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문집
서원
누정
고문서
학맥도

 

인물편 - 손영제(孫英濟) -

 
생몰연대 :1521(중종16) -1585(선조 18)본관 : 밀양(密陽)
호 : 추천(鄒川)
별칭 : 자 덕유(德裕)
활동분야 :
주요저서 : 추천문집(鄒川文集)
 

行狀

昔我先祖文純公 論朱門諸子曰能尊考亭之道者 是亦考亭之徒也 於乎陶山 卽海東之考亭也 登門摳衣之士 皆極一時之選 雖其材地有高下 觀感有淺深 德業有大小而要之 皆陶山之徒也 矧乎表章斯文 張維世敎者其功之焯 其風之遠則尤豈非有光於爲其徒者歟 余於鄒川先生孫公 見之矣 公諱英濟 字德裕 其先大樹部也 有孝子順 載國乘 麗朝有兢訓 以南征功 封廣理君 廣理是密城也 孫之望密城 始此 有政堂文學曰贇 有門下評理曰 季卿 有承旨曰承吉 高祖諱以恂 節度使 曾祖諱信復進勇校尉 祖諱世蕃考諱凝 軍資監正 妣咸安趙氏吏曹參判孝同之孫 處士光遠之女 公 早毅然有立志 不俉俗士 以篤學著聞 薦爲列邑黌訓 誘掖指授 隨處稱職 士爭雲集 康陵辛酉擢明經科 內而成均館典籍兵禮二曹左郞正郞司憲府持平 外而禮安縣監蔚山府使也 卒戊子十月九日 此其肇卒大略也 其宰禮安也 惕然歎曰丈夫而不務聞道 惟利祿之是尙 不亦惑乎 甫下車 卽欲就巖棲門下而文純公 時在京 待其還不啻若飢渴之在躬 俄而山梅爭報 此日幸蒙天許退之詩 始乃贄幣而參戶屨之列 是己巳三月也 講學問政心悅誠服 非簿牒公故 未始非薰襲春風之日 文純公往往以書謝其終日陪席之幸 蓋尊以地主而不欲師道自居也 公痛懲梁某 執禮益勤 心中却無縣紱 退與闔境同門之賢 詠歌周旋於隴雲天淵之間 以相磨而相樂 如後凋金公富弻昆仲 日休琴公應夾昆仲 又如月川趙公穆惺齋琴公蘭秀梅巖李公叔樑 咸其石交而雪月金公富倫 尤莫逆也 自於心 旣得大德輝光 兼資名勝麗澤 天借一縣 勝似葛稚川之求爲句漏 自此心扄融廓 體膚如覺增長 爲治 克體師門準的以興學爲急務 行釋菜禮於夫子廟 凡殿宇之傾側不修者 俎豆禮器之非古制者 竝皆新之 且以學規多闕漏 別爲約條以揭之 莫非訂質師門 楷式永世 於是文化蔚然 後來金矦光遂 跋其約條 以斯文事爲已任云者卽此也 未久山頹 痛失依歸 裁卒塗爲奠辭 略敍其考德未終之恨 仍請于方伯金黃岡繼輝 創陶山祠 傾俸助資 挈其力之朒贏而張弛之 殫竭無餘 終底有成 雪月公 有詩云起工隨物力 敦事盡心情 信記實而美之者也 哀有喪好施與 月川惺齋二公 方苫凷而窮 以槨板等物 效麥舟之義 臨民撫摩 重以用刑輕 皷舞歌頌 咸願借寇 秩滿 更加一年 雪月公 每引朱韋齊闔中尉古事 要其因家而公謝不能從 甲戌秋 乃歸 淸風灑然 其治蔚 又如禮 乙亥額於陶山 與同門諸友 奉延宣恩以慶之 旣又俛仰舊迹 徘徊竟夕而罷 晩卜築鄒川 有淵曰鼇 寓意於古人鼇峯書堂講道之制 退修初服 糲食澗飮 時公之二弟宏濟兼濟亦皆好學 有對床之歡 又鄕里契誼有操庵南公弼文 相與講明師門之緖 其糲食澗飮猶非寂寥也 自號鄒川 經籍之餘 逍遙徜徉 以終葬府東推火山長善洞負亥原 配達城徐氏平章事匀衡之後縣監峕重之女 墓大邱豐角縣東美兌山向巽原 有五男二女男曰起門曰起倫執徐難負母奔竄遇賊翼蔽願代而死旌其閭曰起業曰起後其婦張氏有月影臺下投崖殉節之烈亦閭旌曰起命女全時憲李汝(言+亟)起門无後起倫一子瞻起業餘男三桂枝覺覽起後一子盼起命亦无後全時憲三子有翼生員有慶有章參奉李汝(言+亟)一子廷俊曾玄以下不盡載而至今二百䄵之間 詩書桑麻 能世其家 嗚乎夫士之生於陶山之世 何如其幸也 彼一時自好之徒 如陸放翁陳龍川之絶聽於木鐸千年之振者 間亦有之而公 勇於攀化 敏於自修終始罔懈 眞箇是豪傑之士 及至延額之日 公時已賦歸而猶且跋涉四百餘里之遠 凡篤於師門 不以存歿而或間 甚至名其坊曰慕禮 用寓晨夕羹牆 蓋公於陶山其得之如此其深故 其慕之如此其切也 文純公銘秋巒鄭居士之莫曰有師無負 吾見於君 若喪其喪終身云云 今以此 移之於公 亦不愧矣 公綜理密察 辦局圓活 以宣城斗小而自師門易簀之後 公私賓旅及日用責費 浩劇無比者 殆無闕月而公 輒應之如流 鑿鑿中窽 官若無事 民且不擾 其亦才資之恢學問之力 有以交資互濟 非人人可企而及者 借使爲鎭爲藩爲卿爲公 蔑不可矣而秖沈屈鳳凰之棲 乍試牛雞之治 未能大其展布 惜哉 重以倭變 密被殘甚 墓前珉石見毁 顯詩竝逸 凡係文籍 蕩然雲空 今其收拾者特是岱岳之毫芒 據草澗權公文海輓詩腰佩三城印之句則抑不止於禮蔚而傘無得以詳 至於生歲甲子亦無傳 可慨也已 雖然 以其文也則祭先師一辭及攬秀亭一詩 亦云多矣 以其蹟也則有邑誌載美 禮則曰詳明精密 蔚則曰敦修學校 政冠一世 至其本府則曰學行聞望 此公案也 不憲唯是 觀於孝烈雙旌 交輝一庭而三綱 具焉者 實由於敎誨式糓之所使 非一朝猝然勉強而始能者也 蓋見公家謨承傳 有異於俗學 厥惟休哉 開爽之風 表裏無間 好善之心 誠實有餘故 一言而人皆信從 藥峯金公克一撰松溪申徵士季誠閭表 特擧公而稱之曰贊其譠者 孫先生某 其見重可知也 夫旣根本有篤於內者故 外而觸遇盡分者皆出於長遠久大之計而殆近乎前哲立德之規 乃若約條之揭 學政之冠 已是留功源頭而陶山祠院之創 特其表章斯文 張維世道者未可以尋當事業 比而論之 當初籌畵經始 均出於諸賢 抑非獨公也 然以一邑長上 硬着擔當則敎令課率之間 凡百就緖 咸其績也 終使闕里 煥乎金絲之搆 然遡其崇道樹風之烈 當與劉克莊之於考亭書院 韓補之於紫陽書院 前後一轍 垂之千億而無窮 向所謂益光陶山之徒者豈其謏也 於是而竊有感焉 功緖之如彼其留芳者 雖由於立志之已早而其實 師友間薰染之助與爲多焉 世之關門獨學 自以爲得者 其將跡公而苶然知愧 惟恐其不及於卽日行之風則公之興起後來者 至是而亦不可謂不遠矣 獨其當日授受之設 未有端的可據者 是其爲尙古者之憾 然 因其蹟而求其心 更參以函席終日之竗而想像焉亦庶乎有以得之矣 野淳桐鄕後生也 有時出入黌齋或先院 未嘗不慨然願慕乎公之風 日其耳 孫承九 遠訪余白石灘上紫霞山間 辱委以記德之狀 顧藐末何敢焉 起而辭者再三則起而請者亦再三而繼以警之曰吾祖遊老先生之門 今日之託子 子其可無情乎 惡在乎其願慕也哉 野淳念院享之議 發自吾鄕已久而方鬱而未伸 又使其潛光終翳然而無有發明 是重吾黨不敏之責 君之警之誠是也 乃敢冒僭而爲據家先手札 間竊附以平昔所感於心者 以備立言君子之采擇云 庚辰半夏節眞城李野淳謹狀


