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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편 - 금응훈(琴應壎) -

 
생몰연대 :1540(중종35) -1616(광해군8)본관 : 봉화(奉化)
호 : 면진재(勉進齋)
별칭 : 자 훈지(壎之)
활동분야 :
주요저서 : 면진재유고(勉進齋遺稿)
 

遺事

公 日休之弟也 諱應壎 字壎之 號勉進 嘉靖庚子生 庚午中司馬 甲午以廷臣薦 拜祠官 乙未超授公六品階 除永春縣 盡遞歸 復拜堤川縣監 居官大治 鄕人立石表德 庚子拜義興縣監 時方刊退陶先生集 西厓月川諸公 以爲非公 不可監董其事遂不赴任 丙辰六月六日疾卒于家 享年七十七 葬于知禮村先塋子坐午向之原 退溪先生講道溪上 一時英材賓賓然執弟子禮 以考德問業者多矣而若論精切之識篤實之學則獨推長公爲前列 公是時以英妙之齡樂易之資 亦得以登先生之門而逮事之 當時眞諦之傳 旣甚的而又與長公同室而處 其相與切劘者爲如何哉 嗚呼公之造詣之深 豈埈淺見所可窺測而獨以可見者言 在親庭則樂有賢父兄而人無間言 在師門則訥於言語而得聞奧旨 臨民則必推惠澤 待人則不設藩町 於玆數者 可以卜其平生也 爲山長十餘年 奬進後學之功 甚多 埈嘗持啓蒙氣學設 拈出所疑晦者叩之 隨問響答 聽者忘倦 嗚呼埈於公 知之者少而其所未知者又何限也 公前娶長水黃氏通政大夫驪州牧使怡之女 無子後娶安東權氏贈司憲府執義大器之女 生一子攬娶漆原尹氏嘉善大夫行黃海道觀察使調元之女 孫男五人 惟用謙尙謙信謙 在云
嘉善大夫原任弘文館副提學李埈謹撰

行狀

先生諱應壎 字壎之 奉化人也 高麗金紫光祿大夫太學士諱儀 其遠祖 歷十世有諱遇工 內府令尹 始居于奉化 是生諱以和 通禮門祇侯 是生諱滌 長沙縣監 是生諱嵇 生員 是生諱衎 生員 星州判官 是生諱致湛 生員司䆃寺僉正 是生諱榟 以力學有操守 聞於鄕 爲禮安訓導 退陶夫子誌其墓 寔先生之考也 娶贈參判光州金孝盧女 贅居于禮安烏川里 有二子長諱應夾 號日休堂 季卽先生也 日休先生 以至孝聞 先生自幼時 惟兄是視在親側 日戲嬉無違色 旣長與伯氏 受業於退陶夫子 篤志勉學 服膺師訓 如心經啓蒙等書 無不潛心了解 嘗扁其齋曰勉進 師門所手書命名者也 又築室於寒棲庵之傍 以爲朝夕受敎之地 師門詩所謂琴生 結茅棟 在我南溪曲者是也 時先生兄弟及內兄金後凋挹淸山南養正雪月諸先生 居同里學同門 出則講質於師門 退則以所聞於師門者 聯閑講討 寒岡鄭先生 嘗稱烏川一里 皆君子 後人因名爲君子里 庚午中生員 壬辰島訌 一鄕推先生爲義兵都摠 甲午藥圃鄭先生 以居家孝友士林矜式 啓薦拜祠官 乙未超陞六品除永春縣監 旣遞 復拜堤川縣監 居官多異蹟 縣人士立石 以寓去後思 庚子刊先師文集 時先生拜義興縣監 同門諸先輩皆以爲非先生 無以幹其事 遂呈辭不赴 終始監董 俾完大役 又校刊師門世譜四書釋疑 爲跋語以發揮之至於陶山書院養士講學之需 多先生所措置而主講席者十餘年矣 愚伏鄭先生 蒼石李先生 亦嘗質問周易啓蒙疑義 蒼翁嘗歎其得聞其所未聞 而所未聞者 又何限焉 盖自山頹之後 及門諸賢 次第淪謝 先生巋然若靈光獨存 以師門餘敎 奬進後學者先生之力居多焉 先生生於嘉靖庚子 卒於萬曆丙辰 壽七十七 墓在縣西知禮村訓導公墓下坐子之原 配長水黃氏牧使怡女 後配安東權氏執義大器女 生卒葬在子孫錄 先生性度醇深 氣質和厚 以精明之識而加篤實之工 自立雪師門 已爲諸先輩所推重而經綸氣局 又足以服衆心而辨大事 是以鄕兵倡議 擬主轂之任 斯文大役 委幹事之責 十年丈席 爲士林之所矜式 而惜乎先生歿後 數世 宗嗣屢絶 文獻無徵 至今可據者 獨有蒼石所撰遺事若干條 及諸先輩輓誄文字而已 當日爲學次第 仕宦履歷 俱無所尋逐 然 退陶全書中 與先生兄弟書札及詩牘 無慮屢數十篇 將與天壤而俱存則百世之下 猶可見師門講質之蹟 日休先生以篤學純行 爲同門前列 西厓柳先生嘗稱爲小學樣子 大菴朴公品題烏川諸君子 特稱公爲從兄無違 後人欲知先生者 求之於伯氏先生 可矣 惟願世之秉拂君子 勿以此疎略而採納焉 傍裔孫通訓大夫行司諫院正言詩述撰


