅한 법칙이 없는 것이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천연의 스스로 있는 中입니다.<中은 어느 한 쪽도 아니며 넘치는 것도 아니며 미치지 못한 것도 아니며 끌어 올린 것도 아닌 지극한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배우기를 가히 넓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이것에 대해 묻기를 가히 자세하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이것을 생각하기를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이것을 분별하기를 가히 밝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이 네 가지는 아뢰는 條目이며 이 네 가지 중에서 삼가 생각하는 것이 가장 중하옵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그 시작의 여러 끝을 發하셨으니 臣이 청하옵건대 그 쌓으신 功을 더 쌓아 세월이 오래되면 공부와 힘이 깊어져서 하루 아침에 훤하게 통하여 트이는 것이 있으면 비로소 이른바 體와 用이 한 근원이 되며 나타난 것과 미세한 것의 간격이 없는 것이 진실로 그러하여 위태로운 인심과 미묘한 道心이 아득하지 않고 精하게 살피며 반드시 지키는 것이 어지럽지 않아 中을 가히 잡을 수 있을 것이니 이를 일러 이른바 진실로 아는 것이라 합니다. 臣이 청하옵건대 다시 행하는 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뜻을 성실하게 함에 반드시 그 기미를 살펴 한 털끝 만큼도 實하지 못한 것이 없게 하며 마음을 바르게 함에 반드시 마음의 動과 靜을 살펴 한 가지 일도 바르지 않게 하는 것이 없으며 몸을 닦음에 한 가지의 편벽됨에 빠지지 말며 집을 가지런히 함에 어느 한 쪽만을 가까이하지 말며 보지 못하는 바를 경계하며 듣지 못하는 바를 두려워하며 혼자 있어 남이 모르는 곳에서도 삼가며 뜻을 굳게 하여 그치지 아니함은 힘써 행하는 條目이니,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때에 따라 그리고 곳에 따라 생각마다 거두어 잡으시고 일마다 두려워하여 조심하셔서 일만 가지의 더러움과 모든 욕심을 마음 가운데에서 씻어 버리시며 다섯 가지 떳떳한 倫紀와 일백 가지 행실을 지극한 善으로 磨礱하여 밥 먹으며 숨쉴 사이에도 계속하시며 의리를 헤아리셔서 분함을 징계하시며 욕심을 막으시며 어진 곳으로 옮기시며 허물을 고치시고 성실하며 한결같이 하시고 넓으며 크며 높으며 밝기를 힘써 예법에 벗어나지 아니하며 하늘을 도와 천하를 經綸하는 것이 다 玉漏에 根源하게 하십시오.<經綸은 실제 하는 이름인데 나라 다스리기에 비유하였고 屋漏는 집의 어두운 구석이니 혼자 있는 곳에서도 조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진실로 쌓은 것이 많으며 시간이 오래되면 자연히 의가 精해지고 仁이 익어 그만두고자 하여도 능히 그만두지 못하여 갑자기 스스로 성현의 中和된 곳에 들어가는 것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넷째는 道術을 밝혀서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唐虞와 三代의 융성할 때에는 道術이 크게 밝아 다른 데에서 갈리어 미혹된 것이 없는 까닭에 사람의 마음이 바르게 되고 다스리는 덕의 교화가 흡족해지기 쉬웠으나 周나라가 쇠퇴한 후로부터는 道術이 밝지 않아서 邪慝한 것이 같이 생기므로 사람의 마음이 바르지 않아 다스리려고 하여도 다스려지지 않고 교화시키려 하여도 교화시키기 어려웠습니다. 