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이황선생 영정

退溪先生年譜
  연보 1
  연보 2
  연보 3
  연보 4
선생의 생애와 학문
  一. 생애편
  1. 태어나신 환경
  2. 어진 천품
  3. 부단한 탐구
  4. 벼슬길
  5. 인재양성,도덕교육
  6. 원숙한 인간상
  7. 조용한 최후
  二. 학문편
  1.선생이 남긴 저술
  2. 선생의 학문적전승
  3. 선생의 학문

 

퇴계 선생 연보(4)

 

1569년<선생 69세> 정월 庚戌, 6일에 吏曹判書를 제수하셨는데 나아가지 아니하시고 병으로 세 번 사양하시니 허락하여 갈으시고 다시 判中樞府事를 제수하셨다. 甲子, 20일에 대궐에 나아가 은혜에 감사하시고 인하여 田里에 돌아가기를 빌었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이날에 文昭殿의 의논이 일어났다.

처음에 世宗께서 漢나라 때의 原宗의 제도를 依倣하여 文昭殿을 세워 四親과 <四親은 高祖의 신주이다> 太祖의 신주를 모셔와 한 집에 室을 다르게 하여 서쪽으로써 위를 삼고 四時에 제사가 있으면 앞 전각에서 합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太祖가 가운데에 계셔 남으로 향하시고 高祖․曾祖․祖․父 네 분은 동서로 벌려 앉게 하여 昭穆의 제도같이 하였다. 成宗께서 德宗을 追崇하셨으나 叡宗을 文昭殿에 들여 모셨기 때문에 德宗을 別殿에 모시고 이름을 延恩殿이라 하였다. 仁廟께서 승하하시고 明廟께서 왕위에 오르심에 이르러 여론이 있으되 仁宗을 들여 모시면 世祖께서 마땅히 祧遷하실 것이로되 明廟께는 친히 다하지 아니하시고 祧遷하지 않으시면 다섯 간이 되니 世宗의 뜻이 아니라고 하여 이에 仁宗을 延恩殿에 모시니 이는 그 때에 李芑와 尹元衡 등이 나라 일을 맡아서 그 의견을 주장한 것으로 이에 사람들이 다 痛憤하므로 지금에 이르러 대신 李浚慶이 의견을 올리되 “仁廟께서 하늘에 오르신 후에 그 때의 모든 신하들이 예의를 돌보지 않고 자신들 마음대로 함에 잘못하여 文昭殿에 뫼시지 아니하고 別廟에 모시니 物議가 憤鬱하여 이 일이 족히 천지간의 和한 기운을 느껴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고 여러 가지 의논을 하되 明廟를 사당에 들여 모실 때에 틀림없이 文昭殿에 들여 모실 것이니 이 일은 의리에 심히 밝다 하되 다만 仁廟와 明廟는 더불어 마땅히 같은 代이시어 자리 수가 조금 늘어나므로 文昭殿 옛 집의 그 간수를 조금 늘려야 가히 奉安하실 것이니 臣 등이 禮官과 더불어 청하옵건대 먼저 집의 形止를 奉審하여 미리 닦아 지어야합니다.” 하므로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그 때에 河東郡夫人의 喪事를 맞아 返魂하게 되었을 때 사삿집에 家廟를 세우고자 하여 2品 이상에게 명하여 의논하라 하시거늘 선생께서 의견을 말씀드리기를 “追崇하는 모든 일은 마땅히 國喪 3년 뒤에 한결같이 宋나라 때의 僕왕과 秀 왕의 옛 일대로 하여야 할 것이나 오직 家廟만은 지금 만들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하셨다. <河東郡夫人은 宣祖大王을 낳으신 부인이시다>