옛날 우리 선조 문순공이 주자의 문도 여러 사람들을 논평해 말하기를 ‘능히 주자의 도를 높이는 자는 역시 주자의 문도들이다’ 라고 했다. 아! 도산은 곧 우리나라 고정이다. 문하에 다니며 옷깃을 여민 선비가 모두 한 때의 정선된 사람들이어서 비록 그 재주와 바탕이 높고 낮은 바가 있고, 보고들은 바에도 얕고 깊음이 있고, 덕업에도 크고 작은 바가 있으나, 요인은 모두 도산의 문도이다. 하물며 사문을 드러내 빛내고, 세교를 펴는 자의 그 공이 빛나고 그 바람이 멀리까지 간다면 어찌 그 문도되는 이들에게 영광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추천선생 손공에게 이런 것을 보았다. 공의 이름은 영제요, 자는 덕유며 그의 선조는 대수부이다. 효자 손이 있었으니 나라의 역사에 실려 있다. 고려시대에 긍훈이 있었는데 남쪽을 정벌한 공로로 광리군에 봉해졌으니, 광리가 바로 밀성이다. 손씨가 밀성을 명명한 것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윤은 정당문학이었고, 계경은 문하평리였으며 승길은 승지였다. 고조의 휘는 이순인데 절도사였으며 증조의 휘는 신복인데 진용교위였고 조의 휘는 세 번이며 고의 휘는 응으로데 군자감정이었다. 비는 함안조씨인데 이조참판 효동의 손녀이며, 처사 광원의 딸이다. 공은 일찍 의연히 뜻을 세워 속된 선비들과는 짝하지 않았으며 학문을 돈독히 하여 소문이 나서 여러 고을의 훈도가 되었는데, 인도하여 도와주고 지시하여 가르쳐주어 이르는 곳마다 직무를 칭찬했으며, 선비들이 다투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명종 신유년에 명경과에 합격하여 내직으로는 성균관전적 병,예 2조의 좌랑, 정랑, 사헌부지평을 역임했고 외직으로는 예안현감 울산부사를 역임했으며 무자년 10월 9일에 졸했다. 이것이 그가 태어나서부터 마칠 때까지의 대략이다. 그가 예안 현감이었을 때 슬퍼하면서 탄식해 말하기를, 장부로서 도학을 공부하는데 힘쓰지 않고, 오직 명리와 녹봉을 위했으니, 또한 의혹된 것이 아닌가? 하고 비로소 수레에서 내려 곧 암서문 아래에 나아가려 했으나 문순공이 그때 서울에 있어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길 몸소 굶주리고 목마른 것 같이 하였을 뿐만 아니었다. 잠시 후에 산의 매화도 다투어 피였으니, 이날 퇴계선생이 임금으로부터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원하는 글을 허락받았다. 비로소 폐백을 드려 문도의 대열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것은 을사년 3월이었다. 강학을 하고 정사에 대한 문답을 함에, 즐거운 마음으로 문서를 돌보는 공적인 일을 않고, 처음부터 선생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 날이 없었다. 문순공이 왕왕 편지로써 종일토록 배석한 행운에 감사했으니, 현감으로써 존경한 것이지 스승의 도리를 스스로 유지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공은 양모를 심하게 꾸중하고 예를 행하기를 더욱 부지런히 하여 마음속으로 도리어 현감의 인끈을 없애려 했다. 퇴근해서는 문하의 어진 이들과 함께 농운대와 천연대 사이를 두루 돌아다니며 시를 노래하며 서로 연마하며 서로 즐겼으니 후조당 김부필 형제와 이류당 금응협 형제와 같은 이였고, 또 월천 조목, 성재 금란수, 매암 이숙량 같은 이는 사귐이 견고한 친구였으며, 설월당 김부륜과는 더욱 막역한 사이였다. 마음은 스스로 이미 큰 덕과 밝은 빛을 얻었고 아울러 이름난 곳에 벗끼리 사귀어 학문에 힘쓰기를 도움 받았으니 하늘로부터 한 고을의 훌륭함을 빌린 것을 마친 치천 갈홍이 구루를 구한 것같이 생각했다. 이로부터 마음을 열고 닫는 융통성이 확연해지고 겉모습에도 깨달음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았으며, 다스림에도 능히 사문의 표준을 법했고, 학문을 일으킴을 급선무로 하여 공자의 사당에 석채례를 행하였다. 모든 전우가 기울어져 수리하지 않은 것과, 재상가 제기가 옛 제도와 맞지 않는 것을 아울러 새로 만들고, 또 학교에 많이 빠진 것을 별도로 약조를 만들어 게시함에, 스승과 문도들에게 질정하지 않은 것이 없도록 하여 오랜 세월 법식이 되었으니 이에 문화가 왕성해졌다. 후에 현감으로 온 김광수가 그 약조의 발문을 지어, 사문의 일을 손공이 자신의 임무를 생각했다, 고 이른 것이 바로 이것이다. 머지않아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시자 의지할 데를 잃었으며 노제의 제문에 덕을 상고함에 다하지 못한 한스러움을 간략히 서술했다. 그로 인하여 관찰사 황강 김계휘에게 도산사를 창건하기를 청하고 봉급을 기울여 자금을 보조했으며, 그 힘이 줄어들고 남는 것을 끌어당기고 늘어나게 했으며, 있는 힘을 남김없이 다하여 마침내 낙성했다. 