무엇을 일러 道術이라 하는가 하면 하늘이 명하신 것을 나서 떳떳한 人倫에서 행하는 것이니 천하와 고금에 다 같은 것으로 말미암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臣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반드시 道術을 밝혀 인심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써 新政에 공헌하는 것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 밝히는 일은 또한 本과 末이 있으며<本은 처음이고 末은 끝이다> 먼저 하며 후에 하며 緩하며 急한 베품이 있는 것이니 人君께서 몸소 행하여 마음에 얻으신 다음에 근본하여 백성들이 날마다 쓰는 것은 本이고 法制의 자취를 따르며 문물의 아름다운 것을 이어 依倣하여서 한 곳에 대어 생각하는 것은 末이니 本은 먼저 하고 急하게 할 것이고 末은 후에 하고 緩하게 하는 것입니다. 臣이 엎드려 보건대 동방에서 異端의 害로서는 불교가 가장 심하고 老莊의<노자와 장자다>虛誕한 것을 혹시 숭상하는 이가 있어 성인을 업신여기며 예법을 경멸하는 풍속이 간혹 있으며 管商의<管仲의 商鞅이다> 術業을 다행히 전하여 진술하는 이는 없으나 功을 세며 利를 꾀하는 폐습이 고질화 되어있고 鄕愿의 덕을 어지럽히는 습성은 세상에 아첨하는 것의 濫觴이 되었으며 俗學의 향방의 아득한 근심은 擧子가 이름을 쫓는 데서 爎原한데<老子와 莊子는 허무한 것을 숭상하던 사람이고 管仲과 商鞅은 완전히 利만 탐하고 형벌을 각박하게 하던 사람이고 鄕愿은 세족에게 아첨하여 밖으로는 용하다 하되 안으로는 실로 용하지 않는 것이고 俗學은 성인의 학은 아니라고 글을 외우고 글씨만 숭상한다는 말이다>하물며 이름내는 길과 벼슬 찾는 곳에 기회를 타서 막고 부정하여 속이고 저버리는 무리가 또 어찌 없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일로써 보건대 지금 인심의 不正함이 심합니다. 설사 불행히 주상께서 도로 향하신 마음이 조금이라도 처음과 같지 못하시면 무릇 이러한 여러 가지 사람들이 반드시 잡다하게 같이 나아가 달려들어 일백가지 방법으로 주상의 마음을 어지럽힐 것이니 한 번만이라도 친하게 되면 곧 더불어 한 가지가 될 것이니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뜻을 잡으시기를 金石같이 하여 처음과 나중에 변하지 마시고 道를 밝힘을 日月같이 하셔서 陰慝한 기운을 훤하게 없애 干犯침 못하게 하면서 떳떳이 오래되고 그치지 않으시면 기다려 興起하는 선비와 스스로 새롭게 하려는 백성들은 다 큰 德에 올라서고 아래의 모든 간사한 것과 잡되고 陰慝한 것들은 또한 장차 신성한 敎化에 변화되기에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다섯째는 길러온 腹心을 밀어서 耳目을 통하는 것입니다. 人主는 한나라의 元首이며 大臣은 腹心이며 臺諫은 耳目입니다. 서로 맞추어 삼자가 서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옛날에 人君이 大臣을 신임하지 아니하며 臺諫의 말을 듣고 쓰지 않는 자는 비유하건대 사람이 스스로 그 가슴과 배를 미워하여 버리며 스스로 그 귀와 눈을 발라 막는 것과 같으니 진실로 머리만으로는 사람이 될 수 없고 혹시 大臣을 신임하여도 옳은 道로 말미암지 않아 대신을 구하는 것에도 그 나라를 바르게 하며 사업을 이루어 임금을 돕는 어진 사람은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첨하여 임금의 뜻에 따르는 자를 구하여서 그 사사로운 욕심을 이루기를 꾀하면 얻은 바 그 사람됨이 간사하여 政事를 어지럽히는 사람이며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흉악한 도적으로 권력을 擅恣하는 자일 것입니다. 