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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편 - 박수일(朴遂一) -

 
생몰연대 :1553(명종 8) -1597(선조 030)본관 : 밀양(密陽)
호 : 건재(健齋)
별칭 : 자 순백(純伯)
활동분야 :
주요저서 : 건재일고(健齋逸稿)

行狀

公諱遂一字純伯號健齋朴氏本新羅宗姓公子有食采於密陽者子孫因氏焉中世有諱華仕麗朝位三重大匡都僉議右政丞又幾世至諱宗元進士號默齋是爲公曾祖祖諱雲進士號龍巖師朴松堂先生以德行問學重於世退溪李先生實銘其墓考諱灝生員號恒齋有賢行早卒妣廣陵李氏宗諤之女公以嘉靖癸丑十二月二十八日生幼有至性八歲生員公暴歿公驚奔號踊仆地而穌執禮如成人九歲龍巖公授小學該通文義佩服遵省龍巖喜曰異日能扶持吾家者必此兒也壬戌龍巖公卒公隨侍諸父于廬側慈闈定省亦不廢甲子就學于李上舍仁壽恪受師訓寒暑不輟庚午往謁退溪先生于陶山辨論奧義見解超詣先生亟加獎歎曰某資性穎悟龍巖有孫矣辛未遊盧蘇齋門下多所質問丙子赴漢城別試輒不利覆試自是棄擧子業專意學問篤志勵精夜則懸䯻以警睡重修龍巖公明鏡堂左右圖史杜門靜養與旅軒張先生盧公景佖崔公山立交相講磨乙酉公遘癘危甚㺱遭趙夫人喪强病扶起哭撫殯斂咸稱情禮末幾母夫人繼染公執藥嘗糞靡不用極及其歿哀毁攀檘絶而後甦泣血三年幾至喪明遇先妣手澤之物輒失聲悲泣壬辰倭大擧入寇焚掠州里公竄伏山谷備經艱苦遇先忌必潔躬具羞致如在之誠時龍巖繼夫人尙在季父家公晨夕定省時具酒食衣服以進遇亂躬負輿竄匿及喪送終盡禮時列邑義兵爭起公與盧公景任通諭一境結義募兵以與列邑相應事聞除軍資監參奉季父公病卒叔母從弟次第淪喪時當亂離蒼黃公盡力具衣襨以葬外家蕩然於亂中公收葬四五喪挈養其孤孩曰此兒得存吾外祀不絶矣丁酉賊再動爲天兵所敗徑由本府公遽遇賊迫脅罵不絶口遂被害卽九月二十三日也享年四十有五旋葬于赤林先壠向乙之原與趙氏同塋公氣貌端嚴資性溫毅平居莊敬自持無疾言遽色俚近之言不出於口勢利榮達聲色游燕之好泊然無所動於中日誦大學中庸以爲進德之基尤好看易或有出入則書匣中只留庸學易三書杜公高公常過公曰公三世易也公志意堅定雖値逆境從容靜暇不以外至者爲欣戚平生不苟合於人交游有戱狎者斂然如無覩也不言人之是非長短隣里有相較者推而與之不與爭曲直嘗手書責成於己聽命於天及眼大乾坤小心高岱岳卑之句揭座右以資觀省深以安肆爲戒嘗誨子弟曰幽獨之中人所易忽用功最難爾等愼勿自欺事親盡孝承顔順志叱咜之聲不及於犬馬祭祀沐浴齊戒躬視刲爓遇忌日竟夕悲哀或有疾不稱情禮則慘然有不豫之色與從弟成一友愛甚至朝晝不離敎子弟使之同食共寢以篤親愛之情有過則用夏楚甚則對案不食以致感悟於人施與有節而尤致勤於昏喪賙恤窮貧親族多待以擧火歲時伏臘具酒食會宗族講修敦睦之義遠祖外先墳塋有代盡荒廢者輒竪碣表刻俾不至泯沒也嗚呼公資稟旣異而入聞詩禮於家庭出而游師友之間擩染服習以就其德器使其老壽康寧以盡其中晩之功則飽飫充積之餘有以紹家業而明師旨使此學有傳而遭値離亂飽受艱險末乃身罹鋒鏑蹈禍不測善人無祐自古而已然此君子所以致惑於天道也雖然張先生與公爲道義之交而其祭文有曰身若不勝衣而其自立之正有不可移者氣若不出口而其自守之貞有不可奪者病不離身而造詣之志猶不已焉困不可支而堅守之操自不變焉雖在顚沛急遽之間其自持之也不失其常度雖値逆境悖機之來其酬應之也不亂其序次人之邪正能察於心術之微事之成敗能決於擧措之地善無微而不取才無細而不惜寬裕之中有箇規模剛毅之用必尙和平心無偏繫而無物不用其誠情不泥著而無事不循其理此雖稟賦之高而其亦就於學問之積者然也家庭之承師友之得蓋有所來矣噫張先生交公之久知公之深而其言如此則後之欲知公者不待它求而可以得諸此矣公配平壤趙氏引儀仁復之女有四田長弘慶中司馬兩試次亨慶履慶晉慶參奉弘慶無子以從子慄爲後二女適李(禾+辰)金爾後亨慶四男憓恬進士悜愼生員四女適生員蔡以復參議金厦樑鄭 (敝+土)權垓履慶三男愉愑恂三女適全佇呂東韶南應祖晉慶五男愭愰縣監悏慄㥠三女適任景尹敎官李垷曹夏英慄有子曰廷元其餘曾玄以下多不盡載其晜孫思沃抱公之季胤臥遊公所錄遺事及張先生墓銘屬象靖撰次爲行狀自惟眇然後生無所識知何敢屬辭比事以自列於作者之林且有賢胤之手錄與賢友之信筆足以俟後世而不惑又奚以多焉思沃起曰雖然方以先祖逸稿付諸剞劂狀行之文不可以闕幸吾子之終惠也象靖乃不敢辭以臥遊公之錄爲按而以張先生之文爲斷間附以平昔所感於心者以寒慈孫不匱之思且以備立言君子之攷信云謹狀歲庚子仲夏上浣韓山李象靖狀
공의 휘는 수일이요 자는 순백이며 호는 건재이다. 박씨는 원래 신라의 종서인데 공의 아들에게 밀양에 채지가 있었기 때문에 자손들이 그것으로 인하여 본관을 삼았다. 휘를 화라고 하는 분이 계셨는데 고려조에서 벼슬을 하여 직위가 삼중대광도첨의우정승에 올랐다. 또 몇 대를 지나 휘를 종원이라고 하는 분은 진사로 호를 묵재라고 하는데, 이분이 바로 공의 증조부이다. 할아버지의 휘는 운이며 진사로 호를 용암이라고 하였다. 박송당 선생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덕행과 학문으로 세상에 중망을 받았으며, 퇴계선생께서 그 묘지명을 지으셨다. 아버지의 휘는 호이며 생원으로 호를 항재라고 하였는데 행동이 어질었으나 일찍 죽었다. 어머니는 광릉 이씨 종악의 따님이시다. 공은 가정 계축년 12월 28일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지성이 있었다. 8세에 생원공이 갑자기 죽자 공은 놀라 달려가서 울부짖으며 펄쩍펄쩍 뛰다가 까무러쳐 땅에 쓰러졌으며, 깨어나 상례를 치름에 있어 마치 어른과 같이 했다. 9세에 용암공으로부터 소학을 배움에 글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했으며 마음속에 그 뜻을 간직하면서 따라 성찰하니, 용암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 다음에 이 아이가 반드시 우리 집안을 지탱할 것이다.”라고 했다. 임술년에 용암공이 죽자 여러 숙부들을 따라 용암공의 묘 옆에서 시묘살이를 했으며, 아침저녁으로 자애롭게 모시기를 그치지 않았다. 갑자년에 상사 이인수께 글을 배우러 나아가서 선생님의 가르침을 정성스러이 받아들였으며, 추위나 더위에도 멈추지 않았다. 경오년에 도산에 가서 퇴계선생을 찾아 뵈었다. 심오한 뜻을 변론하고 견해가 뛰어난 것을 보고 퇴계선생께서 지극히 장려하고 칭찬하시기를, “아무개는 천성이 총명한데 그는 바로 용암의 손자이다.”라고 하셨다. 신미년에 노소재의 문하에 가서 얼마 간의 질문을 하였다. 병자년에는 한성별시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이때부터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오로지 학문에만 뜻을 돈독히 하고 정성을 모았으며, 밤이면 상투를 매달아 놓고 잠을 쫓기도 했다. 용암공의 명경당을 중수하고, 좌우의 책들을 정리했으며, 외부로 나들이 하지 않고 조용히 마음을 닦았다. 여헌 장선생과 노경필, 최산립과 사귀면서 서로 학문을 연마했다. 을유년에 공이 유행병에 걸려서 대단히 위독했는데, 바로 그때 조부인의 상을 당했다. 병든 몸을 부축받아 억지로 일으켜서 곡을 하고 빈렴하기를 모두 예에 맞게 했다.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모부인이 이어서 전염이 되었는데, 공은 약으로 하기위해 똥까지 맛을 보아가면서 매우 정성을 다했다. 돌아가시자 슬퍼한 나머지 야위어서 정신을 잃은 뒤에 깨어나기도 했다. 3년동안 상주 노릇을 하다가 거의 상이 다할 무렵에도 선비께서 쓰시던 물건을 보면 목놓아 슬피 울었다. 임진년에 왜구들이 대거 침입해 들어 와서 마을을 태우고 약탈하자, 공은 산골짜기에 도망쳐 숨어서 그 어려움을 겪을 채비를 했다. 선조들의 기제 날이 오면, 반드시 몸을 깨끗이 씻고 제수를 장만하여 살아 계실 때처럼 정성을 다했다. 그 때 용암공의 계부인이 여전히 계부 집에 계셨는데, 공이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렸으며, 때에 맞게 술과 음식, 의복을 마련해서 드렸다. 난리가 나자 몸소 모시고 숨었으며, 상을 당해서는 예를 다해서 장례를 지냈다. 그때 여러 고을에서 의병이 다투어 일어나자, 공은 노경임 공과 함께 온 지역에 두루 알려서 의병을 모을 것을 결의하여, 여러 고을과 서로 협력하기로 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군자감에 제수되었다. 