설월당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기공에는 물력을 보조했고 일을 돌봄에 심정을 다했다.’ 하였으니 진실로 사실을 기록해서 찬미한 것이다. 슬픔과 상사에 베풀기를 좋아하였는데 월천, 성재 두 분이 상을 당하여, 관곽 등 물건이 궁함에 범중엄의 뜻을 본받아 도왔다. 백성들을 무마함을 중히 여기고 형벌 쓰기를 가벼이 하여 백성들이 북치고 춤추며 노래하며 칭송하여 다 같이 임기가 만료되어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만류하고 다시 1년을 더 있도록 했다. 설월당이 매번 주위재 민중위 고사를 인용하여 그 집을 부탁하도록 요구했으나 공이 사절하고 따르지 않았다. 갑술년 가을에 울산으로 돌아갔으니 맑은 바람에 물뿌린 듯 했다. 울산을 다스림도 예안과 같이 했다. 을해년 도산서원에 사액을 받을 때도 동문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내린 은혜를 받들어 맞이해서 경축을 했다. 또 옛 자취를 굽어보고 쳐다보며 밤이 다 되도록 배회하다가 마쳤다. 만년에 추천에 살 곳을 정하고 못을 만들어 오연이라 이름했는데 고인이 오봉서당에서 강도한 제도의 의미를 붙인 것이다. 물러나 벼슬 전의 옷을 입고, 현미밥을 먹으며 계곡의 물을 마셨다. 당시 공의 두 아우 굉제, 겸제도 모두 학문을 좋아하여 책상을 짝하여 공부하는 기쁨을 맛보았으며 또 향리에도 우의를 맺었다. 조암 남필문과 서로 함께 사문의 통서를 강명하였으니 현미를 먹고 골짜기 물을 마시더라도 외롭고 쓸쓸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스스로 추천이라 호를 정하고 경적을 연구한 여가에 돌아다니며 완상하고 노닐다가 세상을 마쳤다. 고을의 동쪽 추화산 장선동 해좌에 장사했다. 부인 달성서씨는 평장사 균형의 후손이요 현감 시중의 딸이다. 묘는 대구 풍각현 동쪽 미태산의 손향이다. 5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기문이며 차남 기륜은 임진란 때 어머니를 업고 도망가다가 적을 만나 팔과 몸으로 덮어 보호하고는 대신 죽기를 원했는데 정려가 있다. 삼남은 기업이며, 사남은 기후인데 부인 장씨가 월령대 아래 언덕에 투신해 순절한 열녀로, 역시 정려가 있으며, 오남은 기명이다. 사위는 전시헌, 이여극이다. 기문은 아들이 없고, 기륜은 외아들 첨으로 두었으며 기업의 측실 아들이 셋인데 계지, 각, 람이다. 기후는 외아들 반을 두었고 기명도 역시 아들이 없다. 전시헌은 삼남을 두었는데 장남 유익은 생원이고, 차남은 유경이며 삼남 유장은 참봉이다, 이여극은 외아들 정준을 두었다. 증손 현손 이하는 다 기재하지 않는다. 지금 200년간에 시서 농사를 능히 세업으로 한 집안이다. 아 ! 무릇 선비가 도산의 세상에 태어난 것이 어찌하여 다행스러운 일인가! 저 한때 스스로 몸을 깨끗이 한 문도가 육방옹, 진용천의 목탁소리 들리던 것이 끊어졌으나, 천년을 진동시킨 자가 간혹 있는 것과 같으니 공은 이끌리어 교화됨에 날랬고, 스스로 수양함에 민첩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게으름이 없었으니 참으로 한사람의 호걸스런 선비였다. 서원 사약을 받던 날 공은 그때 벌써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었으나 그래도 400여리 머나 먼 곳을 산넘고 물건너 왔으니, 사문에 돈독하기를, 살아 있고 없고 혹은 간격이 있고에 관계하지 않고, 심지어 그 골을 이름하여 <모예>라 하였으니 아침저녁으로 사모하는 마음을 써서 붙인 것이다. 대개 공이 도산에 대해, 얻음이 이와 같이 깊었기에 사모함도 이와 깉이 간절했다. 문순공이 추만 정거사의 묘갈명에 이르기를 ‘스승을 저버리지 않았음을 내 그대에게 보았도다. 선생의 상사를 부모의 상사와 같이해서 종신토록 그렇게 했구나’ 라 했는데 지금 이것을 공에 옮겨도 역시 부끄럽지 않다. 공은 빈틈없이 조리있게 처리하고 자세히 살펴, 국면을 판결한 것이 원활해서 선성이 작은 고을이나, 스승이 세상을 떠난 후로, 공사의 여비 및 일상 비용이 많아지는 것이 없는 달이 없었다. 공이 문득 수응해서 물이 척척 빈곳으로 흘러들어가듯 하였다. 관청에는 일이 없는 것 같았고 백성들도 동요하지 않았으니 재주와 자질이 넓고 학문의 힘으로 서로 돕고 서로 구해줌이, 사람마다 바라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량 변방을 지키고 공경의 일을 하더라도 가능했을 것이다. 봉황이 깃들 곳을 잃고 침굴하듯이 어진사람이 때를 만나지 못해 잠시 소 잡는 칼로 닭을 베는 것과 같은 격에 맞지 않는 다스림을 시험해서 능히 크게 펴지 못했으니 애석하구나. 거듭 왜적의 변란으로, 밀양이 잔악하고 심한 해를 입어, 묘 앞의 비석이 허물어져 써 놓은 글도 아울러 잃어버리게 되었다. 관계 문적이 없어져 지금 수습한 것은 특히 대악의 털끝만한 것이다. 