2월 초하루에 慕義殿에 陪祭하시고 己卯, 5일에 春秋館의 史館에 들어가서 여러 재상들과 더불어 世宗實錄을 펴내어 文昭殿의 儀軌를 상고하시고 政院에 나아가 家廟 그림과 箚子를 올리셨다. “殿안의 太祖께서는 東向하시고 좌우로 昭穆께서 남북으로 향하여 앉으시면 집을 고쳐야 할 일도 없고 땅이 좁아 거행하기 어려운 근심이 옛 예에 합당하여 奉先하는 道에 진실로 편리하고 합당할 것입니다.” 하셨으므로 주상께서 즉시 引見하시어 자세히 물으시거늘 선생께서 펴서 대답하시기를 箚子의 뜻과 같이 하시므로 명하여 대신과 禮官에게 의논하라고 하셨다. 선생께서 물러나와 또 옛 사당의 그림을 올리시니 대신과 禮官이 모두 의논하기를 “殿 안의 제사하는 의례와 옛 예를 따르지 아니하시니 世宗께서 효도 생각이 무궁하셔서 살아계실 때 朝夕으로 섬기는 공경을 펴시어 신주가 앉아계시는 자리의 向背規式을 이미 정하시어 그후 140년 동안 실행하던 제도를 하루 아침에 고치는 것은 일 자체가 거북한 것입니다.” 하므로 선생의 의견을 실행하지 못하셨다.

乙未, 21일에 朝講에 入侍하셨고 己亥, 25일에 宣仁門 밖에 나아가 箚子를 올려 물러가기를 빌었으나 허락하지 않으셨고 壬寅, 28일에 또 箚子를 올리셨으나 또 허락하지 않으셨다.

議政府右贊成을 제수하셨는데 肅拜하지 않으시고 궐문 밖에 가서 힘써 사양하시니 가라고 허락하셨다.

3월 丙午, 2일에 또 대궐에 나아가 兼帶한 직책을 다 갈고 致仕하여 “시골로 돌아가겠습니다” 라고 하셨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이때에 이르러 선생께서 가실 뜻을 이미 결정하셨기에 연일 계속해서 대궐에 나아가 힘써 사양하셨는데, 그 때에 장차 주상께서 慕義殿에 친히 제사지내니 政院에서는 선생께서 드디어 가실까 두려워하여 아뢰어 “제사를 지낸 후에 引見하시고 보내십시오” 하고 청하므로 주상께서 注書 兪大修에게 명하여 뜻을 알리셨다.

判中樞府事를 제수하심에 戊申, 4일에 詣闕하여 은혜에 감사드리고 夜對廳에 들어가서 대하시며 물러가기를 간절히 비시니 주상께서 허락하셨다.