참봉을 지낸 계부공이 병으로 돌아가시고, 숙모와 사촌 동생이 차례로 죽었다. 그 때는 난리 중이어지만 공은 수의를 마련해서 장례를 지냈다. 외가도 난리를 만나 난리중에 공은 4·5 상구를 수습해서 장례를 지냈다. 그 고아를 거두어 양육하면서 말하기를 “이 아이가 살 수 있으면 우리 외가의 제사는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정유년에 적들이 다시 쳐들어와 관군을 무찌르고 급히 본 부로 쳐들어 왔다. 공은 적의 협박을 받았지만 꾸짖으며 입을 다물지 않아 결국 적의 해를 입었다. 바로 9월 23일 이었으며, 향년 45세 였다. 적림의 선영 을좌에 조씨와 같이 모셔서 안장했다. 공은 기모가 단정하고 엄숙했으며, 성품이 온화하고 의젓했다. 평소에도 엄숙하고 조심하게 지냈으며, 스스로 화난 말이나 화난 얼굴빛을 보인적이 없으며, 저속한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세리영달과 성색유연의 즐거움에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날마다 대학과 중용을 외워 진적하는 기틀을 마련했으며, 주역 공부하기를 매우 좋아했다. 간혹 나들이 할 일이 있으면 서갑에다가 중용, 대학, 주역 서책만 싸가지고 다녔다. 고두곡 공이 일찍이 공을 칭찬하기를 “공은 삼세역이다.”라고 했다. 공은 뜻이 굳고도 안정되었으며, 비록 역경에 처해도 종용히 정가롭게 지내서, 기쁘고 슬픈 빛을 겉으로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평생토록 구차하게 남에게 영합하려고 하지 않았고, 사귀는 사람 가운데 친압하는 사람이 있으면 감추어서 못 본 것처럼 했다.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 장점과 단점을 말하지 않았고, 이웃에 서로 겨루는 사람이 있으면 미루어 허여하여 올고 그름을 다투지 않았다. 일찍이 손수 ‘자신을 책망하여 살피고, 하늘에 명을 듣는다.’는 것과 ‘안목이 크면 하늘과 땅이 작으며, 마음이 높으면 높은 산이 낮다.’는 구절을 써서, 앉는 자리 오른쪽에 걸어두고 성찰하여 편안하고 방자함을 깊이 경계했다. 일찍이 자제들에게 깨우쳐 이르기를, “혼자 있는 가운데에 소홀하기 쉬워서 공부하는 것이 가장 어려우니, 너희들은 삼가서 스스로 속이지 말아라.”라고 했다. 어버이께 효성을 다해 섬겼으며, 부모님의 안색을 살펴가며 그 뜻을 따랐다. 개나 말과 같은 짐승들에게 조차도 꾸짖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목욕재계하고 제사를 지냈으며 몸소 규섬하는 것을 보고, 기제 날이 되면 저녁 내내 슬퍼했다. 간혹 병이 나서 제사에 참석할 수 없으면, 슬퍼하며 기뻐하는 얼굴빛을 띠지 않았다. 사촌 동생인 성일과 우애로워서 낮이나 밤이나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자제들에게 함께 식사하고 같이 자도록 하여 친애의 정을 돈독하게 했다. 잘못을 하면 매질을 하였으며, 심하면 밥상을 마주하여 밥을 먹지 못하게 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깨닫게 했다. 예절에 맞게 베풀었으며, 더욱 혼례나 상례에는 정성을 기울였다. 가난한 친족들을 먹여 살려서 많은 이들이 불을 지피고 양식을 기다리도록 했으며, 새해나 복랍에는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종족을 모아서 정애가 두텁고 화목하는 의의를 이야기했다. 먼 조상이나 외가 선조들의 무덤이 여러 대를 지나는 동안 황폐해진 것은 비석을 세워 표각해서 없어지지 않게 했다. 아! 공의 품성과 자질이 이미 남달랐으니, 집에서는 시례를 들고, 밖에 나가서는 스승과 벗들과 노닐면서, (사우들의 가르침이) 물들고 그것을 익혀서 자신의 덕을 이루었다. 오래살고 건강하여 그 중만의 공을 다한다면 실컷 먹고 넉넉히 축적한 나머지가 있어서 가업을 잇고 스승의 취지를 밝혀서 이 학문을 전수했다. 그러나 난리를 만나서 고생을 매우 많이 했으며, 마침내 자신이 칼날에 화를 입게 되었다. “착한 사람은 도와줄 이가 없다”는 옛말은 헤아리지 못하겠다. 그러나 이것은 군자가 천도에 의혹을 가지는 것이다. 비록 그러하지만, 장 선생과 공은 도의로 사귀었으니, 제문에서 말하기를, “만약 몸에 옷을 이기지 못하면 자립하는 바름을 전달하지 못하고, 기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스스로 정조를 지킴을 빼앗을 수 없다. 곤궁한 것은 버틸 수 없었으나, 정조를 굳게 지킴은 스스로 변하지 않았다. 비록 좌절하거나 위급한 순간이라도 스스로 지켜서 상도를 잃지 않았다. 비록 역경에 처해 어려운 시기가 와도 그것에 응수하는 것이 어지럽지 않았다. 사람들의 사특한 마음과 바른 마음의 차례를 심술의 미묘한 데서 살필 수 있었다. 일의 성패를 행동하는 데에서 능히 결정할 수가 있어 착한 일이 작다고 해도 모두 취하였고 미세한 재주라 하여도 매우 아꼈다. 관대하고 너그러운 가운데 규모가 있고 굳세고 과감하게 작용하였다. 반드시 화평한 마음을 숭상해서 한 쪽으로 얽매임이 없었고, 사물에 그 정성을 따르지 않음이 없었다. 이것은 비록 타고난 성품이 고절하기 때문이며, 또한 학문이 축적된 데에서 나아갔기 때문이다. 가정에서 이어받은 것과 스승에게서 깨우친 것에서 더욱 더 그 유명함이 있다고 했다.”고 했다. 아! 장선생이 공과 사귄지가 오래되어 공을 깊이 알면서 이러한 말을 했으니, 뒷날 공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다른 곳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이곳에서 알 수 있는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공의 부인은 평양조씨로 인의를 지낸 인복의 따님이다. 아들 넷을 두었으니, 맏이는 홍경으로 사마양시에 합격하였고, 그 다음으로는 형경·이경·진경인데 참봉을 지냈다. 홍경은 아들이 없어 종자인 율을 후사로 삼았으며, 딸 둘을 두었는데 이진과 김이후에게 시집을 갔다. 형경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혜·념은 진사가 되었고 영 · 신은 생원이 되었다. 딸도 넷이었는데 생원인 채이복·참의를 지낸 김하량과 정창·권해에게 각각 시집갔다. 이경은 아들 셋이 있었는데 유·용·순이며, 딸 셋을 두었는데 전저·여동소·남응조에게 시집갔다. 진경은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기·황은 현감을 지냈고, 협·율·서이다. 딸 셋을 두었는데 임경·윤교관·이현·조하영에게 시집갔다. 율의 아들은 정원이며, 그 나머지 증손·현손 이하는 많아서 다 싣지 않는다. 그 제손 사옥이 공의 계윤인 와유공이 기록한 유사와 장선생이 지은 묘지명을 안고 와서 상정에게 차례를 매겨 행장을 지어줄 것을 부탁했는데, “아득한 후세에 태어난 후생이 아는 것도 없이 어찌 감히 이러한 일을 부탁받아 작자의 대열에 끼이겠는가? 또 현윤이 손수 기록할 것과 어진 벗들의 편지로도 뒷사람들에게 의심이 없도록 할 것인데, 또 어찌 많은 말이 필요하겠는가?”라고 하니 사옥이 벌떡 일어나면서 말하기를 “비록 그러하지만, 장차 선조의 일고를 엮으려고 하는데. 행장을 빠뜨릴 수가 없으니. 저희들의 마지막 바람입니다.”라고 했다. 상정은 이에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와유공이 지은 기록을 참고하고, 장선생이 지은 글을 중간 중간에 끼워 넣었다. 또 평소에 마음속의 느끼던 감정으로 자손들의 다하지 않는 마음을 채우고, 또 입언한 군자들의 고신을 기다린다. 경자년 중하 상완에 한산 이상정이 짓다. 㰡”퇴계학연구㰡• 경상북도 편

