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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편 - 陶山書院(도산서원) -

 
위치 :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건축 : 1574년(선조 7) 창건, 1575년(선조 8) 사액, 1614년(광해군 6) 趙穆 追配, 서원철폐령 때 존속한 서원, 1969-1970년 정화작업
배향인물 :  이황(李滉), 조목(趙穆)
배향일: 2월 中丁日, 8월 中丁日
기타 : 사적 제170호(1969.5.28), 典校堂: 보물 제210호(1963.1.21), 陶山書院 尙德祠附正門 및 四周土塀: 보물 제211호(1963.1.21), 陶山書院圖: 보물 제522호(1970.8.27)
『嶠南誌』: 在郡東十里宣祖甲戌建乙亥賜額享文純公李滉光海乙卯從享工參趙穆

 

▶ 해설

 선조 7년(1574) 서원을 건립하여 退溪 李滉(1501-1570) 선생의 위패를 奉安하고 이듬해인 선조 8년(1575)에 ‘陶山’이라는 사액을 받아 石峯 韓濩(1543-1605)가 쓴 편액을 국왕이 하사하였으며 광해군 6년(1614)에 이르러 士林이 月川 趙穆(1524-1606) 선생을 從享하게 되었다. 陶山書院은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는 동시에 영남 유림의 정신적 중추 구실을 하였으며,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당시에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1969년과 1970년에 정부의 고적보존정책에 따라 성역화 대상으로 지정되어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 서원 경내의 건물로는 陶山書堂․隴雲精舍․亦樂書齋․下庫直舍 등 도산서당 일곽의 건물을 포함해 尙德祠․典敎堂․典祀廳․博約齋․弘毅齋․東光明室․西光明室․藏板閣․上庫直舍 ․內三門․進道門․玉振閣 등이 있다. 서원으로 출입하는 정문은 進道門이다. 진도문 좌우측으로는 東光明室과 西光明室이 담에 연이어 위치하고 있다. 光明室은 藏書庫로서 임금이 하사한 서적, 퇴계가 보던 서적, 그리고 퇴계의 門徒를 비롯한 여러 유학자들의 문집을 모아 둔 곳이다. 東光明室은 1819년(순조 19)에 지은 건물이고, 西光明室은 1930년에 東光明室과 같은 모습으로 지은 건물이다. 진도문을 들어서면 맞은편에 강당인 典敎堂이 높게 조성된 기단 위에 서 있고, 좌우에는 東齋와 西齋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강학공간을 형성하는 이 일곽은 엄격한 좌우대칭을 한 배치를 하여 강학공간으로서의 규범을 보이고 있다. 典敎堂은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건물로서, 전체적으로 큰 대청을 형성하고 서쪽으로만 閑存齋로 불리는 한 칸의 온돌방이 있다. 이방은 원장이 거처하던 방이다. 강당 대청 뒤쪽으로는 쪽마루가 설치되어 있고, 전면 뜰 아래에는 庭爎臺가 설치되어 불을 밝힐 수 있게 했다. 