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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편 - 금응협(琴應夾) -

 

생몰연대 :1526(중종 21) -1596(선조29)본관 : 봉화(奉化)
호 : 일휴당(日休堂)
별칭 : 자 협지(夾之)
활동분야 : 정치, 학문
주요저서 : 일휴집(日休集)

行狀

公姓琴氏 諱應夾 字夾之 奉化人 高麗時有爲集賢殷太學士曰諱儀者 公遠祖也 星州判官諱衎 實曾相 司䆃寺僉正諱致湛 實祖 禮安訓導諱榟 實考 妣端人光州金氏贈吏曺參判諱孝盧之女 以嘉靖丙戌八月癸未 生公于禮安烏川里第 自髫齓時 擧止已如成人 不妄笑語 非禮之事不正之色 未嘗接於耳目 蓋其天性然也 及長遊艮陶先生門 家貧親老 不免翼擧子業 乙卯中司馬 萬曆甲戌 廷臣有以公行義聞于上 授集慶殿參奉 任滿除敬昌兩陵王子師傅皆不赴 丁亥朝廷 拔尤逸民 超授公六品職 除河陽縣監 未幾以親老辭歸 乙未除翊衛司翊贊不赴 丙申二月四日 疾卒于家 享年七十一 三月乙酉 葬于縣西知禮村訓導公墓右麓坐北向南之原 配宜人禮安李氏進士英之女 無嗣 沒幾年 宜人取門族奉事順先子撥 爲后 導公志也 撥娶司憲府持平奉珙之女 生二男二女 曰好謙處謙 女金時翼金邦烈 進士 好謙 娶義禁府都事金止善之女 生四男曰以魯曰以普曰以晢曰以哲 處謙娶持平柳袗之女 無后 繼子以普云 公容貌端正 資稟純粹 如鸞鵠之停峙也 金玉之精潤也 其爲學也自退陶先生倡明道學 四方學子執經問難 爭自琢磨 以公英妙之才篤實之學 升堂而覩奧 熏德而嚌獻者事半而功倍 及先生旣汲 末學弊生 不務實行 漸尙口耳 公痛自策勵 眞實向裏 以忠信篤敬爲本 躬行實踐爲事 讀書講義 明白簡約 不煩辭說 專務自得 尤用力於心經近思錄等書 手自抄寫 爲夾輔用力之地而公之學 始大進矣 其居家 未明而起 拜於家廟 退而端坐 未嘗傾倚 訓導公 早世 端人年過九十 尙無羔 公與寡妹穉弟 皆在膝下 奉養承順 靡不曲盡 每日整衣冠入拜牀下 親梳髮洗面 手執甘旨 雖負債公私而膳羞備珍 朋友之過 必置酒盡歡於端人之前者幾五十年而不怠 苟可以取悅端人者 如元朝擲骸等戱 兄弟爭道强聒 端人 道然而笑 及己丑丁憂 公年六十四日居墓側 哀毁逾 禮人皆爲公危之而不少衰 饋稷忝以誠 御婢僕以莊 家庭之間 肅穆如也 恩義之篤 人無間言 李氏妹早寡無子 公念之不已 爲置田宅 經紀其產業與弟縣監公 老而同室 友愛彌篤縣監公嘗欲卜居于數里之地 公泣曰吾兄弟二人 豈忍須臾離也 縣監公 亦不忍則爲營一室於傍 堂表昆李六人 同居一社 接屋連墻 推友弟敦睦婣勉德業規過失 朝夕所講明 無非禮誼忠信 所辨說 率皆義理精致 每遇嘉辰美景 隨處相會 談笑觴詠 盡歡而罷 遂成禮俗 鄕里化其德 遠近稱其賢 洞風之美於斯爲盛 寒岡鄭先生 嘗稱之於人曰凡人一家 雖有賢父兄 亦難於盡善 若烏川則無非君子者 此所以爲難故 論人物之懿者必稱宣城而風俗之美則又必以烏川爲首焉 公嘗作詩以自警曰讀書 曰敬身 曰操心 曰愼言 曰制念 曰彌謗 曰正家 曰睦婣而皆身親切己之言 其待人接物 必以至誠 未嘗有所低昂 薄厚 吉凶吊慶 必皆極力周救 金內翰垓於公爲從姪 壬辰夫婦俱沒 子女七八人 皆在幼穉 公爲營葬事 撫存諸孤 無異已出 見人有過失 必敎告諄切 不少假借 嘗曰親戚 間或有拂意事 面諭而已 不當係滯在心不然 其違路人無幾 以此隣里畏而愛之 不敢爲過擧 至於巫覡析禱之事 亦不敢作 其居官簡不病忽 廉不露隅 凡施罷皆以漸不收聲而吏民之思 愈久態切 凡所營幹 必許功調度不費呵督而事易集 嘗童役齋宇 見竪柱某柱長似幾分 木工不信 度之果然 尤致心於學校 老先生嘗爲禹祭酒創建易東書院于洛水之上 爲學者藏修之所而出財助役 以至訖事 公力居多焉同門諸友如趙月川金鶴峰兩先生 皆敬憚之 西厓柳先生 戒其子弟曰汝輩勿讀小學 只見日休之爲人 這是小學樣子 嘗論人及公 嘆曰凡人賢者未必能 能者未必賢 如日休 可謂兼之矣 其爲一時所重 如此 盖其一言一行 皆可爲後世模範而至其容貌之正資稟之粹才學之美則以余所見 一人而已 顧愚何足以知之 以其操几杖之久也 聊綴所耳目大者 以白魯産之不誣云
嘉善大夫原任弘文館副提學李埈謹撰