墓碣銘

公諱遂一字純伯新羅朴姓王時分封諸公子於列邑今之密陽居其一而公其後裔也九代祖諱華爲麗朝三重大匡都僉議右政丞中世居龍宮至四代諱宗元弘治進士號默齋娶生員許諒女就而居焉祖諱雲卽正德己卯進士龍巖其號也師朴松堂英友眞樂堂金公就成公之學文德行非後學所可得而議焉閭有孝碑宣廟朝所旌也塋下有碣退溪李先生撰文也公之著有景行錄紫陽心學至論擊蒙編丙午生員娶廣陵李宗諤女以癸丑十二月二十八日生公公甫八歲生員公暴歿公驚奔號僻仆地至三此豈常兒所能哉九歲龍巖公口授小學公該達佩誦龍巖愛重之曰吾家幹蠱非此兒耶壬戌龍巖喪逝公仲季八在廬定自慈闈晨昏不廢年十七往謁退溪李先生先生頗獎許之又往謁蘇齋盧相公此皆其志早有在也丙子參漢城別擧不利於覆試自是不復留意擧業遂奮爲己之學夜或懸䯻警睡篤志母夫人憂疾而止之乙酉家熾酷癘公喪耦後先妣繼染公不離侍藥嘗糞預驗及其喪也哀毁哭踊頓絶獲穌者累矣泣血三年幾至喪明服闋後時見先妣手澤之物輒失聲悲號隣族莫不嗟歎壬辰遭倭變避竄山谷雖在蒼黃急遽中若遇忌辰親具時羞必致如在之誠時龍巖繼夫人金氏尙在季父家公晨夕必具酒饌奉之又措時衣服以進其在亂離奉置躬侍不失常儀及喪送終如禮時本道義兵隨邑皆作公共府儒召聚十餘旅以應之事聞有除命公之外家蕩沒於賊亂公收葬三四喪極其情禮攜其孤孩撫養之曰此兒須存外祀不絶矣丁酉賊兵再動及其敗還徑由本府公未及遠避遽遇賊亦不自亂罵不絶口遂不免禍乃丁酉九月二十三日也時賊兵未退慮復有餘凶遂以十月十五日還葬于先兆之壠與趙氏同塋嗚呼天不佑善至於是哉公雖不得終承庭訓從前累世所積之善所尙之風流在家庭者深且厚矣其所傳襲有來矣何獨資稟之美哉至於平日百行固非外人所得悉也而蓋皆恒人所不可及者也公配乃平壤趙氏卽宣務郞通禮院引儀仁復女也生四男長曰弘慶中癸丑司馬兩試無子以第四弟晉慶第四子爲後女二長適李(禾+辰)次適金爾後次曰亨慶有四男四女長曰규㥣娶陽城李惟聖女次曰(曰+罒+心)娶進士權澈女女長適生員蔡以復次適正字金厦樑次適士人鄭(敝+土) 餘未字次曰履慶有四男二女男曰愉娶士人申佑德女次曰愑娶聞韶金興瑞女女長適士人全佇餘幼次曰晉慶有五男三女男長曰愭娶海平吉昌先女冶隱後也次曰愰娶府使崔山輝女次曰悏娶縣監權應生女次曰慄爲弘慶後娶士人安景淹女次曰㥠娶師傅鄭四震女女長適豐川任景尹皆各有男女而不敢具載季胤晉慶以崇禎七年春蒙恩除從仕郞永崇殿參奉參奉曾修慟慕錄載先系及公事蹟大槩來示仍曰晉慶爲先人伐石將鐫敢請銘其陰顯光不但平日相與之分固不尋常況今連家之義旣深且重可敢辭焉銘曰朴出羅祖寔天攸錫分封列境密泒最赫曰惟龍巖善地挺特有師有友窮討隱賾公爲嗣孫克繼克述明鏡肯堂鳶魚妙察不幸遭亂操守愈確處困亨道臨變惠迪天意難知不佑有德善旣世積後豈無發後人何鑑鑑此竪石