주상께서 선생을 引見하시어 힘써 머무르시기를 두세 번 권하셨으나 선생께서 물러가기를 더욱 간절히 비시므로 주상께서 말씀하시기를 “卿이 이제 돌아간다면 하고자 하는 말이 있지 않겠는가?” 하시니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옛날 사람들이 말하기를 ‘다스려지는 세상을 근심하고 밝은 임금을 위태롭게 여긴다.” 하였으니 대개 明主는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자질이 있고 治世에는 가히 근심된 것을 막을 것이 없으니 絶人한 자질이 있으면 혼자의 지혜로써 세상을 다스리며 신하를 업신여기고 근심을 미리 막지 않으면 교만하고 사치한 마음이 생기니 이것은 가히 두려워할 만한 일입니다. 지금 시절이 비록 治平한 듯하나 남쪽과 북쪽에는 틈이 있고 백성은 困乏하고 마을과 창고는 비어 장차 나라의 몰골이 되지 못하게 되어서 만일 갑자기 事變이 생기면 土崩瓦解할 조짐이 있으니 근심이 없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그 후 24년 만에 壬辰倭亂(1592)을 당하였다> 성상의 자질이 高明하시어 여러 신하들의 재주가 성상의 뜻에 차지 못하기 때문에 논의하고 處事하는 가운데 혼자의 지혜로 세상을 다스리는 점이 없지 않으시니 識者가 미리 근심거리로 삼는 것입니다. 신이 전번에 올린 바 乾卦에 ‘날으는 용이 하늘에 있고 亢龍은 뉘우침이 있다.’ 하는 말이 있는데 ‘날으는 용이 하늘에 있다’ 하는 것은 人君의 극히 높은 자리인데 그 위에 또 자리가 있으면 너무 높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스스로 高亢하고자 하여 즐겨 신하와 더불어 마음을 한 가지로 하지 않으며 德을 한 가지로 하지 않으면 어진 사람이 아래에 있어 도울 수 없을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亢龍이 有悔니라.’ 하는 것입니다. 용이 物 이룸은 구름으로써 그 변화를 신묘하게 하여 恩澤이 만물에 입히게 되는 것이니 人君이 아랫사람과 더불어 마음을 한 가지로 하지 않으며 德을 한 가지로 하지 않으면 용이 구름을 만나지 못한 것과 같을 것이니 비록 그 변화를 신묘하게 하여 恩澤을 만물에게 입히고자 한들 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임금의 덕에 있어 큰 변입니다. 무릇 태평이 지극하면 반드시 亂이 생길 조짐이 있을 것인데 지금이 태평하다고 하여 일에 혹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이는 배를 잡아 물을 거슬려 올라가다가 손을 놓을 때에 흐르는 물을 따라 아래로 따라 내려가 풍파를 만나면 뒤집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학문하는 공을 그만두지 않고서야 사사로운 뜻을 가히 이겨서 이러한 변통이 저절로 사라져 풀어질 것입니다. 성인의 일천 말과 일만 말은 存心하는 법이 아닌 것이 없으나 역시 요점을 아는 것이 귀합니다. 臣이 전에 드린 聖學十圖는 臣의 사사로운 소견이 아니고 모두 옛 어진 사람들의 소견이며 臣은 다만 그 사이에 한 두 가지 道를 보충했을 따름입니다. 그 공부는 전에 드린 箚子에서도 생각 思자와 배울 學자로써 주를 삼은 것으로 이것으로써 생각을 이루신 즉 얻으신 바가 더욱 깊어 사업에 발휘하실 것이니 가히 소신의 충성하려는 생각에서 가르침을 드리는 정성을 아실 것입니다.” 주상께서 말씀하시기를 “心統性情圖는 세 개가 있는데 가운데 그림과 맨 아래 그림은 卿이 그린 것인가?” 하시니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程復心의 四書章圖에 이 그림이 있는데 위의 한 그림은 바로 程復心의 그림이고 그 나머지 理와 氣를 나눈 것에 말이 많이 온당하지 않으므로 버리고 孟子와 程子와 朱子가 의논한 本然之性과 氣質之性으로 나누어서 중간과 아래 그림을 그렸는데 本然之性은 理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며 氣質之性은 理와 氣를 겸하여 말한 것이고 情에 대해 말한 것으로 理를 쫓아 발한 것은 四端이며 理氣를 합하여 발한 것은 七情입니다. 그러므로 가운데 그림은 本然之性으로 四端을 주로 하여 만들었고 아래 그림은 氣質之性으로 七情을 주로 하여 만든 것이니 이것은 비록 臣이 만든 것이나 모두 성현의 말씀을 끌어와서 만든 것으로 臣이 망령되이 지은 것이 아닙니다.” 하셨다. 주상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성정을 거느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시니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西銘』에 이르시기를 ‘천지의 막힌 것을 내 몸으로 삼았고 천지에 主한 것을 내 性으로 삼았다.’ 하니 기운은 형제가 되고 理 가운데 갖추어져 있는 것이니 理와 氣가 합한 것이 마음이 되어 한 몸의 主宰가 되니 性情을 거느린 것이 아니겠습니까?