공의 성은 금씨, 휘는 응협이요 자는 협지니 봉화인이다. 고려시대에 집현전태학사인 휘 의라는 사람은 공의 원조이고, 성준판관인 휘 연인 사람은 실증조이고, 사도시첨정인 휘 치담인 사람은 실조이고, 예안훈도인 휘 재인 사람은 실고이고, 비는 단인 광주김씨로 증이조참판 휘 효로의 딸이다. 공은 가정 병술년(1526, 중종21) 계미일에 예안의 오천리에서 태어났다. 어린아이 때부터 행동거지가 이미 성인과 같아 함부로 웃거나 말하지 아니하고, 예가 아닌 일과 바르지 아니한 색은 귀와 눈에 접한 적이 없었으니 대개 타고난 성품이 그러해서이다. 자라서는 퇴도선생(이황, 1501~1570)의 문하에 유학하였는데, 집안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어 과거시험 준비를 힘써하지 못하였다. 을묘년(1555, 명종10)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만력 갑술년에 정신이 공의 행의를 임금에게 아뢰어 집경전 참봉을 제수하였으며, 임기 만료로 경창양능 왕자사부에 제수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아니했다. 정해년 조정에 일민으로 선택되어, 뛰어 넘어 공에게 육품직을 주어 하양현감에 제수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어버이가 늙음으로써 사직하고 돌아왔다. 을미년에 익위사익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병신년 2월 4일에 병환으로 집에서 졸하시니 향년 71세였다. 3월 을유에 현서 지례촌 훈도공의 묘 오른쪽 기슭 북향 남쪽 언덕에 정사하였다. 부인은 의인 예안이씨인 진사 영의 딸이며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돌아가신 몇 년 뒤에 의인이 문족인 봉사 순선의 아들 발을 후사로 삼으니, 공의 뜻을 따른 것이다. 발은 사헌부지평 이공의 딸에게 장가 들어 2남2녀를 낳으니 호겸과 처겸이고, 딸은 김시익, 김방렬에게 출가하였다. 호겸은 의금부도사 김지선의 딸에게 장가 들어 4남을 낳으니 이로, 이보, 이석, 이철이다. 처겸은 지평 유진의 딸에게 장가 들었으나 후사가 없어 이보로써 대를 이었다. 공은 용모가 단정하고 자품이 순수하여 난곡의 정치와 같고, 금옥의 정윤과 같았다. 그 학문 함에 있어서는 퇴도선생이 도학을 창명함으로 사방의 학자가 경서를 가지고 어려운 곳을 물으며 다투어 스스로 탁마하니 공의 영묘한 재주와 독실한 학문은 당에 오름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덕을 닦아 맛 보려고 하는 자는 일은 반을 하고도 공은 배가 될 것이다. 선생이 돌아가시니, 말세의 학문적인 폐단이 생겨 실행에 힘쓰지 아니하고 점차 구이만을 숭상케 되었다. 공은 통렬히 스스로 책려하고 진실로 내면을 향하여 충신독경으로 근본을 삼고 궁행실천으로 일을 삼았다. 독서와 강의가 명백간약하여 사설이 번거롭지 않고 오로지 스스로 터득함을 힘쓰며 더욱 더 심경, 근사록 등의 책에 힘을 기울여 손수 가려 뽑아 베껴 써서 공부를 보충하고 힘쓰는 것으로 삼으니 공의 학문은 비로소 크게 나아가게 되었다. 집에 거처함에 있어서는 날이 밝지 않을 때 일어나 가묘에 절하고, 물러나서 단정히 앉아 조금이라도 기대거나 의지하지 아니하였다. 훈도공이 일찍이 세상을 버리었고 단인의 연세가 90을 넘었으나 오히려 병이 없었다. 공이 과부인 여동생과 어린 아우가 모두 슬하에 있어도 봉양하고 승순함에 매우 곡진하였다. 매일 의관을 바르게 하고 들어가 상하에서 절을 하고, 친히 머리를 빗고 얼굴을 씻어 드리며 손으로 맛있는 반찬을 집어 드렸다. 비록 공사의 부채를 지더라도 진수성찬을 늘 마련하였다. 벗들이 자나가면 반드시 술을 마련하여 단인의 앞에서 즐거움을 다하게 한 것이 거의 50이 다 되었지만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참으로 단인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원조칙해같은 놀이라도 형제간에 다투어서 떠들썩하게 하니 단인이 유연히 웃었다. 기축년에 상을 당하였는데 공의나이 64세였으나 매일 묘의 곁에 거처하며 슬퍼함이 예를 넘었다. 사람들이 모두 공을 위해 위태롭게 여겼으나 조금도 쇠해지지 않고 정성으로서 제례를 다하였다. 비복을 부리는데 있어서 장엄하게 하였고 가정에서는 엄숙하고 화목함을 위주로 하였으며 은혜와 의리를 생각하기는 돈독히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험담을 하지 못하였다. 이씨 여동생이 어려서 과부가 되어 자식이 없었으므로 공이 늘 염려하여 전택을 마련하여 그 아우와 함께 생업을 이어가게 하였다. 현감공이 늙어서 한 집에 같이 사는데 우애가 더욱 돈독하였다. 현감공이 늘 몇 리 되는 곳에 따로 집을 지어 살고자 하니 공이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형제 두 사람이 어찌 잠시라도 떨어 질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므로 현감공이 차마 떠나자 못하여 곧 방 한 칸을 마련하여 당표곤계 육인이 한 집에 살았다. 