공은 휘가 수일(遂一)이고 자가 순백(純伯)이다. 신라에 박씨가 왕 노릇할 적에 여러 공자(公子)를 고을에 나누어 봉하였는데 지금의 경상좌도(慶尙左道)인 밀양(密陽)이 그 중에 하나이니, 공은 바로 그 후예이다. 역사책에 기재되어 전하는 것이 없고 족보 또한 잃어서 공에게 몇 대가 되는지는 알지 못한다. 공의 9대조인 휘 화(華)는 고려조에 삼중대광(三重大匡) 도첨의 우정승(都僉議右政丞)을 지냈으며, 중세(中世)에는 용궁(龍宮)에 거주하였다. 6대조 휘 종원(宗元)에 이르러 홍치(弘治 명(明) 나라 효종(孝宗)의 연호 ) 연간에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호를 묵재(默齋)라 하였는바, 생원(生員)인 허량(許諒)의 따님에게 장가드니, 허씨는 바로 김해(金海) 수로왕(首露王)의 후손이다. 생원이 선산(善山)의 해평현(海平縣)에 거주하였으므로 공은 장가든 뒤에 이곳으로 가서 거주하니, 바로 지금의 고리방(古里坊)이 그 마을이다.
조고(祖考)는 휘가 운(雲)인데 정덕(正德) 기묘년(1519,중종14)에 진사에 합격하였는바, 용암(龍巖)이 그의 호이다. 스승이 송당(松堂) 박영(朴英)이고 친구가 진락당(眞樂堂) 김취성(金就成)이니, 공의 학문과 덕행은 후학이 의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을에 효자비(孝子碑)가 있으니 선조(宣祖) 때에 정려(旌閭)한 것이며, 묘소 아래에 비갈이 있으니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이 찬(撰)한 것이다.
공의 저서로는 《경행록(景行錄)》, 《자양심학지론(紫陽心學至論)》, 《격몽편(擊蒙篇)》, 《삼후전(三侯傳)》, 《위생방(衛生方)》 등이 있어 가보(家寶)로 전해 온다.
선고(先考)는 휘가 호(灝)인데 가정(嘉靖) 병오년(1546,명종1)에 생원에 합격하였으며, 광릉(廣陵) 이종악(李宗諤)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계축년(1553,명종8) 12월 28일에 공을 낳았다.
공이 겨우 8세 때에 생원공이 갑자기 별세하자, 공은 놀라 울부짖고 가슴을 치면서 세 번이나 땅에 쓰러졌으니, 이 어찌 보통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9세에 용암공(龍巖公)이 입으로 《소학(小學)》을 가르쳐 주니, 공이 모두 통달하여 외웠다. 용암공은 공을 애지중지하며 말씀하기를, “우리 집안의 일을 맡을 자가 이 아이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임술년(1562,명종17)에 용암공이 별세하자 공은 중계부(仲季父)를 따라 여막에 있었는데, 저녁이면 자친(慈親)에게 잠자리를 마련해 드리고 새벽이면 문안을 하여 아침저녁으로 폐하지 않았다. 17세에 퇴계 선생을 예안(禮安)으로 찾아가 뵈오니 선생은 크게 장려하고 허여하였으며, 또 소재(蘇齋) 노 상공(盧相公 : 盧守愼)을 상산(商山)으로 찾아가 뵈었으니, 이는 모두 그 뜻이 일찍부터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병자년(1576,선조9)에 처음으로 한성(漢城)의 별거(別擧)에 참여하였으나 전시(殿試)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후로 다시는 과거 공부에 뜻을 두지 않고 마침내 자신을 위하는 성인(聖人)의 학문에 힘써 밤이면 혹 상투를 매달아 잠을 깨우면서 뜻을 독실히 하였는데, 모부인(母夫人)이 병이 날까 두려워하여 중지시켰다. 을유년(1585,선조18) 집에 독한 염병이 유행하여 공이 배우자를 잃고 뒤이어 선비(先妣)가 전염되니, 공은 곁을 떠나지 않고 약을 올리고 똥을 맛보아 미리 병세를 징험하였다. 모부인이 별세하자, 공은 곡하고 뛰며 슬퍼하고 훼손하여 쓰러져 기절하였다가 소생하기를 여러 번 하였으며, 삼 년 동안 피눈물을 흘려 거의 상명(喪明)할 지경에 이르렀다. 삼년상을 마친 뒤에도 때로 모친의 손때가 묻은 물건을 보면 그 때마다 실성 통곡하며 슬피 울부짖으니, 이웃과 집안들은 모두 슬퍼하고 감탄하였다. 임진년(1592,선조25)에 왜란을 만나 산골짝으로 피하여 숨었는데, 공은 비록 창황하여 급박한 상황에 있었으나 만약 기일(忌日)을 만나면 친히 제수를 장만하여 반드시 조상이 계신 듯이 여기는 정성을 지극히 하였다. 이 때 용암의 계부인(繼夫人)인 김씨(金氏)가 아직도 막내 숙부의 집에 있었는데, 공은 받들어 모셔다가 몸소 봉양하여 떳떳한 법을 잃지 않았으며, 별세하자 초상을 치르기를 예(禮)와 같이 하였다. 공의 외가가 왜적의 난리에 몰살하였는데, 공은 서너 초상을 거두어 장례하되 정과 예를 지극히 하였으며, 어린아이들을 데려다가 어루만지고 기르며 말씀하기를, “이 아이가 모름지기 보전되어야 외가의 제사가 끊기지 않는다.” 하였다. 정유년(1597,선조30)에 왜적이 다시 쳐들어 왔다가 패하여 돌아갔는데 이 때 길이 본부(本府)를 경유하였다. 공은 미처 멀리 피난하지 못하고 갑자기 왜적의 흉한 칼날을 만났으나 또한 스스로 혼란하지 않고 계속하여 왜적을 꾸짖다가 마침내 화를 면치 못하고 별세하였으니, 아! 슬프다. 하늘이 선한 사람을 도와주지 않음이 이에 이른단 말인가. 공은 비록 가정 교훈을 끝까지 받지는 못하였으나 예로부터 여러 대에 걸쳐 쌓아온 선행과 숭상하는 유풍이 가정에 남아 있는 것이 깊고 또 후하였으며 전하여 이어온 것이 유래가 있었으니, 어찌 다만 자품이 아름다웠을 뿐이겠는가. 평소 여러 행실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외인(外人)들이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나 모두 보통 사람이 미칠 수 없는 것이었다.
공의 배필은 평양 조씨(平壤趙氏)이니, 곧 선무랑(宣務郞)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인 인복(仁復)의 따님이다. 가정(嘉靖) 임자년(1552,명종7)에 출생하여 만력(萬曆) 을유년(1585,선조18)에 별세하였다. 4남을 낳았는데, 장남 홍경(弘慶)은 아들이 없어 넷째 아우인 진경(晉慶)의 넷째 아들 율(慄)을 양자로 삼았으며, 딸이 둘인바 장녀는 이진(李▣)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김이후(金爾後)에게 출가하였다. 이씨 사위는 남녀를 두고 김씨 사위는 1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차남 형경(亨慶)은 4남 4녀를 두었으니, 장남인 규(▣)는 양성(陽城) 이유성(李維聖)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는데 이름이 헌(憲)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장녀는 생원 채이복(蔡以復)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정자(正字) 김하량(金厦樑)과 선비 정별(鄭▣)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차남 이경(履慶)은 4남 3녀를 두었는바, 아들은 유(愉)와 용(愑)이고 나머지는 어리며, 장녀는 선비 전저(全佇)에게 출가하였는데 일찍 과부가 되었고 나머지는 어리다. 차남 진경(晉慶)은 5남 3녀를 두었는바, 장남인 기(愭)는 해평(海平) 길창선(吉昌善)의 딸에게 장가드니 야은(冶隱)의 후손이며, 3남을 낳았으나 모두 어리다. 다음은 황(愰)인데 부사(府使) 최산휘(崔山輝)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으나 모두 어리다. 다음은 협(悏)인데 현감 권응생(權應生)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다음은 율(慄)인데 홍경(弘慶)의 양자가 되었는바, 선비 안경엄(安景淹)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으나 어리다. 다음은 서(㥠)이다. 장녀는 선비 임경윤(任景尹)에게 출가하여 3남 1녀를 낳았다. 막내아들인 진경(晉慶)은 숭정(崇禎) 7년(1634) 봄에 은혜를 입어 종사랑(從仕郞) 영숭전 참봉(永崇殿參奉)에 제수되었다. 참봉은 일찍이 《통모록(慟慕錄)》을 편수하여 나에게 보여 주고 말하기를, “저희들이 선친을 위하여 돌을 다듬어 비문(碑文)을 새기게 되었으므로 감히 비석의 후면(後面)에 기록해 줄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나는 평소 서로 대하는 정분이 진실로 심상(尋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금 연척(連戚)의 의리가 깊고 또 중하니,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박씨는 신라의 시조에게서 나왔으니
실로 하늘이 주신 것이었네

여러 고을에 나누어 봉하였는데
밀성군파(密城君派)가 가장 혁혁하다오
용암공은
일선(一善) 고을에 우뚝 뛰어났네
훌륭한 스승이 있고 벗이 있어
숨은 이치 연구하고 토론하였는데
공은 사손이 되어
뜻을 잇고 일을 계승하였네
명경당을 지어
솔개와 물고기의 묘리를 살폈는데
불행히도 난리를 만났으나
지키는 조집(操執)이 더욱 확고하였네
곤궁함에 처하여도 도가 형통하고
사변에 임하여도 도리를 따랐는데
하늘의 뜻을 알기 어려우니
덕이 있는 이를 돕지 않았네
선행을 이미 대대로 쌓았으니
후손이 어찌 번창하지 않겠는가
후인들은 무엇을 보아야 하나
여기에 세운 이 비석을 보라  㰡”국역여헌집㰡• 민족문화추진회