임금이 이런 사람을 욕심을 이루는 腹心으로 삼고 신하는 임금을 욕심을 이루는 머리로 삼아 위와 아래가 서로 합하여 굳게 맺어 사람들이 이간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는 다 내쫓겨 나라 안이 비고 귀와 눈을 맡은 마을 관원은 모두 권력을 잡은 신하의 사사로운 사람이 되는 즉 이른바 귀와 눈이 元首의 귀와 눈이 아니고 權臣의 귀와 눈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귀와 눈을 빙자하여 勢焰의 불을 붙여 權臣의 惡을 당으로써 조장하고 腹心으로 말미암아 惡을 쌓으며 禍를 만들어 어두운 임금의 邪慝함을 쌓아 이루어 방자해서 스스로 각자가 하고자한 것을 얻었도다 하며 元首의 鴆毒은 腹心에서 생겨나고 腹心의 蛇蝎은 귀와 눈에 의해 생겨나는 줄을 알지 못합니다. 皐陶의 노래에 말하기를 ‘元首가 叢脞하시며 股肱이 게으르면 일만 가지 일이 떨어지니라.’ 하니 이는 일만 가지 일이 떨어지는 책임이 元首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宋나라 신하 王介之가 말하기를 ‘재상이 宮禁의 의향을 받들며 急死가 재상의 공지를 받들면 조정의 기강이 땅을 쓸어버린 것 같다.’하니 사특한 길로 말미암지 않으면서 능히 서로 쓰임이 되는 것이 지극히 어진 道라 하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몸을 닦고 살피는 것을 정성으로 하여서 하늘의 사랑을 받게 하실 것입니다. 전하께서 보배를 잡으시고 왕위에 오르신 지 한 돌이 되었습니다. 하늘의 별이 자주 변하고 시절 妖孼이 번갈아 일어나고 和한 기운이 응하지 아니하여 兩麥이 다 耗損되고 수재가 참혹함은 예전에는 없던 바이고 바람과 우박과 蝗蟲등 여러 재변이 보이니 이는 하늘이 전하를 사랑하심이 깊이 위엄으로 경계하심이 지극한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어버이를 섬기시는 마음을 미루어 하늘을 섬기시는 도리를 다하시고 닦고 살피지 아니하는 일이 없게 하며 두려워하지 않는 때가 없어서 주상의 몸가짐에 비록 과실은 있지 않으나 心術의 隱微한 가운데에 쌓인 병을 가히 완전히 없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宮禁에는 비록 본래의 家法이 있으나 眷黨과 幽陰한 무리들이 청탁드리는 것을 가히 防遮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간하는 것을 들으시는 것은 비록 아름다운 것이나 때때로 사사로운 마음으로 굳게 거절하시는 것은 마땅히 고쳐야 할 것이며 어진 일을 즐기심이 비록 호색하는 정성같이 하시나 혹 헛된 것으로써 억지로 구함에 이르신 것은 마땅히 살피실 것이며 벼슬과 상을 함부로 주지 말아 공이 없는 자가 요행으로 얻고 공이 있는 자는 몸을 풀어 흩어져 버리게 하지 마시고 赦하고 풀어주는 것을 자주 하지 마셔서 악을 행하는 자로 하여금 면함을 얻게 하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해를 입게 하지 마시고 節義를 숭상하시며 염치를 가다듬어 名敎를 막아 지키기를 튼튼하게 하는 것을 가히 허술하게 생각지 말며 검약을 숭상하고 사치를 금하여 公私의 재물과 힘을 有餘하게 하는 것을 늦추지 못할 것입니다. 조종의 예법이 오래되어 폐단이 생긴 것을 비록 조금이라도 變通하지 않을 수 없으나 혹 그 어진 법과 아름다운 뜻까지 일체 어지러이 고치면 반드시 큰 근심에 이를 것입니다. 조정의 신하들 중에서 바른 것을 미워하고 다른 것을 꺼려하여 틈을 엿보아 일을 일으키는 자를 미리 진정시키지 않을 수 없으나 혹 스스로 어진 무리들끼리 반목하고 서로 배척하여 공격하면 반드시 도리어 손상됨을 볼 것입니다. 옛 것을 지켜 보통 것을 좇는 신하를 오로지 쓰심은 지극한 다스림을 얻어내기에는 방해가 되며 새로 나아가 일을 일으키기를 좋게 여기는 사람을 편벽되게 부리시면 또한 어지러운 길을 돋우어내기에 이를 것입니다. 