<主는 性을 말한 것이고 宰는 情을 말한 것이다> 대체로 이 性을 담는 것은 마음이고 내어 쓰는 것 또한 마음이니 이것은 마음이 性과 情을 거느린 까닭입니다.” 하셨다. 주상께서 또 물으시기를 “그림 안에 虛靈 이 두 자가 위에 있고 知覺 이 두 자가 아래에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시니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虛靈은 마음의 본체이고 知覺은 사물을 응접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습니다.”하셨다. 주상께서 말씀하시기를 “또 할말이 없느냐?” 하시니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우리 祖宗은 은혜가 깊으시며 혜택이 두터워서 공과 德이 높으시지만 다만 士林之禍가 중엽에 일어나니 廢朝때의 戊午士禍와 甲子士禍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中廟朝의 己卯士禍 때에는 현인과 군자가 다 대죄를 입어 이로부터 邪와 正이 서로 섞이어 간사한 사람이 뜻을 얻어 사사로운 원한을 갚을 때는 반드시 말하기를 ‘己卯 때의 남은 習이다.’ 하여 사람의 화가 연속해 일어났으니 예로부터 이같은 때는 있지 않았습니다. 明廟가 나이 幼冲하시고 권세있는 간신이 뜻을 얻어 한 사람이 패하면 또 한 사람이 나서서 서로 잇달아 일을 일으키니 사화를 차마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臣이 이미 지나간 일을 아뢰는 것은 장래에 큰 경계로 삼으시게 하고자 함입니다. 예로부터 人君이 처음에는 정사가 淸明하므로 바른 사람을 등용하여 쓰나 임금이 허물이 있으면 간하며 잘못이 있으면 다투므로 人君이 반드시 厭苦하는 뜻이 새기게 됩니다. 이에 간사한 사람들이 틈을 타 逢迎하여<人君의 뜻을 맞이하는 것이다> 人主의 마음을 사로잡으니 만일 이 사람을 쓰면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 없을 것이라 하여 이로부터 소인과 더불어 뜻을 합하여 正人이 손 닿을 데가 없게 된 후에야 간신이 뜻을 얻어 벗을 부르면 무리를 모아서 인하여 하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됩니다. 지금 새로 정사하시는 처음에 무릇 간하며 논하는 바를 다 뜻을 굽혀 쫓으시니 큰 허물이 없으시나 오래됨에 주상께서 혹 마음을 바꾸시면 어찌 능히 오늘 같으실 것을 능히 보증하겠습니까? 이 같으면 邪와 正이 장차 서로 나누어져 간사한 사람들이 반드시 이길 것이니 처음의 정사에서 크게 상할 것입니다. 唐나라 玄宗의 開院 때에 姚崇과 宋璟 등의 어진 신하가 조정에 가득하여 그로써 태평세월을 이루었으나 玄宗이 욕심이 많은 것으로 말미암아 군자는 다 물러가고 소인만 머물러서 天寶의 난을 일으키니 한 나라의 임금의 몸으로 그 일에 두 사람이 같게 된 것은 처음에는 군자와 합하였고 나중에는 소인과 합하였기 때문입니다. 주상께서는 이 일로써 큰 경계를 삼으셔서 어진 무리를 보호하여 소인으로 하여금 構陷하지 말게 하시면 이것은 宗社와 신민의 복이니 臣이 경계하고 아뢰고자 하는 것에 이보다 큰 것은 없습니다. 하셨다. 주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일러준 말을 마땅히 경계로 삼을 것이다.” 하시고 또 물으시기를 “卿이 조정의 신하 가운데서 가히 천거할 만한 이가 없는가?” 하시니 대답하여 말씀하기를 “오늘날 대신의 자리에 있는 자는 다 맑고 삼가하며 六卿에는 邪慝한 사람이 없으며 首相에 이르러는 危疑한 때를 당하여도 聲色이 변하지 않음에 진실로 柱石같은 신하이니 마땅히 비교해서 중요하게 여길 사람은 뜻하옵건대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首相은 영의정 李浚慶이고 聲色은 소리와 얼굴빛이다> 주상께서 또 학문하는 사람을 물으심에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옛날에 程子께 묻는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제자 중에 누가 얻음이 있습니까?’ 하거늘 程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얻은 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쉽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시니 그 때에 游酢와 楊時와 謝良佐와 張繹과 李籲와 尹焞 등 여러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니나 程子께서 감히 가벼이 허락하지 않으셨는데 臣이 어찌 감히 위로 天日을 속여 어느 사람이 얻은 바가 있다 하겠습니까? 奇大升같은 이는 글을 많이 읽었고 또한 理學의 소견이 빼어나 통한 선비이나 다만 收斂하는 공부가 적습니다.” 아뢰기를 마치시고 드디어 물러나시니 豹皮의 요 한 벌과 胡椒 두 말을 주시고 李道로 하여금 쌀과 콩을 주라고 하시고 또 명하시어 가는 길에 말과 배 끄는 사람을 주어 돌아가는 것을 보호하라고 하셨다.

