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이황선생 영정

退溪先生年譜
  연보 1
  연보 2
  연보 3
  연보 4
선생의 생애와 학문
  一. 생애편
  1. 태어나신 환경
  2. 어진 천품
  3. 부단한 탐구
  4. 벼슬길
  5. 인재양성,도덕교육
  6. 원숙한 인간상
  7. 조용한 최후
  二. 학문편
  1.선생이 남긴 저술
  2. 선생의 학문적전승
  3. 선생의 학문

 

퇴계 선생의 생애와 학문

 

 

  4. 벼슬길


  옛날에 벼슬길에 나가려면 국가시험인 과거에 합격해야 했다. 과거에는 향시(鄕試), 회시(會試), 전시(殿試) 등 여러 단계가 있었는데 이 여러 단계를 모두 거쳐야 했다. 퇴계선생은 27세에 향시에 합격하고 그 이듬해 28세에 회시에 합격하였다. 향시․회시에 합격하면 진사(進士)라 하여 이미 선비로서의 자격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퇴계선생은 회시에 합격한 후에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대과에 응시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연보의 32세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선생은 진사시험에 합격한 후에도 과거공부에 뜻이 없었다. 형 대헌공(大憲公 : 해(瀣)를 말함)께서 어머님께 아뢰어 권하도록 하여 이 해 문과 별시(別試)의 첫 단계 시험(初試)을 치러 2등으로 합격하였다. 서울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떤 여인숙에서 잤는데 밤에 도적들이 들어와 동행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 어쩔 줄을 모르는데 선생만은 태연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기록으로 보면 대과에 응한 것은 형과 어머니의 권에 의하여 치루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뒷 부분의 도적의 이야기에서 퇴계선생은 당시에 이미 외부적인 자극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그것에 의하여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을 만큼 확고한 정신세계를 이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남들이 그렇듯 탐내는 대과의 시험을 보지 않겠다고 한 것도 세속적인 부귀공명에 마음이 끌리지 않았기 때문이니 그때 이미 퇴계선생의 정신세계는 외계적인 그 무엇도 퇴계선생의 마음을 흐트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도적떼를 만난 다급한 시점에서도 태연할 수 있었던 것도 확고하게 자리잡힌 퇴계선생의 정신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퇴계선생이 대과에 급제한 것은 34세 때였다. 3월에 급제하고 4월에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이것이 퇴계선생의 벼슬길의 시작이었다. 이 때 이후 70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36년 동안 수많은 관직의 종류와 직급을 거쳤다. 여기서 그 복잡한 과정을 소상하게 소개하기는 어렵다. 또 그렇게 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다만 그 중요한 관직생활의 변천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36세에 호조정랑(戶曹正郞)에 임명되고

  40세에 홍문관교리(校理)가 되었다.

  42세에 어사(御史)로서 충청도와 강원도의 재해상황을 시찰하였다.

  48세 1월에 단양군수가 되고, 12월에 풍기군수로 옮겼다.

  53세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58세에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임명되고,

  66세에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임명되고,

  67세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임명되었다.

  68세에 우찬성(右贊成)에 임명되고 이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임명되고 이어 홍문관 대제학(大提學) 예문관 대제학에 임명되었다.

  69세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퇴계선생은 이들 벼슬중 많은 부분을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퇴계선생은 과거시험에 응하는 것 자체부터 형과 어머니의 권에 의하여 했다고 했거니와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는 것을 결코 탐탁하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벼슬이 내릴 때마다 두번 세번 사퇴소를 올려 어떻게든 면할려고 애를 쓰고 그래도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면 어쩔 수 없이 관직에 나가곤 했다. 잠깐 관직에 나갔다가는 또 거듭 거듭 면해달라는 소를 올려 임금이 어쩔 수 없이 면해주면 그 날로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오고, 내려와서는 좀체로 다시 벼슬길에 나가려 하지 아니하였다. 당시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퇴계선생을 조정에 불러 올려 나라의 기풍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야단이었다. 명종 때의 좌의정 상진(尙震)은 조사수(趙士秀)와 함께 경연에서 퇴계선생을 모셔와야 한다고 아뢰면서 「이황은 그 인품이 허물어져 가는 나라의 풍속을 바로잡을만 하니 임금님께서 직접 편지를 써 부르십시요」하였고, 이귀수(李龜壽)는 임금께 글월을 올려 「이황은 학문이 있고 도덕이 있으면서 산촌에 물러나 있으니 이런 사람을 받들어 모시면 선비들의 기풍을 북돋울 수가 있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명종은 직접 편지를 써서 올라오기를 청하되 「그대는 뛰어난 덕과 세상에 드문 학문을 가졌으면서도 공명을 탐하지 아니하고, 시골에서 한가롭게 지내면서 물러나기만 좋아하는도다. 내 항상 서울에 돌아와 주기를 바라나 어진 이를 구하는 내 정성이 부족한 탓인가 조정에 나와주지 아니하니 내 마음이 진실로 허전하도다. 내 비록 옛 어진 임금과 같은 덕을 못가졌을지언정 그대는 어찌 옛 은사(隱士)처럼 물러나려고만 하는가? 속히 올라와 나의 간절한 뜻을 받들어 주오」라고 부르는 편지를 내렸다. 그래도 퇴계선생은 소를 올려 「신은 덕이 부족하고 학문이 모자라는데도 공연히 헛된 이름만 나서 임금님을 속이는데 불과하고 또 신의 병이 깊어 임금님의 뜻을 받들기가 어렵습니다」하는 내용의 소로 사퇴를 거듭했다.