서울과 지방의 아전이나 종들은 바치고 심부름하는 자들을 이리떼처럼 잡아 먹으면서도 그래도 부족하여 마을 창고를 비울 정도로 도적질하며 鎭浦의 장수들은 군사를 호랑이처럼 삼키면서도 오히려 싫어하지아니하여 그 독이 善隣과 일족에까지 미치며 饑荒이 날로 심해지는데에도 賑救할 묘책이 없으니 모든 도적이 크게 일어날까 두려워하며 변방이 허술하여 남쪽이나 북쪽에 틈이 있어 썩고 더러운 오랑캐가 불시에 침입해올까 염려되는데, 무릇 이같은 무리를 臣이 감히 낱낱이 들지 못하니 오직 전하께서 깊은 하늘이 주상을 사랑하시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고 안으로는 몸과 마음을 돌아보시는 것을 공경으로 專一하여 그침이 없게 하시며 밖으로는 정치를 닦아 행하시는 것을 성실히 하는 것으로 專一하여 거짓으로 꾸미는 것이 없게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시면 臣이 두려워하건대 否와 太가 서로 극이 되며 禍亂이 서로 이어서 수백년 동안 昇平하신 끝에 나라의 근심거리가 장차 날로 지금의 폐단보다 배로 생겨서 하늘이 전하를 사랑하시는 마음이 도리어 전하께는 스스로를 버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批答하시되 “내가 疏章을 보니 卿의 도덕은 옛 사람에게 叱正하여도 또한 그 짝 될만한 이가 드물 것이다. 무릇 이 여섯 조목은 진시로 千古의 지극한 말이며 當今에 급히 힘 쓸 일이니 내가 비록 䏚末하나 감히 가슴에 담지 않겠는가?” 하셨다. 병으로 말미를 받아 있으면서 본 벼슬과 겸직인 大提學을 사양하시고 인하여 “崇政을 더한 것을 원하는 대로 개정하여 주십시오.” 하셨으나 듣지 않으시고 의원을 보내어 병이 어떠한지 물으셨고 선생께서 잇달아 사양하셨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伸縮, 24일에 대궐에 나아가 大提學을 힘써 사양하여서 세 번이나 말씀드렸으나 듣지 않으시므로 이튿날 또 굳게 사양할 것을 그치지 않으시니 그 때에야 사직을 허락하셨다. 癸卯, 26일에 다시 判中樞府事를 제수하시고 知經筵春秋館事를 겸하게 하시니 大提學을 갈았던 까닭에 다시 批答을 내리셨다. 

9월 초하루에 獻官으로 康陵에 제사지내셨다.<康陵은 明宗의 능이다> 己酉, 3일에 夕講에 入侍하여 啓事하셨다. 그 때에 軍籍을 정리하는 일이 있었는데 선생께서 아뢰기를 “山陵을 겨우 치르고 또 天使도 금방 겪었으며 失農도 하였으니 軍籍을 정리할 때가 아닙니다.” 하시고 인하여 搨前에서 箚子를 쓰면서 말씀하시기를 “군사를 搜括하여 빠진 것을 보충하는 것은 마땅히 급한 일입니다. 다만 작년 이래로 국상과 산릉의 큰 役事가 잇달아 있었고 天使가 와서 백성이 困弊하였으며 올해에는 또 바람과 가뭄의 災變이 있었으며 날으는 황충(蝗蟲)이 하늘을 가리어 사방에서 災傷을 근심하며 救荒을 근심하는 글이 서로 이어 그치지 않거늘 나라에서는 일찍이 한 번도 號令한 정사를 내어 백성들을 구하는 방책은 세우지 않고 바야흐로 집마다 더듬으며 戶마다 뒤져 협박하고 몰며 침노하여 독촉하기를 성화같이 급하게 하니 나라의 근본이 어찌 요동하지 않겠습니까? 臣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잠시 그치고 세월이 풍년들고 백성이 쉰 후를 기다려 그 때 하는 것이 의리에 옳지 않을까 합니다.” 또 말씀하시되 “옛날의 聖王은 궁중의 일을 조정에서 參豫하여 알지 못하는 일이 없어서 宦官과 宮妾이 다 유능한 재상에게 거느려지게 하였고 諸葛亮이 後主께 아뢰기를 ‘궁중과 府中이 다 일체가 되어서 옳으며 잘못된 것에 높여 주며 벌주는 것을 다르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간사한 일을 하였거나 법을 범하였거나 또는 충성하고 어진 일을 하는 자가 있으면 有司에게 붙여 그 형벌과 상을 의논하여 공평하고 밝은 정치임을 밝히는 것이 마땅하니 편벽되게 사사로운 정으로하여 안팎의 법이 다른 것은 옳지 않다.’