午正에 漏水가 내리거늘 拜辭하시고 성으로 나와 東湖夢賚亭에서 자고 己酉, 5일에 배를 타고 동으로 돌아가 奉恩寺에서 주무셨다. 명사들이 조정을 비우고 나와서 전송함에 각각 글을 지어 이별하여 보내니 선생께서도 글을 지으시길


배에 벌여 앉으니 모두 勝流라

날저물어 돌아가고자 하나 마음은 머물러 있네.

원하건대 한강물을 가져다가 벼루에 부어서

이별에 임한 한없는 시름을 그려 내고자 하노라.


하셨다. 

庚戌, 6일에 楊州의 無任浦에서 주무시고 申酉, 17일에 집어 도착하셨다.

 4월 글을 올려 물러나서 오는 것을 허락하시고 먹을 것을 주신 것을 감사하시고 인하여 벼슬을 갈아 致仕하기를 빌었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처음 선생께서 조정에 계실 때에 사방사람들이 풍채를 想望하기를 바랐었는데 물러가심을 들음에 朝野<조정과 들이다>가 缺然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執義 權德與가 상소하여 이르기를 “현자의 가며 머무는 것에 인심의 향하며 등짐이 달려 있으며 국가의 存亡이 매여 있습니다. 지난 번에 判府事 李滉이 글을 올려 해골을 빌어 왕명을 기다렸거늘 政院이 아뢰기를 ‘비록 보내지 않을 수 없겠으나 원하옵건대 引見하여 보내소서.’ 하였고 引見하시는 날에 이르러 곧 바로 馬을 주십시오 하고 여쭈거늘 주상께서 未穩한 뜻을 전교하신 즉 또 곡히 물러가기를 비는 연유를 진술하셨는데 이는 전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것을 政院이 허락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 때를 당하여 政院에서 현자의 가며 머무는 것이 인심과 국가의 向拜와 存亡에 매여 있는 까닭을 아뢰고 또 聖學이 바야흐로 급한 때에 가히 이 사람으로 하여금 經筵에서 잠깐이라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진술하여 주상을 인도하여 굳이 잡아 허락하지 않으시고 지성으로 머무를 것을 청하시게 했다면 李滉이 비록 가고자 한들 가히 갈 수 있었겠습니까? 臣이 살펴보니 詩傳 小雅의 白駒篇은 어진 사람을 머무르게 하는 것이라. 그 첫장에 이르기를 ‘밝고 밝은 흰 망아지가 우리 마당의 나물 싹을 먹는다 하여 매고 얽어서 오늘 아침을 길게 하여 이른바 이 사람이 이에 머물게 되리라.’ 하였고 그 둘째 장에 말하기를 ‘맑고 맑은 흰 망아지가 우리 마당의 명아주를 먹는다 하여 매고 얽어서 오늘 저녁에 길게 하여 이른바 이 사람이 이에 머물게 되리라.’ 하였고 셋째 장에는 말하기를 ‘皎皎한 白駒가 賁然히 오면 너를 공작이라 하며 너를 후작이라 하여 평안하고 즐겁기를 기약이 없게 하리라.” 하였으니 너의 優遊함을 삼가며 너의 가려하는 생각을 힘쓰며 사랑하기를 간절히 하여 좋은 벼슬로 족히 얽매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며 머물기를 지극히 하며 그 뜻을 이루지 못할 줄을 생각하지 않음이니 이 일로써 보건대 옛 사람들이 현자가 가는 데에 머물게 하고자 함을 일만 가지로 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함을 또한 한가하게 생각하지 못함이 이와 같거늘 지금은 망아지를 매자는 사람이 있으나 듣지 못하고 도리어 馬을 주자는 청이 있는 것은 어찌된 것입니까? 