집이 서로 접하고 담장이 연이어 있어서 형제간에 우애와 공경을 장려하고 친척간에 화목을 돈독히 하며 덕업을 힘쓰고 과실을 서로 경계하여 바로 잡았다. 아침저녁으로 강명하는 것은 예의충신 아님이 없었고 변설하는 것은 모두 의리의 정치를 따랐다. 늘 좋은 시절과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곳을 따라 서로 모여 담소하고 술마시고 읊조리며 즐거움을 다한 뒤 파하였으므로 드디어 예속을 이루게 되었다. 향리에서 그 덕에 교화되고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그 어짊을 칭송하여 동네의 풍속의 아름다움이 이로써 성대하게 되었다. 한강 정선생이 일찍이 사람들에게 칭송하여 말하기를 “무릇 사람의 집안에 어진 부형이 있으나 또한 모두 착하기는 어렵다. 오천은 곧 군자 아닌 이가 없으니 이것은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물의 아름다움을 논하는 이는 반드시 선성을 일컬어야 하며 풍속의 아름다움은 또 반드시 오천으로서 으뜸을 삼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일찍이 시를 지어서 스스로 경계하였는데 독서, 경신, 조심, 신언, 제념, 미방, 정가, 목인에 대한 것으로 모두 자신에게 절실한 말들이었다.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함에는 반드시 지성으로써 하여 일찍이 낮추고 우러르며 후하고 박하게 하지 않았으며 길흉조경에는 반드시 모두 힘을 다하여 두루 구제하였다. 내한벼슬을 지낸 김해는 공의 종질인데 임진년에 부부가 함께 죽었으나 자녀 칠팔 인이 모두 어렸으므로 공이 장사를 지내 주고 여러 아이들을 보살펴 주는데 자기 자식과 다름이 없게 했다. 사람들의 과실을 보면 반드시 지극하고 절실하게 가르쳐주고 알려 주어 조금도 거짓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친척사이에 간혹 뜻에 거스리는 일이 있으면 얼굴로서 깨우쳐 줄 뿐이요, 마음 속에 얽매어 두고 응어리 져서는 안될 것이니 그렇지 않다면 길가는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하니 이런 까닭으로 이웃 마을 사람들이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며, 감히 지나친 행동을 않았다. 무격기도의 일에 이르러서는 감히 하지 아니하였고 그 벼슬을 함에 있어서는 간단히 처리하되 잘못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았다. 떳떳하여 모나지 않게 하였고, 모든 일을 시행하고 끝내는 데는 점차 하였기 때문에 관리나 백성들의 생각이 오래 될 수록 더욱더 절실하였다. 무릇 경영하고 처리하는 것은 반드시 공을 계산 조절하여 꾸짖음과 독려함을 허비하지 않고 일이 쉽게 되게 하였다. 일찍이 제우를 짓는 일에 기둥을 세우는 것을 보고 “나무 기둥은 길이가 몇 분 되어야 할 것 같다.”라고 하니 목공이 믿지 않았다. 그러나 재어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더욱더 학교의 발전에 마음을 다하여 노선생이 일찍이 우좨주의 역동서원을 낙수가에 청건하니 학자들이 모여 수학하는 곳이 되었는다. 재산을 염출하고 일을 도와서 마칠 때까지 공의 힘이 크게 작용하였다. 동문의 여러 벗들, 예컨대 조월천, 김학봉 두 선생이 모두 경탄하였고, 서애 유선생은 그 자제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은 소학을 읽지 말고 다만 일휴선생의 사람됨을 보아라. 이는 소학의 양자이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사람을 논하다가 공에게 미쳐서는 탄식하여 말하기를, “모든 어진 이가 다 능함을 기필할 수 없고 능한 사람은 반드시 어짊을 기필할 수 없으나 일휴같은 이는 겸했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그 한 때 소중히 여겼음이 이와 같았다. 대개 그 말 한 마디와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후세의 모범이 된다고 할 수 있고, 그 용모의 바름과 자품의 순수함, 재주와 학문의 아름다움은 내가 본 것으로는 한사람뿐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어찌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마는 그 오래도록 지조를 지킨 것과 다만 듣고 본 위대함은 노나라에 태어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하겠다.
가선대부 원임 홍문관 부제학 이준 삼가 지음