초간 권문해의 만시 ‘허리에는 세성의 인끈을 찼고’ 란 구절에 근거하여 보면 문득 예안, 울산에 그치지 않지만 지금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태어난 해의 갑자도 또한 전해지지 않으니, 개탄스러울 뿐이다. 비록 그러하나 문장에 있어서는 선사의 제문 1편 및 <남수정>시 1편도 또한 많다고 이른다. 그 업적은 읍지에 잘 실려져 있는데 예안에서는 ‘자세하고 밝아 정밀했다.’ 고 말했고 울산에서는 ‘학교를 돈실히 관리했으며 정치가 한 세상의 으뜸이었다.’ 고 말했고, 본 고을에서는 ‘학행에 중망을 들었다.’ 고 했으니 이것이 공안이다. 내가 효열을 보니 두 정려가 서로 빛나 한 가정에 삼강이 갖추어져 있음은 실로 선으로 자식을 잘 가르치고 선도한 까닭이지 하루아침에 갑자기 억지로 힘써서 된 것이 아니다. 대개 공의 가정의 가르침과 이어받고 전하는 것을 보면 속된 학문과 다른 면이 있으니 아름다운 일이다. 환하게 트인 풍모는 겉과 속에 차이가 없게 되었고 착한 것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성실하고도 남음이 있었기에, 한번 말함에 모든 사람들이 믿고 따랐다. 약봉 김극일이 송계 신계성의 장려문을 지었는데, 특별히 공을 거론하여 칭찬하여 말하기를, 그 계획을 찬성한 사람은 손선생 모라 하였으니, 중망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대저 근본에, 내적인 돈독함이 있었기에, 밖으로 촉발되어 다 분석해 내는 것이 모두 크고 멀며 오래도록 큰 계책에서 나와서, 앞선 현철들이 입덕한 규범에 아주 가깝게 되었다. 약조의 계문같은 것은 학정의 으뜸이다. 이것은 공을 남긴 근원이며 도산의 사당과 서원을 창건함에, 사문을 드러내고 세도를 편 것이, 일상적인 사업으로 견주어 논할 수 없다. 당초의 계획은 시작할 때부터 여러 어진 이들에게서 고르게 나온 것이지 공의 독자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 고을의 최고 책임자로서 단단히 붙어서 담당을 했기에, 명령과 통솔하는 사이에 여러 가지 일의 단서가 된 것이 모두 쌓인 것이다. 마침내 궐리로 하여금 금사당의 얽음이 빛나도록 하여 그 도를 높이고 기풍을 세우는 열광을 멀리서 맞이하여, 유극장이 고정서원에 대해서 한 것과 한보가 자양서원에 대해 한 것과 함께 전후에 같은 방법으로 오래도록 드리워 도산의 문도들을 더욱 빛낸다고 말한 것이, 어찌 아첨하는 것이겠는가? 이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느낀 바가 있다. 공을 이룬 것이 그 꽃다운 이름을 남긴 것과 같은데 비록 입지가 일찍 이루어진 것 때문일지라도 그 실은 사우들이 좋은 감화를 받도록 도와줌이 많은 것이다. 세상에 문을 닫고 홀로 배워 스스로 터득하는 사람이, 장차 공의 뒤를 밟으려고 하다가 피로에 지쳐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일이 있는 날 실행하는 풍교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게 될 것이며, 공이 일으킨 뒤에 오는 사람도 이에 이르러 멀지 않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홀로 당시 주고받은 지결에 단적으로 증거될 만한 것이 있지 않으니, 옛것을 숭상하는 자들이 유감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그 행적으로 인하여 그 마음을 구하고, 다시 스승을 모신 자리에서 종일토록 (강구한) 묘안을 참고해서 상상을 하면 거의 얻는 바가 있게 될 것이다. 야순은 같은 고을의 후배이다. 서당 혹은 서원에 드나들면서 개연히 공의 풍모를 바라고 사모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의 8대손인 송구가 멀리서 내가 있는 백석탄 위 자하산 속을 찾아와서 행장을 부탁하기에 돌아보니 먼 말세의 사람으로 어찌 감당을 하겠는가? 일어나 청하기를 두 번 세 번 하면서 이어서 경계하여 말하길 “우리 선조께서 노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했기에, 오늘 그대에게 부탁을 하는데, 그대가 무정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해서 바라고 사모함이 있다고 하십니까?”하였다. 야순이 서원 제향의 의논을 생각하니, 우리 고향으로부터 발의된 것이 오래되었는데도 답답하게 뜻을 펴지 못하고, 또 죽은 사람의 덕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끝내 가려져서 밝게 피어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들이 거듭 불민한 책임이다. 그래서 경계한 것이 진실로 옳다는 생각이 들어 감히 참람을 무릅쓰고 선대의 편지에 근거해서, 사이에 평일에 마음속으로 느낀 바를 부기하여, 바른 말을 세우는 군자들이 채택하도록 갖추어 쓴다. 경신(1760) 반하절에 진성 이야순은 삼가 행장을 쓰다. 㰡”퇴계학연구㰡• 경상북도편