告府君遺事

皇明世宗皇帝嘉靖三十二年[明宗大王八年]癸丑十二月二十八日先君生于海平縣古谷坊之第
庚申八月二十一日先考生員公暴卒時先君甫八歲出遊門外猝然聞訃驚奔號擗三仆于地執禮行素人皆稱服
辛酉祖考龍巖公授小學該達文義敬佩不釋公愛重之曰扶持吾家者必此兒也
壬戌遭龍巖公喪從仲父居廬晨昏定省不廢慈闈
甲子京學于甘文李上舍仁壽獨處冷齋恪遵師訓[上舍龍巖公女婿於先君爲姑母夫也]
穆宗皇帝隆慶三年[宣祖大王二年]己巳時崔松亭[應龍]除安東府使先君亦嘗歷遊松
亭勸課士子文士以飛翰擒藻相尙先君所製皆自性情中出不與人爭其文華
庚午先君往謁退溪先生先生見其穎悟最加重愛先君問曰先生嘗評松堂白鹿洞規解頗有不滿之意小子未詳其意敢問先生曰白鹿洞規解言忠信行篤敬懲忿窒欲乃初學工程而松堂添入顔子問爲邦及參乎吾道一以貫之之兩端爲邦之道一貫之旨豈初學之所知也先君曰然則小學亦初學工夫而首言元亨利貞天道之常仁義禮智心性之綱天道人性非初學之所知也人生八歲從灑掃應對上做工夫至于大學窮理正心然後方可上達天理則規解之引爲邦一貫無乃倣此乎先生愕然驚異徐曰子言然矣然小學之首言天道人性與此有異人雖初學不可不知本然之性性之德原於天此小學之欲使學者知性之固有而涵養本原也至於爲邦制度之大者一貫聖道之妙處此豈初學循序漸進之功也先君又拈出近思錄疑難反復先生誨諭丁寧先君出先生目送之其後簡于松亭曰朴秀才資質穎悟龍巖其有孫矣○未久先生氣度不寧歸調本宅每言曩在山舍得見朴秀才若同處講學度有相長之益而老物㤼寒歸家竟違所懷云[此崔訒齋聞于松亭而記送]
辛未遊盧蘇齋先生門下[有答問而逸其稿]
壬申聘夫人平壤趙氏[引儀仁復之女]
神宗皇帝萬曆二年甲戌子弘慶生丙子以祖母命赴漢城別擧不利於覆試自是棄擧業發奮爲學勵志刻力夜則懸䯻以警睡母夫人憂其生疾一切禁抑○子亨慶生戊寅重修明鏡堂左右圖書杜門靜養日與親戚逍遙自娛東南搢紳遠近同志無不就訪而信宿[時玉山張旅軒鄕友盧景佖崔山立日日相從安東柳公雲龍作宰仁同時每歷訪其餘交友玉山張天翰金宗孝張悌元源源遊從]
己卯子履慶生庚辰鄕人慕龍巖公德義仁孝聞于朝遂命旌閭崔松亭撰碑陰先君書之辛巳子晉慶生乙酉冬家熾酷癘先君先嬰此患苦劇中先妣喪出扶起斂殯不錯情禮又侍母夫人之病嘔血累日至不省人事而親執湯藥嘗糞甘苦及其歿也哭擗哀毁頓絶獲蘇泣血之餘兩眼幾至失明踰朞而愈服闋後久處廬次不忍就正寢族人咸曰某旣喪主饋又罹罔極之痛能盡孝於遘癘之中豈非神明所扶耶○時省母夫人所用巵匜之屬輒失聲悲號家人封置手澤所及之物不得開閉
辛卯三月聞忠州外舅喪爲位而哭○七月往奠于外舅喪子弘慶亨慶履慶從焉○冬往達城訪徐樂齋思遠
壬辰四月倭賊充斥先君先奉神主埋於屛地次收先世書籍藏于巖穴以此俱得保於兵燹中孤哀等至今覩先世手澤者豈非幸也當時賊兵各據州縣焚掠閭閻搜蕩山野人皆晝伏夜竄蒼黃罔措而遇忌日則必掃淨地親具饌奠以薦如在之誠乘輿播越生民魚肉乃共鄕正字盧景任間道通諭士子倡義募兵以討賊爲急據險邀擊有所斬獲以此往來之賊不得肆一方避亂之人多賴焉大駕至龍灣以罪己之敎下于本道先君奉讀之感淚如流○事繼祖母極其誠孝平日繼祖母在季父家晨夕之省必具酒饌以進至於時節則又供便身之物無不備焉及其臨亂負輿竄伏以免兵禍○挈眷避亂于聞韶地山齋時兵火孔棘饑饉荐臻大家世族無不顚仆於道路先君懲目前之變預措救荒之資乃勅家屬幷日而食操履益固不以飢餓動心
癸巳正月丁繼祖母憂[時在安東道只村]○三月先君患濕兼得酷痢危苦適張先生自龜智村歷訪先生亦在衰絰中數夜聯枕討話亹亹忘疲○夏五月聞天兵大至賊盡南下歸石底弊廬勸課子弟臧穫及時耕讀奉几筵朝夕之奠稱其有無秋返古谷舊基翦除荊棘掃滌廟庭以修葺先業爲務然家舍盡爲灰燼村落沒於蓬荻生者相食死者委骨傷心慘目有不忍言者○還石底張先生又歷訪○季父自安東來古谷衰絰飢困之餘重患泄痢十餘日遂至不救叔母從弟一時俱痛相繼喪逝先君盡脫衣服艱備棺具極力斂葬
甲午奉遷繼祖母權厝遠道艱關親自扶柩所過知舊咸致奠賻之物葬于上林
乙未春先君患濕病篤一日謂孤等曰玉山張某吾友人也吾死之後汝等往從之○先君外家蕩沒於亂初先君收葬其四五喪于先塋之側備盡情禮有一四歲兒鞠養於老婢無所依托先君携來撫育曰此兒存吾外祀不絶矣○秋先君與張先生共浴于靑松椒井
丙申先君寡偶恒抱惄如之情春張先生棄報恩挈眷來寓常對一室討論不輟朝夕蔬食共案者至七八朔冬先生移寓于聞韶龜智村先君遺晉慶從之手寫朱文公貽長子書令佩服焉
丁酉先君白念賦勢日劇遠避無所常鬱悒不樂每想張先生深入而時各邑淸野入城之令甚嚴居民不得自由出疆故先君貽書玉山倅李輔軍威倅李奎文詳探賊勢以資避向之計九月猝然遇賊不屈遇害[時賊兵爲天兵所逐書夜遁還道路阻隔先君依本倅柳澈陣下曉頭賊火遍山一陣奔潰賊見先君衣冠之異凡謂之軍帥脅迫之先君罵不絶口終罹凶禍]嗚呼尙忍言哉尙忍言哉不肖孤抱此窮天之痛忍生天地之間尙保餘生徒切腐心而已○賊作窟於釜山浦而天兵百萬一時大敗瘡痍之卒逃散之兵晝夜彌滿道路刼掠村閭人無朝夕之慮勢不能安頓守殯十月葬于赤林先壠之側辛坐之原奉几筵入宣城
先君志氣堅定處事精密雖値逆境必從容靜而理之不以自外至者爲欣戚故體若不勝衣而其立心制行有不可奪者焉
常以禮律身凡嬉笑俚近之言未嘗出諸口勢利榮達聲色遊宴淡然無所好常在調病中雖羸悴之極矜持之念少不懈弛病或少間則必合眼靜坐終日執志如金石平生無苟合於人交遊中有戱狎不敬者待之以禮故不惡而嚴隣里或有相較者推而與之不與爭其曲直平居以莊敬自持無疾言遽色端嚴明瑩見人邪正莫敢匿其情對人只談古今事蹟人之是非長短未嘗出諸口心無偏擊情不泥著故事循其理物用其誠罕出門庭足跡未嘗入官府若有公事則輒以疾亂所與相從只數三友而已嘗曰吾遊永嘉時風度逈秀者南義仲不幸今者亡矣自少嘗手書責成於己聽命於天八字付壁顧省又書眼大乾坤小心高岱岳卑會融千古意寒水月更奇之句以寓心期誨人以安肆爲戒嘗戒子弟曰幽獨之中人所易忽用功最難爾等愼勿自欺與從弟成一友愛相篤日夕不離嘗謂曰男子守己至死不變彼徇利害而貳行者可哀也已
奉親三十餘年承顔順志務盡誠敬平生叱咜之聲未嘗及犬馬甘旨之奉溫淸之節咸適其宜造次無違
其祭祀也沐浴齋戒酒饌必親執朝夕奠謁祠宇出入亦告朔望則奠遇忌悲號或以疾患不稱情禮則不豫之色終日不已
其敎子弟使之食必同器寢必同衾以篤友愛之情或有過則撻楚甚則對案不食以致慮悟
吾家世業稍多而先君性不喜華靡衣服食御以儉素爲主至於營辦未嘗卦於心於人施與有節而尤致勤於昏喪春夏之間親族待而擧火
吾家在族宅之中歲時佳節必設酒饌令門中男女聚會一堂以講敦睦之義以此族親雖衆終無間言
或同宗異姓之遠族貧餒無賴者則留而恤之衣服食事稱其情義勸以立揚之意至於赴試亦措給筆紙及路資無不優焉
凡遠祖外家代盡墳塋歲久頹廢幾不記識之地則必竪短碣手自題曰某公某氏之墓使不至泯滅如別侍衛崔公直長河公之墓碣皆先君之所立也[崔公之墓在古谷之後河公之墓在新谷諸宮山麓妙光山又有外先祖之墓而因亂未及措竪故每切傷恨] 常念一善名賢事蹟泯沒裒錄聞見幾就篇秩而經亂散失其後從叔收拾餘緖與上舍崔晛丈參考往蹟以成梗槩後崔丈竟卒其業今所謂一善志者此也