  명종은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어진 이를 부르되 오지 않으니 탄식하노라」(招賢不至歎)하는 제목으로 독서당(讀書堂)에서 글읽는 선배들에게 시 한수씩을 지어 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화공을 시켜 퇴계선생이 사는 도산의 풍경을 그리게 하고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퇴계선생이 지으신 도산기(陶山記)와 도산을 읊은 여러 시들을 거기에 쓰도록 하여 이것으로 병풍을 만들어 침전에 펴 두고 퇴계선생을 그리워 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퇴계선생은 벼슬에서 물러나기만 바라고 별다른 치적은 남기지 못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다만 직무를 맡지 않으려고 노력했을 뿐 일단 직무를 맡게 되면 그 일을 사리에 맞게 그리고 철저하게 처리했던 것이다. 어사가 되어 지방을 순찰하고서는 흉년에 대응하는 대책을 세우도록 건의하고 부정을 행한 탐관오리는 엄격하게 벌하도록 처리하였고, 바야흐로 일본과의 관계가 순탄하지 못하려 할 즈음에 이들을 잘 회유할 수 있는 외교적인 방안을 건의하고, 역대 왕실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의 확장․배치문제에 있어서 합리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지방관으로서 풍기군수가 되었을 때에는 소수서원을 수리하여 서원이 강학의 장소로서 활용될 수 있는 본보기를 세우기도 했던 것이다. 그 밖에도 많은 치적을 올렸으나 여기서 그 소상한 내용을 다 기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퇴계선생이 마지막으로 벼슬을 사양하면서 선조에게 올린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무진년에 올린 6개조목의 소라는 뜻이다. 이 소는 당시에 있어서 퇴계선생이 나라다스리는 원리의 대강을 제시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왕통을 계승하였음을 중하게 여기시고 효성을 온전히 하십시요.

  당시 새로 왕위에 오른 선조는 명종의 아들이 아니었다. 명종이 아들이 없이 죽었으므로 명종의 서동생인 덕흥군(德興君) 초(岧)의 아들로서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이다. 즉 양자로 들어와 왕통을 계승한 것이다. 양자에게는 생가의 부모와 양가의 부모가 있기 마련이다. 그 사이에서 여러가지 갈등이 생길 수가 있다. 그러므로 옛날의 법에 있어서는 생가와의 인연을 줄이고 계통을 잇는 양가의 인연을 중하게 여기도록 규정하였다. 특히 왕가에 있어서는 국가를 다스리는 왕통이므로 그 책임이 막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퇴계선생은 선조에게 이 점을 특히 강조하여 왕통을 중히 여기고 양부모에게 효도를 극진히 할 것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② 참소하는 무리들을 막고 양궁(兩宮)을 친하소서.

  중종이 돌아가시고 중종의 맏아들인 인종이 제12대 왕으로서 왕위에 올랐으나 불과 8개월만에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중종의 둘째 아들인 명종이 그 뒤를 이어 제13대 왕으로서 22년간 왕위에 있었다. 선조는 이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이다. 그러므로 당 인종의 비(妣) 인성왕후박씨(仁聖王后朴氏)가 대왕대비로 있었고, 명종의 비 인순왕후심씨(仁順王后沈氏)가 왕대비로 있었던 것이다. 양궁(兩宮)이란 바로 이 두 분을 말한 것이다. 궁중에는 많은 궁녀와 내시들이 있다. 대왕대비와 왕대비를 중심으로 많은 궁녀들 사이에는 온갖 말썽이 일어날 소지가 있다. 특히 인종조와 명종조에는 대윤(大尹)․소윤(小尹)의 파벌이 있어 온갖 불상사가 있었다. 이러한 특수한 여건을 생각하여 퇴계선생은 모든 참소하는 무리들을 막고 대왕대비와 왕대비를 잘 모셔서 궁중의 화합이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③ 성학(聖學)을 돈독히 하여 정치의 근본을 세우소서.