선생은 휘가 응훈(應壎)이고 자는 훈지(壎之)이며 봉화 사람이다. 고려시대 금자광록대부태학사(金紫光祿大夫太學士)를 지낸 휘 의(儀)는 그의 먼 조상이다. 10대를 지나 휘 우공(遇工)은 내부령윤(內府令尹)을 지냈고, 처음으로 봉화에 거처하였다. 이 분이 휘 이화(以和)를 낳으니, 통례문지후(通禮門祇侯)를 지냈다. 이 분이 휘 척(滌)을 낳으니, 장사현감(長沙縣監)을 지냈다. 이 분이 생원인 휘 혜(嵇)를 낳았다. 이 분이 휘 간(衎)을 낳으니, 생원이었고, 성주판관(星州判官)을 지냈다. 이 분이 휘 치담(致湛)을 낳으니, 생원이었고,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을 지냈다. 이 분이 휘 재(榟)를 낳으니, 힘써 공부하여 지조가 있기로 고을에 이름이 났고. 예안훈도(禮安訓導)가 되었으며, 퇴계 선생이 그 묘지를 지었으니, 바로 선생의 선고이다. 참판(參判)에 추증된 광주김씨 효로(孝盧)의 딸에게 장가들어 예안(禮安) 오천리(烏川里)에서 처가살이를 하였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휘가 응협(應夾)이고 호는 일휴당(日休堂)이며, 둘째가 곧 선생이다. 일휴 선생은 지극한 효성으로 소문이 났다.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오직 형을 본받아 어버이 곁에서 날마다 놀이를 함에 뜻을 어기는 빛이 없었다. 이미 자라서는 형과 함께 퇴계 선생에게 수업하였다. 독실한 뜻으로 부지런히 공부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가슴에 간직하였고, <심경><계몽>등과 같은 책에 마음을 침잠시켜 분명하게 이해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일찍이 그의 집을 면진(勉進)이라 편액하였는데, 스승이 손수 써서 명명해 준 것이었다. 또 한서엄(寒棲庵) 곁에 집을 짓고 아침 저녁 가르침을 받는 터전으로 삼았으니, 퇴계선생의 시에 이른 바, “금생이 초가집을 지었는데 나의 퇴계 굽이에 있다”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이다. 이때 선생의 형제와 외사촌 형제인 김후조(金後凋), 읍청(挹淸), 산남(山南), 양정(養正), 설월(雪月) 등 여러 선생들이 한 마을에 살면서 동문수학하였는데, 나가서는 스승에게 질의 강론하고 물러나서는 스승에게 들은 것을 책상에 맞대고 토론하니, 한강(寒岡) 정선생이 일찍이 “오천 한 마을이 모두 군자로다.” 라고 칭찬하였고, 후세 사람들이 여기에 기인하여 마을 이름을 군자리 라고 하였다. 경오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임진왜란 때 온 고을에서 선생을 추대하여 의봉도총(義兵都摠)으로 삼았다. 갑오년에 약포(藥圃) 정선생이 “집안에 거처함에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어 사림에서 표본으로 삼는다.”고 아뢰어 천거하니 사관(祠官)에 제수하였다. 을미년에 품계를 뛰어넘어 6품으로 승진시켜 영춘현감(永春縣監)에 제수 하였고, 임기가 다하여 교체되자 다시 제천현감(堤川縣監)에 임명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남다른 업적이 많으니,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떠난 뒤의 추모하는 마음을 부쳤다. 