祭文

維萬曆二十七歲己亥七月戊申朔六日癸丑友人張顯光昭告于先友朴純伯几筵之下 嗚呼生而相愛者情也死而不忘者思也情隨人而淺深思隨情而短長思不期長而自不得不長者其情深也情不期深而自不得不深者其人重也昔我有純伯情雖欲不深其可得乎今我失純伯思雖欲不長其可能乎嗚呼純伯爲人復可得耶世有純伯而世之知純伯者曾鮮焉人品高而形貌卑則不識其人品之高而惟形貌是見者以爲卑焉敏於行而訥於言則不識其制行之貴而惟言訥是病者以爲短焉篤於好善峻於疾惡而人疑於狹也富而好禮取與有節而人疑於嗇也安身分義絶意名利故或病其拙也不立詭異惟務平常故或病其祖也不幸而埋沒塵埃不立一名俗夫視之爲常人又不幸而遭罹戹會殞躬凶變好議者咎之爲不智吁知德者固鮮而好德老尤鮮宜乎人之知純伯者旣寡而好純伯者尤寡也見其外而不見其內識其粗而不識其精則人不知純伯也無怪己有善者能好人之善己之正者能愛人之正則其於純伯心好之誠愛之者能幾人乎知之鮮好之寡而在純伯又何爲損哉噫以吾觀之純伯之所不可及者其可悉擧乎身若不勝衣而其自立之正也有不可移者焉氣若不出口而其自守之貞也有不可奪者焉病不離身而造詣之志猶不已焉困不可支而堅守之操自不變焉雖在顚沛急遽之間其自持之也不失其常度雖値逆境悖機之來其酬應之也不亂其序次人之邪正能察於心術之微事之成敗能決於擧措之地善無微而不取才無細而不惜寬裕之中有箇規模剛毅之用必尙和平心無偏繫而無物不用其誠情不泥著而無事不循其理此雖稟賦之高而其亦就於學問之積者然也家庭之承師友之得蓋有所來矣顯光無狀末路孤立得吾純伯而爲可恃焉其相知也不于外而于內其相許也不于跡而于心平生之情旣不得不深則今日之思其何得不長乎嗚呼純伯之亡已將再期矣再期之中已往之歲月旣無日不思及於純伯則此後歲月當何日而已乎思純伯之顔容思純伯之言語思純伯之性情思純伯之德行與夫商確之論相從歡洽之事稠中泛論之語兩人密砭之辭昭昭乎心目洋洋乎盈耳而有不得忘者焉曷爲而然哉非我偏私於純伯使我而不能忘者惟純伯之德爾而今寇氛小靜几筵得返于故山鄙踨亦來寓於月波之上此亦曾與純伯約以同遊也有其約而無其人我獨日彷徨於水石之間其又何以爲懷乎敢佩薄奠而來小伸永思而致告

만력 이십칠년 기해년 칠월 무신삭 육일 계축에 장현광이 고인이 된 친구 박수일의 영전에 고합니다.

살면서 서로 사랑함은 정이요 죽어서 잊지 않음은 그리움이니
정은 사람에 따라 깊고 얕으며 그리움은 정에 따라 짧아지고 길어집니다
생각이 길어지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길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정이 깊기 때문이며
정이 깊어지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깊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사람이 중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나에게는 순백이 있었으니 정이 비록 깊지 않고자 하나 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나는 순백을 잃었으니 생각이 비록 길지 않고자 하나 될 수 있겠습니까

순백과 같은 인물을 다시 얻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순백이 있었으나 세상에 순백을 아는 자는 일찍이 적었습니다
인품이 높으나 형모가 낮으니 인품이 높은 것을 알지 못하고
오직 형모만을 보는 자들은 낮다고 여겼으며 행실은 민첩하였으나 말에는 어눌하니
행실의 귀함을 알지 못하고 오직 말이 어눌함을 병폐로 여기는 자들은
단점으로 여겼습니다 선을 좋아하기를 돈독히 하고
악을 미워하기를 준엄하게 하니 사람들은 도량이 좁은가 의심하였으며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여 취하고 줌에 절도가 있으니
사람들은 인색한가 의심하였습니다 몸을 분수와 의리에 편안히 여기고
명리에 대한 생각을 끊었으므로 혹은 그 졸렬함을 병으로 여겼으며
괴이함을 세우지 않고 오직 평상을 힘썼으므로 혹은 그 거침을 병으로 여겼습니다
불행히 진세에 매몰되어 한 이름을 세우지 못하니
세속의 지아비들은 이를 보통 사람으로 여겼으며
또 불행히 나쁜 시운을 만나 흉변에 몸을 잃으니
비판을 좋아하는 자들은 지혜롭지 못하다고 허물하였습니다
아 덕을 아는 자가 참으로 적고 덕을 좋아하는 자는 더더욱 적으니
사람들이 순백을 아는 자가 이미 적고 순백을 좋아하는 자가 더욱 적음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외모만 보고 내면을 알지 못하며 대강만 알고 정한 것은 알지 못하니
사람들이 순백을 알지 못함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자기가 선행이 있는 자만이 남의 선행을 좋아하고
자기 몸이 바른 자만이 남의 바름을 사랑하니
순백에 대하여 마음으로 좋아하고
정성으로 사랑한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아는 이가 적고 좋아하는 이가 적으나
순백에 있어 또 어찌 감손(減損)되겠습니까
아 나로서 보건대 순백을 따라갈 수 없음을
어찌 다 들 수 있겠습니까 몸은 옷을 감당하지 못하는 듯하였으나
자립의 바름은 옮길 수 없음이 있었으며 기운은 입에서 나오지 못하는 듯하였으나
스스로 지키는 지조는 빼앗을 수 없음이 있었습니다
질병이 몸에서 떠나지 않았으나 조예의 뜻은 오히려 그치지 않았으며
곤궁하여 지탱할 수 없었으나 굳게 닦은 지조는 스스로 변치 않았습니다
비록 어렵고 급박한 사이에 있으나 스스로 지킴이
떳떳한 법도를 잃지 않았고 비록 역경과 어려운 기회를 만났으나
수응함에 있어 그 차례를 잃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간사하고 바름을 심술의 은미함에서 살폈고
일의 성공과 실패를 거조하는 자리에서 결단하였으며
선은 작다 하여 취하지 않음이 없고 재주는 하찮다 하여 아끼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너그러운 가운데에도 규모가 있었고 강의한 씀으로
반드시 화평을 숭상하였습니다 마음은 편벽되이 매임이 없었으나
사물마다 정성을 쓰지 않음이 없고 정은 한 곳에 집착하지 않았으나
일은 이치를 따르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는 비록 품부함이 높아서이나
그 또한 학문을 쌓음에 나아갔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정에서 계승함과 사우에게서 얻음이
유래가 있어서였습니다 불초한 나는 말로에 고립하였는데
우리 순백을 얻고서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로 알기를 외모로 하지 않고 내면으로 하였으며 서로 허여하기를
자취로 하지 않고 마음으로 하여 평생의 정이
이미 깊지 않을 수 없었으니 오늘날 생각함이
어찌 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순백의 죽음이 이미 재기가 되었습니다
재기의 가운데에 이미 지나간 세월은 이미 날마다 생각이 순백에 미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이후의 세월인들 마땅히 어느 날에 그치겠습니까
순백의 얼굴과 모습을 생각하고 순백의 언어를 생각하고
순백의 성정을 생각하고 순백의 덕행을 생각하고 서로 대하여 상의하던 말과
서로 따라 즐거워하던 일과 사람들 가운데에 범연히 논의하던 말과
두 사람이 은밀히 대하여 경계하던 말이 마음과 눈에 분명하고
귀에 쟁쟁하여 잊을 수 없으니 어찌하여 그러합니까
내가 순백을 편벽되이 좋아해서가 아니요 나로 하여금 잊을 수 없게 하는 것은
오직 순백의 덕입니다 지금 왜구가 다소 조용하여 궤연을 고향의 산천으로 돌아가 모시고
나 역시 월파의 위로 와서 우거하니 이 또한 일찍이 순백과 함께 놀기를 약속한 곳입니다
그 약속은 있으나 그 사람이 없으므로 나 홀로 날마다 수석의 사이에 방황하고 있으니
어떻게 마음을 가누겠습니까 감히 하찮은 제물을 가지고 와서 올리며 영원한 그리움을 다소 펴 아뢰니
아 슬프옵니다  
㰡”국역여헌집㰡• 민족문화추진회
 