  성학(聖學)이란 성인의 학문 혹은 성왕(聖王)의 학문을 말함이다. 동양에 있어서 성왕은 요․순․우․탕․문무와 같은 왕이다. 그들이 닦은 학문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 핵심은 서경에 실린 16자로 된 말이다. 즉 인심유위, 도심유미, 유정유일, 윤집궐중(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의 16자이다. 그 뜻은 「사람의 욕심은 위태롭고 진리를 향하는 마음은 가냘프니 이 진리의 마음을 확실하게 하고 오직 이 마음만을 가져서 확실하게 중용을 행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제왕은 언제나 사물을 바로 볼 수 있는 깨어있는 정신의 소유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를 실현하는 방법은 ꡔ대학ꡕ의 격물치지, ꡔ중용ꡕ의 성명(成明)의 이론에 있으니 이를 잘 공부하여 확실하게 체득하는 것이 왕으로서 꼭 지켜야 할 원리라는 것이다.


  ④ 도술(道術)을 밝히고 인심(人心)을 바로 잡으소서.

  도술이란 무엇인가? 퇴계선생은 밝히되 「하늘에 근거하여 일상 윤리에 나타나는 것으로서 천하고금이 다같이 말미암는 길」이라고 하였다. 이 길이 밝혀지면 세상은 다스려지고 이 길이 밝혀지지 않으면 세상은 어지러워진다는 것이다. 이 길을 밝히는데는 근본과 말절이 있는데 근본은 임금이 몸소 실천하고 마음에 와 닿도록 확실하게 체득하는 것이고 말절은 외형적인 제도에 의거하여 이를 실현하려는 것이다. 근본적인 방법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경(敬)으로 일관해야 된다는 것이다. 경으로써 추구하는 길이 처음에는 쉽지 않은듯 하지만 쉬지 않고 계속하면 확연히 체득되는 경지가 열린다는 것이다. 즉 퇴계선생은 임금이 우주 생생(生生)의 이법을 마음으로 체득하여 백성의 모범이 되면 나라에 도덕이 저절로 행하여진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⑤ 복심(腹心)을 미루어 이목(耳目)을 통하게 하소서.

  복심은 배와 심장을 말한다. 이것은 비유로서 대신들을 뜻하는 말이다. 이 글에서는 나라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여 임금은 머리와 같고 대신은 배와 심장과 같고, 언관(言官)들은 귀와 눈과 같다는 것이다. 정치가 바르게 될려면 첫째 대신들을 잘 써야 하고 그 다음에는 나라의 정치가 잘되고 못되는 것을 바른 말로 고하는 언관을 잘 써야 한다는 것이다. 대신을 쓰는 것은 임금이 하는 것이니, 즉 머리가 밝고 지혜로와야 비로소 바른 사람을 대신으로 기용할 수 있고 대신이 발라야 이목의 역할을 하는 언관들을 또 올바르게 쓴다는 것이다. 즉 여기서는 공정한 인재등용이 있어야 나라의 정치가 바로서게 됨을 강조하였다.


  ⑥ 성실하게 수양하고 반성하여 하늘의 사랑을 받도록 하소서.

  한(漢)의 동중서(董仲舒)는 자연현상은 사람의 행위 특히 군주의 행위와 관련이 있다고 했다. 이것을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이라 한다. 퇴계선생은 이 주장을 인용하면서 군주가 군주로서의 도리를 다하면 자연현상도 순조롭게 된다고 생각한 옛사람의 생각을 본받아 임금님께서도 끊임없는 수양과 반성을 통하여 만백성이 그것을 본받고 하늘도 이를 사랑하여 순조로와질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주장하였다.


  위의 무진육조소의 설명은 지나치게 요약하여 본래의 소의 절실한 내용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으나 소의 본문은 지극히 간절하여 퇴계선생의 충정이 여실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6가지 조항은 훌륭한 군주가 되는데 꼭 필요한 덕목이라고 할 수 있고, 또 군주시대의 정치원리로서 그 근본을 지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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