東齋인 博約齋와 西齋인 弘毅齋는 각각 정면 세칸, 측면 두칸의 홑처마 맞배집으로 유생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서원의 제향공간은 강당 뒤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사당인 尙德祠는 정면 세칸, 측면 두칸의 팔작지붕을 한 건물로서, 退溪 李滉과 제자 月川 趙穆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목은 열다섯 살에 퇴계의 문하생으로 들어와 마흔일곱 살때까지 가장 가까이 퇴계와 인연을 맺었고, 퇴계 사후에는 문집 발간 등의 추모사업과 도산서원 건립에 심혈을 기울였다. 1614년(광해군 6) 왕의 재가를 받음으로써, 퇴계의 제자 중 유일하게 도산서원 從祀者가 되었다. 사당 출입문인 內三門의 오른쪽 계단은 제향 때 들어가는 오른쪽 문으로 오르는 계단이고, 왼쪽 것은 나올 때 이용하는 문과 계단이다. 강당의 동쪽, 사당의 남쪽 아래에는 문집 판목이 보관된 藏板閣이 있고, 사당 서남쪽 아래에는 향사 때 향례를 보조하며 제수를 마련하는 典祀廳이 있다. 전사청은 두 동으로 이루어졌는데, 동쪽의 건물은 제기고로 쓰이고 서쪽의 건물은 酒廳으로 쓰이는 관계로, 한 칸은 바닥이 마루이고 다른 한 칸은 흙바닥[土床]으로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전돌바닥으로 바뀌어 외부로 트여 있다. 尙德祠와 典祀廳 사이에는 협문이 나 있다. 강당 일곽과 도산서당 서쪽 두 곳에는 서원을 지키고 관리하는 庫直이 거처하던 庫直舍가 있는데, 각각 上庫直舍․下庫直舍라고 한다. 퇴계가 생존시 사용하던 각종 물품과 서책, 그리고 출판물은 1970년 보수할 때 지은 유물전시관인 玉振閣에 전시되어 있다. 도산서원 도서관인 東․西 光明室에는 1,271종, 4,917책의 장서가 있는데, 이곳에는 퇴계 선생의 서간첩인『師門手簡』을 비롯하여 선생의 手澤本 또는 문집과 선생의 저서 및 그 후의 수증본이 수장되어 있다. 장판각에는 선생의 문집을 비롯하여 『교남빈홍록』등 총 37종 2,790판이 소장되어 있다. 유물전시관은 1970년에 보수할 당시 신축한 건물로서 선생의 유품인 자리․베개 등의 실내비품과, 梅花硯․玉書鎭 등의 문방구, 靑藜杖․梅花燈․投壺․渾天儀 등이 소장되어 있다. 이 서원은 1969년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었으며, 도산서원 전교당은 1963년 보물 제210호, 도산서원 상덕사 및 정문과 둘레담은 1970년 보물 제211호로 지정되었다.

 

▶ 관련 글

陶山記

靈芝之一支 東出而爲陶山 或曰 以其山之再成而命之曰 陶山也 或云 山中舊有陶竈故 名之以其實也 爲山不甚高大 宅曠而勢絶 占方位不偏 故其旁之峯巒溪壑 皆若拱揖環抱於此山然也 山之在左 曰東翠屛 在右 曰西翠屛 東屛來自淸凉 至山之東 而列峀縹緲 西屛來自靈芝 至山之西 而聳峯巍峩 兩屛 相望南行 迤邐盤旋八九里許 則東者西 西者東 而合勢於南野莽蒼之外 水在山後 曰退溪 在山南 曰洛川 溪循山北 而入洛川於山之東 川自東屛而西 趨至山之趾 則演漾泓渟沿泝數里間 深可行舟 金沙玉礫 淸瑩紺寒 卽所謂濯纓潭也 西觸于西屛之崖 遂並其下 南過大野 