하니 또한 이 뜻입니다. 만일 ‘안의 일을 바깥 조정에서 알 바가 아니다.’하면 이것은 심히 옳지 않는 것입니다.”하시고 인하여 朱子가 효종에게 올리신 글 가운데서 한 대목을 각별히 기록하여 올리셨는데 그 때에 늙은 궁인인 石尙宮이라 하는 자가 있어 先祖 때부터 안팎을 교통하여 정사에 干豫한 죄가 있어 臺諫에서 의논하는 바가 된 까닭에 선생께서 그것에 미친 것이니 주상께서 다 받아들이시고 명하여 軍籍 정리를 그치라고 하셨다. 壬子, 6일에 夕講에 入侍하여 程子의 四箴을 나아가서 강의하셨다. 강의를 마치시고 아뢰기를 이 四箴은 顔子가 仁을 어떻게 하느냐고 물은 章에 있으니 孔子 문하의 많은 제자들에게 仁을 가르치신 것이 매우 많으나 오직 顔子만이 이것을 얻어들었기 때문에 朱子께서 말하시기를 ‘聖門의 心法을 전수하는 切當하고 중요한 말이다.’하였습니다.하시고 인하여 고사를 인증하여 切當히 강의하시고 주상께서 이르시기를 “이것은 진실로 지극한 말이니 마땅히 좌우에 두고 날마다 살펴야 할 것이니라.” 하셨다.

乙卯, 9일에 朝講에 入侍하여 論語集註를 강의하심에 周易을 배우면 吉하며 凶하며 사라지며 자라나는 이치와 나아가며 물러나며 있으며 망하는 道가 밝게 된다 하는 말에 이르러 선생께서 그 뜻을 미루어 아뢰기를 “六四卦에 주역의 이치가 다 갖추어져 있으니 우선 乾卦를 말씀드리면 첫 爻는 잠긴 용이니 쓰지 말라고 하였고 둘째 爻는 보이는 용이 밭에 있다고 하였고 셋째 爻는 아래 卦의 가장 위에 있으므로 용으로써 취하여 卦象으로 삼지 아니하여 다만 경계할 뜻을 일렀고 넷째 爻는 혹 뛰며 못에 있다 하였고 가장 위에 있는 爻는 자리가 너무 높아 극하므로 말하기를 귀하나 지위가 없고 높으나 백성이 없어 가장 높이 오른 용은 뉘우침이 있는 象이라고 하였으니 人君이 만일 높은 것으로 자처하여 어진 사람은 간만히 하며 스스로 성인인 체하여 혼자만의 외로운 지혜로 세상을 제어하며 아랫사람에게 자기를 낮추는 뜻이 없으면 이 형상에 응하여 궁한 재앙이 있을 것이니 반드시 겸허하여 묻기를 좋아하며 德을 같게 하여 서로의 일을 도와야만 亢極한 재앙을 면할 것입니다. 繫辭에 말하기를 위태롭다고 하는 자는 그 지위에서 평안한 자요, 망할 것이라고 하는 자는 그 있는 것을 보존하는 자이며 亂하다고 여기는 자는 그 다스릴 수 있는 자라 하시고 또 말하기를 망할까 망할까 하는 이는 包桑에 매여있다 하시니 人君께서 이것을 아신다면 가히 허물이 없을 것입니다.” 하시고 또 여쭈기를 “지금 나아가 강의한 것은 성현의 지극하신 말씀이나 한갖 음과 뜻과 句讀만 알고 스스로 얻은 실상이 없으면 유익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아득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를 않으면 위태롭다.’ 하셨는데 그 뜻을 해석하는 자가 말하기를 ‘마음에 구하지 않으므로 아득하여 얻는 것이 없고 그 일을 익히지 않으므로 위태로워서 평안하지 못하다’ 하니 모든 經書에 다 통하여도 마음에 얻는 실상이 없으면 아득하여 얻는 것이 없고 마음에 생각하여도 익히지 아니하면 위태로워 평안하지 못할 것입니다. 延平께서 朱子께 이르시기를 ‘이 도리는 온전히 날마다 쓰는 것의 익힘에 있으니 날마다 쓰면 움직이며 가만히 있으며 말하며 침묵하는 사이에 마음을 두고 살피며 그 일에 익숙한 후에야 아는 것이 실로 얻은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이 진실한 학문이다.’ 하셨습니다.” 하셨다. 庚申, 14일에 晝講에 入侍하셨다. 선생께서 전날에 말씀하신 것 중 亢極한 용이 뉘우치는 것이 있다 하는 것은 그 뜻을 오히려 다 말하지 못하였다 하며 또 각별히 箚子를 지어 강의를 마치고 나아가 읽으시니 주상께서 말씀하시기를 “경계하라는 것은 내 마땅히 경계를 삼겠노라.” 하셨다. 그 때에 申士楨이란 자가 있었는데 공주의 아들이었다. 