祭文

鄕後進前弘文校理盧景任謹用薄具敬奠于蓮堂處士朴丈之靈嗚呼哀哉曰惟一善肇自三國山川秀麗佳氣蔥鬱篤生異人群賢繼作接武後先潤我正學唯我蓮堂稟質堅確溫雅其資慈詳其德夙承庭訓卓然有得擺脫塵冗拔出流俗靜坐一室左右書籍沈潛窮蘊內外洞澈根基堅定不撓外物持身甚嚴儀範雍穆若小若大率循禮法家中肅肅斬然有則親族睦婣鄕閭矜式令聞廣施遠邇咸服嗟余小子世分最篤視猶同己訓戒頗切諄諄勸諭導我大路啓迪有方禮智仁義如余愚劣亦知感悅武夷秋夜伊川春日討論遺經縱橫反復意久承誨可庶卒業天何不佑奪我大賢禮善禍浮信之於天天旣難恃余悲何極天生一別接我心目世路蒼黃于南于北歿不憑棺窆不臨穴遲遲一哭晩在今日剛毅之資已矣何適蓮堂已空夜月悲涼謦欬莫聞滿目凄荒後學有疑于誰其質前賢有傳于誰其托非我私慟乃擧鄕慟非一鄕慟乃擧世慟然所可慰餘韻不滅遺澤及人立懦敦薄於千萬年有光斯赫況彼堂從又此四璧克承先業肯構能穀公何悲爲 介福有錫松楸他日可更來哭靈庶不遺昭我來格

祭文

族友結義兄弟生員崔晛來哭于處士朴公純伯氏之靈嗟哉朴兄乎我尙忍哭我兄耶昔在眞安聞兄之喪始而驚昏仆于地也旬日而惑疑其傳之妄也逾月而悲恨不得復見兄面而詰其由也嗟哉朴兄乎爾乃何如人而今其何以歸也茫茫乎人世如爾兄者蓋未之見而風靡波蕩之際尤驗其所守之確屹然山嶽松筠不敢以巨浸霜雪少撓其一髮正所謂水不能沒火不能焦處亂世而不能禍者人所共恃乎吾兄而今至於此極吾安得不惑也惑之不解遑遑焉如有求而未得者累日在衆中語知不知莫不惜其亡而怪其理知吾兄之德飽人耳目者宿矣而不惟不得施於斯世而爲知己者痛今反爲不肖者藉焉爲善者沮焉天之福禍善惡之理果何也吾安得不永恨長痛愈久而愈切也近有玉山太守李君君子人也於兄於我俱爲莫逆交也憐我之悲解我之惑曰天之佑德爲常而數之窮也天亦反其常善人之得福爲恒而變之極也善亦罹其殃匪今斯今自古有之然而有德而不得佑者不朽而無德而得福者無聞焉爲善而罹殃者爲榮而不善而久視者無稱焉芝蘭焚而益芳何羨乎櫟壽也良玉毁而彌章可哀哉瓦全也以純伯之德可以陶甄斯世而不得佑於蒼天者非値其數之窮耶以純伯之孝可以遠害全身而不得全於亂世者非遇其變之極耶然而不全其軀而必全其天可不謂全其歸乎不佑其身而必佑其後可不謂佑其德乎全其天而佑其後吾何恨乎純伯而不可與世之幸免苟活自生自死者同日語矣吾之生也猶死也純伯之死也猶生也不以顔氏之不壽而小其德不以仲由之非命而沒其名於我純伯復何悲焉於是乎我之惑小解而我之悲則無已也非我悲其朴兄也自悲其失我兄也嗟哉朴兄乎爾其止於是耶知兄者衆而不知兄者愈多知與不知於兄無所損益也德晦張丈兄之友而我之師也誠伯朴君我之友而兄之弟也知兄之知我也猶兄於我也知我之知兄也猶我於兄也溫然之容粹然之質淸苦之操履淳正之學問見兄者皆服聞兄者皆飽至其知人之所不知見人之所未見惟我數人同之而兄之自知而我數人之所不知者亦何限焉遊心經訓得不傳之妙旨夜思晝踐應萬變於日用抱膝長吟秘經濟之大手飯粟飮水處亂離而裕如蓋其所得於胸中者千倉萬囷而世莫得窺焉若其優游洛水之泮嘯詠蓮堂之上非其所樂而預見憂危益自韜晦掉頭名譽不出戶庭將使萬卷圖書永作終老之域一善江山衣被昭回之光發揮先師之業無忝鄒魯之鄕兄其躍如我當從之不以在外之欣戚易吾之樂而不幸於今中道罹殃我其有耳誰使聞之我其有目誰使明之氏昏蒙蒙誰使牖之已矣乎永不得承兄之警策矣我所以不悲兄而自悲也吁咄哉以龍巖先生之德行而使我兄夭以我兄純明之質而不善其終命天其有定於後日而佑其嗣歟我於是具薄奠以哭焉道玉山守之意而解我之惑以慰其諸孝子辭不盡意以寓一哀

祭文

仁同縣監李輔謹以酒果致奠于亡友朴君純伯之靈嗚呼哀哉美質難得而天資稟實好學未聞而心齊有的溫溫其外斷斷所存人服其德足畏其言家庭有訓鄕曲維則生何不辰遭此孔棘忉忉怛怛而國而家有計誰用有謨誰嘉遑遑蹙蹙在山在林崑岡火列玉石俱相知未知共悲同慽搢紳東南於何信宿朋友遠近無所就質矧余無似托契最密他年卜隣有約相從那知今日遽至此恫一哭奠罷萬事皆空

祭文

族友結義兄弟生員崔晛來哭于處士朴公純伯氏之靈嗟哉朴兄乎我尙忍哭我兄耶昔在眞安聞兄之喪始而驚昏仆于地也旬日而惑疑其傳之妄也逾月而悲恨不得復見兄面而詰其由也嗟哉朴兄乎爾乃何如人而今其何以歸也茫茫乎人世如爾兄者蓋未之見而風靡波蕩之際尤驗其所守之確屹然山嶽松筠不敢以巨浸霜雪少撓其一髮正所謂水不能沒火不能焦處亂世而不能禍者人所共恃乎吾兄而今至於此極吾安得不惑也惑之不解遑遑焉如有求而未得者累日在衆中語知不知莫不惜其亡而怪其理知吾兄之德飽人耳目者宿矣而不惟不得施於斯世而爲知己者痛今反爲不肖者藉焉爲善者沮焉天之福禍善惡之理果何也吾安得不永恨長痛愈久而愈切也近有玉山太守李君君子人也於兄於我俱爲莫逆交也憐我之悲解我之惑曰天之佑德爲常而數之窮也天亦反其常善人之得福爲恒而變之極也善亦罹其殃匪今斯今自古有之然而有德而不得佑者不朽而無德而得福者無聞焉爲善而罹殃者爲榮而不善而久視者無稱焉芝蘭焚而益芳何羨乎櫟壽也良玉毁而彌章可哀哉瓦全也以純伯之德可以陶甄斯世而不得佑於蒼天者非値其數之窮耶以純伯之孝可以遠害全身而不得全於亂世者非遇其變之極耶然而不全其軀而必全其天可不謂全其歸乎不佑其身而必佑其後可不謂佑其德乎全其天而佑其後吾何恨乎純伯而不可與世之幸免苟活自生自死者同日語矣吾之生也猶死也純伯之死也猶生也不以顔氏之不壽而小其德不以仲由之非命而沒其名於我純伯復何悲焉於是乎我之惑小解而我之悲則無已也非我悲其朴兄也自悲其失我兄也嗟哉朴兄乎爾其止於是耶知兄者衆而不知兄者愈多知與不知於兄無所損益也德晦張丈兄之友而我之師也誠伯朴君我之友而兄之弟也知兄之知我也猶兄於我也知我之知兄也猶我於兄也溫然之容粹然之質淸苦之操履淳正之學問見兄 ..