경자년에 스승의 문집을 간행하였다. 이 때 선생은 의홍현감(義興縣監)에 임명되었는데, 동문 여러 선배들이 모두 선생이 아니면 이 일을 주간할 수 없다고 하여, 드디어 사직의 글을 올리고 부임하지 않았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감독하여 큰일을 완수하였다. 또 사문세보(師門世譜)와 사서석의(四書釋疑)를 교정해서 간행하였고 발문을 지어서 떨쳐 발현시켰다. 도산서원에서의 선비 양성과 학문 강론의 물품 수급에 이르러서도 선생이 조치한 바가 많았으며, 강론의 자리를 주관한 것이 10여년이나 되었다. 우복(愚伏) 정선생과 창석(蒼石) 이선생도 또한 일찍이 <주역>과 <계몽>의 의심스러운 뜻을 질문한 적이 있는데, 창석이 일찍이 그 들어보지 못한 것을 들었다고 감탄하였지만, 그 들어보지 못한 것이 또한 어찌 한정이 있었겠는가? 대개 퇴계선생이 돌아가신 뒤 문하에 있던 여러 현사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지만 선생이 우뚝 홀로 남아 있었으니 스승의 남은 가르침으로 후학을 장려함에는 선생의 힘이 많았다. 선생은 가정 경자년에 출생하여 만력 병진년에 돌아가셨으니 수명이 77세였다. 산소는 고을 서쪽 지례촌(知禮村) 훈도공(訓導公) 산소 아래 좌자(坐子)의 언덕에 있다. 배필 장수황씨는 목사(牧使) 이(怡)의 따님이고, 후배 안동권씨는 집의(執義) 대기(大器)의 딸이다. 생몰과 장례의 일은 자손록(子孫錄)에 실려있다. 선생은 성품과 도략이 순후하고 깊었고, 가질이 화평하고 두터웠다. 정밀하고 밝은 식견으로 독실한 공부를 더하여, 스스로 스승의 가르침을 공경스럽게 받들어 이미 여러 선배들이 미루어 무겁게 여기는 바 되었고, 경륜과 기국이 또한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설복시켜 큰 일을 처리하기에 넉넉하였다. 이 때문에 고을에서 의병을 일으킴에 주곡(主轂)의 임무를 맡도록 천거하였고, 사문의 큰 역사에 일을 주간하는 책임을 맡겼으며, 10년 장로의 자리에 있는 동안 사림에서 공경하여 본받는 바 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선생이 돌아가신 뒤 몇 대 동안 집안의 후사가 여러 번 단절되어 징험해 볼 문헌이 없고, 지금까지 근거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다만 창석이 편찬한 유사 약간 조목과 여러 선배들의 만사와 뢰문이 있을 뿐이며, 당시 공부하신 차례와 벼슬하신 이력은 모두 찾아낼 바가 없다. 그러나 <퇴도전서> 가운데 선생의 헝제에게 보낸 서찰과 시편이 무려 수십 편이나 있어서, 장차 천지와 더불어 함께 보존될 것이니, 백대 이후에도 오히려 스승에게 강론하고 질의한 자취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일휴선생은 독실한 공부와 순후한 행실로 동문들의 앞 줄에 있었으니, 서애 류선생이 일찍이 칭찬하여 소학양자(小學樣子)라고 하였고, 대암(大菴) 박공은 오천리 여러 군자들을 품평하면서 특별히 공을 칭송하여 ‘형을 쫓아 어김이 없었다.’라고 하였으니 선생을 알고자 하는 후인들은 그 백씨에게서 찾아봄이 좋을 것이다. 오직 바라건데 세상의 받들어 모시는 군자들께서는 이 소략한 글로써 의견을 채택하지 마십시오.
방계 후손 통훈대부 행사간원정언 시술이 짓는다.
『퇴계학연구』, 경상북도편