자기 아버지께 불효하여서 臺諫이 바야흐로 疏를 올려 아뢰며 죄를 청하였는데 선생께서 아뢰기를 “요즈음 臺諫의 의논하는 바가 혹 집안 일을 간섭하며 혹 사사로운 일에 관련된 것이라 하며 즐겨 듣고 허락하지 않으시니 한 가지 일에도 이와 같고 두 가지 일에도 이와 같아서 쌓여 그치지 않으면 사사로운 일이 공변된 것을 이겨 없애는 것에 이르면 어지럽고 망할 조짐이 이에 말미암을 것입니다. 綱常이란 것은 우주를 부지하는 기둥과 대들보와 같은 것이며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주석과 같은 것이거늘 臺諫이 이 일 때문에 의논하는데에도 듣지 않으시면 주추와 기둥과 대들보가 부러지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또 아뢰기를 “臣이 無狀하여 文翰의 소임과 史局의 중한 책임을 다 감당하여 수행하지 못하고 오직 잠시나마 經筵에는 출입할 수 있을 것인데 겨울이 몹시 차가워 또한 장차 감당하기 어려우니 국사를 수행하지 못하면서 한갖 國祿만 먹는 것은 市井사람이 利만 보고 염치는 돌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조정은 臣을 士大夫라 부르는데 臣이 市井사람으로 자처하면 의리에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하시고 인하여 물러나기를 비심을 심히 간절히 하셨으나 주상께서 허락하지 않으시고 이르시기를 “상하가 바야흐로 卿에게 의지하고 있는데 그것이 무슨 말인가?” 하셨다. 그 때에 주상께서 선생께 기울여 향하시기를 심히 간절히 하시고 선생께서도 학문을 권하며 강론하는 것 외에도 정사에 잘못된 것이 있으면 홀연히 일을 좇으며 진술하여 아뢰시고 비록 宮禁과 戚屬에 관계된 일이라도 또한 주상을 위하여 아뢰시고 주상께서는 또한 마음을 비워 아름답게 여겨서 따르시고 말마다 들으며 계획마다 좇겠노라 하시는 上敎를 내리심에 이르렀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오히려 늙고 병이 들어 소임을 다할 수 없다고 하시며 늘 물러갈 뜻을 두시니 士大夫들이 선생께서 가시며 머무르시는 것으로 世道의 낮으며 높음을 점쳐서 오직 나라를 버리고 가는 것을 빨리하여 그 배우신 것을 다 행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셨다. 이 날 臺諫에서 거론된 일을 다 들어주시니 이는 선생께서 계를 올린 힘 때문이었다. 實錄撰集都廳堂上으로 임명되셨다. 總裁官 洪暹이 여쭈기를 “李滉은 斯文의 옛 선비이니 의논하여 붓으로 써서 칭찬하고 각아내리는 데에 가히 이 사람같은 이는 없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한 까닭이다.<實錄은 明宗朝에 하셨던 것을 기록한 것이다> 丙寅, 20일에 대궐에 나아가 물러가기를 빌었으나 허락하지 않으시고 말씀하기를 “卿이 만일 벼슬을 그만두면 누구와 더불어 나라일을 하겠는가? 겨울철이라 병을 면할 수 없으면 완전히 소임을 폐하여도 무엇이 미안하겠는가? 원하건대 사양하지 말라 하시고 인하여 내일 夕講에 入侍하라.” 하셨다. 丁卯, 21일에 夕講에 入侍하셨는데 주상께서 묻기를 “요즈음 조정의 의논이 趙光祖에게 관직을 追贈하고자 하는 것이니 그 사람의 학문과 행했던 일이 어떠한 것이었나?” 하시니 선생께서 아뢰기를 “光祖가 天稟이 빼어나서 일찍이 뜻을 性理學에 두고 집에 있을 때에는 효도하고 우애가 있었습니다. 