李滉이 어진 신하인 것으로 의논하지 말고 학문하는 일로써 말하건대 지금 세상에서 누구와 비교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평생의 정력이 다 학문에 있어 진실로 알고 실천하여 공부가 이미 이루어졌고 恬淡하고 안정하며 스스로 지켜 밖을 생각하지 않으니 진실로 선비의 높은 태도이며 斯文의 宗匠입니다. 그 여섯 가지 조목을 진술한 것과 열 가지 그림을 드린 것과 자못 일을 좇아가며 손수 箚子를 올리며 글을 의논하며 입으로 대답하여 아뢴 것을 보니 식견이 높으며 깊고 의논이 精하고 순수하고 綽綽이 그 연원이 있고 결단코 俗學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간절하고 위태한 정성은 오직 학문을 열어내어 인도하는 것에 있으니 이 進講하기가 바야흐로 급한 때를 당하여 經幄의 옛 신하를 구하고자 할 것인데 이 사람을 버리고 그 누구를 구하겠습니까? 이 같은 사람이 비록 前代에 있어도 오히려 만나지 못함을 한할 것인데 하물며 같은 때에 한 세상에 나서 도리어 버릴 수 있겠습니까? 전날 청하여 올라올 때에 전하께서는 일념이 오로지 현자를 좋아하는 것에 있으셨고 조정에서 상하를 다 돌보지 못할까 걱정하셨는데 이제 이미 돌아간 뒤에도 전하의 일념이 여전히 전과 같으심을 보증할 수 있을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朝野의 장차 흩어져 歸宿할 바가 없을가 臣은 두렵습니다. 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현자가 있지 않으면 그 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 하였으니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인심이 향하며 등 돌리는 것을 살피시며 국가가 유지되며 망하는 연고를 경계하셔서 돈독히 생각하여 善을 좋아사시며 몸을 責하여 어진 이를 부르시고 모든 사람의 情을 매어서 그로써 큰 업의 터를 삼으시면 종사에 심히 다행하고 生民에게도 심히 다행할 것입니다.이 일로 말미암아 벼슬 갈기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有旨를 내리시기를 “卿이 전부터 물러가기를 간절히 비니 뜻을 빼앗기가 어려울 듯 함에 이 때문에 그대로 허락하여 卿의 뜻을 평안하게 한 것이다. 致仕를 허락하지 않으며 벼슬을 갈지 않음은 뜻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니 卿이 마땅히 알고 있으라.”하셨다.

7월에 川谷書院의 두 선생 祝文을 지으셨다.

9월에 盧伊齋가 喪禮를 의논한 글에 회답하셨다.

1570년<선생 70세> 정월에 전문을 올려 致仕하게 해주십시오 하고 비시고 아울러 글을 올려 벼슬을 갈아주십시오 하셨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諭旨에 이르시기를 “卿의 나이 70이나 다른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이에 감히 듣지 않고 그 벼슬을 갈지 않는 것은 卿의 어진 德을 생각하여 여전히 정간을 이룬 것이지 사양하여 물러감을 허락한 것이 아니므로 조정에 돌아올 기약을 날마다 바라니 乘馹하고 올라와 내가 바라는 것을 도우라.” 하셨다. 3월에 또 전문을 올려 致仕하기를 빌었으나 허락하지 않으시고 인하여 乘馹하고 올라오라고 하셨다. 4월에 召命을 사양하시고 다시 致仕하기를 빌었으나 허락하지 않으셨고 잇달아 사양하셨으니 허락하지 않으셨다.