墓碣銘 幷序

奧昔明宣之世我退陶夫子倡明大道 繼往聖而開來學 有居最近聞道益親切 若魯君子之遊於孔氏之門者 寒岡鄭文穆公所謂烏川里七君子是已 先生其一也 先生奉化人 諱應壎 字壎之 高麗太學士諱儀之後 曾祖諱衎 判官 祖諱致湛 僉正 考諱榟 訓導 退陶夫子撰墓誌曰性 直訥 少力學有操守 妣光州金氏贈天官左侍郞孝盧女 有二子長日休堂先生諱應夾 季卽先生 以嘉靖庚子生于烏川里第 天性孝友 事太夫人與兄日休堂 日供戲以悅志 旣學于我退陶 築室于寒棲館之側 師門詩所謂琴生結茅棟 在我南溪曲者也 由是問學旣勤 踐履益篤 大獲師門奬詡 至手書勉進二字 名其齋 庚午中司馬 壬辰亂 以鄕望爲義兵將 赴敵病遞 甲午藥圃鄭貞簡公 在揆地 以先生居家孝友士林矜式 薦拜祠官 乙未超陞永春縣監 旣遞 復除堤川縣監 居官大治 縣人士立石記其蹟 自陶山建院 凡養士講學之規 實先生所措置爲多 庚子刊退陶全書 先生有除義興縣監命 西厓月川諸先生 以爲非先生 無幹其事者 遂呈遞 克竣大役 繼刊師門世譜及四書釋疑先生爲跋語 以發揮之 及同門諸賢 次第淪謝 先生以大耋 獨主院席 日聚士友 講習師敎 一方學者多從遊焉 丙辰六月六日考終于寢 葬縣西知禮村先壠後負坎原 配長水黃氏牧使怡女 墓祔左麓 後配安東權氏贈報義人器女 墓同壙 一子攬 權氏出 隱德不仕 攬子有謙允謙 用謙尙謙信謙 女權用錫尹淳 有謙子以韶早歿 嗣子萬和 允謙子萬春 女李春貞 用謙嗣子萬夏 尙謙子萬和萬夏萬徽萬諧萬古 女成世瑜 信謙子萬杫萬祺萬亨萬調 女朴震琦朴敬身 嗚呼 今距先生世三百有餘年 顧晩生謏聞 何敢狀先生萬一 謹攷當時諸賢撰述 有曰精明篤學 和粹醇深 有曰玉栗氷潔 海濶河沒 是豈惟先生姿性之美爲然 盖先生 早以退陶爲依歸 心悅而篤學焉 體認而力行之 其竗契眞積之功 實有以致 此輝光發越之盛 況在家而有日休堂 同里而有金後凋挹淸山南養正雪月諸先生 以所嘗聞於師門者 退而相與講討 日有進修 及夫山梁旣頹 恐大道媺言不與天壤幷久 刊一部遺書 日星乎斯文 主十年丈席 標準乎吾黨 毅然以闡斯道啓後學 爲己任 蒼石李先生 亦嘗從先生 講質易學啓蒙疑義 旣以爲得聞其所未聞 而繼歎其所未知者 又何限焉 則先生道學造詣之極 豈後學所可窺測哉 至若處族之厚臨民之惠接物之弘 特先生學問中餘事耳 惜乎先生之沒 宗嗣屢絶 文獻無稽 至今墓道顯刻之尙闕 實吾道百世之憾也 日先生後孫鍾正樂源甫 收家藏行蹟墓藏碣石 强彙寧曰子其退陶之後也 謹以此事屬之 余實不敢當 亦有所不敢辭者 依蒼石遺事及諸輓祭文字而纂次之 係以銘曰
有窃烏川 密邇陶山 君子惟七 先生其一 家庭講習 程氏伯叔 早遊巖栖 築室南溪 朱門悟道 黃齋揭號 斯文有事 謝紱容易 一方矜式 十載院席 刊釋書旨 牑發易理 光光大業 諒有由出 藥老薦實 蒼翁狀德 是宜銘焉 非我敢言
通政大夫前行承政院同副承旨兼經筵參贊官李彙寧謹撰