而入于芙蓉峯下 峯 卽西者東 而合勢之處也 始余卜居溪上 臨溪縛屋數間 以爲藏書養拙之所 蓋已三遷其地 而輒爲風雨所壞 且以溪上 偏於闃寂 而不稱於曠懷 乃更謀遷 而得地於山之南也 爰有小洞 前俯江郊 幽夐遼廓 巖麓悄蒨 石井甘冽 允宜肥遯之所 野人田其中 以資易之 有浮屠法蓮者幹其事 俄而蓮死 淨一者繼之 自丁巳至于辛酉 五年而堂舍兩屋 粗成 可棲息也 堂凡三間 中一間 曰玩樂齋 取朱先生 <名堂室記>「樂而玩之 足以終吾身 而不厭」之語也 東一間 曰巖栖軒 取<雲谷詩>「自信久未能 巖栖冀微效」之語也 又合而扁之曰 陶山書堂 舍凡八間 齋曰時習 寮曰止宿 軒曰觀瀾 合而扁之 曰隴雲精舍 堂之東偏 鑿小方塘 種蓮其中 曰淨友塘 又其東 爲蒙泉 泉上山脚 鑿令與軒對 平築之爲壇 而植其上梅竹松菊 曰節友社 堂前出入處 掩以柴扉 曰幽貞門 門外小徑 緣澗而下 至于洞口 兩麓相對 其東麓之脅 開巖築址 可作小亭 而力不及 只存其處 有似山門者 曰谷口巖 自此東轉數步 山麓斗斷 正控濯纓潭上 巨石削立 層累可十餘丈 築其上爲臺 松棚翳日 上天下水 羽鱗飛躍 左右翠屛 動影涵碧 江山之勝 一覽盡得 曰天淵臺 西麓 亦擬築臺 而名之曰 天光雲影 其勝槩當不減於天淵也 盤陀石在濯纓潭中 其狀盤陀 可以繫舟傳觴 每遇潦漲 則與齊俱入 至水落波淸 然後始呈露也 余恒苦積病纏繞 雖山居 不能極意讀書 幽憂調息之餘 有時身體輕安 心神灑醒 俛仰宇宙 感慨係之 則撥書攜笻而出 臨軒玩塘 陟壇尋社 巡圃蒔藥 搜林擷芳 或坐石弄泉 登臺望雲 或磯上觀魚 舟中狎鷗 隨意所適 逍遙徜徉 觸目發興 遇景成趣 至興極而返 則一室岑寂 圖書滿壁 對案嘿坐 兢存硏索 往往有會于心 輒復欣然忘食 其有不合者 資於麗澤 又不得 則發於憤悱 猶不敢强而通之 且置一邊 時復拈出 虛心思繹 以俟其自解 今日如是 明日又如是若夫山鳥嚶鳴 時物暢茂 風霜刻厲 雪月凝輝 四時之景 不同 而趣亦無窮 自非大寒大暑大風大雨 無時無日而不出 出如是 返亦如是 是則閒居養疾 無用之功業 雖不能窺古人之門庭 而其所以自娛悅於中者不淺 雖欲無言 而不可得也 於是 逐處各以七言一首 紀其事 凡得十八絶 又有蒙泉冽井庭草澗柳菜圃花砌西麓南沜翠微寥朗釣磯月艇鶴汀鷗渚魚梁漁村烟林雪徑櫟遷漆園江寺官亭長郊遠峀土城校洞等 五言雜詠二十六絶 所以道前詩不盡之餘意也 嗚呼 余之不幸晩生遐裔 樸陋無聞 而顧於山林之間 夙知有可樂也 中年 妄出世路 風埃顚倒 逆旅推遷 幾不及自返而死也 其後年益老 病益深 行益躓 則世不我棄 而我不得不棄於世 乃始脫身樊籠 投分農畝 而向之所謂 山林之樂者 不期而當我之前矣 然則余乃今所以消積病豁幽憂 而晏然於窮老之域者 舍是將何求矣 雖然 觀古之有樂於山林者 亦有二焉 有慕玄虛 事高尙而樂者 有悅道義 頤心性而樂者 由前之說 則恐或流於潔身亂倫 而其甚 則與鳥獸同羣 不以爲非矣 由後之說 則所嗜者糟粕耳 至其不可傳之妙 則愈求而愈不得 於樂何有 雖然 寧爲此而自勉 不爲彼而自誣矣 又何暇知有所謂世俗之營營者 而入我之靈臺乎 或曰 古之愛山者 必得名山以自託 子之不居淸凉 而居此何也 曰 淸凉壁立萬仞 而危臨絶壑 老病者所不能安 且樂山樂水 缺一不可 今洛川雖過淸凉 而山中不知有水焉 余固有淸凉之願矣 然而後彼而先此者 凡以兼山水 而逸老病也 曰 古人之樂 得之心而不假於外物 夫顔淵之陋巷 原憲之甕牖 何有於山水 故凡有待於外物者 皆非眞樂也 曰不然 彼顔原之所處者 特其適然 而能安之爲貴爾 使斯人 而遇斯境 則其爲樂 豈不有深於吾徒者乎 故孔孟之於山水 未嘗不亟稱而深喩之 若信如吾子之言 則與點之歎 何以特發於沂水之上 卒歲之願 何以獨詠於蘆峯之巓乎 是必有其故矣 或人唯而退 嘉靖辛酉 日南至 山主老病畸人記