5월에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易東書院에 모였었다. 陶山에 나가셔서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心經을 강론하셨다. 8월에 易東書院에서 落成式을 하므로 가셨다. 9월에 전문을 올려 致仕하기를 비시고 글을 올려 벼슬을 사양하셨는데 허락하지 않으시고 다만 兼帶한 校書館과 活人署의 提調만을 갈으셨다. 다시 陶山에 나가셔서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啓蒙과 心經을 강론하셨다. 10월에 奇明彦에게 편지하여 心經情圖를 의논하셨다.

11월에 병으로 피곤하시므로 모든 선비들을 사례하여 보내셨다. 柳應見이 精舍에 있으면서 보내온 세 절귀에 화답하신 것이 있는데 그 중 한 수에 이르시기를


공자같은 성인도 오히려 마음을 가리는 사람을 箴規하셨고

曾子께서 이르시기를 글로 모여 서로 도와 仁을 이루는도다.

늙어감에 다시 학문을 하는 데에 소홀한 것을 깨달으니

속절없이 돌아온 것을 부끄러워하며 또 봄을 기다리노라.


하셨다. 

家廟에서 時祀를 행하셨다.

그 때에 선생께서는 이미 병환이 있었기 때문에 자제들이 參祭하지 마시기를 청하였는데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늙었기 때문에 제사지낼 날이 많지 않으니 가히 참예하지 않을 수 없다.” 하셨고 櫝을 받들고 제물을 올려 스스로 執事하셨기에 기운이 더욱 不平하셨다. 己卯, 16일에 奇明彦의 편지에 화답하시어 致知格物說을 고치셨다.

12월 丙申, 3일에 자제들에게 명하여 다른 사람들의 서적들을 기록해서 돌려 보내라고 하셨다. 경계하여 잃어버리시지 말라고 하셨고 그 대에 자제가 奉化縣監이 됨에 명하여 監司께 辭狀을 내라고 하셨으며 집 사람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금지하셨다. 丁酉, 4일에 형의 아들 寧에게 명하여 遺戒를 쓰게 하시니 “첫째는 禮葬을 사양할 것이고 둘재는 碑를 세우지 말고 작은 돌에게 그 전면에는 쓰기를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하고 그 후면에는 간략하게 향리와 世系와 志行과 出處를 진술하기를 家禮 중에 있는 바와 같이 하라.” 하시고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시켜 지으라 하면 서로 아는 奇高峯같은 이는 반드시 실지로 없는 일을 장황하게 써서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으므로 일찍이 스스로 뜻하였던 바를 닦아 내고자 하여 먼저 銘文만을 짓고 남은 것은 因順하여 마치지 못하였는데 草한 글을 여기저기 草 중에 섞여 간수하였으니 가려내어 그 銘文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보며 듣는 것이 사방으로 둘러서 있으니 너희의 行喪함이 다른 예가 아니므로 반드시 예를 아는 유식한 사람에게 물어야 거의 지금 세상에도 마땅하고 옛 예법에도 멀지 않을 것이다.” 하셨고 그 밖의 것은 집안 일을 처리하신 두어 가지 사항이었다. 낮에 諸生 등을 보셨다. 자제들이 하지 말기를 권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죽고 사는 이 때에 가히 보지 않을 수 없다고 하시며 명하여 웃옷을 덮게 하시고 諸生들을 불러 더불어 永訣하며 말씀하시기를 “평생에 그릇된 소견으로써 그대들 모두와 더불어 종일토록 강론하였던 것은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하셨다.

戊戌, 5일에 명하여 壽器를 준비하라고 하셨고 庚子, 7일에 문인 李德弘에게 명하여 서적을 맡게 하셨다. 이미 선생의 병세가 중하므로 문인들이 점을 침에 謙卦에 군자가 마칠 때가 되었다고 하는 爻를 얻었다.