墓誌銘 幷序

先生諱應壎 字壎之 日休先生之弟 先生天資醇正 器局通敏 同伯氏早登退溪先生門 亟蒙奬詡齋號勉進 師門命也 性至孝友 奉母端人金氏與伯氏左右供戲極其無方 中庚午司馬 藥圃鄭貞簡公以首揆薦曰居家孝友士林矜式卽除參奉 超授六品尋爲永春縣監 又遷堤川縣監 所至皆有治績 邑人立石以思之 庚子除義興縣監 時陶山方刊師門文集 西厓月川諸先生 以爲非公 無以幹此事者 遂棄不赴郡 了刊事始終 當日同門之所推倚者旣如是矣而盖先生 輕爵祿而重吾道之義 素所判然也 壬辰島訌 以衆望將 鄕兵而病不任焉 嗚乎謹考雲川金公 以退陶所誌銘訓導公而以先生兄弟 爲贊德之至 蒼石李公之碣日休公也 以爲容貌才行 以余所見 一人而已而其論孝友學問處 必幷及其弟 先生事行實德 豈容後人之一言哉 竊以退陶之世 門人弟子應運而興 或遠或近而公兄弟及後凋挹淸山南養正雪月諸公 同師共友 又同居里 寒岡鄭文穆公 以烏川一里皆君子稱之 何其盛也 雖然其爲幷時之美六 君子皆然 及夫七十子喪而大義易壤之際 先生巋然獨享高壽 凡文字之未及刊者 院規之未盡定者 悉皆無憾而永賴焉 勸導後學 講明斯道 如蒼石李先生 歎啓蒙疑義得所未聞而又歎其所未盡者 何限焉 且師門喪後蒙齋公早世至爲幹檢家務 立嗣以定宗祀 凡此惟勉進齋一人也 先生生于庚子 卒于丙辰 壽七十七 配長水黃氏牧使怡之女 墓祔公墓右麓 後配安東權氏贈執義大器之女 同壙 子攬權氏出隱德不仕 攬子有謙允謙用謙尙謙信謙 女權用錫尹淳 有謙以萬和嗣 允謙子萬春 用謙嗣子萬夏 尙謙子萬和萬夏萬徽萬諧萬古 信謙子萬杫萬棋萬亨萬調 銘曰
猗歟君子 一里魯有 在家難季 出而師友 繄我師敎 達處成村 學優登聞 隨手刃恢 脫屣郡紱 管了刊事 皐比院席 啓我遺旨 道識其大 是以賢者 宰如禮原 上考兄左 孝友相罽 可質幽明 羡門有石 不苔其銘
門裔豫書述謹撰

常享祝文

得聞奧旨奬進後學是有譽處蒼老記德

輓詞

憶昨吾君寄我書先生門下二人餘公於晩節猶無負我顧初心己不如七十得男眞可仗箕裘遺業未應疏天光雲影臺誰管舊跡追惟淚滿裾

輓詞

倜儻襟懷愷悌姿早從溪上服鑪錘家肥孝友鄕邦敬邑徧仁恩父老思耕鑿一區安晩節儀刑千載有餘師傍人莫恨螽斯少繁慶他年足一夔

輓詞

早從函丈門爲學有淵源落落心常古休休道所存聲名聞百里齒德足三尊猶幸搆堂志能令屬後昆

輓詞

賢父兄家至樂全師門所得又充然忘憂萱背同姜被推孝琴堂理宓絃天豈無知仁有後人誰不敬德兼年騎龍此日公何憾鏡裏飛鸞獨自憐鄕里稱賢士望尊胸衿海闊氣春溫平生孝友爲家政暮境安閒絶世喧山院幾多承謦咳溪門況又忝姻婚傷哉考德今何處耆舊襄陽不復存