영지산의 한 줄기가 동쪽으로 나와 도산이 되는데, 혹자는 말하기를 산이 또 이 루어졌기 때문에「도산」이라 명명하였다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산속에 옛날에 질그릇 가마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을 가지고 이름을 붙인 것이라 한다. 산은 그리 높거나 크지 않지만 널리 트인 곳에 자리잡아 형세가 빼어나며 차지 하고 있는 방위가 치우치지 않기 때문에 그 곁에 있는 산봉우리며 메, 시내와 골 짝이 모두 이 산에서 두손을 맞잡고 절하며 둥글게 빙 둘러싸고 있는 것 같다. 산은 왼쪽에 있는 것은 동취병이라 하고 오른쪽에 있는 것은 서취병이라 한다. 동취병은 청량산에서 나와 산의 동쪽에 이르러 멧부리가 아득하게 늘어서 있다. 서취병은 영지산에서 나와 산의 서쪽에 이르러 봉우리가 삐죽삐죽 솟아 있다. 두 취병산은 서로 바라보며 남쪽으로 가는데, 비스듬히 8, 9리 가량 돌아가면 동쪽 의 것은 서쪽으로, 서쪽의 것은 동쪽으로 와서 남쪽 들녘의 아스라한 바깥에서 산세가 합쳐진다. 물은 산의 뒤에 있는 것을 퇴계라 하며 산의 남쪽에 있는 것은 낙천이라 한다. 퇴계는 산의 북쪽을 돌아 산의 동쪽에서 낙천으로 들어간다. 낙 천은 동취병에서 서쪽으로 흘러 산기슭을 향하여 이르니 멀리 흐르다 깊이 고이 기도 하며 몇 리나 내려가다가 거슬러 올라오기도 하는데 깊어서 배가 다닐 수 있다. 금빛 모래며 옥 같은 자갈이 맑고 환하며 검푸른 빛을 띠고 차갑게 비치니 곧 이른바 탁영담이다. 서로 서취병의 기슭에 닿아 마침내 그 아래를 따라 남으 로 큰 들판을 지나 부용봉 아래로 들어간다. 부용봉은 곧 서쪽의 것이 동으로 와 서 형세가 합쳐진 곳이다. 처음 내가 퇴계의 가에 살 곳을 정하여 시냇물이 보이 는 곳에 집 여러 칸을 얽어서 책을 간직하고 나의 보잘 것 없는 심신을 기르는 곳으로 삼았다. 대체로 이미 세 번이나 그 터를 옮기니 여차하면 비바람에 무너지 고 게다가 냇가가 너무 고요하고 적막한 곳에 치우쳐져 마음을 넓히기에는 부적 합하여 이에 다시 옮기고자 하여 도산의 남쪽에다 땅을 얻었다. 이곳에는 작은 골 짜기가 있어 앞으로는 강과 교외를 굽어보며, 그윽하고 아득하며 둘레가 멀고 바 위 기슭은 초목이 빽빽하고도 또렷한데다가 돌우물은 달고 차서 은둔하기에 딱 알맞은 곳이었다. 원래는 농부가 그 가운데서 밭을 일구고 있었으나 재물로 바꾸 고 법련이라는 중이 그 일을 맡았는데, 얼마 있지 않아 법련이 죽자 정일이라는 중이 그 일을 이어받았다. 정사년(1557)부터 신유년(1561)까지 5년이 걸려 서당과 정사(精舍) 두 채가 대략이나마 완성되어 깃들어 쉴 수 있었다. 서당은 모두 세 칸이며 가운데 칸은 「완락재」라 하였는데, 주자의 <명당실의 기문>에 나오는 「그것으로 즐기며 완상하니(樂而玩之) 족히 종신토록 싫증이 나지 않는다.」는 말에서 취하였다. 동쪽에 있는 칸은「암서헌」이라 하였는데 <운곡시>의「오래도 록 잘하지 못함 스스로 믿었거늘, 바위 틈에 거처하며(巖栖) 작은 효과 드러나기 바라네.」라는 말에서 취하였다. 또한 합쳐서 편액을 달고 「도산서당」이라 하였 다. 