 

墓誌銘 幷序

仲尼之徒成德達材者魯産居多 魯無君子斯焉取斯 若日休公之於退陶先生之門 卽魯産也 公鳳城琴氏高麗時 有爲集賢殿大學士曰儀者 公遠祖也 星州判官諱衎 實曾祖 司䆃寺僉正諱致湛實祖 禮安訓導諱榟 實考 妣端人金氏光州右族贈吏曺參判孝盧之女 嘉靖丙戌八月癸未公 生于禮安烏川里第 乙卯守司馬 萬曆甲戌薦授集慶殿參奉 任滿除敬昂兩陵參奉 幷以親老不赴 丁亥朝廷拔尤逸民 超遷公六品職旋除河陽縣監時端人年九十一 未幾辭㱕 己丑丁端人憂廬于墓側 人皆危其衰惙而瞿皇慨廓 一遵古制 乙未除翊衛司翊贊 病不赴 丙申二月四日疾卒于家 享年七十一 卜得吉三月乙酉葬于縣治西知禮村訓導公兆右麓坐北向南原 公生有美質 擧止異凡兒 讀書績文不費呵督 長遊退陶先生之門 先生方講道于鄕 以繼往開來 公熏其德而獻其肉者 事半而功倍 家貧親老 旁習擧子業 亦恢乎游刃而竟不偶 訓導公早逝 公與寡妹穉第 同居膝下 就養極其忠 山於採永於漁 雖負僓公私而膳羞備珍 朋友之過 必置酒盡歡 於端人之前看幾五十午而不怠 苟可以取悅端人者如元朝猶骰等戱 兄弟爭道强聒 端人逌然而笑 饋稷忝以禮 御婢僕以莊 處鄕黨撫門戚 恒持一心 未嘗少變 有所低昂厚薄也 具治河陽也 簡不病忽 廉不露隅 凡施罷皆以漸不收聲而吏民之思 愈久而愈切 嘗語子弟曰親戚間 或有拂意事 面諭而已 不當係滯在心 不然 其違路人無幾 由是鄕里敬憚 凡有過失 必戒曰得無日休公 知之耶 先君子每稱曰如夾之者 純善無惡 當求諸古人 西厓柳相公與余論人及公 嘆曰凡人賢者 未必能 能者未必賢 如夾之兼有焉 公酒量甚宏 醉輒合眼 拱手而坐 人不敢干以非禮 公諱應夾 字夾之 日休其號也 配宜人禮安李氏進士英之女 無嗣 公沒幾年 宜人與公季 取門族順先之子撥 爲后 遵公志也 撥娶禮安李氏持平珙女 生子女幾人俱幼 若公之衡氣機 固非齊巫所能測 以其操几杖久也 聊綴所耳目大者 以白魯産之不誣云銘曰
德充于身 行拔于人 韞櫝匪沽 宮鍾外聞 大才暫施 知者怛惜 我薦諸石 永揭懿則
朝散大夫前行翊衛司洗馬裵龍吉謹撰

 

墓誌銘 幷序