中廟께서 다스림을 구하시기를 목마른 데에 물 생각하듯 하시어 장차 三代 때의 다스림을 이루려 하셨으므로 光祖가 또한 세상에서도 드문 만남이라 하여 金淨 金湜과 奇遵과 韓忠등과 더불어 서로 힘을 한 가지로 쓰며 마음을 같이 하여 크게 更張하였고 조목과 법을 설립하고 小學으로써 사람을 가르치는 법으로 삼고 또 呂氏鄕約을 거행하고자 하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바람에 움직이듯 하였는데 만일 오랫동안 폐하지 않았던들 다스리는 도를 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그 때에 나이 어린 사람들이 다스림에 이르기를 급하게 생각하여 빨리 하고자 하는 폐단이 없지 않았고 옛 신하들 중 물리침을 본 자가 벼슬을 읽고 怏怏하여 일백 가지로 꾀하여 틈을 살펴 망극한 참소로 얽어매어 일시에 어진 선비의 무리들을 혹 귀양 보내고 혹 學行에 뜻을 두는 사람을 싫어 하는 자들이 홀연히 지목하여 ‘己卯士禍 때의 무리다.’ 하니 인심이 누가 禍를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士風이 크게 더럽혀져서 이름난 선비가 나지 않는 것은 이 일 탓입니다.” 하셨다. 주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전번에 弘文館에서 南袞의 벼슬을 죄상에 따라 삭탈하여야 한다 하니 이것은 또한 어떻게 된 일인가?” 선생께서 아뢰기를 “己卯士禍는 바로 南袞과 沈貞의 간사함에 말미암아 끝내 中廟의 누가된 것이니 가히 죄가 하늘에 통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상의 뜻은 先廟 때의 대신을 죄상에 따라 관직을 삭탈하기가 미안한 일이 아닌가 하시는 것이니 심히 忠厚한 뜻이나 모든 의논된 바는 어진 일을 나타내고 나쁜 일을 치는 일이니 光祖를 追贈하시고 죄상에 따라 南袞을 죄 주시면 是非가 분명해질 것입니다.“ 주상께서 명하여 대신에게 收議하게 하시고 弘文館과 兩司와 政院으로 하여금 각각 南袞의 죄상을 진술하라 하시고 드디어 南袞의 관직을 삭탈하셨다. 10월 초하루에 慕義殿에 陪祭하셨다.<명종의 魂殿>

선생께서 아뢰기를 근래에 日食이 있었고 또 겨울인데 천둥의 변괴가 있었습니다. 先王께서는 災變을 만나면 두려워 몸을 기울여 德을 닦았으니 가히 文具만을 행하여서는 상천을 감동시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詩經』에 하늘을 공경하는 도리를 말하였는데 ‘공경하고 공경하라. 하늘이 나타나신다. 높고 높은 위에 계신다고 말하지 말라. 그 일을 오르내리며 날마다 보시는 것이 이에 계신다.’ 하니 대개 하늘은 곧 이치이며 하늘의 이치는 흘러서 행하며 그렇지 않을 때가 없으니 사람의 욕심이 조금이라도 그 사이에 생기면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中庸』에 또한 말하기를 ‘神의 생각을 가히 헤아리지도 못하는데 하물며 가히 생각하여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였고 孟子께서 이르시기를 ‘그 마음을 잡아 性을 기르면 그것이 곧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하니 하늘을 섬기는 도리는 다만 마음과 性을 잡아 기르는 데에 있을 따름입니다. 宋나라 때에 張橫渠께서 지으신 『西銘』에 이 이치를 말한 것이 심히 분명한데,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로써 하늘을 섬기는 도를 밝히셨으니 그 속으로 미루어가면 성인의 지위에서의 일이고 아래에서부터 인사를 배우는 공부도 겸하여 다하지 않을 것이 없으나 이를 안 후에야 하늘을 공경하는 도리를 밖에서 假借하여 꾸미기를 기다리지 않고 진실한 공부를 가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하여 청하시기를 “小學 강의를 마친 후에 『西銘』을 강의하겠습니다.” 하시니 “그렇게 하라.”하셨다. 