祭文

鄕後進前弘文校理盧景任謹用薄具敬奠于蓮堂處士朴丈之靈嗚呼哀哉曰惟一善肇自三國山川秀麗佳氣蔥鬱篤生異人群賢繼作接武後先潤我正學唯我蓮堂稟質堅確溫雅其資慈詳其德夙承庭訓卓然有得擺脫塵冗拔出流俗靜坐一室左右書籍沈潛窮蘊內外洞澈根基堅定不撓外物持身甚嚴儀範雍穆若小若大率循禮法家中肅肅斬然有則親族睦婣鄕閭矜式令聞廣施遠邇咸服嗟余小子世分最篤視猶同己訓戒頗切諄諄勸諭導我大路啓迪有方禮智仁義如余愚劣亦知感悅武夷秋夜伊川春日討論遺經縱橫反復意久承誨可庶卒業天何不佑奪我大賢禮善禍浮信之於天天旣難恃余悲何極天生一別接我心目世路蒼黃于南于北歿不憑棺窆不臨穴遲遲一哭晩在今日剛毅之資已矣何適蓮堂已空夜月悲涼謦欬莫聞滿目凄荒後學有疑于誰其質前賢有傳于誰其托非我私慟乃擧鄕慟非一鄕慟乃擧世慟然所可慰餘韻不滅遺澤及人立懦敦薄於千萬年有光斯赫況彼堂從又此四璧克承先業肯構能穀公何悲爲 介福有錫松楸他日可更來哭靈庶不遺昭我來格

祭文

異姓姪金安節敬奠于健齋族叔父之靈嗚呼顧余無狀纔及丱角負笈君子之門以承謦欬之益撫恤之勤則無異已出敎誨之至則示以義方者殆十有餘載矣而第緣昏庸之質雖未副誘掖之意魚魯之分實冥道指南之賜恩義之深其與生我者無間矣嗚呼公之德與行豈易言哉幼承龍巖之訓早登退陶之門從事爲己之學深做篤實之功發軔正路期入安宅敬以治心禮以律身實德隱於中光輝著於外而至於孝於親友于弟追遠以誠交友以信睦族以恩賙窮以仁沈晦於丘樊絶意於外慕左圖右書樂以忘憂者此公之一端之行見於日用之間而令人嘉尙者也嗚呼時會喪材櫝玉待價修道而道未行抱德而德未施竟値滔天之變奄罹慘怛之禍理之變耶數之凶耶其何令哲人至於此極也嗚呼安節之於公常擬粉首糜骨以報恩德之萬一而異域風霜瑣尾間關腥塵滿地兵路多梗歿未治柩葬未執紼趨慰奠哭尙在人後情理俱缺愧負平昔他日地下何以爲顔此安節之所以肝摧心裂失聲慟哭而不覺氣塞者也尤可慟者癸巳哭翰林叔乙未失盧懼仲丁酉又遭我公罔極之變數三年來善人殆盡我疑誰質我過誰責踽踽涼涼終歸汙下之域而以至鄕無善俗士失依歸則天何心而畀之厚又何心而奪之速也此必是關時運之盛衰而抑不容人力於其間者也已矣已矣夫復何言永隔重泉小子何托來奠韮薄音容莫接撫膺長號天地茫茫不亡者存鑒此鑒此

祭文

聞韶金是柱謹以酒果之奠敢昭告于故文丈朴公之靈惟靈斯文大儒經世君子禮樂是習俎豆是事嗟哉賢者而無其位道之不行德乃日高謂遐享耳何患喪乎時之不淑四郊多壘智巧皆避公乃死之豈曰徒然王蠋無愧仁者不壽將大其後有子四人克繼克守會過祥期公其知否小子來哭爲奠薄酒

祭文

鄭四象四震等謹以魚果之奠敬祭于處士朴公之靈嗚呼惟公山嶽之精美璞之鍾鐵石其心河海其量淵源有自孝友踐形心莊志篤精思力行遵養自修不爲表襮孰知其貴明月暗擲嗟我末學何有知識一拜眞城情義懇切再奉洛涘疑誨冞篤那知永訣在靑鳧別我於是時亦與張師竄入窮山存歿不知疑懼方極又訃奄至阻兵莫奔悲痛曷巳時事日急又走太白相距逾邈末由一哭劇賊幸遁今春始還遲遲此哭尙在秋寒俯仰忸怩孰察悲情嗚呼自我獲拜分深兄弟將以仰賴以度殘生豈料如今竟至此極遇之苦晩失之何速嗚呼蒼天令我窮獨我之有失此後誰責我之有過此後誰說佳山好水春風秋月誰與陪嘗言念腸絶惟幸君公兟兟胤子資稟且好鸞停鵠峙孰謂公亡門屛慶溢早晩相聚仁輔義責所聞相講所學相質相期古人庶竭悃愊一盃借辦公其來格

祭文

維萬曆二十七年歲次己亥九月丁未朔二十二日戊辰友人張顯光謹以酒杲奉奠于故友朴純伯之靈嗚呼溫良之容樂易之德端方之行敦實之言已矣乎哉不復得接吾於是日其痛如何是日之悲有倍聞訃自公之去今已三霜風隨歲渝俗與日變吾黨無恃思公不忘芝焚蕙孤松折柏獨則吾之慟豈止哀亡抱無盡情終此一哭不亡者存庶幾昭格

祭文

生員崔晛謹以酒果奉奠于故處士朴公之靈嗚呼自公之逝閱三霜紛紛人事吁可傷公之在世鸞鳳翔洛波浩渺烏山蒼眞源一脈賴而長公之云歿蛟龍藏芳蘭萎折荊棘昌狐狸號舞鳥鳶張公之精神不隨亡賢聖左右如在牀根深枝遠挹餘香我想儀形宛在傍一輪秋月浸寒塘淸光猶昔庶照余之寸腸

祭文

從弟成一謹具雞酒之奠敬祭于密城朴公健齋兄之靈嗚呼與兄相別今幾月耶以不可一日一刻相離之弟兄而隔幽明今至二期于玆則哀弟之憫默悼怛裂腸摧心者爲如何也日愈遠而思愈深月益久而情益切地久天長此寃此痛何時而洩耶嗚呼積德深仁不足以厚其生至孝純誠尙不能全其歸遂使靑氈先業無所依托而如弟愚頑之物獨留於人世間則孰謂天理之能得其常而仁人君子之能得其福耶嗚呼我兄其可忘耶天稟甚高英邁絶世年纔十七負笈退陶之門親承性理之要訣遂奮於爲己之學日誦大學中庸以爲進德之基社門端居滿壁圖書潛心靜裏不求聞達充養旣久表裏無瑕體用不差內外俱備絶浮薄輕躁之病做篤實踐履之功德益高而日躋業益廣而月崇其居家也內外斬斬閨門肅肅不以恩愛而掩義不以賤惡而加惡焉其事母也承顔養志終始無違叱咜之聲未及於犬馬其居喪也哀毁骨立死而復穌其祭祀也齊沐嚴謹務極誠虔遇忌則哭泣悲慟無異初喪其於鄕族恤患周窮如恐不及疾惡而芒刺在背好善而蘭臭在室臨事明敏處疑若燭亹亹家庭之訓惓惓鄕邦之學高挹首陽之淸風遠泝伊洛之淵源將見吾道之有所歸而善學之有所托天獨何如遭此罔極之數而使吾黨踽踽涼涼(土+適)埴孤行者乎然則我兄之亡豈獨迷弟親愛之痛而止而已哉旣以弟慟又以道哭烏可已乎宜乎此寃此痛與天地相終始而無窮者也嗚呼謦欬未聞儀容莫接蓮堂半月益傷思兄之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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