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이황선생 영정

退溪先生年譜
  연보 1
  연보 2
  연보 3
  연보 4
선생의 생애와 학문
  一. 생애편
  1. 태어나신 환경
  2. 어진 천품
  3. 부단한 탐구
  4. 벼슬길
  5. 인재양성,도덕교육
  6. 원숙한 인간상
  7. 조용한 최후
  二. 학문편
  1.선생이 남긴 저술
  2. 선생의 학문적전승
  3. 선생의 학문

 

퇴계 선생의 생애와 학문

 

 

  5. 인재양성과 도덕교육


  사람은 누구나 부귀와 공명을 좋아한다. 그런데 퇴계선생은 왜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부귀공명을 마다했을까? ꡔ맹자ꡕ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물고기도 탐이 나고 곰의 발바닥도 탐이 나는데 두 가지를 다 가질 수가 없으면 물고기를 버리고 곰발바닥을 취하리라. 삶도 내가 원하는 바이고 옳음(義)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두 가지를 다 가질 수가 없으면 삶을 버리고 옳음을 취하리라」고 하였다. 사람에게는 하고 싶은 것이 많다. 그러나 그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다 가질 수가 없을 때는 자기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을 취하는 것이다. 퇴계선생인들 부귀가 근본적으로 싫었겠는가? 그러나 그것을 마다했을 때는 그것보다 더 값지다고 생각한 것이 있고 그것을 추구하자니 그것보다 덜 값지다고 생각한 부귀를 버렸다고 생각함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면 부귀보다도 더 값진 것이 무엇이었던가? 퇴계선생이 생각한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은 「참」이요, 「옳음」이었던 것이다. 벼슬길도 본래는 참과 옳음을 추구하고 실현하려고 하는 길이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서는 그렇지 못한 때가 있다. 나라에 질서가 없을 때에는 벼슬길은 무자비한 권력의 투쟁장으로 화하기가 쉽다. 퇴계선생이 살던 시대도 이러한 시대였다. 4대사화(四大士禍)가 연달아 일어나던 시대였다. 즉 무오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갑자사화가 연달이 일어나던 때이다. 터무니도 없는 허구의 사실을 얽어 훌륭한 선비들을 한꺼번에 수십명, 때로는 백여명의 선비들을 몰살시켰던 것이다. 퇴계선생의 네째 형인 이해(李瀣)도 간신 이기(李芑)에게 밉게 보여 터무니도 없이 죄에 얽혀 심한 매를 맞고 귀양길을 떠나다가 죽었다. 이런 판국이었으니 벼슬길에서는 참과 옮음을 펴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퇴계선생은 진작 간파했떤 것이다. 그리하여 진작부터 일생의 사업으로 해야 할 바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곧 학문을 통한 교화이었다. 이를 통하여 장차 일할 수 있는 인재를 키우고, 또 도덕을 회복해 보고자 하였다. 속담에 「10년 앞을 위해서는 나무를 심고, 100년 이후를 생각해서는 사람을 키운다」는 말이 있다. 퇴계선생은 당시의 정계에 실망을 느끼고 고향에서 교육을 통하여 후일에 대비하고자 했다. 이 목적을 위하여 세워진 것이 도산서당 지금의 도산서원인 것이다.

  퇴계선생이 교화활동을 생각한 것은 30대 전후의 젊은 때부터인듯 하다. 과거에 응할 생각이 적었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였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주변의 권에 의하여 과거를 보게 되고 과거에 급제한 후에는 부득이 벼슬에 종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40대 후반에 와서는 학문을 통한 교화활동에 대한 욕구가 점점 굳어져 50세 때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강학의 자리를 폈던 것이다.

  이 때 이후 안동을 중심한 영남지방은 물론이요, 경향각지에서 퇴계선생의 학문과 인품을 그리워하여 글을 배우려 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던 것이다. 지금 전하는 도산급문록(陶山及門錄) 즉 퇴계선생 문인록에는 109명이 적혀 있다. 이들 가운데 정승의 지위에 오른 분이 9명이나 된다. 비록 정승의 지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할지라도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수없이 많다.

  깊은 물에 고기가 모인다는 속담도 있듯이 당대의 유명한 인물들이 대체로 퇴계선생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던 것이니 그것은 곧 퇴계선생의 학문과 덕행이 위대했던 증거이다. 과거에 급제를 하고 정승의 지위에까지 오르 사람들은 더욱 두드러진 사람들이었거니와 비록 그러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도산급문록에 기록된 인물들은 대체로 한 고을, 한 문중의 두드러진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도산서당에서 배운 바를 각기의 문중, 각기의 고을에서 이를 펴나갔던 것이다. 퇴계선생의 학문적인 영향권은 전국적인 것이지만 특히 영남지방에 있어서의 그 영향은 지대했던 것이다. 그 흐름이 오늘날에까지도 은연중에 지속되어 온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퇴계선생이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을 통한 교화사업을 전개한 것이 얼마나 값진 계획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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