또 아뢰기를 董仲舒가 한 말이 있으며 ‘人君께서 마음을 바르게 하여 그로써 조정과 百官과 만민을 바르게 하여 그로써 사방에 이르면 멀며 가까운 데에 바르게 하기를 한결같이 하지 않는 것이 없어 邪慝한 기운이 그 사이에 干犯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이로써 음과 양이 조화되고 바람과 비가 제 때에 불고 내리며 가히 모든 복된 물건과 日月祥瑞가 다 이르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하였으니 위로는 人君의 마음에서부터 아래로는 조정의 百官과 만민에 이르기까지 바르지 않는 것이 없으면 어찌 邪慝한 기운이 干犯함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人君께서는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보다 먼저 할 것이 없으며 그 가운데서도 많은 공부와 節目이 있으니 만일 다만 한 두 가지 끝에 있는 일만 고쳐서 災變을 없애고자 한 즉 가히 어찌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셨다. 庚子, 25일에 夕講에 入侍하여 董生行을 강의하시고<董生行은 小學에 있는 글이니 董生의 집에 새끼를 낳은 개가 나간 뒤 새끼가 울거늘 닭이 벌레를 물어서 먹이는 일이 있는지라. 글 짓는 사람이 그 董生이 어질므로 그런 祥瑞가 있다 하였다>아뢰기를 “和한 기운이 상서로움에 이르렀기 때문에 감동하는 바가 있으면 왕왕 상서로움에 응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귀한 것이 德에 있고 상서로움에는 있지 않으니 진실로 德이 없으면 상서로움이 무엇이 귀하겠습니까?” 하셨다.

11월 戊申, 4일에 夕講에 入侍하셨다. 이날 小學을 강의하시고 아뢰기를 “小學과 大學은 聖學의 始終이니 마땅히 예전에 배운 것을 익히고 새 일을 아셔야만 할 것입니다. 이제 비록 小學을 다 강의하였으나 또한 항상 유념하시는 것이 옳습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학문을 하는 공부는 능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함이 근심이 아니라 능히 물러나서 걷지 못함이 근심이다.’ 하였으니 물러나서 걷는다는 것은 물러서서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옛날에 배운 것을 늘 생각하여 잊지 아니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옛 것을 익히는 공부가 깊고 지극하면 새 것을 아는 공부 또한 이에서 벗어나지 아니합니다.”

癸丑, 9일에 弘文館에 들어가서 西銘을 교정하셨다. 그 때에 장차西銘을 강의하려 하는 데에 대신이 나아가 청하여 “선생으로 하여금 나아가서 읽으시게 하여주십시오.”하거늘 선생께서는 “衰病하고 氣乏하여 말소리가 低微하여 족히 주상께서 들으시도록 가르쳐 깨우치게 하지 못한다.” 하시며 사양하셨는데 대신이 다시 청하여 관원이 모두 같이 “교정한 후에 進講하여 주십시오.” 하므로 명을 받들었고 또 西銘考證을 만들어 그로써 참고로 삼게 하셨다.

庚申, 16일에 병으로 말미암아 사직하셨는데 명하여 말미를 주시고 의원을 보내어 문병하게 하시고 음식물을 주시고 己巳, 25일에 또 內醫를 보내어 병세를 물으셨다. 12월에 재삼 辭狀을 올리셨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庚寅 16일에 聖學十圖와 箚子를 올리시니 첫째는 太極圖요 둘째는 西銘圖요 셋째는 小學圖요 넷째는 大學圖요 다섯째는 白鹿洞規圖요 여섯째는 心統性情圖요 일곱째는 仁說圖요 여덟째는 心學圖요 아홉째는 敬齋箴圖요 열째는 夙興夜寐箴圖이었다. 주상께서 “학문을 하는 데에 심히 切當하다.” 하시며 병풍을 만들어서 들이라고 명하셨다. 戊戌, 24일에 나아가 은혜에 감사하시고 사직하셨는데 허락하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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