정사는 모두 여덟 칸인데, 재는「시습」이라 하였고, 료는「지숙」, 헌은「관 란」이라 하였으며 합쳐서 편액을 달고「농운정사」라 하였다. 서당의 동쪽에다 작은 네모난 연못을 파고 그 안에는 연꽃을 심었는데,「정우당」이라 하였다. 또 그 동쪽에「몽천」을 만들고, 샘 위에 있는 기슭은 파서 관란헌과 대칭이 되도록 하여 평평하게 쌓아 단을 만들고 그위에는 매화․대․솔․국화를 심어「절우사」 라 하였다. 서당 앞의 출입하는 곳은 사립문으로 가리고「유정문」이라 하였다. 문 밖의 작은 오솔길은 시내를 따라 내려가다가 골짜기 입구에 이르러 두 기슭이 서로 마주 보는데, 그 동쪽 기슭 곁에는 바위를 들어내고 터를 다지면 작은 정자 를 지을 만하나 힘이 미치지 못하여 다만 그곳을 보존해둘 따름이었다. 산으로 들 어가는 문처럼 생긴 것이 있어「곡구암」이라 하였다. 여기서 동쪽으로 돌아 몇 걸음을 가면 산기슭이 갑자기 끊기고 바로 탁영담 위로 내던져져 있는데, 큰 바위 가 깎은 것처럼 서 있으며 열 길 남짓 포개어 있음직하다. 그 위에다 높은 대를 쌓으니 소나무 가지가 해를 가리고 위로는 하늘, 아래로는 물이 있고 새와 고기가 날고 뛰며 좌우의 취병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짙푸른 빛이 잠기어 있는 것이 강 과 산의 절승을 한 번만 보면 모두 얻을 수 있으므로「천연대」라 하였다. 서쪽 기슭에도 또한 대를 쌓으려하여 천광운영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그 뛰어난 경개 가 결코 천연대에 못하지 않다. 반타석은 탁영담 안에 있는데 그 형상이 펀펀하고 비스듬하여 배를 묶어놓고 잔을 돌릴 만하며 매번 큰 비가 내려 물이 불으면 소 용돌이와 함께 들어갔다가 물이 내려가고 물결이 맑아진 뒤에야 비로소 그 모습 을 드러낸다. 나는 항상 오랜 고질병에 얽히어 괴로워하여 비록 산에 거처한다해 도 책을 읽는 데만 전적으로 뜻을 둘 수 없었다. 그윽한 근심을 참고서 호흡을 조금 조절하고 나면 이따금 신체가 가뿐해지고 편안해지며 심신이 깨끗하게 깨 어 우주를 굽어보고 우러러 보면 감개가 그에 이어져 책을 물리치고 지팡이를 끌고 나가 헌함에 다다라 연못을 완상하며 단에 올라 절우사를 찾기도하고 채마 밭을 돌며 약초를 옮겨 심고 숲을 뒤져 꽃을 따기도 한다. 어떨 때는 바위에 앉 아 샘물을 튀기며 장난을 치기도하고 대에 올라 구름을 바라보기도하며, 또 어떤 때는 물가의 돌에서 고기를 살펴보기도하며 배에서 갈매기를 가까이하기도한다. 마음내키는대로 가서 자유롭게 노닐다보면 눈닿는 곳마다 흥이 일고 경치를 만 나면 흥취가 이루어지는데 흥이 극에 달해 돌아오면 온 집이 고요하고 도서는 벽에 가득하여, 책상을 마주하고 잠자코 앉아 마음을 지키고 기르며 연구 사색하 여 이따금 마음에 깨달음이 있기만하면 다시 기뻐서 밥을 먹는 것도 잊었다. 그 래도 터득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친구들의 가르침에 힘입고, 그래도 얻지 못하 면 속으로 분을 발하면서도 오히려 감히 억지로 통하려하지 않고 잠시 한쪽에 놔두었다가 때때로 다시 끄집어내어 마음을 비우고 생각하고 풀어 보면서 스스 로 풀리기를 기다린다. 오늘 이렇게 하고 내일도 또한 이렇게 할 것이다. 