墓碣銘

鄒川先生孫公 卒二百有餘年 其耳孫承九氏以門意 來命是瓚曰先祖事行 宜應銘法 江海間舊蹟之盡於蠻燹 吾家三世之單而又早世 子所知也 平日日可見者今曷從以詳 惟子生長桐鄕 知吾祖事異夫人 今以屬之子 嗚呼蹟偉而辭拙 僬僥於千匀矣 顧何敢 惟公之來我邦及退陶先生世 裁下車則摳衣巖棲服其誨 退而與門下諸賢 相觀以善 如趙月川穆琴日休應夾吾家後凋諸公 疇非道義以劘者而先雪月公其尤也 旣以事契責 雖不文 亦不敢辭 遂次其世系屨歷生卒德業子孫 㑭揭諸阡 其世系羅代有得鍾而以孝聞者曰順 載三綱行實 麗朝有以南征勳胙廣理茅者曰兢訓 孫之籍密陽 始此 其後世有顯人 至曾大父諱信復 始補西班 大父諱世蕃 不仕 父諱凝 官列正 母趙氏籍咸安 少宰孝同 寔祖 士人光遠 寔父也 其屨歷嘉靖辛酉 闡大科 歷國子典籍 內敍則春夏二官員外郞郞中霜臺侍御史 外出則縣監禮安府使蔚山 或云中間守榮川郡而無可攷 其生卒生年未聞 卒戊子 得於公友權草澗文海集中 其葬 密陽府東推火山坐刻原是也 其德業 公少力學 不專治公車 嘗敎授數邑 戶外嘗屨滿 於禮也 以縣之學制多未備 皷篋者靡所稽以程也 遂質諸師門 議于同志 著學令數十條 以勸迪之 至今吾鄕之言文化者必稱首公 及山頹也 請于方伯金黃岡繼輝 捐俸立陶山祠 秩滿加一載 甲戌秋始歸 雪月公 有刀用言游室 琴鳴宓賤堂 及淸風不受四知金之句 其爲治之出學道 可知也 翌年夏延額陶院也 又北行四百里 參諸弟子列其篤於斯文 又如此 蓋公登門雖晩 旣質美矣 行修矣 學積矣 大師爐鞴之化 賢友麗澤之益 宜其丹漆之易受 蓬麻之自直矣 晩又築鼇淵山水 枕藉經傳以終 其所至 非後生可測度而今以公之所施於邑 吾先詩之引孔門兩賢者 參看於蔚州 志敦修學校 政冠一世之語 公之彬然成德 又可推也 其子孫 公娶達城徐氏縣監時重之女 有五男二女 男起門起倫起業起後起命 全時憲李汝(言+亟) 其婿也 執徐難 徐淑人 竄山谷 賊卒逼 起倫以身翼蔽 竟捄母而身不免 第四婦張氏剝面投崖 事聞俱命旌 起門早亡無嗣 起倫有一男瞻起業餘男三桂枝覺覽起後有一男盼宣 敎郞全男有翼生員有慶有章參奉李男廷俊瞻又無嗣盼有二男昌祖胤祖以下不盡錄其有科宦者 玄孫碩佐 進士號星隱碩冑武科判官 五代孫萬重文科察訪 六代孫孝曾進士僉中樞 七代孫克福武科府使 公諱英濟 字德裕 鄒川之號 出後凋稿鄒 蓋公所居地 因以自號云 銘曰惟學之博 惟正之師也 惟德之進 惟友之資也 惟孝烈之竝 惟敎之成也 惟先生之烈 惟後人之程也 朝奉大夫前行童蒙敎官金是瓚撰