公姓琴氏 諱應夾 字夾之 奉化人 高麗時 有集賢殿大學士曰諱儀者 公遠祖也 星州判官諱衎實曾祖 司䆃寺僉正諱致湛實祖禮安訓導諱榟實考 妣端人光州金氏贈吏曺參判諱孝盧之女 以嘉靖丙戌八月癸未生公于禮安烏川里第 自髫齓時 擧止已如成人不妄笑語 非禮之事不正之色 未嘗接於耳目 盖其天性然也 及長 遊退陶先生門 乙卯中司馬 甲戌朝臣有以公行義 聞于上 授集慶殿參奉 任滿除敬昌兩陵王子師傅 皆不赴丁亥朝廷拔尤逸民 超授公六品職 除河陽縣監 未幾 以親老辭歸 乙末除翊衛司翊贊 丙申二月四日疾卒于家 享年七十一 三月乙酉葬于縣西知禮村坐北向南之原 公娶禮安李氏進士英之女 公容貌端正 資稟純粹 如鸞鵠之停峙也 金玉之精潤也 其爲學也自退溪先生倡明道學 四方學子執經問難爭自琢磨 以公英竗之才篤實之學 升堂而覩奧 熏德而嚌胾 事半而功倍 及先生旣沒 末學漸尙口耳 公痛自策勵 眞實向裏 以忠信篤敬爲木 躬行實踐爲事 讀書講義 明白簡約不煩辭說 專務自得 尤用力於心經近思錄等書 手自抄寫 爲夾輔用工之地而公之學 始大進矣 其居家未明而起 拜於家廟 退而端坐一室未嘗傾倚 訓導公早世 端人年過九十 尙無恙 公與寡妹穉弟 皆在膝下 奉養承順 靡不曲盡 每日整衣冠八拜牀下 親梳髪洗面 手執甘旨 盡歡於端人之前者幾五十年而不怠 如元朝擲骰等戱 兄弟爭道强聒 端人逌然而笑 己丑丁憂 公年六十四 日居墓側 哀毁踰禮 人皆爲公危之而不少衰 與弟縣監公 老而同室 友愛彌篤 堂表昆季六人 同居一社 接屋連墻 推友弟焞睦婣勉德業規過失 寒岡鄭先生 嘗稱之於人曰凡人一家雖有賢父兄 亦難於盡善 若烏川則無非君子 其居官 簡不病忽 廉不露隅 凡施罷 皆以漸 吏民之思愈久而愈切 凡所營幹 必計功調度 不費呵督而事易集 嘗董役齋宇 見竪柱某柱長似幾分 木工不信 度之果然 尤致心於學校 老先生嘗爲祭酒創建易東書院 爲學子藏修之所而出財助役 以至訖事 公力居多焉 同門諸友如趙月川金鶴峯兩先生 皆敬憚之 西厓柳先生 戒其子弟曰汝輩勿讀小學 只見日休爲人 這是小學樣子 嘗論人及公 嘆曰凡人賢者未必能 能者未必賢 如日休可請兼之矣 其爲一時所重如此 益其一言一行皆可爲後世模範而至其容貌之正資稟之粹才學之美則以余所見一人而已 顧愚無所知見而以其操几杖之久也 聊綴所耳目大者 以白魯産之不誣云銘曰
公昔語人 朝聞而夕 小學樣子 溪門高足 舁厚施嗇 君子所惜 我辭非設 視諸銘石
嘉善大夫原任弘文館副提學李埈謹撰

