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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편 - 詠雩亭(영우정) -

 
소재지 : 경북 군위군 우보면 달산 2리
건립연대 : 1880년() 건립
건립자 또는 연고자 : 박민수
건물의 입지 : 家內, 內形
건물의 형태 : 단층의 평집
지붕 : 맞배지붕
건물의 모양 : 四角形
누정건물의 정면과 측면의 칸수 : 정면 - 4칸, 측면 - 1칸
건물 보존 상태 : 양호
문화재 지정 현황 :

 

 李晩燾 作 詠雩亭記

朴秀士承祚自龜山之羅湖來致其門父老顯鶴顯求汶祚氏之書而命之曰惟我先祖贈兵部右侍郞舞溪府君及府君之孫柳村公曾享道岡書院戊辰之歲不幸遭金糸系之撤柳爺就羅址而立寓慕之齋舞溪府君因其院墟而成藏修之室盖顧瞻舞天府君之嘗所薖軸而又有壇墠之不敢遽遠故也然室成三歲名未定記未述願吾子幷留義焉余作而難曰記昔丁卯春余嘗過羅湖而獲拜道岡之祠欽服淸芬有若光風之講太極而其楣間之扁又出吾先人之手竟摩挲徘徊不能去也倐怱三十餘年之間世道之滄桑不敢盡言而菩薩閣板亦不爲人所憐有如是乎惟是慈孫不之挫沮於芟夷斬伐之餘而雍容奏定之方中詩不賢而能之乎第其記事己非萎筆所敢况立名訓世何第重難而責之匪人也賢父老必有私自熟講者第言之承祚良以曰父老所言不可盡記而有當日詠雩者其說何如余曰得之矣舞溪之本號以有舞川詠雩之今名以思舞溪也蘋藻鉶塩雖或廢掇而方至之川不可遏也號食風虛空雖或發作而四時之春不可奪也旣有川爲又有春爲則風詠之樂其將不窮於其浴也思先人之所以浴於其風也思先人之所以風其感發興起者爲若何乎雖然諷詠之爲儒家故事非自曾點如乎點於聖門一箇狂者論其實德似不如三子而是日之對卽因其所居之地而有天理流行之妙非如規規於事爲之三子故夫子特與之然則天理本也事爲末也如使公得登於聖門者果不眩於天人之分而有上下同流之氣像乎余又疑夫浴則有沂風則有雩詠者歌也未知其所歌者何詩而不著其名也若非象句之舞筆是房中之樂此冠童之通行故畧其辭歟是不敢知也今蹟公之行而著其當歌之詩可乎天性至孝猛虎獲行於采茸之路爲之歌南該六年廬墓痛念烏哺之不如爲之歌蓼莪晩謝公車沈性理之奧爲之歌兼葭衡門家訓及敎兒輯說言言合道事事中理爲之歌周南召南未知今之風詠者能念古人三拜鹿鳴之義乃曰夫也可與言詩乎余固不足與言而若因此詩而反氵复涵濡則不惟陟降之靈日監在玆龜西之舞水長接乎魯日南之沂水而不覺此身之爲曾氏之冠童也天壤之間未知何樂可以當此乎若不此之務而專爲輪奐之美則洛陽亭舘自在何必苦心於山林閒曠之濱風霜畏壘之墟乎余固老矣難復遠遊而每僻處古隱山中之山也南擧目而望之則八公如在莾蒼間而道岡卽其內也千仞之鳳其或翔騰而吾未及察耶千仞以上天也翔之不己天必有復安知不有南康之節復或勞農於山間者乎至是而廢者可興分者可合豈特亭云亭云而己乎旣語秀士因復書以爲記如此 上之三十六年己亥端節 通政大夫 前行承政院 同副承旨 兼經筵 叅贊官 春秋館 修撰官 眞城 李晩燾 謹記