봄에는 산새가 짹짹 울고 여름에는 제철의 식물이 무성하게 우거지며, 가을에는 바람과 서리가 매우 차갑고 겨울이 되면 눈과 달이 엉기어 빛을 내는 것이 네 철의 경 치가 다르며 흥취 또한 끝이 없다. 절로 큰 추위·큰 더위·큰 바람·큰 비만 없으 면 나가지 않은 때나 나가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나갈 때도 이렇게 하였고 돌아 올 때도 또한 이렇게 하였다. 이것이 곧 한가로이 거처하면서 병을 요양하는, 세 상에는 쓰일 데가 없지만 나에게는 쓰일 데가 있는 방법이니, 비록 옛사람의 대 문이나 뜰을 엿볼 수는 없었지만, 마음에 절로 즐거움을 주는 것이 얕지 않아 비 록 말을 하지 않고자 하였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이에 곳에 따라 각기 칠언시 한 수씩으로 그 일을 적어 모두 열 여덟 절구를 지었다. 또한 〈몽천〉·〈열 정〉·〈정초〉·〈간류〉·〈채포〉·〈화체〉·〈서록〉·〈남반〉·〈취미〉·〈요 랑〉·〈조기〉·〈월정〉·〈학정〉·〈구저〉·〈어량〉·〈어촌〉·〈연림〉·〈설 경〉·〈역천〉·〈칠원〉·〈강사〉·〈관정〉·〈장교〉·〈원수〉·〈토성〉·〈교동〉 등 다섯 자[五言]로 여러 가지를 읊은 절구(絶句) 시 스물 여섯 수를 지었는데 앞의 시에서 다하지 못한 남은 뜻을 말한 것이었다. 아아! 나는 불행히도 늦게 먼 외딴 시골에서 태어나 순박하고 고루하기만 하여 들은 것이 없으나 산과 숲 의 사이에서 스스로 돌아보니 일찍이 즐길 만한 것이 있음을 알았다. 중년에 망 령되이 세상에 나가 속세의 바람과 흙먼지를 전신에 뒤집어쓰고 객관(客館)이나 전전하다가 자칫하면 스스로 돌아오기도 전에 죽을 뻔하였다. 그후 나이가 들어 늙을수록 병은 심하여지고 행하는 일마다 더욱 실패를 겪으니 세상은 나를 버리 지 않았지만 나는 세상에 버림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비로소 울타리와 새 장에서 몸이 벗어나 분수에 맞게 농촌의 밭구릉에 몸을 던지니 전에 이른바 산 림의 즐거움이 기약하지 않아도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니 내 이제 쌓인 병을 삭이고 깊은 근심을 틔우며 늘그막에 편안히 쉴 곳으로 이곳을 버린다면 장차 어디서 구하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옛날에 산림에서 즐긴 것을 살펴보니 또한 두 가지가 있었다. 현허(玄虛)를 그리워하고 고상함을 일삼으며 즐긴 자도 있고, 도의를 기뻐하고 심성을 기르며 즐긴 자도 있었다. 앞에 말한대로 따른다면 어쩌 다 제 몸을 깨끗히 하기 위하여 윤리를 어지럽히는데로 흐를 수도 있으며, 심하 면 새나 짐승과 무리를 같이하여도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 뒤에 말한대로 따르면 즐기는 것이 찌꺼기일 따름이니 그 전할 수 없는 묘법에 이르 러서는 구하면 구할수록 얻지 못할 것이니 즐거움이 무엇이 있겠는가? 비록 그 렇기는하나 차라리 이것을 위해서 스스로 힘을 쓸지언정 저것을 위해서 스스로 속이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어느 겨를에 이른바 세속의 영리라는 것이 나의 마 음 속으로 들어옴을 알겠는가! 