 

墓誌銘 幷序

恭惟先生鳳城華閥光山宅相擇里來僑于此渭陽君子之村朝夕對榻質美行篤濟以學力聯袂依歸攝齊翫樂篤信師敎如食求飽動遵規矩不蹉蹞步烏頭力去學流口耳先生是懼一意向裏車輪鳥翼鞕辟着己小學樣子厓老知言蜚英墨綬百里歌絃色養萱闈骰戲綵歡至行純篤雖古猶罕鄕隣至今山仰如昨尸祝之議百年未沒今玆克擧諸腎拜列多士敬執疇不齊遫惟靈是妥俯鑑忱誠佑我群蒙世世無窮常享祝文執義李級小學樣子大師高弟同門敬服風猷永世

 

輓詞

奉檄歸朝曰名聲衆所推牛刀雖暫試雅志詎能移囊昔相從志如今永別離忍將無限恨題輓涕交頤

 

輓詞

生前交契重死後哀情多人生曾有極不必龍蛇嗟

 

輓詞

平生剛毅性無復後生規孝友居家曰絃歌宰縣時傷今頻灑淚感古屢傾巵有弟來營壙嗟無伯道兒

 

輓詞

月川趙穆謹以酒果告于烏川琴夾之之靈惟君正直之質孝友之德宜其享年而僅得中壽宜其有後而卒無了胤是何天道之難必而善人之無福若是其甚歟君有一弟如手如足生同形影自相爲命今適從宦遠在他方不得留此而臨護時勢使然豈情之薄委几筵於婢僕應吊客於洞親傷心慘目有如是耶如僕百年情契一朝斷絶目不復覩君之儀刑耳不復聽君之警策踽踽涼涼於一世而無與開心曲思之深傷之切哭之慟而不自己言不能盡書不能悉己矣已矣痛哉痛哉斯人斯人
丙申歲壬辰月乙酉日烏川琴夾之將永歸眞宅月川趙穆以酒果哭而送之曰平生言笑君憐我甁之無粟今日祖送我憐君氊之無續種德不食天何嗇兮茫茫此理難可測兮人去烏川堂存日休一琴絃絶余唱疇酬鶴返無期雲空悠兮愀然洞焉芝原之邱嗚呼已矣嗚呼已矣

 

祭文

鳴乎惟兄生同一里長我五年親爲弟兄情無內外同參蓮榜其登龍門一自山頽雖無所仰賴居鄒魯庶講舊聞矧伊兄心本自良善躬修孝友人慕恩慈奉檄毛公實爲親悅戲綵萊子甚得親歡風樹遽悲以禮無憾將受天祜水享遐齡何意微痾竟至不淑黔婁有婦被不斂斜庾袞兄亡撫柩不轍伊我在側涕淚如泉言念平生中腸若割卽遠己卜靈辰不留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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