墓碣銘

密陽之孫 系出新羅大樹部 中世有諱順 以孝感 得天降石鍾 賜牟梁一區 事瑴東京誌及三綱行實 入麗朝有諱兢訓 以平南功 策封廣理君 廣理 卽今之密陽 孫之貫 始此 有政堂文學密城君諱贇 門下評理 季卿承旨承吉 三傳至軍資監正諱凝 娶咸安趙氏處士光遠之女 生五男 第三英濟 卽鄒川先生也 與弟宏濟兼濟俱捷司馬 勵志劬工 夙有儒望 屢薦學職 訓誨後進 遠近生徒坌集 明廟辛酉登明經科 內而歷典籍兵曹正佐卽司憲府持平外而典三邑 皆有聲績 其守禮安 在隆慶三年 時退溪先生 倡道于陶山 公下車卽摳衣執弟子禮 講究質疑 大被奬許 嘗於巖棲軒講席 論浊平九經章 每精微處剖柝其要領 老先生深許其博洽密察 退與金後凋雪月挹淸趙月川李梅巖琴日休勉進惺齋金藥峯權草澗李艮齋諸賢 講劘道學 更相推重 後凋贈公詩曰章安作守公應是 璆稚爲賓我豈人 不下范君興學校 寧慚王令受緋銀 雪月詩曰淸風不受四知金 六載臨民用意深 邈邈君門難借寇 因家非戱是誠心 公亦聯翩唱酬 其交際相與之殷 可見 月川惺齋喪 竝致賻 以寓同門之慟 以縣學儀制之多未備 質之師門 重修聖廟 著定學規數十條 與當時諸贒 列署姓名於立約案 又增置四十丁 爲永世守護之圖 至今遵行不替焉 庚午老先生下世 公躬執斂襚 盡誠禮 爲文以祭之 亟請于方伯金黃岡繼輝 捐俸倡立陶山祠 雪月公有詩美之曰昔日莊修地 諮諏屬世英 起工隨物力 敦事盡心情 秩滿 以治蹟加一年 甲戌始解歸 翌年夏延額陶山也 又與門墻諸公 齊會而公首題於院錄 晩年卜築鼇淵 扁以慕禮 以寓山仰之誠 其宰蔚山也 一如治禮安時 邑誌有曰敦修學校 政冠一世 又曰有學行文望 此皆實蹟也 第其中經兵燹 重以家禍甚酷 後承單孑 家藏文蹟墓道珉碣 蕩殘無餘 竝其肇卒年紀仕宦屨歷 無從而攷焉 惜乎 噫國朝㝡重儒術 在明宣盛際 尤彬彬蔚興而公於是時 屢應儒薦 歷掌學職 望實之隆 固一時之所推而又得依歸於大賢之門講究經旨 屢蒙先師之印可 看詳條列 始備學宮之儀節 及夫樑摧以後 卽倡楹奠之議 一區新祠 創自廩餘 永基百世藏之所 以雪月詩中聖廟恢新制 賢祠煥舊莊之句 見之 其羽翼斯文之功 固不可泯也 政事亦四科中一而武城之刀 單父之琴 著見於當峕諸賢之所稱詡 有可以斑斑證嚮而攷信於百代之後也 第其世遠跡湮 閟而不章者 殆百年有䭎而粤在癸酉 始因陶院舊蹟而溯得其詳 繼而諸賢遺集之出而段段散見者皆可按而知也 於是乎後生末學 始知公之問學如此 政化如此 有功於斯文 又如此 莫不咨嗟闡明之是圖 陶山先發 紹修繼之 以至列邑多士一辭推仰 揭虔之議尙德之誠 蓋亦秉彛好懿之良心而發潛闡幽之會 亦有峕而然歟 配達城徐氏縣監時重之女 墓在大邱豐角縣乾坐原有五男二女男起門起倫起業起後起命女全時憲李汝(言+亟) 孫曾以下兟兟不盡錄逮在龍蛇之亂 第二子起倫 負母夫人避亂 遇賊翼蔽死之 第四子婦張氏投崖而死 俱旌閭 從子起陽三倡義旅 備有勞蹟 當昏朝屢辭徵辟 道學名節 爲世所稱 號聱漢先生 家庭之間 趾美襲芳 源流之所自來 有可以牽連書之 偉哉 銘曰菀彼陶院誰其創之知縣斯倡典爲之基維公之賢夙膺剡章學有淵源績著循良世遠籍燬名與跡湮塵蠧眜眜慨我後人院蹟縣志幽潛始闡功之所存名因而顯傍攷信蹟同門攸贊匪我言謏公議是按 崇祿大夫前行兵曹判書兼知經筵春秋館事韓致應撰