輓詞

耆舊凋零盡傷心豈忍聞霜寒後凋樹月冷日休門墜緖誰宗統遺風悼世紛烏川空式里素幔悵斜曛

輓詞

七十子從溪叟遠當年親炙獨斯人國褒孝友曾通籍縣試循良幾悅民去歲相逢猶款晤今春歷問柰沈呻一方從此無遺老爲痛先賢澤漸湮

輓詞

嶽靈川液弟兄鍾器度依然鐵祖風同向師門聞妙設夙從心地效奇功化行湖邑絃歌內道在仁鄕禮讓中近七得男風骨秀由來福善理非空師門群哲漸凋零世道如今欲晦冥尙幸天心遺一老豈知風度秘重扃

輓詞

歎息溪門有幾人公今長逝又成陳一心終始惟忠孝半世風流是坦眞珠樹秀庭憐少彩瑤琴留匣慘生塵當年義幕餘書記病阻南天淚滿巾

輓詞

平生常服丈人眞十載陶山席上珍莫貴文章皆軾轍惟欽孝悌有春津春風滿座薰和襲秋月當年笑語新晩得一男當谷虎閒垂五柳葛天民襄陽耆舊都誰在鄒魯仁賢跡已陳故人穉弟今衰老哭向烏川淚滿巾

輓詞

伯氏風聲世共知孝心公亦弟難爲少年得力師門地晩歲施仁嶺縣時鄕國今亡多士式故家留有小兒遺從今經過烏川路更向誰家擧酒卮

祭文

惟公在親庭則樂有賢父兄而人無間言子騫之孝耶在師門則訥於言語而得聞奧旨參也之魯耶有壽踰從心仁者之效也有子能繼志善家之報也作山長之幾年誠篤尊賢而養士鳴玉琴於二縣績著推孝而爲理惟齒德之俱尊諒順安之可安何小子之薄劣獨懷情而鬱抑繫官千里病不問而喪未送漬綿一酌緘短詞而寓長痛己焉哉醇方之質恢廓之氣有德之容有源之學今皆不可得而見之兮撫天地而永辭

祭文

退溪先生講道溪上一時英材彬彬然執弟子禮以考德問業者多矣而若論精切之識篤實之學則獨推長公爲前列公於是時以英妙之齡平易之姿亦得以登先生之門而逮事之當時眞訣之傳旣甚的而又與長公同室而處家庭之間自長至老而相與切劘者爲何如嗚乎公之造詣之深豈埈淺見所窺測獨以可見者言居家有篤行之聞處鄕無非義之營臨民則必推惠澤待人則不設藩町於玆數者可以卜其平生也有時飮酒醺然雜以諧謔其於經傳媺言若莾於記得而嘗持啓蒙與氣學設拈出所疑晦者而叩之隨問響答聽者忘倦嗚乎埈於公知之者少而其所未知者又何限也先正遺風日逖尙幸誦其說以告人而雖以埈之愚蠢亦得以聞先賢言行之一二而識其所傳之有自孰謂天之不憗遽奪此一老增吾道之日孤也地遠身病不得以時奔赴代薦漬綿哭敍忱意嗚乎哀哉

祭文

外翁之弟吾母之叔少而承顔今扺華髮有疑相質有酒相酌隴雲獵馥天淵翫月龍山之會再枉陋室氣力無減言笑猶昔羨其康健感其款曲心乎念念一往之答忽聞嬰瘴溘至死別人間萬事不須更說寒於卽遠病未引紼嗚乎已矣只增摧咽