辛丑, 8일 酉時에 正寢에서 돌아가셨다. 이날 아침에 모시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盆梅에 물을 주라고 하시고 酉時 초에 명하여 누우신 자리를 바르게 하라고 하시고 부축되어 일어나 앉아서 儼然히 돌아가셨다.

辛亥, 18일에 訃音이 주상께 올라가니 명하여 領議政을 追贈하셨다. 이보다 먼저 주상께서 병환 중에 계시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내의에게 명하시기를 약을 지어서 가지고 역마를 타고 가서 구하라고 하셨는데 내의가 이르기 전에 선생께서는 이미 돌아가셨다. 監司가 狀啓를 올려 아뢰니 政院에 전교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李滉이 세상을 떠나니 내 심히 痛悼하노라. 가히 領議政을 追贈하고 致賻하는 모든 일을 빨리 前例를 상고하여 올려라.” 하시니 이에 禮官이 아뢰어 喪葬의 恩奠을 모두 議政禮 쓰기를 청하였다. 각별히 右副承旨 李齊閔을 보내어 조상하게 하시고 또 右承旨 兪泓을 보내어 제사지내게 하시니 다 異數이다.

乙卯, 22일에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겸 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를 追贈하셨다.

1571년 3월 壬午, 21일에 禮安 搴芝山 남쪽에서 장사지냈다. 子坐午向한 언덕으로 선생께서 사시던 곳에서 일리 가량 떨어진 곳이다. 첨정공이 遺戒로 두 번이나 글을 올려 힘써 禮葬을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묘비에 새기는 것은 遺戒대로 써서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하였다. 처음에 선생께서 돌아가시니 원근의 사람들이 匍匐하여 달려와 미처 弔喪하지 못할까 염려하였으며 비록 평소에 일찍이 문하에 와서 수업하지 못한 자라도 또한 모두 거리마다 모여 弔哭하며 嗟歎하였고 어리석은 백성과 천한 노비라도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여러 날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이에 이르러 士大夫와 선비로서 모여 장사지낸 자가 삼백 여명이었다.

1572년 萬曆 원년

1573년 11월 초하루에 위패를 받들어 伊山書院에 奉安하고 釋菜하는 예를 행하였다. 서원은 榮川郡의 동쪽 6,7리에 있는데 戊午년 가을에 郡守 安瑺이 세운 것으로 선생께서 일찍이 記를 지으셨더니 이 때에 郡守 許忠吉이 서원 가운데에 사당을 지어 선생을 제사지내니 이 일이 주상께 아뢰어져서 이듬해에 伊山書院이라 賜額하셨다.

1574년 봄에 서원을 陶山의 남쪽에 세우기로 하였다. 온 마을 선비들이 의논하기를 陶山은 선생께서 道를 강론하시던 곳이니 가히 서원이 없을 수 없다하여 서당 뒤에 여러 걸음 나가서 땅을 개척하여 짓기로 하였다.

1575년 여름에 서원을 다 짓거늘 陶山書院이라 賜額하였다.

1576년 2월 丁丑, 13일에 위패를 奉安하고 釋菜할 예를 행하였고 이날에 廬江書院에서도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냈다. 이보다 먼저 안동선비들이 낙동강 상류에 서원을 세웠는데 고을 동쪽 삼십리에 있는 것을 白連寺의 옛터인데 이름하여 廬江書院이라 하고 앞에 누각이 있으니 養浩樓라 하였다.

12월에 諡號를 주시니 文純이다.<道와 덕이 있고 널리 들은 것을 文이라 하고 중립해서 바르고 精하고 순수한 것을 純이라 한다.>

1596년 윤8월 戊寅, 14일에 誌石을 묻었다.<선생께서 스스로 명을 지으셨고 高峰 奇大升이 그 뒤에 서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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