우수한 선비인 박승조가 구산의 나호로 부터 찾아와서 그의 문중 부노인 현학과 현구와 문조 씨의 서신을 전해주며 명하여 말하기를 “오직 우리 선 조이신 병부좌시랑을 증직 받으셨던 순계부군과 그리고 부군의 손자인 류촌 공께서는 일찍이 도남서원에서 향사를 하시다가 무진(1868)년에 불행하게도 서원이 철폐되자, 류촌 옹은 나호의 터에 나아가서 우모하는 재실을 세웠고, 무계부군은 그 서원의 폐허를 인연하여 장수의 재실을 이루었으니, 대개 무 천을 돌아보고 첨앙하니 부군께서 일찍이 은거하시던 곳이며, 또한 단소와 감히 너무 멀지 않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실을 낙성한지 삼년이 되어도 이름을 결정하지 못하였고 기문도 서술하지 못하였으니 원컨대 군자 께서는 아울러 유의하여 주십시오.”하였다. 내가 자세를 가다듬으며 어렵게 여기며 말하기를 “생각해보니 옛날 정묘(1867)년 봄에 내가 일찍이 나호를 지나가다가 도강사에 참배하게 되었는데 청분에 흠복됨이 마치 광풍루에서 태극을 강론하는 것 같았으며, 그 이마에 현판은 또한 우리 선인의 솜씨에서 나왔기에 어루만지며 배회하면서 능히 떠나지 못했더니 문득 삼십 여 년의 기간이 되었으며, 세도는 창해가 상전되듯 변한 것은 감히 다 말할 수 없으 나 보살각판도 역시 사람들의 그리워하는 바가 아니니 이와 같음이 있으리? “오직 이 자손들이 베고 평정하고 참벌한 뒤에 더 꺾이고 침체되지 아니 하고 옹곡(온화함)한 모습으로 정한 방중의 시를 연구하니 어질지 아니하면 능히 그렇게 되겠느냐? 다음으로 그 사실을 기록하는 것은 이미 시들은 붓 으로 감히 할 것이 아니나 하물며 이름을 세워 세상을 교훈하는데 어찌하랴! 그러나 거듭 어렵다고 하여도 그럴만한 사람도 아닌데 책임을 지우느냐? 현 부로님도 반드시 사적으로 익히 강론한 것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더니, 승 조가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부로님의 말씀하신 바는 가히 다 기록할 수 없 으며 당일에 무를 읊은 것이 있으니 그 설명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것이 좋구나. 무계의 본 이름은 모천이 있게 때문인데, 영 우의 지금 이름은 무계를 생각함에서이다. 제사를 올리는 서원은 혹 폐철되 었으나 바야흐로 이르는 무천은 가히 막지 못할 것이다. 호식하는 바람이 허 공에서 비록 발작하더라도 사시의 봄은 가희 빼앗지 못할 것이다. 이미 무천 의 됨이 있고 또한 봄의 됨이 있다면, 풍영하는 즐거움은 그 장차 목욕함이 무궁하리라. 선인들의 까닭을 생각하며 그 풍속에 목용하고 선인들의 그 감 정이 발하고 흥이 일어나 외웠던 바를 생각하면 그 어떻겠는가? 비록 그러 나 외우고 읊는 것이 유가의 고사가 됨은 증점으로부터가 아닌가? 증점은 성문에 일개의 광자인데, 그 실덕을 논하면 삼자보다 못할 것 같으나 이날에 대한 것은 즉 그 거하는 바의 지역을 인한 것이어서 천리가 유행하는 묘함 이 있으니 규규하게 일을 한 삼자보다 못하기 때문에 부자께서 특별히 그와 더불어 하였다. 그렇다면 천리는 근본이요, 일을 함은 말단이다. 만약 공으로 하여금 성문에 오름을 얻었더라면 과연 천인의 나뉨에 현혹되지 아니하고 상하가 같이 흐르는 기상이 있었겠느냐? 내가 또한 의심나는 것은 목욕하는 기수가 있고, 외움은 무우에 있었으니 읊은 것은 노래일 것인데 그 노래한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구나, 시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그 이름이니 만약 에 상구의 부가 아니라면 반드시 이것은 방중의 즐거움이리니, 이는 관동의 통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말을 생략하였으리라. 이것은 감히 알지 못하겠 구나. 지금 공의 행실을 발자취로 하여 그 마땅히 노래하여야 할 시를 나타 냄이 가하겠느냐? 천성이 지극히 효도하여 맹호가 녹용을 캐러 가는 길을 호위하였으니 그를 위하여 ‘남해’를 노래하였겠지? 육년을 노모와 생활하며 가마귀의 효성을 다하지 못한 것을 애통하게 생각하셨으니 그것을 위하여 ‘요아’를 노래하였으리? 만년에 벼슬을 사양하고 성리의 오묘함에 잠기셨으 니 그것을 위하여 ‘견가’와 ‘형문’을 노래하였으리라. “‘가훈’에 그리고 ‘교아집 설’은 말마다 도에 합치되고 일마다 이치에 맞으니 그것을 위하여 ‘주남’과‘소 남’을 노래하였으리니, 지금 외우고 읊는 자가 능히 고인들의 ‘녹명’의 의에 삼배를 하는지 모르겠구나.”하였더니 이에 말하기를 “가히 더불어 시를 말하 겠느냐?”하였다. 나는 진실로 족히 더불어 말할 수 없으며 만약 이 시로 인 하여 반복하여 흠뻑 젖는다면 오르고 내리는 영혼이 날마다 보면서 이 구서 의 무수에 있을 뿐만이 아니라 장구히 노남의 기수에 접하여 이 몸이 증씨 의 관동이 됨도 깨닫지 못할 것이니 천지사이에 무슨 낙이 가히 이것을 당 해낼지 모르겠구나. 만약 이것을 힘쓰지 아니하고 전적으로 집을 반듯하고 아름답게 한다면 낙양에 정관이 저절로 있는데 어찌 반드시 산림의 한광한 물가와 풍상의 외루한 터에서 고심하였겠는가? 나는 진실로 늙었기에 다시 멀리 놀러가기가 어려워 매일 옛 은거하던 산중이 산에 궁벽하게 살고 있는 데, 남쪽으로 눈을 바라보면 팔공산이 망창한 사이에 있는 것 같고 도강은 즉 그 안이다. 천 길을 나는 봉이 그 혹 날아서 오르는데도 내가 살펴보지 못하였을까? 천길 이상은 하늘이다 날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하늘도 반드 시 회복됨이 있으리니, 남강의 절개가 영농의 산간에 회복됨이 있지 아니할 지 어찌 알리오? 이에 이르러 폐한 것이 가히 흥할 것이고 나누어진 것이 가히 합할 것이니 어찌 특별히 정자다 향자다 할 뿐이겠느냐고 하였다. 이미 우수한 선비(승조)에게 말하고는 인하여 다시 글을 써서 그것으로 기문을 이 와 같이 하였노라. 기해(1899)년 단오절에, 통정대부 전행승정원 동부승지 겸경정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진성 이만도가 삼가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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