遺事

先生諱英濟 字德裕 號鄒川 孫氏之系出新羅大樹部 至興德世有諱順 以孝著稱 賜年梁一區 語在東京誌 高麗時 有諱兢訓 以南征功 封廣理君 廣理 卽密陽古號 仍貫籍 有政堂文學封密城君 曰贇 有門下評理曰季卿 是生文科承旨承吉 是生節度使以恂 是生進勇校尉信復 是生世蕃 是生軍資監正凝 卽公之先考也 妣咸安趙氏吏曹參判孝同之孫處士光遠之女也 先生自髫齕 儼然有老成局度 與二弟宏濟兼濟 俱捷司馬 勵精勤劬 篤志力學 以儒望 被薦爲列邑訓導 所在勤於敎督 生徒坌集 明廟辛酉 登明經科例陞資屢薦至典籍 歷兵禮曹佐郞正郞司憲府持平 外而歷典三邑 禮安榮川蔚州也 所莅皆有治績 時退陶先生 倡道東南 爲世儒宗 公之在禮安也 登門贄見 簿牒之暇就質講學 嘗於巖棲軒 講治平九經章 至於精微之處 刻意深索 老先生深許其博洽密察 又以書謝終日陪席之幸 退而與及門諸賢契 以道義投書贈詩 切偲勸勉 如金後凋富弼雪月富倫琴惺齋蘭秀日休應夾勉進應塤趙月川穆權草澗文海李艮齋德弘李梅巖叔樑皆一時之翹楚 師門薰灸之餘 資以麗澤之益 信道之篤取友之端 此其大較也 其莅民 以興學爲第一件急務 增修聖廟 著定學規 訂質師門 永爲楷貳 於是宣城之文化蔚然後金矦光遂跋其條約曰申明奉行 如關石和匀 以續孫矦故事云者 卽此也 及庚午樑夢之痛 公設奠致哀 以敍其考德未終之恨 仍請于時方伯金黃岡繼輝 創陶山祠 其經理之道措畵之方 公與有力焉 金雪月詩云昔日莊修地 諮諏屬世英 起工隨物力 敦事盡心情 蓋記實而美之者也 乙亥宣額於陶山也 公跋涉遠程 首題院錄 晩構小亭於鼇淵之上 杖屨自適 以遂初服 名其坊曰慕禮 以寓山仰之懷 至今過者指點爲慕禮書堂 按本府邑誌藥峯金公早日讀書于府治東靈井寺 公與之友善 及藥峯金公 來莅本州也 式於閭而契最深 立松溪申徵士季誠閭 表碑而其文有贊其計者 孫先生英濟之語 槩見其尊敬之至推詡之深也 公以戊子十月九日卒 墓推火山長善先壠負亥之原 配淑人達城徐氏平章事勻衡之后縣監時重之女 生五男二女長起門次起倫起業起後起命女適全時憲李汝(言+亟)起門起命无后起倫 奉母避亂 遇賊翼蔽死之 起後妻張氏 投崖殉節 俱旌閭 壻李汝(言+亟)倡義殉國 蓋見公敎導之有素也 起後生盼宣敎郞全時憲生子有翼生員有慶有章參奉李汝(言+亟)生子廷俊餘不盡錄嗚呼戴經 有云 古之君子論撰其先祖 無美而稱之 是誣也 有善而不知是不明也 知而不傳 是不仁也 公之實行實蹟 若是其昭乎不誣而自經喪始家禍孔酷 一二孱孫 歷來屢世 罔或克壽 家藏文獻 蕩失於兵燹之 中墓道前 舊有小碣而今不見存 獨趺石在耳 用是從仕年條及言行實蹟 生年月日 俱未能詳焉 獨邑乘有學行文望四字而已 痛矣痛矣 自近年來 陶院之舊蹟 始發 諸賢巾衍中唱酬文字往復書札 於是焉次第裒搜 始章章焉可傳於世 抑顯晦之有時而然耶 迺者秉彛所同 遠邇齊聲 欽慕景行 責以畏壘而時詘擧嬴 全沒巴鼻 不肖輩不明不仁之罪 又安可逃也 只有感涕而已 顧甲東以八世後裔 識蔑生晩 每中夜以思 痛先蹟之將湮 慨志願之未遂 略敍鄕里世系 附以子孫列錄 參考宣城諸賢手墨 裒輯遺事 恭俟秉筆君子之取擇焉