혹자가 말했다.「옛날의 산을 사랑한 사람들은 반 드시 이름난 산을 얻어 스스로를 기탁하였는데 그대가 청량산에 거처하지 않고 이곳에 거처한 것은 어째서입니까?」대답「청량산은 절벽이 만 길이나 서 있고 아찔하게 깎아지른 듯한 골짜기를 바라보고 있어 늙고 병든 사람에게는 편안할 수가 없으며, 또한 산을 좋아함과 물을 좋아함이 한 가지만 빠져도 안되는데 지 금 낙천 물이 비록 청량산을 지나간다고는 하나 산 속에서는 그곳에 물이 있다 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내가 실로 청량산을 바라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곳은 뒤 로 미루고 이곳에 먼저 자리를 잡은 것은 무릇 산과 물을 겸하고 있어서 늙은이 의 병에 안락하기 때문입니다.」또 말하였다.「옛 사람들의 즐거움은 마음에서 얻지 바깥의 사물에다 기탁하지는 않습니다. 대체로 안연의 누추한 골목이나 원 헌의 옹기로 만든 창문이 어디 산과 물에 있었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바깥의 사 물에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모두 참된 즐거움이 아닙니다.」대답「그렇지 않습니 다. 저 안연과 원헌의 처지가 특별히 마침 그렇게 되어서 그것을 편안히 여길 수 있었음을 귀하게 여겼을 따름입니다. 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지경을 만나도 록한다면 그 즐거움이 어찌 우리보다 깊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공자와 맹자는 산수에 있어서 일찍이 자주 일컫고 깊이 깨우쳐주시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실로 그대의 말과 같다면 증점을 인정한다는 감탄이 어찌 특히 기수의 가에서만 나왔 겠으며, 죽을 때까지의 바램이 어째서 유독 노봉의 꼭대기에서만 읊어졌겠습니 까? 이는 반드시 그럴만한 까닭이 있어서입니다.」이에 그 사람은「예예」하며 물러났다. 가정 신유년(1561) 동짓날 산 주인 늙고 병든 기인(畸人)은 적다.
□ 이 <陶山記>는 본래 도산서당(뒤에 서원이 됨)에 관하여 이것저것을 읊은 연작시인 <陶山雜詠>의 병기(幷記)로서, 도산서당의 환경과 유래를 설명하는 중요한 자료로 알려져 있다.

陶山書院奉安文

恭惟先生 天挺英雋 圭璋令質 琢磨功深 寤寐洛閩 羹牆孔孟 奧自志學 以至從心 一念始終 典學無怠 不至不已 希聖希天 嗚呼先生 道尊德盛 著龜邦國 師表士林 百世聞風 尙知興起 矧玆覿德 誰無秉彛 惟是陶山 講道之所 孔之闕里 朱之考亭 俎豆不陳 吾黨之恥 載謀載度 經之營之 有侐其宮 有儼其位 罇爵淨潔 黍稷馨香 凡在駿奔 一心精白 尙其昭假 陟降在玆 惠以光明 啓佑我後 世世無斁 敬恭以承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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