祭文

先生資稟玉栗精神氷潔氣度海闊夙遊溪門克受徽言學有淵源誠孝出天友愛純全奉先必虔行成于身德照于隣名達于宸牛刀割鷄字恤群黎績冠湖西脫屣塵寰浩然休官倦鳥知還賁趾邱壑婆娑初服樂我家食有客滿堂有酒盈觴世慮都忘時對罏䄽講討古文道義彌尊守己也貞待人也誠處事也明醇實之工禮讓之風爲世所宗斯文賴扶吾道不孤士知其趨毿毿華髮年高八耋庶幾無疾時之不淑邦之無祿天奪斯亟師門諸賢相繼歿焉正脈無傳學絶道熄後生蒙學於何考德自此江左有幾人也俗漸汚下熊罷夢應玉樹其挺積善之慶生無所羞歿無所憂靈其瞑眸寏也愚庸承敎從容越自髫童兄弟義隆父母恩同欲報無窮龍蛇今夕遽失所托獨立痛哭方喪有禮莫遵其制辜負初計靑烏相吉永窆卜日輀車將發病伏斗室不能臨穴但增悲咽百身未贖九原難作眞宰漠漠幽明難分典型猶存心目不諼緘辭酌醴代手以祭一字萬涕世路多岐嗚乎曷歸萬古長辭

祭文

惟靈醇懿之資惇厚之質早得依歸陶山立雪從容函丈幾年親炙旣有美質又加以學奉親以誠事兄以恭一堂和氣藹藹融融白首斑衣兄舞弟歌樂酒交酬兄弟匪他楊播淳厚公綽惇睦求之古人亦不多得蘭臭遠播人爵自至佩符專城邑有循吏子育群氓恩浹肌骨三尺龜趺鐫刻遺德家山入望早賦歸來婆娑一區寓興罇壘不設畦畛待人款曲鄕人飮德尊慕愛悅杯蛇忽感將謂勿藥沈綿一朞竟至不淑士林齎咨鄕隣奔哭嗚呼哀哉曰余小子受恩偏厚丱角趨拜陪奉杖屨兩門相對朝暮遊從一樽侍話秋月春風有無通共事同一家誨余諄諄惟恐有差追思往事哀淚傾河曰月不淹卽遠有期一酌薦誠千古長辭

祭文

惟靈氣鍾磅礴和粹醇深瑞鳳儀刑滄海胸襟弱冠從師于洛之潯稟受旣異涵養亦多名高蓮榜藹然聲華平生踐實仁孝友悌允矣君子令聞令譽中年兩邑鸞鳳栖棘歛此大惠施之于邑晩歲烏川婆娑林壑地上神仙南極德星謂應千歲永保康寧如何一朝奄隔幽明鄕人長痛士林共悲公年已高每憂無兒善必有慶天啓白看公雖逝矣門望在玆從孫是稜承誨自幼事違所願地異所往恨未朝夕杖屨是陪竟至於斯今焉已哉去歲仲夏將覲驪邑路過宣城進而問侯疾雖彌留所恃神佑那知一辭此是永訣曰惟好去言惟在昨悲懷到此欲語哽塞疾患纏身事故掣肘喪未奔哭葬未進護平生此恨曷其有已嗚乎痛哉玉淵鶴麓風物含愁月川烏溪流水聲悲二三賢歿吾道疇依書豈盡言哭何盡情奠玆菲薄庶鑑微誠

祭文

伏以晦彩南星倏已經時嗚乎曷極余懷之悲海闊之量河決之論已矣已矣不覩不聞鄕隣有事於何就決儒林有議於何就質如行失路如瞽失相蠢蠢靡依悵悵安仰咸嗟涕涕遠邇民士矧我檟洞最近仁里敬承優接幾年于此薰陶之切襲德之深銘之在骨感之在心所以吾黨悲悼不任靈輀到此舊遊山川生旣無貳歿何間焉草奠雖菲情則不薄不亡者存庶此歆格

祭文

嗚乎吾鄕幸而先賢輩出不幸而相繼云歿不幸之中惟可恃者惟我公在耳豈意吾鄕之不幸又至於斯也公之在於世凡七十有年早得依歸親炙道義入則友兄出則悌長力行之暇學問之功交修互進高占蓮榜名播一國暫試牛刀政著三異退居田里二十年于玆其威儀言論一鄕之所倚重一門之所仰望也不幸而至於斯人乎鬼乎抑天之不我遺耶等族姓也深蒙平日之眷厚不問疎遠待之如一或有窮殘無告者極力救恤寬厚敦睦之義出於天性追感舊誼痛割五內謹具菲薄祇薦卑誠靈其不昧庶幾來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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