 遺事

先生諱英濟 字德裕 密陽人 號鄒川 其先系出大樹部 至興德王時 有諱順 以孝感得天降石鍾 賜牟梁一區 事載東京誌 及三綱行實 入麗朝有諱兢訓 以平南功 封廣理君 廣理 卽今之密陽 子孫仍貫于密 有政堂文學密城君曰贇 有門下評理曰季卿 有承旨曰承吉 有節度使曰以恂 是生諱信復進勇校尉 是生諱世蕃 忠順衛 是生諱凝 軍資監正 卽公之考也 妣咸安趙氏吏曹參判孝同之孫處士光遠之女也 先生早捷司馬 與二弟生員宏濟生員兼濟勵志劬工 不專事公車業 以儒望 屢薦學職 訓誨敎督 生徒坌集 明廟辛酉 登明經科 陞典籍 內歷兵禮曹佐正郞司憲府持平 外典三邑 所莅皆有治績隆慶二年正月 始守禮安 旣下車 卽摳衣於退陶先生之門 質疑講究 大被奬詡而老先生與書謝終日陪席之幸 巖棲軒講席 論治平九經章 公於精微處刻意深索 必究其要領 先生深許其博洽密察 退與門下諸賢 講磨道義 如金後凋富弼雪月富倫挹淸富儀趙月川穆李梅巖叔樑琴日休應夾勉進應塤金藥峯克一琴惺齋蘭秀權草澗文海李艮齋德弘諸賢 更相推重 後凋公贈詩曰章安作守公應是 璆稚爲賓 我豈人 不下范君興學校 寧慚王令受緋銀 雪月公贈詩曰淸風不受四知金 六載臨民用意深 邈邈君門難借寇 因家非戱是誠心 又曰虛堂雪月交明夜 十里相思白盡頭 公贈後凋詩曰君在山中我水濱 山靑水白兩無塵 從今始覺幽棲好 野服行尋如玉人 又曰質疑屢釋平生惑 君是吾師勿謂民 賻月川以槨板 助惺齋以喪需 庚午夏以縣學儀制多未備 遂質之師門 議諸同志 重修(文+王)廟 著定學規數十條 與當時諸名勝 列書姓名於立約條後 又置四十額丁 爲永世護守之圖 後公百餘年 金矦光遂 宰是邑 跋校宮舊約下曰敬以隆慶約條 申明奉行 如關石和勻 以續孫矦古事 庚午冬老先生易簀 斂襚纔畢 爲文以祭 仍請于時方伯金黃岡繼輝 捐俸創立陶山祠 雪月公有詩美之曰昔日莊修地 諮諏屬世英 起工隨物力 敦事盡心情 又曰聖廟恢新制 賢祠煥舊莊 秩滿 以軍籍勞 加一年 萬曆二年甲戌始歸 雪月公送別詩曰分憂百里內 施惠六年強 隆慮喬元達 中牟魯仲康 春晴簾靜影 日出錦生香 刀用言游室 琴鳴宓賤堂 周詩同愷悌 漢吏比循良 乙亥延額陶山也 同門諸賢 齊會而首題于院錄 晩卜築鄒川之上 鼇淵之曲 扁以慕禮 以寓慕師門而志其地也 自虵梁變後 邊釁已啓 朝廷方有南顧之憂 其題攬秀亭詩曰軒通北極懷先瀉 眼闊南荒炁益橫 萬曆丙子 藥峯金公之宰密邑也 撰松溪申公季誠閭碑文曰贊其計者 孫先生某 禮安縣案曰決訟詳明 處事精 密後治蔚山也 其邑誌曰敦修學校 政冠一世 本府誌曰有學行文望 權草澗輓詩曰腰佩三城印 民歌五袴恩 此皆公平日造詣也 龍虵之變 第二子起倫 奉母夫人避亂 遇賊翼蔽死之 第四子婦張氏 投崖死之 事閒俱旌閭 從子起陽丁海冠而三倡義旅 退昏朝而屢辭徵命 道學風節 聯芳趾美 當世學者尊之爲聱漢先生 一室三綱炳朗于世 卽此亦可知 家庭之敎 致使然也 夫以國朝成際專尙經術 最重儒薦 公乃屢掌敎授 誘掖後進 學固㔾優而猶就正有道 講究經旨荷函丈博約之褒 創立學條致庠宮儀度之詳 一心幹院 克殫築場之誠 二字扁楣 遙寓見墻之思 若後凋雪月月川藥峯諸公俱是陶山高弟其唱酬詩律 往來書牘 有可以班班證的而至以隆慮之喬 中牟之魯 楊之金 廉之袴 稱詡而贊美之 況乎武城之刀 單父之琴 居聖門文學之科 承魯邦郡子之奬而擬公必以其倫 宜其同門之賢 特加先生之號於傳信之筆也 且其褱瀉北極氣橫南荒之句 可見愛君憂國廓掃蠻陬之志而終焉子孝婦烈 棹樑交映於一室之內 斯可驗公忠義敎養之有素也 於乎公之尊師衛道之誠 不下於儲行之之於考亭 周愼齋之於紹修則宜其士林 有尸祝之奉 朝家有贈貤之恩而所以泯泯至今者 其亦有所由矣 蓋經亂以後 家禍孔酷 遺孫單子 連世早歿家藏文籍墓道遺碣 盡入於兵燹 家牒官誥無從而㴑考 迄今二百餘年 沈晦而莫之顯焉 斯豈獨後孫之慨恨哉 抑亦斯文之不幸也 粤自癸酉以來 陶院之舊蹟 㛌露 諸贒之遺集畢行 一道人士於是始知公學問之純粹政化之綜密 尤有功於師門 又如此 莫不齎咨永歎 聞風興想 擧皆有高山景行之思 闡幽發潛之意 陶院先發 紹修繼之 遠近衿紳同辭無異 尊仰焉欽慕焉不置 譬如精金良玉 雖或黯然沈沒於泥滓汚濁之中 精靈光怪必有發現昭著之日則其爲寶也固自若而其理 卽天也 第念尙闕揭虔之禮 又欠褒異之典 後生於此 不得無曠代之感 抑菀之情 然 秉彛好德 蓋是同聲之相應則潛光幽蹟亦有闡揚之時歟 配達城徐氏縣監時重之女 贈左相勻衡之后墓在大邱豐角米太山乾坐之原 有五男二女起門起倫起業起後起命女全時憲李汝(言+亟)孫男瞻起倫出也盼起後出也起業有餘男桂枝覺覽起門起命俱无后全時憲三男有翼生員有慶有章參奉李汝(言 +亟)一男廷俊曾孫守光瞻出也欽祖桂枝出也敬祖念祖尙祖應祖覽出也昌祖胤祖盼出也玄孫碩輔碩佖碩佐成均進士碩賓昌祖出也碩冑武判官胤祖出也九世孫承九悼先蹟之將晦 玆敢略擧世系德行學術之實蹟 恭竢立言之君子採擇焉

 

돌아가기

Copyright ⓒ 2004 국제퇴계학회 대구경북지부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